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외전 1화>
제국력 988년.
역사적인 재앙이 벌어졌다.
고룡 타일루스가 기나긴 허무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 채 타락, 악룡 타일루스가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인류가 문명의 꽃을 피운 이래 최악의 위기였다.
악룡은 악의를 담아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종말을 고했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침몰될 위기에 놓이게 됐다.
그때.
대종말이 코앞까지 닥친 순간.
성녀의 이름 아래, 제국의 절대자들이 모인다.
제국 최고의 기사라 불리며 뭇 기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검성.
거친 도끼 한 자루로 용병 세계를 일통한 용병왕.
태어날 때부터 전투를 업으로 삼는 야만 부족의 대전사.
드워프 종족의 원로와 엘프족 수호 기사.
마지막으로.
마법의 정점.
마왕 아그네스 리차드까지.
하나, 둘…… 수많은 영웅이 쓰러져 갔다. 피로 만들어진 융단을 지르밟고 전진했다.
그리고.
절대자들은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대에 올라 악룡에 맞서 싸웠다.
처절했던 혈투.
숭고했던 희생.
그렇게 절대자들은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내던진 뒤에야, 이 세계를 종말의 갈림길에서 구원한 것이다.
* * *
“그러니…… 영웅이라 불러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영웅이라는 단어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떨려 온다. 마치 옛 친구들을 회상하듯 그리움이 듬뿍 묻어났다.
그러나 수업을 듣던 아이들이 이런 애틋한 감정을 알 리 만무.
그저 영웅이란 단어에 흥분해 펄쩍 뛰었다.
“난 검성이 제일 좋아!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검성님이 젤루 멋있었대!”
“아냐, 용병왕이 최고야!”
“너 또 할아버지가 용병왕 본 적 있다 말하려고 했지? 바보야, 그거 용병왕 아니라니까. 어떻게 인간이 산을 갈라.”
“아냐, 맞다니까! 울 할아버지가 똑똑히 봤다고 했어!”
저마다 마음에 있는 영웅들을 부르짖는다.
영웅의 발자취를 되짚던 교실이 졸지에 영웅들의 멋짐 순위를 줄 세우는 장으로 바뀌었다.
노파는 이 모습이 익숙한 듯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뒤에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오늘은 안 나오나 했어요.’
현역에서 은퇴하고, 노파가 아이들을 가르친 시간만 거의 40년이다. 세계의 흐름에서 벗어난 노파임에도 무시할 수 없는 세월.
그녀는 아는 것이다. 저 아비규환에 발을 딛는 순간 무한의 굴레에 갇힌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이 토론의 끝이 어디로 갈지도.
“선생님!! 성녀 님이 최고죠!”
“아냐, 바보야. 마왕이 제일 세다니까! 내가 알아. 역사책에서 봤어! 마왕이 젤 세!”
“성녀님은 아직도 살아 계시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성녀님이 최고지!”
“마왕이 최강이야!”
한쪽 무리에서 ‘성녀님이야!’를 외치면, 반대쪽에서 ‘마왕이야!’라고 응수한다.
아까 검성을 외치던 아이도, 용병왕을 부르짖던 아이도
결국 돌고 돌아 ‘강함’이란 부분에서는 성녀와 마왕으로 갈라진다.
귀신처럼 자리까지 바꾸는 걸 봐라.
못 말려. 수업을 이렇게 들어 보세요, 정말.
매번 수업 시작할 때만 해도 말라붙은 감자처럼 꾸물대던 아이들인데, 지금은 싱그러운 사과처럼 반짝거린다.
“선생님! 선생님!”
“누가 더 강해요! 성녀님이죠!?”
“마왕님이죠!”
“글쎄요…….”
노파의 입장에서는 하등 가치 없는 질문이다.
그래도 노파는 아이들의 스승. 어찌 스승이 제자에게 거짓을 고하리까.
노파는 머리를 긁적이며 진실을 말한다.
“아무래도 마왕이지 않을까요? 그…… 성녀가 쓴 ‘마왕의 일기’에서 분명히 적혀 있잖아요.”
마왕 최강파가 환호한다.
반면 성녀 찬양파는 풀이 죽는다.
“봐! 우리가 맞지! 마왕이 최강이지!”
“내가 아까 봤던 역사책이 마왕의 일기였다구! 에헴!”
“인정 못 해…….”
“그치만요, 선생님! 마왕은 무서운 사람이잖아요.”
“맞아요. 우리 할아버지도 마왕은 나쁜 사람이라고 했어요. 영웅은 훌륭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는데, 나쁜 사람이랑은 어울리지 않아요!”
“성녀님이라면 몰라도!”
“맞아! 성녀님이야말로 진짜 영웅이야.”
다시 격앙되려는 아이들.
그 순간.
짝짝.
“자, 그만.”
아이들을 진정시키는 박수소리.
아무리 자유로운 토론을 권장하는 노파라지만 이제는 나서야 할 때다.
“여러분. 누가 더 강하고, 누군 약하고. 그런 게 뭐가 중요하나요.”
무력의 우위가 갈린다고 해서 그들의 업적이, 희생이…… 구원받은 이 세계의 빛이 바래는 건 아니다.
“진실은 하나랍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이 세계를 구원해 준 영웅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여러분이 할 일은 영웅의 행보를 잊지 않는 것. 그거면 충분하답니다.”
그래,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그것이면 된다.
노파, 라네 아리아는 그렇게 생각한다.
한때 성녀라 불렸던 그녀는 말이다.
“책 펴세요. 수업합시다.”
* * *
라네 아리아가 성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향이었던 이 시골에 돌아온 지도 벌써 40년이 지났다.
여기까지 오는 데 여러모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세계를 파멸시키려던 악룡을 저지한 악룡 원정대.
그 구원의 행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영웅, 성녀.
제국의 모든 이들이 성녀를 찬양했다.
그녀가 귀환하는 길마다 꽃가루가 흩날리고, 구원자란 칭호와 함께 찬양의 노랫말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교단으로 향하는 줄이 굽이굽이 이어졌고, 귀족들은 구원자의 후광에 이름 한 자 올릴 수 있을까 무릎걸음으로 금은보화를 갖다 바쳤다.
오만한 황제마저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힐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이었고.
그러나 성녀는 이 모든 게 불편하기만 했다.
모두의 희생으로 이룬 영광이기에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악룡 원정대의 시작은 성녀 자신이었다. 모두가 성녀의 부탁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참여한 것.
그런데 염치없이 혼자만 살아남다니.
어쩌면 그래서일 거다.
마왕의 당부에도 끔찍하게 짓뭉개진 얼굴을 고치지 않은 이유가.
“저기, 저놈 가슴팍 가르면 드래곤 하트 있을 거야. 그거 빼서 치료하면 손은 무리라도 얼굴은 어찌할 수 있을 거야.”
“……괜히 우리한테 속죄한답시고 드래곤 하트 모셔 두지 말고, 빨리 써라. 내가 대표해서 허락하마.”
허락한다고 했지만…… 어떻게 제가 이걸 쓰겠어요. 동료들과의, 당신과의 마지막 추억이 담긴 물건인데……
결국 이 드래곤 하트 때문에 불로장생을 꿈꾸던 황제와 날을 세우긴 했다. 탐욕스러운 황제가 드래곤 하트를 보면 눈이 돌아갈 거라는 마왕의 당부대로였다.
황제는 갖가지 술수를 부리며 교단과 성녀를 압박했다.
드래곤 하트를 내놓으라고.
그 술수가 너무도 저열하고 치졸해 황제의 측근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황제의 대책 없는 행동에는 마왕의 죽음도 연관이 있었으리라.
수틀리면 황궁이고 뭐고 다 엎어 버리던 마왕이 있을 때는 이딴 저열한 짓은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황제의 폭주가 나날이 심해졌고, 결국 칩거해 있던 성녀를 깨우게 된다.
그리고 제국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성녀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실례지만 황제보고 나오라고 해 주시겠습니까. 네, 황제 맞습니다. 이 쓸데없이 큰 집의 주인 말이죠. 당신이 찾는 성녀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 얼마면 될까요? 한 시간이면 되겠나요?”
홀로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의 정문에 섰다.
그리고 당당히 서 황제를 불렀다.
한 시간 안에 튀어나와라.
실로 파격적인 성녀의 모습에 모두가 기겁한다.
황제조차도 성녀가 찾아올 줄은 몰라 허둥댔고, 황궁 전체에 비상에 걸린 가운데…….
약속된 한 시간이 지났을 때.
황궁 위를 가득 채우는 순백의 십자가들.
“시간 다 됐네요.”
아리아의 시련과 은혜가 새겨진 십자가가 제국의 심장부에 떨어졌다.
성녀를 괜히 절대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마왕이 없는 한, 이 드넓은 제국 땅에서 성녀를 막을 자는 없으니.
홀로 황궁 병력 전체를 무력화시키며 황궁을 초토화시킨 성녀는, 하나 남은 손으로 황제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똑똑히 들으세요. 이건 감히 당신 따위가 탐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평소 온건하다고 불리는 성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
아니…… 이건 마치 마왕 같지 않은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사건으로 성녀는 은퇴하게 된다. 이 사건이 있고 얼마 뒤 황제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신에게 고백하건대 황제의 죽음과는 단 한 줌의 관계도 없었지만, 성녀는 황궁과 교단과의 관계를 생각해 제 발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역대 최강, 최고라고 불리는 성녀의 이름값을 보면 실로 초라한 은퇴.
하지만 성녀는 단 한 번도 이를 후회하지 않는다.
짓뭉개진 반쪽 얼굴을 치료하지 않은 것도, 황제와 척을 지면서까지 드래곤 하트를 간직한 것도, 때문에 늙은 주교의 배웅을 맞으며 초라하게 은퇴를 한 것도.
전부 성녀가 아닌……
나 라네 아리아의 선택이었다.
“이런 기분이었네요. 이제 알겠어요. 마왕이 말한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말을요.”
“주교님, 저도 꽤 폼 났죠? 훗.”
성녀라는 이름을 버리고 라네 아리아로 돌아온 그녀.
그렇게 라네 아리아는 자신이 태어난, 어느 이름도 없는 시골로 돌아왔다.
빈자를 돕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은혜를 전하며, 주일이면 신에게 예배드리는 대신 인적이 드문 산에 올랐다.
산 중턱에 세워진 비석들.
동료들의 유품으로 만든 무덤이 있는 산이었다.
오늘도 산에 오른 라네 아리아가 비석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마치 이 비석의 주인이 살아 있는 것처럼 편한 말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꺼낸다.
“제가요, 오래도록 고민해 봤거든요. 솔직히 인정하기 싫지만, 제가 당신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
“분명히 첫인상은 별로였던 것 같아요. 별로 기억이 없거든요. 저 알죠? 불쾌한 기억은 지우는 거. 당신은 불쾌했다는 거죠. 어머, 억울하다고요? 억울해하지 마요. 이건 당신 탓도 있어요. 악명이 어지간했어야 말이죠.”
솔직히 같은 인간이 아닌 줄 알았답니다.
성녀가 쿡, 하고 웃었다.
“그런데 고아원에서 당신을 마주했을 때, 좀 놀랬어요. 물 빠진 앞치마를 입은 채 이불을 널고 있는 당신 모습은…… 귀해요. 아주 귀해요.”
어쩌면 그때였을 거다.
마왕의 내면을 들여다봤던 그때.
“마왕 안에 숨겨진 ‘아그네스 리차드’를 인식했던 날, 저 라네 아리아는 아그네스 리차드에게 호감을 가진 거겠죠.”
성녀와 마왕을 떠나.
라네 아리아와 아그네스 리차드의 인연.
하지만 둘의 관계는 친우 그 이상으로 가지 못했다.
“이거에 대해서도 고민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제 잘못인 것 같아요.”
마왕은 아그네스 리차드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 마왕은 허울뿐인 칭호였으니, 그 남자는 평소에 항상 하던 말대로 인생이라는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살았던 거다.
반면 성녀인 자신은 라네 아리아의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 못했다.
“저는 라네 아리아보다 성녀로 살았죠. 그게 제 사명이라고 생각했었고요. 근데…… 지금 와서 보니 왜 그랬나 싶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이를 깨달은 것은 단신으로 황궁에 쳐들어갔을 때였다.
드래곤 하트.
친우들과 이 남자의 추억을 빼앗아 가려는 황제에게 순수히 분노를 토했을 때, 라네 아리아는 깨달았다.
아…… 이제껏 난 성녀라는 허울에 갇혀 나 자신을 숨겨 왔구나.
“좀 더 솔직해질 걸 그랬어요.”
칭얼대고, 어리광도 피우고, 고집도 부리며,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표현하며 여과 없이 진심을 털어놓았다면.
“우리의 관계가 달라졌을까요? 모르겠네요. 다만…… 이 가슴 저린 후회는 남지 않았을 거 같아요.”
만약 다음 생에 만난다면.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의 인연이 다시 이어진다면.
그때는 각오하세요.
“달라진 저를 보여 줄게요.”
나는 알지요. 당신이 의외로 상냥하단 것을.
사심 없이 진심으로 돌격하는 인연을 쳐 내지는 못할 거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겠지.
“당신이 당황하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즐겁네요.”
웃음을 흘리던 라네 아리아의 얼굴이 급격히 시든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녀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신을 마주했던 성녀이자, 세계의 진리에 근접한 절대자다.
세계선을 뛰어넘는 ‘환생’이라는 기적이 실현 가능성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가능성이 있다면, 신이 허락하는 것인데.
성녀였던 라네 아리아는 신이 얼마나 무심한지 잘 알기에, 자신의 바람이 얼마나 공허한지 잘 알고 있다.
“뭐, 꿈꾸는 것은 자유니까요.”
라네 아리아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꿈을 꾸며 비석을 어루만진다.
‘아그네스 리차드’라고 울퉁불퉁 쓰인 음각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오늘도 노파는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 * *
그런데 말이다.
“안녕.”
기적이.
“나 누군지 알지?”
기적이 찾아온 것 같다.
“나랑 내기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