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217화>
- 언제였던가, 여느 때처럼 무기를 닦던 내게 후배 녀석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선배 정도의 마법사가 왜 선봉에 서세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기에 나는 짧게 대답해 줬다.
- “폼 나잖아.”
- 故 아그네스 리차드, ‘마왕의 일기’ 中
* * *
아찔한 혈향이 풍겨 온다. 흥분한 근육이 둠칫둠칫 춤을 춘다.
즐겁다! 미치도록 즐거워!
역시 싸움은 육탄전이다.
내려쳐. 베고. 부숴.
그리고, 죽인다!
대검 ‘마귀’가 황룡의 머리를 쪼갤 듯 떨어졌다.
하나.
쩌엉-!
막혔다.
콰아아앙-!!
내려친 검격의 여파가 황룡의 뒤편으로 퍼져 나가며 일대가 가루로 변했다.
그러나 의미 없다. 정작 황룡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지 않나.
심지어 반격까지 준비하고 있네.
“…….”
교차된 검날 사이로 황룡의 눈빛이 번뜩인다. 일순간 내 주변의 마나가 지워지며 아찔한 혈향이 풍겨 오고.
곧이어 피를 머금은 반월형 검기가 휘몰아쳤다.
스윽-
검기의 영역에 포함된 모든 것들이 절멸해 나간다.
가루가 되고, 존재를 잃어 갔다.
예외가 있다면 오직 나뿐.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공간에서 오로지 나만이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릿한데.”
싸움의 기본은 나를 알고 적을 아는 거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과거 마왕이던 제국 시절을 넘어섰다.
어쩌면 당연한 거다. 마왕의 힘을 지닌 채로 검호와 거인 두 개가 플러스됐으니까.
한때는 세 개가 삐그덕 거리며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자리를 잡아 서로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다.
‘지금의 나라면, 흠…….’
홀로 악룡 타일루스를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컨디션이 만전이라는 전제를 깔면 악룡의 심장을 뜯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나와…….
‘맞서고 있단 말이지.’
내 앞에서 검기를 흩뿌리는 이 녀석. 황룡은 지금 나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
‘악룡 타일루스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
확실히 황룡이란 녀석, 이제껏 만난 수호령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전에도 한 번 말했지만 수호령이라는 놈들은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보통이다. 실제로 이제껏 싸워 본 수호령들이 그랬잖나.
기간트도 막강한 워 아머를 이용해 찍어 누르려 했고, 레드 드래곤도 드래곤 특유의 격으로 밀어붙였다.
가장 최근의 태사자만 해도 조금 전황이 답답해진다 싶으니까 막무가내로 현신해서 달려들지 않았나.
한데 황룡 녀석은 다르다.
저 아기자기한 검 놀림을 봐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녀석은 ‘효율’을 알고 있다.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승리에 가까워지고, 상대에 따라 어떤 형태의 공격을 뿌려야 하며, 크기나 규모를 키우기보다는 상대의 폐부를 뚫는 치명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수호령임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정도로 인간의 싸움을 이해하고 있는 모습. 그것도 밑바닥부터 바득바득 기어 올라온 것 같은 처절한 싸움을 알고 있었다.
‘마치 나처럼.’
말도 안 되는 비유지만, 진짜로 그러하다.
나야 출신이 그렇다지만, 상위 존재라는 놈이 밑바닥 싸움을 알다니.
“신기한 놈일세.”
재미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놈이다.
웃음이 나왔다.
씨익, 웃고 있는 입가로 검은 기운이 새어 나왔다. 입김처럼 새어 나오는 힘의 정체는 ‘거인’.
오랜만에 맞수가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거인 녀석이 미친 듯이 폭주하고 있다. 가까스로 막고 있지만 당장이라도 현신해 주변을 초토화시킬 기세다.
나조차도 컨트롤하기 힘들 정도니 오죽하겠나. 이런 거인의 힘을 상대하고 있는 황룡이 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그 힘…… 뭐지?”
“네 목을 딸 힘이지. 왜, 관심 있어?”
“난 분명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니 친구냐? 묻는다고 답하게.”
“건방지군.”
대화는 짧았다.
나와 녀석은 약속이나 한 듯 다시 공세를 취했다.
주변을 감싸는 핏빛의 운무.
이번에는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육망성 마법진, 아포칼립스가 생성, 분열하며 영역을 확장해 갔다.
황룡이 검을 내려친다. 나는 막는다. 내가 마귀를 내려친다. 황룡이 흘려낸다.
마귀의 검광이 몰아치고 주변이 캄캄해진다.
검호류 파괴 ‘블랙홀.’
시공간이 회전하며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황룡도 이번에는 손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지, 이제껏 보지 못한 역동적인 동작으로 검무를 췄다.
내 마귀의 반절도 되지 않는 검이 부지런히 빛살을 토해 낸다. 목표는 내 ‘블랙홀’의 어둠. 블랙홀에 침식되고 있는 어둠을 걷어 냈다.
이렇게 검끼리 격돌하는 동안, 마법은 마법대로 충돌하고 있었으니.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피의 용들이 아가리를 벌리며 들이닥치면, 대기 중이던 아포칼립스가 세계를 지워 공격을 무효화시킨다.
반대로 아포칼립스가 직접 타격하려고 하면, 황룡의 주변에 용의 비늘이 떠오른다. 갑주처럼 떠오른 핏빛 비늘은 아포칼립스를 완전히 무효화시켰다.
치열한 공방전.
본능을 깨운 ‘검호’와 진리를 꿰뚫는 ‘마왕’.
두 힘이 전력으로 황룡을 압박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남은 한 녀석이 심심했나 보다.
허공에 주먹이 생성된다. 검은 안개로 이뤄진 거대한 주먹.
거인의 주먹이다.
나와 같이 적을 상대하는 것은 지겹다는 거지.
허공에 떠 있는 검은 기류의 주먹. 웬만한 빌딩 하나 정도는 될 법한 크기의 주먹이 떨어진다.
그 순간.
세계가 출렁이더니, 황룡의 머리로 무언가 모습을 드러낸다.
구슬? 아니, 오브에 가까운 모습. 볼링공 크기의 붉은빛이 도는 오브였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뭐야.’
나조차도 순간 흠칫할 정도로 불길한 분노가 꿈틀대는 오브.
뭐지 이 분노는?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역시나, 오브는 심상치 않은 기운만큼이나 강한 힘을 지녔다.
핏빛의 오브가 거인의 주먹을 손쉽게 막아 낸다. 아니, 막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 되레 기세를 몰아 역공까지 취했다.
“어디, 이것도 막아 보거라.”
불길한 마나가 대지를 침식한다. 출렁이던 대지는 고체에서 액체로 변하고 종국에는 찰박찰박, 핏물로 변했다.
그리고 핏물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은…….
황룡
黃龍
찬란한 황금빛의 용들이 이를 드러내고선 이쪽으로 들이닥쳤다.
108마리의 용들.
놀랍게도 저 많은 것들 하나하나가 신령을 품고 있다. 진유리의 적룡, 청룡과 비슷한 신수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근접에서는 검이, 주변에서는 마법이 빗발치는데, 여기에 신수까지 들이닥친다고?
이 자식 치사하게.
좋아.
“친구 부르기 있다는 거지.”
너만 친구 있는 줄 아나.
마룡기 ‘전우’가 휘날린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스켈레톤이 활약할 거리는 없다. 그러니 더 강화해야 한다.
검격을 세차게 뿌리며 황룡을 멀찍이 떨구고 동시에 주문을 완성한다.
허공에 균열이 일어나며 등장하는 것들.
허무 심연충의 지팡이 ‘허무’와, 뒤룩뒤룩 굴러 나오는 살덩이 ‘어보미네이션’. 마지막으로 과거 삼합회를 집어삼킨 ‘흑마법 결정화’로 만들어진 보석까지.
마왕의 시그니처 마법이라 불리던 최악의 흑마법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스켈레톤은 진화한다.
거인화
巨人化
네가 용이면, 내 친구들은 거인이다.
몸을 일으키고, 뼈의 거인들이 달려드는 황룡의 아가리에 대검을 내려쳤다.
물러나는 용의 무리. 그에 맞춰 황룡도 한 발짝 뒤로 빠진다.
나도 호흡을 정리하며 대검을 어깨에 걸쳤고, 나의 뒤로 뼈의 거인들이 대검을 세우며 신장처럼 시립했다.
하루를 넘게 이뤄진 전투가 처음으로 멈췄다.
황룡이 묻는다.
“대체 너 같은 존재가 어찌하여 인간으로 남아 있는 건가. 영원을 살 수 있음에도 필멸자로 남겠다는 건가.”
나는 답한다.
“내가 인간이니까.”
황룡이 묻는다.
“너는 알 것이다. 저 신의 오만함을. 한데 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인간을 벗어나 하늘에 도전할 수 있음에도, 왜 신의 인형 따위로 남으려는가.”
나는 답한다.
“내가 인간이라니까.”
뭐가 더 필요하나? 내가 인간이라는데.
신이 돼서 뭐 하게? 전지전능하면 뭐 해? 시공의 우주에서 홀로 외롭게 세계를 지켜보는 게 전부인데.
그딴 신은 필요 없다.
난 인간으로 남겠다.
필멸자로 남아, 세계선의 일부가 되어, 내 소중한 이들과 함께 웃고 우는 삶을 살아가겠다,
그리고 그들 곁에서 멋지게 잠들 거다.
“크~ 폼 나지 않냐.”
“미쳤군.”
“미쳤다라…….”
이해받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도 녀석한테 관심 없으니까.
나는 네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손톱만큼도 관심 없다. 너의 목적이 무엇인지 관심 없다. 네가 무슨 이상을 품고 있는지도 전혀 관심 없다.
다만.
너의 사연이, 목적이, 이상이.
나와 나의 가족들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 새끼를 죽일 이유는 충분했다.
“대화는 이쯤하자고.”
송곳니를 세운다. 적의를 세운다.
검을 든다. 마법을 발현한다.
거인을 깨운다.
그리고.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쪽의 무리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충돌하는 마나.
폭발하는 기파.
삭제되는 대지.
세계가 지워지고 있었다.
* * *
한편, 저 하늘 너머에서 초월적인 두 존재가 싸우고 있을 때, 인간들의 전쟁도 그에 못지않게 처절히 이뤄지고 있었다.
중국의 침공은 나날이 격화됐고 베트남과 대만, 인도를 비롯해 인접국 세 곳이 괴멸당하고 만다.
침공한 국가의 국민들을 제물로 바치며 무섭게 세를 늘리려던 중국.
하지만 그들의 침공은 어느 순간 멈추는데.
한국이, 그들이 소국이라 일컫던 한국의 전력이 파죽지세로 중국의 병력을 몰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천만에 가까운 초인들을 도륙 내며 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 세 맹수가 있었다.
“이거 무식하게 많기만 하지, 훈련 상태가 꽝이군. 아들아, 어떻게 보느냐.”
“그 권속이란 걸로 급조해서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렇겠죠. 민지, 네 의견은?”
“…….”
“딸?”
“민지야?”
“……한창 사냥 중인데 말 걸지 마, 좀.”
여기 있는 검호는 너희가 알고 있는 검호가 아니다.
이제껏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기 위해 얼마나 힘겹게 야생성을 가뒀던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곳은 전장.
죽인 숫자만큼 영웅이 될 수 있는 곳이다
본능을 깨운다. 마음껏 뛰어놀자.
사회라는 우리에서 벗어나, 완전히 야생성을 되찾은 맹수가 얼마나 두려운지, 그들은 이번 전쟁을 통해 똑똑히 학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세 검호가 길을 뚫을 때, 정작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 간 곳은 따로 있었는데.
김연희의 마지막 안배.
성갑 기마대였다.
“돌격! 돌격! 돌격!! 뒤는 볼 필요 없다. 앞만 봐!”
“야, 말려라. 대장님 흥분하셨다.”
“큰일 났네. 대장, 같이 가요!”
“돌격-!!”
성갑 기마대는.
적을 갈아 버렸다.
이 표현보다 알맞은 표현이 없을 만큼 유해련을 앞세운 성갑 기마대는 철저히 전선을 분쇄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현역으로 돌아온 그들을 염려하던 주변의 시선이 쏙 들어갈 정도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광휘의 선봉은 은퇴한 거 아니야?”
“광휘의 선봉만이 아니야. 저기 태반이 은퇴한 사람들이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더니.”
“꾸물거릴 시간 없어. 우리도 가자.”
검호와 성갑 기마대가 활로를 트자, 그 뒤로 대한국군의 전 부대가 뒤따랐다. 한국의 유서 깊은 혈족들의 힘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풍부한 에이전트 전력도 뒤를 받쳤다.
그렇게 이들은 왜 이 한국이 동아시아의 맹주로 불리는지, 몸소 증명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각.
이 증명의 대열에 합류한 이들.
수호 가문 진룡이 서해를 넘고 있었다.
* * *
마른하늘에 먹구름이 깃든다. 한낮의 하늘이 먹구름에 가려지고, 도시에 기이한 어둠이 깃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쏟아지는 폭우.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의심이 들 만큼 괴이한 폭우가 중국의 어느 도시를 덮쳤다.,
쾅쾅-! 뇌우가 내리쳤고, 마지막으로 폭풍우가 사방을 막아섰다.
이때쯤 이상을 직감한 무인 몇몇이 통신기를 들었지만.
삐이이이-
이미 끊긴 지 오래.
도시가 봉쇄됐다.
그 순간, 벼락이 번쩍이며 생성된 그림자 위로 기이한 인영들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는데.
고오오오-
용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용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을 뚫고 나온 용들이 일거에 도시로 빠르게 강습한다.
“아룡원, 생존자 있는지 살펴본다!”
“용아병, 지상 병력 모두 지워!”
“운룡대, 나를 따라와!”
진룡 진도하가 외치자 세 무리가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무리를 벗어나 단독으로 움직이는 이가 있었으니.
마왕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다는 여인.
마룡 진유리였다.
“난 빠질게요, 아빠.”
“같이 가지 그러냐. 조심해야 할 시기다.”
“거추장스러워요.”
마룡기 ‘드래고니안’의 헬멧이 장착되고, 이음새 사이로 빛무리가 뿜어져 나오더니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용익
龍翼
팡-!
소닉붐을 일으키며 단숨에 공간을 접는 진유리.
그렇게 그녀는 눈 깜짝할 새 목표인 ‘제단’의 꼭대기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게 위험한 거랬지.”
기혁이가 말했다. 제단부터 최대한 빨리 없애야 한다고.
“이 정도의 부정한 기운이 모인 제단이라면 존재만으로도 이 세계에 대미지를 줄 거야.”
이 세계에 주는 대미지가 과하게 축적되면, 설사 모든 일이 수습되더라도 후유증이 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 안 되지.’
한국에서 언니만 기다리는 귀염둥이들과, 새로 태어날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청소하자.”
진유리가 눈을 감았다 뜨고.
마나의 세계가 펼쳐졌을 때.
그녀가 세계의 모든 선들을 잡아당겼다.
용언(龍言)
천지창조(天地創造)
도시의 일부가 사라진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물론 제단도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