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명가의 마왕님-221화 (221/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외전 2화>

“가 볼게요. 다음 주일에 또 봐요.”

밤새 리차드의 무덤 곁을 지켰던 라네 아리아가 몸을 일으키고, 새벽을 밝히는 여명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인적이 드문 산인 만큼 길 따위는 없다.

가파른 오솔길. 라네 아리아는 지팡이 하나에 의지에 아슬아슬하게 내려오는데.

“끄응…….”

무릎이 시큰하다.

노구의 몸이 삐그덕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비가 오려나. 오늘따라 유독 심하네요…….”

그녀의 나이는 어느덧 세 자릿수가 넘었다.

청년들도 조심해야 하는 가파른 산길을 이 나이의 노인이 지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나마 바닥을 알 수 없는 마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

“안 되겠어요.”

더 이상은 무리네요.

라네 아리아는 당장 마을에 들러 길을 만들 사람들을 섭외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꼼꼼한 아이가 맡아주 면 좋겠는데. 찰리, 그 아이가 좋을까요. 아니지. 로터스 그 아이가 건축 일을 한다고 했으니…….”

지금껏 무수히 가르쳤던 제자들의 이름들이 스쳐 간다. 모두가 코흘리개 시절 그녀에게 글을 배웠던 아이들.

라네 아리아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솔직히 지나친 겸손이다.

이 시골 촌구석에서 그녀는 존재만으로 빛이었다.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쳐 주는 것도 모자라,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줬다.

게다가 전직 성녀라는 타이틀은 교단의 눈길을 항상 닿게 만들었으니.

아무리 초라하게 은퇴했다고 해도 그녀는 교단이 배출한 역대 최고의 성녀이며 구원자였다. 황실과의 관계로 쉬쉬하고 있지만, 교단 내부에 그녀 추종자는 상상 이상으로 많다.

덕분에 타산적인 상인들마저도 이 촌구석을 경유하는 것이고.

라네 아리아가 터를 잡은 뒤 무섭도록 발전, 이제는 단순히 시골 촌 동네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아무리 시골 촌민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이 변화가 그녀 덕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정도.

이런 형편에 동네 사람들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해?

절대 불가능하다.

“그냥 할 수 있는 아이들은 다 불러야겠어요. 어차피 농한기잖아요. 넉넉하게 임금을 주면 다가오는 겨울이 지날 동안 아이들이 따뜻하게 지내겠죠.”

흡족한 결정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지금껏 혼잣말을 했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웃음이 터트렸다.

“예전에 주교님이 그랬죠. 나이가 들면 혼잣말이 많아진다고요…… 정말이네요.”

문득 손을 본다.

하나 남은 손.

지팡이를 쥔 손등에 주름이 보인다. 저 나무가 세월의 흐름에 나이테를 추가하듯, 주름은 자글자글 삶의 족적을 새기고 있었다.

이게 전부 추억이겠죠.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어요.”

그렇게 걸음걸이마다 통증을 느끼다……

불현듯 스쳐 가는 감각.

갑자기 멈춘다.

그러고는 하늘을 보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아니, 깨달았다는 게 더 어울릴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그랬었어.

“……제게 허락된 시간이 다됐다는 겁니까, 아리아시여.”

과거 성녀라는 이름으로 제국 최강을 다투던, 설령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나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임에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간인 이상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질서를 피할 수는 없는 법이란 것을.

라네 아리아는 매우 잘 안다.

얼마나 남았을까.

하루, 이틀…… 사흘?

최후가 코앞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사실에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왕이면 다음 주일까지는 남았으면 좋겠는걸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이 왔던 길, 무덤이 있던 곳을 가리켰다.

다시 가서 인사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피식 웃으며 이 자리에서 인사를 한다.

“못 올 수도 있겠어요.”

어쩌겠어요. 나도 한낱 인간인 것을.

사실 라네 아리아쯤 되면 당장 상위 존재로 각성해 시간이란 절대적 질서를 유예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그런 선택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시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네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요.”

일단 길부터 정리하고요.

라네 아리아는 미련을 털며 산길을 내려갔다.

*   *   *

“코튼 산 말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산에 왜 길을…….”

“제게는 소중한 산이랍니다. 계속 저렇게 방치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아아…… 그러셨군요.”

“혹시 선생님이 주일마다 저 산에 오르신 게…….”

“훗. 밀라는 옛날부터 유독 눈치가 빨랐죠. 로터스가 꽉 잡혀 살겠어요.”

“하핫…… 그, 그렇죠. 제가 기를…….”

“선생님 앞에서 헛소리할래!”

“아앗!!”

웃음이 헤픈 남편과 억척스러운 부인. 그 모습을 따뜻한 눈으로 보고 있는 라네 아리아.

“제가 책임지고 깨끗하게 닦아 놓겠습니다.”

“동기들도 다 부를게요. 곧 겨울이라 놀고 있는 녀석들은 많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선생님은 잘 지내시죠? 어디 아프신 데는 없고요?”

“찾아뵌다, 찾아뵌다 생각은 하는데,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네요.”

“이럴 게 아니라 한번 뭉쳐요.”

“맞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애들 모아서 파티나 할까요? 옛날처럼요.”

“맞아요. 소풍 가는 거예요.”

“훗. 걱정 마세요. 선생님은 잘 지낸답니다. 그런 생각을 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라네 아리아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선생님.”

“선생님…….”

둘 다 라네 아리아의 수업을 듣던 제자들.

들판이 떠나라 뜀박질하던 모습이 생생한데 어느새 이렇게 컸다니…… 라네 아리아의 눈빛에 따뜻함이 가득 서렸다.

둘뿐만이 아니다.

걸음걸음마다 아는 얼굴들이 가득하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여인들이나, 이 동네의 유일한 숙박 시설인 여관의 주인이나, 식육점에서 고기를 썰다 이쪽을 보며 부리나케 고기를 들고 오는 사내도.

전부 라네 아리아가 가르친 제자들이니까.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끊임없이 들려오는 인사에 그녀는 손을 흔들어 줬다.

그렇게 어깨가 아플 정도로 손을 흔든 뒤에야, 두 번째 볼일을 볼 장소로 도착.

십자가가 세워진 건물.

교단의 지부였다.

라네 아리아는 애틋한 눈으로 건물 꼭대기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본다. 각기 시련과 은혜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자를 굽어보고 있다.

‘스스로 이곳을 찾은 게 처음이네요.’

혹여나 미련을 가질까…… 라네 아리아는 일부러 교단과 관련된 모든 곳에 발길을 끊었지만, 시골에 이런 번듯한 교회가 세워진 것 자체가 아직도 교단이 성녀를 포기하지 못한 증거이리라.

문을 두드리는 라네 아리아.

똑똑.

닫힌 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린다.

그런데, 늦다.

왜 이렇게 늦지? 뭐가 일이 있나?

라네 아리아가 직접 문을 열려는 순간,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등장한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부임해서 청소를 하느라…… 누구십니…….”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얼어붙는다.

얼마나 놀랐던지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노사제.

그런 노사제의 얼굴을 확인한 라네 아리아의 눈도 휘둥그레진다.

“어머? 체일리예요? 울보 체일리?”

“성…… 녀님.”

“울지 마요. 뚝.”

라네 아리아가 체일리를 안자 노사제, 체일리의 주름진 눈에 눈물이 고인다.

울보라고 놀리지만 체일리는 한때 성자 후보에 오를 만큼 교단의 유망주였다. 그 신실한 성력은 제국을 통틀어 손에 꼽힐 정도.

만약 심성이 조금만 독했으면 능히 라네 아리아의 뒤를 이었으리라.

아무튼 체일리는 한때 성자 후보로 성녀의 가르침을 받았다. 라네 아리아가 체일리를 유독 반기는 것도 그가 자신에게 배운 첫 번째 제자이기 때문.

일단 들어가요.

라네 아리아는 마치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노사제를 안내해 앉혔다.

“체일리가 여기 왜 있어요? 마지막에 봤을 때가 주교로 오른 걸로 기억하는데.”

“얼마 전 은퇴했습니다.”

“어머나. 벌써? 왜요.”

“저도 80입니다. 물러날 때가 됐죠.”

“80이면 한창인데!”

“흐흐흐. 성녀님이니 그렇죠.”

라네 아리아가 특별한 거지, 보통은 아무리 강력한 마력 보유자라도 노화의 흐름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아무리 은퇴했어도 주교였던 체일리가 여기 있는 건 말이 안 돼요.”

“제가 오겠다고 했습니다. 성녀님도 아시다시피 저도 시골 출신이잖습니까. 번잡한 도시는 저랑 맞지 않은 것 같아서요.”

“당신이라면 원로회에 들어갈 수 있잖아요.”

“흐흐…… 늙은이들의 모임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래도 그게 훨씬 편할 텐데.”

“아리아 님을 모시는 자라면 안락을 멀리하라. 제가 성녀님에게 배운 가르침입니다. 오히려 고맙습니다. 이렇게 성녀님을 뵐 수 있다니. 이 또한 아리아님이 제게 내려 준 선물 아니겠습니까.”

“체일리는 여전하네요.”

참으로 맑은 아이.

그래서 눈물이 많은 아이.

라네 아리아의 손이 노사제의 새하얀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뜻밖의 만남. 또 한 명의 제자를 마주한 그녀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두런두런 추억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머리 꼭대기에서 세상을 비추던 태양이 이제 등을 돌리고, 지평선 너머로 샛노란 노을이 진다.

그러자, 저 멀리서 보이는 아이들. 얼마나 들판을 쏘다녔는지 손 밑에 흙이 가득하다.

“음? 처음 보는 아이들인데.”

이곳 아이들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한 라네 아리아의 물음에 체일리가 쓰게 웃는다.

“버려진 아이들입니다. 제가 이곳에 오는 동안 거뒀죠.”

“저런…….”

어쩐지,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와 체일리와 라네 아리아에게 꾸벅꾸벅 인사했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가는데, 유독 한 꼬마의 눈길이 라네 아리아를 향하는 게 아닌가.

“왜 그러니? 뭐 묻고 싶은 게 있니?”

“물어도 돼?”

“얼마든지.”

“그럼…….”

소년이 주저하더니.

“할머니는 왜 눈이 한 개야?”

“……!!”

“엘피스?!”

코를 흘리는 꼬마 아이가 뱉은 말에 라네 아리아와 체일 리가 놀란다.

악룡을 잡으며 짓뭉개진 반쪽의 얼굴.

라네 아리아 본인은 이 상처를 드러내도 전혀 문제없지만, 일상에 녹아들려면 흉측한 얼굴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래서 평소 고절한 성법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이 엘피스란 꼬마 아이가 이를 꿰뚫어 본 것이다.

놀란 체일리가 퍼뜩 아이에게로 달려가 주의를 주려고 하는데, 라네 아리아가 한 손으로 제지하며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마주친다.

“꼬마야?”

“꼬마 아니야. 엘피스란 이름 있어.”

“어머. 그래요, 엘피스 군. 혹시 할머니 상처가 보이니?”

“응, 보여.”

“대단하구나.”

고위급 성법. 그것도 성녀의 성법을 꿰뚫어 봤다는 말은 그 재능이 심상치 않다는 것.

라네 아리아와 체일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이제 이 아이는 교단 차원에서 관리에 들어가겠지.

품속에 있던 사탕을 꺼내 준다.

웬 사탕이냐며 소년이 눈빛으로 묻자, 그녀는 엘피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제님 말 잘 들으라고 주는 거예요.”

최후가 정해지자, 처음이 오더니.

이제는 새로운 만남이 찾아온다.

결국 이렇게 돌고 돌아 만나니, 인연이란 참으로 얄궂다.

교회의 정중앙에 있던 십자가에 지는 해가 보인다. 라네 아리아는 시간이 이렇게 지났냐며 볼일을 꺼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요. 부탁할 게 있어 왔으면서.”

“부탁 말입니까?”

“네, 시간이 얼마 없어서요. 정리 좀 하려고요.”

체일리의 눈빛이 진중해진다.

존경하는 성녀님의 부탁. 체일리에게 그건 신이 내린 신탁이나 다름없으니, 사제복을 곱게 펴고 경청했다.

“저기 뒤쪽에 코튼 산이라는 곳이 있어요. 그곳을 교단 이름으로 매입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매입이라면…… 음, 이유를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그곳에 제 소중한 동료들이 묻혀 있답니다.”

“친우분들이시라면…….”

체일리가 퍼뜩 눈치챈다.

“……원정대입니까.”

“네, 구원의 행보를 함께한 전우들이죠.”

“허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아는데,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주검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냥 생전 친우들이 쓰던 유품으로 만든 무덤일 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이제껏 제가 관리했는데 이제 힘들어질 것 같아요. 교단에서 여유가 되면 조금 신경 써 주세요. 부탁할게요.”

“부탁은요. 그런 말씀은 거두십시오. 감히 성녀님의 말씀이신데…….”

옛 영웅들의 무덤.

무엇보다 옛 영웅이라면 마법의 왕, 성녀의 마지막 저서인 ‘마왕의 일기’의 주인인 마왕이 묻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당장 주교 회의가 벌어져도 모자랄 일.

“걱정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관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이제는 헤어질 시간.

라네 아리아가 홀가분한 얼굴로 문고리를 잡았다.

“……체일리를 봐서 기뻤어요.”

마지막이란 단어가 생략된 인사. 그 의미심장한 인사를 남긴 채 라네 아리아가 교회 문을 나섰다.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던 길.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라네 아리아가 돌아선다.

“나오세요.”

심각한 표정.

교회에서부터 느껴진 희미한 인기척.

문제는 분명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인간이면 있어야 할 반응이 없다는 거다.

심지어 마나조차도.

이 말인즉, 이 인기척의 주인이 성녀를 아득히 상회하는 수준의 절대자란 말인데.

그런 경우의 수는 있을 수 없다.

그녀는 라네 아리아다.

아무리 최후를 선고받았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상위 존재에 당장 오를 수 있는 절대자.

마왕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자신을 앞지른 존재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하나인데…… 세계의 질서를 벗어난 존재라면 이 이질감을 설명할 수 있다.

“헤, 놀래 주려고 했는데 들켜 버렸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 어둠을 뚫고 존재를 드러내는……

꼬마?

“너는…… 엘피스니?”

엘피스라는 꼬마다. 자신의 성법을 꿰뚫어 본 아이.

꼬마는 자신이 준 사탕을 빨며 이쪽을 똑바로 주시했다.

“안녕, 나 누군지 알지?”

“넌…… 엘피스가 아니구나.”

눈앞의 엘피스는 인간이면 담지 못하는 게 들어 있다. 가히 신의 권능에 가까운 힘.

성녀는 이것이랑 비슷한 힘을 안다.

마왕의 일기에서 본 힘.

“나랑 내기할래?”

불가사의(不可思議)였다.

*   *   *

집으로 돌아와 불가사의와 마주 앉은 라네 아리아.

“정말이죠? 그 내기란 거 끝내면 엘피스는 다시 돌아오는 거죠?”

“그렇다니까.”

과자를 먹던 불가사의가 부스러기를 덕지덕지 묻히고는 해맑게 웃는다.

“이런 식이었군요. 본 대로예요. 이렇게 불특정 인원에게 깃들어 당신의 정체가 항상 변하는 거네요. 현상이라더니…… 정말 바람 같네요.”

“나에 대해 잘 아네? 우리 처음 아니었어?”

“친우의 일기에서 봤어요.”

“친우? 누구?”

“마왕요. 아그네스 리차드.”

“아!! 걔 알아! 심상 세계에서 나를 끌어낸 애!”

엄청났지…… 불가사의가 뭐가 기쁜지 박수를 쳤다.

라네 아리아는 그 모습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불가사의의 입을 닦아 줬다.

“당신이 내기를 한다는 건 알아요. 소원을 들어 준다고요?”

“룰은 간단해. 내가 이기면 네 소중한 것을 뺏을 거야. 대신 네가 이기면 넌 소원을 이룰 수 있어. 흥미롭지? 재미있지?”

“하나만 물을게요. 그 소원, 어디까지예요?”

“뭐든지.”

“뭐든지요?”

“응,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찻잔을 들던 라네 아리아가 멈춘다.

그러고는 한참을 뜸을 들이며 고뇌하더니, 힘겹게 물음을 뱉는다.

“……세계의 경계를 넘어서라도?”

“음…… 그건…….”

세계의 경계를 넘는다는 말.

그것은 말 그대로 신이 개입할 수 있냐는 말이나 다름없다.

역시나 이번에는 불가사의가 한참을 고민한다. 아니, 이건 고민이라기보다는 뭔가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혼잣말을 하듯 작은 입이 쉴 새 없이 오물거린다.

그러고는.

“음…… 너라면 가능할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말이냐면.”

일방적인 내기는 사기다. 내기의 저울추는 공평해야 하는 법. 보통의 인간이 내건 소원과, 세계를 지탱했던 절대자의 소원 무게가 동일하지는 않다.

“고로…… 너를 던진다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좋아요. 내기에 응하겠어요.”

“좋은 선택이야. 조건을 들어 볼까?”

“제 소원은…….”

환생.

다시 삶을 살고 싶다.

“……음? 삶에 미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뭐, 상관없나.”

“참고로 조금 더 있어요.”

“그래? 계속 말해 봐.”

침을 꿀꺽 삼킨 라네 아리아가 떨리는 입으로 그리운 이름을 언급했다.

“마왕, 아그네스 리차드와 함께 태어나게 해 주세요.”

“이야…… 너무 지르는 거 아니야? 너 지금 네가 말하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잘 알아요.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재미있네. 너 재미있어. 왜 그 오만한 자식이 콕 찝어 너를 부탁했는지 알겠어.”

“네?”

“깊이는 알 거 없고. 잠깐 기다려 봐.”

과자를 와득, 씹은 불가사의가 눈을 감는다.

라네 아리아는 이제야 알겠다. 저건 신과 소통하는 거다. 이 정도면 진정한 신의 대리인이 아닌가.

‘현상이니, 어쩌면 신의 일부일지도.’

잠시 뒤. 불가사의가 몇 개 남지 않은 과자를 몽땅 입에 쑤셔 넣더니, 꿀꺽 삼키고는.

“조건이 있어. 일단 기억은 지워진다.”

“수긍하겠어요.”

“그리고 촉매가 필요해.”

“저울추의 무게를 맞출 용도인가요?”

“정확해.”

생을 다시 사는 것도 어머어마한 기적인데, 특정 인물과의 만남을 전제로 깔면 그 기적의 무게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완전히 이해한 라네 아리아.

“좋아요. 잠깐만요.”

허공에 십자가가 펼쳐지고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내 놓는다.

“우와, 이건…….”

“드래곤 하트. 허무에 닿을 만큼 지고의 시간을 견뎌 낸 고룡의 심장이라면 무게 추에 걸맞을 거예요.”

“너 마음에 들어. 편해. 아주 좋아.”

마침내, 내기의 저울추가 수평을 이루었다.

“내기를 하자. 뭘로 할까. 뭐든지 정해.”

“간단하게 가죠.”

가위바위보.

“단판으로.”

“점점 마음에 드는데.”

반짝이는 눈으로 손을 비빈 불가사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라네 아리아가 그 앞에 선다.

“가위.”

“바위.”

“보!”

양쪽에서 손을 내민다.

묵과 찌.

승패가 정해졌다.

그날 밤, 제국의 밤하늘.

가장 찬란했던 별이 떨어졌다.

*   *   *

번쩍.

침대에 누워 있던 진유리가 우와! 소리치며 번쩍 일어섰다. 같이 침대에 누워 있던 박기혁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깜작이야. 뭐야? 갑자기 왜 그래?”

“꿈을 꿨어.”

“꿈?”

“가위, 바위, 보를 했어.”

“……애들이랑 밤새 놀더니. 그래서, 이겼냐?”

진유리가 활짝 웃더니, 주먹을 내민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