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214화>
나는 허공에 글을 띄워 놓는다.
슥슥.
모두 마법으로 만들어진 문자.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수호령
“어제는 뭘 배웠지?”
“수호령요!”
“어제도 수호령 배웠어요!”
“위그드라실요!”
“세계수!”
“어어엄~ 청 큰 나무!”
적극적인 학습 태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역시 스승이 훌륭하니 애들도 훌륭하다니까. 아주 만족스럽군.
“전부 맞아.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수호령에 대해 배워 보자.”
자유의 깃발
drapeau de la liberté
“자유의 깃발. 여덟 수호령 중 하나로, 프랑스에 영역을 두고 있는 수호령이야. 수호령답게 아카데미 엘랑 비탈(élan vital)을 설립했고 수호령 중 가장 온화하다고 알려져 있어.”
자유의 깃발은 수호령 중 정보가 적기로 유명하다.
물론 수호령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모든 정보가 극비로 분류돼도 이상할 게 없지만, 이를 감안해도 자유의 깃발은 심각할 정도로 정보가 적다.
“자유의 깃발이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은 손에 꼽힐 정도야. 자신의 영역, 프랑스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지 않으면 거의 나서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사례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자유의 깃발이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라면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생성된 레드 게이트 때문이야.”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 생성된 레드 게이트.
까다롭기로 유명한 악마형 몬스터에, 현존 최고 난이도인 8레벨 레드 게이트.
최악인 건 8레벨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전조 현상도 없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 생성돼 몬스터를 뱉어 냈다는 거다.
“이로 인해 파리는 파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무려 4차에 걸친 레이드가 이뤄지며 레드 게이트, ‘저주의 붉은 달’은 클리어가 돼.”
저주의 붉은 달.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지 않나?
그렇다. 전직 내 오른팔, 현재는 우리 헤나의 오른팔이 된 바포메트가 나왔던 게이트였다.
헤나는 이 사건의 주범이 자기 오른팔에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는지, 구석에서 똘망똘망 눈을 빛내고 있다.
귀여워라.
“중요한 건 이게 제일 최근이란 거야. 지금으로부터 거의 70년 전의 일이 최근이란 거지.”
거의 70년 동안 활동한 것은 이게 끝이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정보란 게 있을까.
그래서인지 땡무위키에 자유의 깃발을 검색하면 업적이나, 능력, 특징보다 먼저 언급되는 게 이 ‘성격’ 이야기다.
“온화하다. 조용하다. 소심하다. 게으르다. 소극적이다…… 그렇다면 왜? 자유의 깃발은 이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길 꺼려 할까?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내가 물꼬를 트자,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못생겨서요!”
“약해서일 수도 있어요!”
“아냐! 수호령 님이 약할 리 없잖아!”
“게을러서 그렇지 않을까. 나두 휴일에는 늦잠 자.”
“나두 나두.”
“나는 그저께 아빠랑 놀이공원 갔는데?”
“재미있었겠다! 부러워어!”
두서없이 쏟아 내는 아이들.
거의 90퍼센트 이상이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과정. 서로 의견을 나누는 이 모든 과정에서 아이들의 사고력이 성장하는 거다.
“그만, 그만. 모두 잘 들었어.”
모두 일리가 있다며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킨 뒤, 다시 수업으로.
“내 생각에, 이건 능력이랑 관련됐을 확률이 높아.”
현재 ‘자유의 깃발’의 능력으로 알려진 것은 ‘지원계’. 영구적인 강화 버프를 걸어 준다는 거다. 실제로 ‘저주의 붉은 달’ 사건 때 몇몇이 이 버프를 받아 큰 활약상을 보여 준 기록이 있다.
그중 제일 유명한 인물은 ‘롤랑’이라는 기사.
바포메트의 머리를 자른 기사로, 8레벨 보스 바포메트를 상대할 때 일주일 밤낮으로 검기를 뿜어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세간에 알려진 정보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이미 난 좀 더, 많은 걸 알고 있잖나.
이를테면 예전 위그드라실과의 대화, ‘수호령의 전투력 순위’에 대한 대화에서 얻은 정보 말이다.
“……자유는 전투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요. 대신 외적인 능력은 굉장하죠. 특히 인간이 가진 제약을 모두 해제시키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안겨 주는 건 제가 생각해도 사기적인 능력이에요.”
예전에 상위 존재가 뭔지 설명했지만, 존재는 존재에 맞는 격이 있다. 여기서 격은 다르게 표현하면 ‘힘의 총량’ 혹은 ‘힘의 한계점’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인간에게 인간의 격이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인간이란 거죽이 낼 수 있는 한계치가 있다는 말이고.
“자유의 깃발은 이 한계치를 지워 버려. ‘자유’라는 능력으로.”
업그레이드(upgrade)가 아니라 리미트(limit) 자체를 없애는 거다.
처음에 이를 들었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게 가능하다고? 이건 단순히 능력으로 치부할 게 아니다.
기적(奇蹟).
신에 필적할 만큼 어마어마한 기적인 거다.
문제는 이게 모두가 탐내는 기적이란 것이다.
인간은 물론이고, 몬스터도…… 심지어 같은 수호령마저도.
결론을 내자면, 자유의 깃발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다.
* * *
프랑스의 한적한 시골.
사람보다 동물들이 많은 이곳의 어느 펍으로 사람들이 몰려온다.
여느 때처럼 검은 정장을 입은 주인장이 보인다. 어깨 라인의 살짝 해진 실밥과, 하얀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노신사였다.
끼익-
“주인장, 여기 맥주 한 잔.”
“나도 맥주.”
이른 저녁에 맞춰 영업을 시작하는 펍.
이름도 없다.
메뉴도 주인장 마음대로.
어제는 모처럼 먹을 만한 소시지였다면, 그제는 더럽게 과묵한 주인장보다 한층 더 재미없는 감자 요리였다.
“오늘 메뉴는 뭐야.”
“라따뚜이.”
“오, 맙소사.”
“신이시여.”
“젠장! 오늘은 꽝이군!”
라따뚜이.
프랑스 전통 음식으로 각종 야채를 볶아 만드는 요리다.
그러나 각종 야채란 ‘남는 야채’와 동음이의어. 이들에게 라따뚜이란 짬 처리나 다름없다.
“…….”
불평이 쏟아졌지만, 역시나 주인장은 오늘도 과묵하게 자기 할 일만 한다.
잘 세척된 케그에서 맥주를 뽑아냈다.
푸쉬이익-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금빛 맥주가 맥주잔을 채워 간다.
중세가 연상되는 목제 오크 잔에 담긴 맥주라니, 보기만 해도 감성이 터진다. 확실히 인기도 좋다.
신물 나는 라따뚜이가 잊힐 만큼은 충분했다
“캬아아-!”
“끝내주는구만.”
“역시 맥주는 여기가 최고야.”
그러나.
사람들이 매일 같이 이 펍을 찾는 이유가 맥주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맥주는 거들 뿐. 이 펍의 시그니처는 따로 있었는데.
맥주잔을 든 사람들의 시선이 저기 한쪽 구석으로 집중된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서 마주 본 남녀. 로브에 딸린 모자를 머리까지 끌어올린 할머니 앞에, 여기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행색을 한 남자가 굽실거리고 있다.
“물을 멀리 하거라.”
“물…… 말입니까?”
“그래, 너의 앞길에 물과 연관된 사고가 보여.”
“어, 언제쯤입니까. 심각합니까?!”
“반년. ‘카론’이 모는 배에 탈 수도 있어.”
“허업!”
카론이라면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뱃사공이다. 목줄이 걸려 있다는 말.
그렇다. 할머니는 점성술사였다.
주인장의 누나로 알려진 이 할머니는 펍의 시작과 함께 점을 봐줬다고 전해진다. 점도 귀신같이 잘 맞았는데, 어느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나가지 마라.’라고 강력하게 당부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집에서는 불이 났다.
가스 사고였다.
만약 손님이 점을 믿지 못하고 직장에 갔다면, 부인과 자식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사람들은 할머니에게 점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벌써 반 년 치 예약이 꽉 찼을 정도.
“이번 주에 내 차례가 올까?”
“그냥 마음 편하게 다음 주로 생각해.”
“크핫. 나는 오늘 볼 수 있지! 하하하! 자, 마셔. 마셔.”
차례가 된 남자가 어지간히 기쁜지 ‘오늘은 내가 산다.’ 호쾌하게 외치며 맥주를 들이켠다. 맥주 거품이 덥수룩한 수염 위로 흘러내렸다.
“근데, 도미니크. 아까부터 뭘 보는 거야?”
“뉴스 본다.”
“뉴스?!”
“뉴우스으~? 사나이 도미니크가 샌님처럼 뉴스를 본다고?!”
“뉴스랑 샌님이랑 무슨 상관있냐…….”
“실망인데. 내 친구 도미니크가 죽었구만.”
“젠장, 믿고 있었는데.”
“집어치워. 애도의 잔을 들어.”
“도미니크의 죽음을 기리며.”
뉴스 좀 본다고 멀쩡한 사람을 죽여? 사내는 황당한 얼굴로 키득대는 친구들을 본다.
“이것들이 뇌를 맥주에 절였나.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지. 맨날 술만 처먹을 거야?”
“처먹을 건데?”
“존나 좋군.”
“하…… 말을 말자…….”
“얌마, 조용해 봐. 그래, 지성인 도미니크 선생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네 눈으로 봐라.”
신문을 코앞에 보여 준다.
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이는 헤드라인은…….
“……‘역대 최악의 학살?’ 1억이 죽었을 수도 있다?”
눈을 의심케 하는 숫자에 신문을 뺏어 드는 사내.
세상 돌아가는 데 관심이 없는 사내지만 사람이 1억이나 죽었을 수도 있다는데, 궁금하지 않겠나.
“중국의 내전 피해가 알려진 것보다 클지도 모른다는 기사야.”
중국 내전이 시작된 지도 두 달이 넘은 지금.
무림맹 대변인은 내전의 피해를 ‘10만’ 정도로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강력한 논조로 이를 새빨간 거짓말이라 비난하고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중국의 절반이 넘는 도시가 폐허가 됐다고 해.”
“……진짜?”
“내전이라고 해도 초인들끼리 싸우는 거잖아. 설마 민간인도 건드린 거야?”
“미친 거 아니야?”
“나도 정상이 아니라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런 것 같아. 끌고 가서 어디에 가둬 둔다고 쓰여 있어. 거기서 살아나온 생존자가 증언한 거래. 거기 있는 사진이 그 증거야.”
주정뱅이들이 사진에 머리를 박는다. 흐릿한 사진으로 보이는 건, 마치 피라미드처럼 세워진 제단이었다.
“저게 다 관으로 세워진 거래.”
“시발.”
“퉤! 퉤! 젠장, 못 볼 거 봤어.”
“개똥 같은…….”
불쾌해졌다.
아무리 전쟁이라 해도 정도가 있는데, 이건 정도를 넘어선 학살이었다.
“술이나 마시자.”
“그래.”
“좋은 생각이야.”
불쾌한 기분을 맥주로 씻어 내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
“으아악!”
“깜짝이야!”
시선의 주인은 로브를 쓴 할머니였다.
주인장의 누이인 점성술사 말이다.
“이보게, 그 신문 좀 보여 주게.”
“네, 네.”
남자가 넙죽 신문을 바친다.
할머니의 시선이 신문에 꽂힌다. 관으로 세워졌다는 제단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눈을 번쩍 뜬다.
‘저건……!’
인신공양
人身供養
인간을 제물로 바친 흔적이었다.
“나가게.”
“네?”
“당장 가게에서 나가란 말일세.”
남자 일행을 쫓아낸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라 이 가게에 있던 전부를 쫓아냈다.
“롤랑! 당장 문 닫으렴!”
“영업 끝났습니다. 모두 가십시오.”
주인장의 재촉에 펍을 가득 채웠던 손님들이 짐을 싼다.
한 명쯤은 불만을 가질 만도 했지만 주인장의 몸에서 나온 알 수 없는 위압감에 그들은 입을 닫고 얌전히 문을 나서야만 했다.
“시간 없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 해.”
“알겠습니다.”
주인장, 롤랑이 숨겨 뒀던 검을 들고는 누이의 곁에 섰다.
그 순간 둘의 곁에서 푸른 깃발이 펄럭이며.
거대한 문이 솟구쳤다.
자유
개선문
凱旋門
“가자.”
“네.”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의 문.
자유의 깃발의 ‘개선문’이었다.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롭기에 저 문을 나서면 그녀를 잡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쾅-!!
어디까지나 문을 나서면이다.
문이 부서지면 도망갈 수 없는 법…….
충격과 함께 산산조각 난 가게. 먼지 사이로 남자의 실루엣이 다가오고 있다.
* * *
“그런데요! 아빠…… 아니, 선생님! 선생님이 말한 ‘자유’는 한계를 부순다고 했잖아요. 그럼 인간이 수호령처럼 상위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건가요?”
“충분히. 격에서 자유롭다면 수호령이 되는 것도 불가능이 아니야.”
오히려 거기까지면 다행이지.
만약 그 자유라는 게, 진정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다면…….
‘세계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의 거인처럼.
* * *
검은 실루엣이 정체를 드러낸다.
“너는…….”
“오랜만이군, 깃발.”
붉은 용포를 입은 검은 머리칼의 동양인.
“……황룡.”
인간의 거죽을 쓴 황룡이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자유를 내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