소설리스트

검술 명가의 마왕님-234화 (234/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외전 15화>

신부 대기실.

진유리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채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이 보인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가 심히 부자연스럽다.

뭐야, 이상해. 나 왜 저래.

인형인가? 평생 미소란 걸 지어 본 적 없는 사람 같다.

진유리는 얼어 있는 자신이 우스워 웃음이 나온다.

‘긴장하지 마, 진유리.’

그토록 원했던 결혼이잖아.

생각해 보면 결혼이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건 없다. 하나가 된 지 오래였고, 같은 침실을 쓴 지도 꽤 됐다.

지독히도 안 맞던 식단도 서서히 맞춰졌다.

쥐꼬리만큼 먹던 진유리는 이제 앉은 자리에서 밥 두 그릇을 뚝딱 한다. 박기혁도 진유리를 따라 야채라는 것을 입에 대기도 했다.

기념일도 그랬다.

한 달 터울로 있던 기념일은 하나둘 합쳐지더니 반년에 한 번 했다. 요즘은 애들 기념일을 더 많이 챙기게 되더라.

다른 신혼부부들은 방귀를 트니 마니로 라디오에 사연도 보낸다는데, 우리는 본의 아니게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

공략을 함께 가면 안 보고 싶어도 볼 수밖에 없거든.

“그러고 보니 진짜 오래됐다.”

문득 진유리는 궁금해졌다. 내게 박기혁이란 존재는 무엇일까.

기억의 필름을 돌려 본다.

처음에는 어땠지?

처음은 아마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진룡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검호. 이 검호가의 막내는 명성만큼이나 대단할까?

그래서 멀리서나마 구경했고, 박기혁은.

“역시 싸움은 개싸움이 최고라니까! 푸하하하!! 더 덤벼! 더 더!!”

“이 꽉 깨물어라.”

강렬했다.

기대 이상으로 훨씬 더!

똑똑히 기억한다.

무장이고 뭐고 하나 없이 갑옷을 입은 동기한테 몸을 부딪치던 그 과격함, 한 마리 맹수 같은 모습을…….

집 안에서 볼 수 있는 연약한 말라깽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날, 진유리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가 출구 없는 지옥? 반가워. 진유리라고 해.”

그래도 혹시 몰랐다.

함께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원래 감정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희석되는 거니까.

그런데 이 남자는 어떻게 된 게, 파면 팔수록 매력적일까?

“이래서 진유리, 네가 문제란 거야. 이런 눈치 없는 애들을 뽑았으니까.”

“어떻게 해야 되긴. 쟤들 전부 ‘도구’로 써야지.”

몸이면 몸, 얼굴이면 얼굴, 검도 잘해, 마법도 잘해.

너 대체 부족한 게 뭐니?

진유리의 입꼬리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올라간다.

계속해서 기억들이 스쳐 갔다.

잠투정하는 봄이를 둥가둥가 하면서 수업을 듣던, 초보 아빠 박기혁.

‘저때 봄이 참 귀여웠지.’

이미 입에 고기가 한 움큼 있음에도 또다시 고기를 찾던, 욕심쟁이 박기혁.

‘예나 지금이나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건 똑같다니까.’

바지가 찢어져 엉덩이를 까고 대검을 휘두르던, 노출광 박기혁.

‘하여튼 조신하지 못해요.’

봄이와 헤나를 배에 올려 두고서 낮잠을 자던, 인간 침대 박기혁.

‘귀여워. 여간 귀여운 게 아니라니까.’

싸우는 아이들을 엄하게 혼내는 기혁이나,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고 졸던 기혁이나, 자신이 요즘 소홀했다며 어리광을 피우자 머리를 긁적이며 안아 주던 스윗 기혁도……

그랬다.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기억 속에서 우리는 늘 함께였다.

‘함께’라는 말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미 우리는 묶여 있었다.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

그때, 급하게 달려온 직원이 예식 시작을 알렸다.

바로 준비하라는 말이 있길 잠시, 진도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손을 내밀었다.

“가자꾸나.”

“네.”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이제 우리는 결혼한다.

완성된 운명에 마침표를 찍는다.

진도하의 손을 잡은 진유리의 얼굴에는 어느새 어색함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진심이 가득하다.

너를 향한 마음이.

진유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   *   *

하객들이 모두 식장으로 들어서고.

나 혼자 문 뒤에 서 있다.

“후우…….”

분명히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긴장된다.

하긴 그럴 만하다.

과거를 포함해도 결혼은 처음 아닌가. 원래 뭐든지 처음은 긴장되는 법이다.

긴장되는 와중에 문득 영감탱이가 생각난다.

“인마, 너 그 지랄 맞은 성격을 고치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니까. 여우 같은 마누라하고 토끼 같은 자식들 낳으면 너도 달라질 수 있어.”

“내가 가면 너 돌봐줄 사람 없다. 빨리빨리 하나 물어서 데려와. 그래도 나라도 있어야 네가 꿀리지 않을 거 아니냐. 정 안 되면 성녀라도 데려와. 인마, 스승한테 헛소리하지 말라니. 걔 너한테 마음 있다니까! 내기할래?”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내게 가족을 만들어 주려고 했던 분이었다. 내 지랄 맞은 성격을 고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했지.

은근히 기대도 했던 것 같았다.

조금 미안하네.

“영감, 나 결혼해.”

결국 살아생전에는 못 보여 줬는데, 두 번째 생에서 이렇게 하게 되네. 미안해.

영감 말대로 지랄 맞은 성격이 고쳐질지는 모르겠어.

“어디 한번 봐봐. 고쳐지는지.”

꼭 봐야 돼. 약속했다. 믿는다.

문이 열리고.

나는 가슴을 편다.

그 어느때보다 당당하게.

“신랑, 입장.”

가자.

*   *   *

“신랑, 입장!”

축포가 올리자, 심호흡을 하며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색색의 꽃잎이 떨어지는 길, 하객들의 환호와 함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준우와 메르헴이 손을 흔들고 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패기만 있었지 어수룩했던 박기혁의 어린 친구들은, 어느덧 한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멋지다, 박기혁.”

“잘 살아야 돼요. 성격 좀 죽이고요.”

그 옆으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 김하니와 동아리 후배들이 보인다.

김하니와 몇몇은 옵티멈에 적을 두었다. 아쉽게 갈라진 후배들도 일 년에 한 번은 꼭 얼굴을 비췄다.

“선배님, 멋져요!!”

“인류 최강 박기혁! 아카데미 최고 아웃풋 박기혁!”

“출구 없는 지옥 박기혁! 걸어 다니는 재앙 박기혁!”

송새벽은 자신의 팀원들이랑 있다.

박기혁의 첫 번째 제자인 송새벽은 이제 어엿히 일가를 이뤘다.

‘신장’과 ‘오니’를 성공적으로 결합했고, 이전에는 없는 새로운 혈족으로 거듭났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부모님을 버린 가문을 원망하지 않게 됐다.

“스승님, 축하드립니다!! 잘사세요!!”

“선배님, 축하드립니다!!”

권용준도 보인다.

박기혁의 비공식 제자이자 착한 동생은 보육원 동생들 틈에 섞여 열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박기혁의 가르침을 받은 권용준은 송새벽의 팀에서 에이스로 거듭났다. 이제 저 아이도 진심으로 웃을 줄 알게 됐다.

기특했다.

“형님, 결혼 축하해요!”

“삼촌, 축하해요! 행복하세요!!”

올리버와 이스마일은 스승을 보며 축하하다, 또 뭐가 문제인지 서로를 보며 으르렁대고 있다.

매번 싸우는 둘. 그래도 막상 붙여 놓으면 호흡이 환상적이다. 박기혁은 저 둘의 사이가 좋다고 확신했다.

“비켜. 너 때문에 스승님이 안 보이잖아.”

“아, 죄송해요. 너무 작아서 안 보였네요. 정 안 보이면 업어 드릴까요?”

아카데미 학장 천수만과 위그드라실도 있다.

천수만은 박기혁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피한다. 트라우마 때문이다. 얼마나 갈굼을 받았나.

위그드라실은 여러 사건으로 수호령이라는 직위에 회의를 느꼈다. 할 수 있다면 족쇄를 풀고 싶다나.

“결혼 축하합니다.”

“결혼 축하해요, 기혁 군.”

스타 히어로의 존 C. 타일러와 말튼 에브리헴도 보였다.

저 양반들은 몇 년 만에 봐도 똑같네.

“푸하하! 쟤 좀 봐봐. 얼어붙었어. 크레이지 보이가 큐트 보이가 됐다고.”

“조용. 무례. 입조심.”

의외의 얼굴도 보였다.

윌리엄과 로자리아. 각자 미국 동부와 서부를 대표하는 히어로로 활약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왔을 줄은 몰랐다.

“정말 가는구나. 도둑년에게 졌어.”

“미친년아, 결혼식장에서 신부 욕하지 마.”

그렇게 박기혁이 당당히 나아가는 그때, 떨어지는 꽃잎들 사이로 검들이 내려왔다.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검들이 박기혁의 앞길을 축복해 줬다.

“축하한다, 동생아.”

“도령늼, 잘사라.”

형이다.

박기혁의 형, 박수혁.

박수혁은 예비 신부인 니나 폰 슈코르체니와 팔짱을 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박기혁과 처음 만났던 그때의 그 미소를 띤 채 말이다.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

그렇기에 박기혁은 형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던 것 같다.

박수혁의 퍼포먼스가 있고 잠시, 질 수 없다는 듯 검광이 번쩍인다. 떨어지는 꽃잎들이 일순간 수십 조각으로 쪼개지더니, 허공에서 활짝 만개했다.

초인들조차 식별 불가능한 신속의 검격.

“잘살아야 돼.”

박민지였다.

박기혁의 누나이며, 백호라 불리는 수호자.

요즘 박민지는 수호자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얼굴 보기 힘들 정도로.

때문에 어머니는 속이 터진다. 아들 둘은 척척 결혼해서 가는데, 하나 남은 딸은 남자 친구는커녕 칼질만 하고 있으니.

그래도 누나, 난 누나 편인 거 알지?

박기혁은 누나에게 눈을 찡긋해 줬다.

그리고 박기혁은 마침내, 이 길의 끝에 선 부모님을 마주하게 된다.

“……흑, 흑. 기혁아.”

“마누라, 좋은 날에 웃어야지.”

박기혁에게 부모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 두 사람.

박건과 김연희였다.

박기혁은 항상 두 분에게 고맙다. 결함 많은 이 아들을 무한한 애정으로 보듬어 주셨으니까.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돌아서는데, 사회자의 말과 함께 식장 양편에서 문이 열리며 두 아이가 나왔다.

박기혁의 두 딸, 박봄과 박헤나였다.

꼭 결혼을 축하하고 싶다며 조르고 졸라 만든 시간.

두 아이가 서로 눈을 마주친다.

‘준비됐어?’

‘응.’

두 아이가 날개를 펼친다.

봄이는 천사의 날개를, 헤나는 요정의 날개를.

그 순간, 떨어지던 꽃잎이 깃털로 변한다.

천사가 내려온 듯 버진 로드에 성스러운 날개가 펄럭이고, 날개 사이로 장미의 넝쿨들이 자라났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하객들은 말을 못 잇는다.

그리고 세상의 성스러움이 모두 모인 길을 향해.

“신부, 입장.”

진유리가 걸어온다.

진도하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박기혁은 할 말을 잃었다.

진유리는 눈부셨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빛났다.

이 짧은 길이 안타까워질 정도로 1초가 영원처럼 흐른다.

저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아니,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그만큼 사랑스러웠다.

진도하가 진유리의 손을 잡아 박기혁에게 건네줬다.

“부족한 딸이야. 잘 부탁하네.”

“아닙니다.”

두 사람이 마주섰다.

‘오늘 좀 예쁘네?’

‘새삼스럽게. 난 원래 예뻐.’

‘고맙다. 함께해 줘서.’

‘나야말로 고마워. 함께해 줘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마법만 쫓던 남자는 과거와 다르게 사람을 품을 줄 알게 됐다. 독기로 가득 찼던 가슴에 한 줄기 여유를 품을 줄 알게 됐다.

친구, 가족, 동료, 제자……

수많은 인연들은 박기혁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줬다.

따뜻함을 줬고 다정함을 줬다.

저들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도움받은 건 나였다.

마왕 박기혁이 아니라 인간 박기혁이 무엇인지.

친구란 무엇이고, 가족이 무엇이며,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

이 세계는 그에게 많은 것들은 선물해 줬다.

이제 박기혁은 순수하게 사람을 볼 수 있다.

타인의 호의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인정이란 따뜻한 감정을 베풀 줄 알게 됐다.

물론 그 대가로 더 이상 옛날 같은 독기는 없지만, 그래도 어떤가.

이제 난 마왕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남편인데.

서로의 약지에 반지가 걸린다.

“사랑한다.”

“사랑해.”

박기혁과 진유리가 입을 맞추고.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리, 결혼했습니다.

……

그렇게 결혼식을 마치고……

8년이란 시간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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