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외전 3화>
“있잖아, 헤나야.”
가방을 챙기던 봄이가 말했다.
“요즘 우리가 너무 조용했던 게 아닐까.”
무릇 검호가의 일원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화제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법인데, 너무 조용했다. 그래서 분량이 적어졌을 지도…….
“뭐래는 거야. 사고라도 치겠다는 거야?”
“아니이~ 사고를 치겠다는 게 아니라~ 좀 그렇다는 거지~.”
베에~ 혀를 내밀며 웃는 박봄.
가방을 챙기던 헤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하…….’ 한숨을 쉰다. 헤나의 머리 위에 똬리를 틀고 있던 버찌도 비슷했다.
인간과 고양이.
종은 다르지만 둘의 눈에 담긴 감정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누가 알까.
용모단정, 품행성실.
용호 재능 교육관의 학생회장이자, 모든 아이들의 롤 모델인 박봄이.
사실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인 걸.
괜히 김연희가 박봄을 볼 때마다 복잡한 표정으로 ‘크게 될 아이’라 말하는 게 아니다.
가능성=사고(事故)의 총량
이놈의 집구석에서 통하는 공식이다.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
세상 순진한 표정으로 예고 사고를 선언하는 박봄이랑 꼭 맞는 노랫말이었다.
“학교가 고쳐지고 더 그래. 아빠가 수업하면 좀 괜찮았는데. 아빠보고 계속 수업해 달라고 부탁해 볼까? 어때, 내 생각이?”
“하…… 아버지도 쉬셔야지.”
“그런가. 무리인가…… 힝.”
지루해! 지루해에!!
팔을 방방 휘저으며 박봄이 온몸으로 지루함을 표현했다.
“그만해, 정신 사나워.”
“그치만, 지루하잖아~ 헤나는 지루하지 않아? 뭔가 두근두근하는 신남이 없어.”
지루한 일상의 연속.
봄이는 즐거움이 필요했다. 찌릿찌릿, 자극적인 즐거움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가 너무 길잖아!
봄이는 견디지 못해!
하지만 박봄의 장대한 설명에도 헤나와 버찌의 표정은 여전하다.
“너 붕어지?”
“응? 붕어?”
“너 어제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 안 나?”
봄이에게는 딸기 언니, 헤나에게는 아줌마.
모두 진유리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진유리가 그들의 동생‘들’을 품으며 정식으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상황.
마왕 박기혁의 존재를 이어받은 박봄이나, 수호령 에우리아의 편린을 이어받은 박헤나나 이미 보통의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들이다.
그런고로 생명을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요즘 둘의 신경은 온통 진유리의 뱃속에 향해 있다.
인간이란 종이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의 총아.
그 가능성의 총아 중 단연코 으뜸가는 가능성.
잉태(孕胎)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적.
둘은 이 잉태의 기적을 가장 근접 거리에서 보고 있었다.
“바로 어제 엄마 배에 귀를 대고 이렇게 말했지.”
“그만, 그만.”
“그만은 무슨. 귀 열고 똑똑히 들어. 네가 어제 이렇게 말했다. 동생들 태어날 때까지 얌전히 있자! 우리가 사고 치면 태교에 좋지 않을 거야!”
그녀의 뱃속에서 꼬물대는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가 나올 때까지.
절대! 절대로오!
사고 치지 않으리라!
허리에 손을 올리며 당당하게 다짐했던 게 바로 어제였건만, 지금 봐라.
지루해? 심심해? 네가 사람 맞니?
헤나가 한심한 눈으로 박봄을 바라본다.
버찌도 비슷했다. 웬만하면 언니 편을 들고 싶지만, 이건 아니야 정말.
“……조크, 조크! 하하. 넝다암!”
“…….”
“…….”
“으릇!”
박봄 스스로도 부끄러운지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러더니.
“나, 날 그렇게 보지 마아!”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문을 열고 도망갔다.
헤나는 혀를 차며 놔두고 간 봄이 가방을 들었다.
“버찌야, 쟤 왜 저러니.”
“냐아아옹-.”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버찌가 헤나의 머리칼에 머리를 푹, 박았다.
* * *
아아악!
우다다닥.
“애들 온다.”
얼른 떨어져 식탁에 앉으라는 의미가 숨어 있는 말에, 진유리가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안겨 있던 손을 풀었다.
“칫. 마누라가 악몽을 꿨으면 뜨거운 가슴으로 보듬어 줘야지!”
“악몽은 무슨. 가위바위보 한 게 악몽이냐.”
“너무해!”
“너어무? 말 잘했다. 너무는 네가 하는 게 너무고.”
다른 게 너무한 게 아니다. 황룡이랑 신나게 쌈박질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자그마치 한 달!
그 한 달 동안 진유리 껌딱지처럼 곁에 붙어 다닌다면, 믿겨지는가? 당사자인 나조차 믿겨지지 않는다.
“밤새 그렇게 물고 빨았으면 됐잖냐! 쑥스러워하지 마! 볼 빨개지지 말라고! 칭찬 아니다.”
“아이, 참.”
“하…… 이제 좀 떨어질 때도 됐잖아. 무슨 껌딱지도 아니고 떨어질 생각을 안……!”
잘 걸렸다.
한바탕 논리적으로 쏘아붙이려는데.
그 순간.
배시시 웃는 진유리.
난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에 말을 멈춰야만 했다. 왜냐하면 진유리가 배를 쓰다듬고 있었거든. 우리 아이들을 품은 배를 말이다.
아직 커지지도 않은 배를 쑤욱 내밀고 슥슥 문지르더니.
“어? 얘들아, 뭐라고? 방금 아빠가 소리 지르는 거 들었다고? 어머, 놀랬니?”
“야…… 내가 언제…… 소리 질렀다고 그래…….”
“아니야, 오해야. 너희 아빠가 얼마나 상, 냥, 한, 데. 그치, 여보야?”
“……영악한 녀석.”
“흐흐흐…….”
필살기를 이런 식으로 남발할 수 있다니, 이게 사기가 아니고 뭔가. 손짓 한 번에 나를 패배시킨 진유리가 승리의 표정을 지으며 식탁에 앉았다.
잠시 뒤, 우리 귀염둥이들이 차례대로 내려왔다.
봄이는 진유리를 보자마자 어리광을 피우듯 품에 안겼는데, 무슨 일인지 얼굴이 벌게져 있다.
헤나는 그런 봄이를 아주 하찮게 보고 있고.
나는 그 틈에 밥을 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그릇.
다른 집으로 치면 국그릇에 가까운 크기의 그릇에 가득가득 밥이 쌓아 올리고 모두의 앞에 놓은 나는 엄숙히 선언했다.
“밥 먹자.”
잘 먹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수저를 들었다.
달그락달그락.
누구 새끼들인지 어쩜 저렇게 복스럽게 먹을까.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흐뭇하게 애들을 보고 있는데, 진유리가 말했다.
“식탁이 평소보다 비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이스마일하고 올리버는 내일 오는 거니?”
“응! 내일 와.”
“학교 마치면 같이 올 거예요.”
“근데, 둘 다 어디 있는 거니. 엄마가 정신이 없어서 잘 못 들었어.”
“엘은 본가에 잠시 갔다 온다고 했어.”
“올리버는 오랜만에 아빠가 쉬어서 아빠랑 만난다고 했어요. 에버월드 간다던가? 그렇더라고요.”
“어머? 올리버가 에버월드 갔단 말이지? 그러엄 우리도 다음 주에 갈까?!”
“정말?!”
“진짜요?! 좋아요!!”
“여보야, 그렇다는데?”
“알았다. 다음 주에 보자.”
평소에는 여기에 수저가 두 개씩 더 올라간다. 이스마일하고 올리버, 내 제자들 말이다.
이스마일은 검왕의 씨앗인 성운(星雲)을 이해하기 위해, 올리버는 몸 안에 잠들어 있는 불가사의의 권능을 조정하기 위해 내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형편이었다.
두런두런 이야기가 이어진다.
대충 이런 식이다.
유리 입에서 아무런 맥락도 없이 새벽이 이야기가 나온다.
송새벽, 내 첫 번째 제자 말이다.
얼굴 본 지 오래됐다는 유리의 말에 봄이가 그 큰 눈을 휘둥그레 뜨며 보고 싶다고 동의.
갑자기 일정이 잡힌다.
또 헤나가 깍두기를 집으며 ‘할머니 보고 싶다.’라고 말을 흘리면 봄이가 호들갑을 떨며 ‘나도오!’라며 격하게 동의.
또 갑자기 일정이 잡힌다.
이렇게 몇 번이면 월요일 아침임에도 일주일 일정이 순식간에 꾸려진다.
어질어질하군.
“그러고 보니 너희들 수학여행 간다던데. 아빠가 뭐 준비할 거 없어?”
“아직 정해진 거 없어.”
“오늘 정해져요. 전교 회의에서 정하기로 했거든요.”
전교 회의? 애들끼리 정한단 말인가?
내가 묻자 봄이가 빵빵한 볼을 오물거리며.
“선생님이 이런 것도 해 봐야 한대.”
“의사 결정을 확실히 하는 것과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 그리고 조율하는 걸 배우는 수업이라고 했어요.”
아하, 수업의 일환이란 말이지.
“나쁘지 않네.”
“너희들끼리 회의하면, 그럼 회의 진행도 너희가 하는 거야?”
“네, 봄이가 해요. 얘가 전교 회장이잖아요.”
“오옷?!”
“히, 그래서 나 옷도 이렇게 입었잖아.”
진유리의 감탄에 봄이가 어깨를 으쓱한다.
캐주얼한 정장. 블랙과 화이트 투톤에 평소보다 훨씬 단정한 복장이다.
‘저게 뭔데?’라는 내 표정에 헤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판사 스타일이래요. 모자하고 망치도 준비했어요.”
“왜 판사님이 쓰는 모자하고 나무망치 있잖아. 그거 만들었어.”
“어머? 한번 보자! 엄마도 보여 줘.”
“히히. 짠.”
“우와아아. 이거 봄이가 직접 만들었어?”
“응, 내가 직접 깎은 거야.”
봄이가 사각으로 각진 판사 모자와 나무망치를 자랑스럽게 들었다.
박봄 커스텀이라나.
고개를 끄덕인다.
“멋지네. 제대로야.”
“역시 아빠야. 알아봐 주는구나!”
“그럼, 뭐든지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안 하면 안 했지, 손을 댔으면 완벽하게 해야 하는 법.
내가 기특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어디선가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
버찌가 한숨을 푹 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르르릉……(이놈의 집구석……).”
……왜? 뭐가 잘못됐어?
* * *
용호 재능 교육관.
드넓은 대강당에 전교생이 동그랗게 모여 있다.
전교생이라고 해도 수십 명.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의 규모에 비하면 한 줌이었다.
“조용.”
딱딱.
단상 위에 앉은 박봄이 딱딱, 나무망치를 내리친다. 실로 근엄한 얼굴. 잡담하던 아이들이 박봄에게 집중했다.
“본격적인 회의에 앞서 당부하겠습니다. 이 회의는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는 자리인 만큼 절대, 절대로! 의견을 비난하지 마세요. 알았습니까?”
목소리에 담긴 무게감이 다르다.
이것이 카리스마라는 것인가.
아이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헤나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도 안 차겠나.
저기서 무게 잡고 있는 쟤가 아침에 그 나사 빠진 애랑 같다는 게.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 주제.
수학여행, 어디로 갈 것인가!
한 명이 손을 든다.
“그…… 바다를 보러 가고 싶습니다…… 그…… 부산에 바다가 많다고 했는데…….”
1학년인 만큼 문장이 어색하게 끊긴다. 몇몇 상급생들이 피식피식 웃자, 발표하는 1학년 아이가 더 움츠러든다.
그때 박봄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빛을 보내자, 그 수근거리던 아이들 곁으로 박헤나와 박봄의 단짝인 임현지가 조용히 다가섰다.
“조용해. 회장 말 못 들었어?”
“죽을래.”
“……미, 미안.”
싸늘한 분위기.
박봄이 생글 웃는다. 그러자 굳어 있던 분위기가 스르륵 녹아내렸다.
“괜찮아요, 후배님. 천천히 말해 보세요. 저는 듣고 있답니다.”
“네, 네!! 그래서요, 저희 엄마가요…….”
자신감이 생긴 1학년 아이가 또박또박 말했다.
10분간의 발표.
요약하자면 부산.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에 부모님의 별장이 있다. 그곳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게 어떻겠나? 라는 간단한 의견이었다.
다음은 2학년.
“호캉스를 하고 싶습니다! 프리즘에서 요즘 유행하고 있잖아요. 귀찮게 이곳저곳 갈 곳 없이 한곳에서 해결하면 편하지 않을까요?”
수영장도 있고, 식당도 있고, 방도 넓다. 침대도 좋다.
고작 한 살 더 먹었다고 1학년보다는 훨씬 조리 있게 발표했다.
다음으로 3학년은 외국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며 의견을 낸다.
별장에, 호텔에, 외국 여행.
고작 초등학생의 여행치고는 지나치게 어마어마하지만, 사실 이게 당연하다. 여기 온 애들 중 절반 이상은 혈족이다. 각자 한 지방을 대표하는 가문의 아이들.
박봄과 박헤나도 돈이 썩어 나는 검호 가문이잖나.
그렇기에 비용을 신경 쓸 리 없다.
이런 상황에 한 명이 포문을 열었다.
“저희 아빠 호텔로 가면 수학 여행비, 저희 아빠가 다 낼 거예요.”
“어?! 어! 저도요! 저희도요!”
“나도 할 수 있어.”
아예 대놓고 자신이 발표한 여행지로 간다면 모든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며 말하자, 너도나도 손을 든다.
갑자기 시작된 돈 싸움.
우리 아빠가 더 부자예요!
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는 노골적인 경쟁이다.
판사모를 쓴 박봄이 눈살을 찌푸린다.
‘이건 안 좋아…….’
여기에 혈족 아이들이 많은 것은 맞다.
하지만 아닌 곳도 있다. 재능만으로 들어온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지잖나.
멈춰야 해.
급하게 망치를 내리치려던 그때.
“저도 의견 있습니다.”
확연히 다른 피부색을 가진 아이.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묻어 있는 소년.
셰이드 왕가의 보물로 불리는 이스마일.
그가 이 싸움을 끝내러 왔다.
“셰이드 왕실의 이름을 걸고 정식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재물로 경쟁을 한다면.
진정한 부가 뭔지 보여 주겠다.
“저희 왕궁으로 가죠.”
일주일 뒤.
용호 재능 교육관 전교생은 비행기에 올랐다.
창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에는 셰이드 왕실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