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210화>
중국의 어느 산이 화마에 휩싸여 있다.
넘실대는 불꽃, 질식할 듯한 연기.
무수한 생명들이 화마의 아가리에 씹혀 잿더미로 변해 갔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발버둥 친다. 살기 위해 불꽃 사이로 질주하는 가련한 무리들.
그리고 그중에는…… 인간 무리도 섞여 있었다.
“도망쳐!”
“빨리! 빨리!!”
“엄마-!!”
“장아야!”
“애들 챙겨! 얼른!”
“선발대, 방향 제대로 잡아.”
“진법 유지에 신경 쓰는 거 잊지 말고.”
인파의 선두에서 무복을 입은 인원들이 길을 뚫었다. 장애물을 치웠고, 불꽃을 맨손으로 뿌리쳤으며, 진법을 유지해 연기를 걷어 냈다.
더욱이 여기저기서 불꽃에 휩싸인 거목들이 쓰러질 때는.
콰아앙-!!
어김없이 누런 호랑이를 닮은 도기(刀氣)가 주변을 쓸어버렸다.
“모두 힘내라. 우리는 하북의 지배자, 팽가다!”
“우어!!”
대주의 말에 팽가의 무인들이 단전 깊숙이에서 기합을 토해 낸다. 불꽃 속에서도 선명히 드러날 정도로 근육이 눈에 띄게 부풀어 올랐다.
타고난 신력과 빼어난 근골, 그리고 이에서 나온 강맹한 도법.
모두 하북의 호랑이, 하북 팽가를 나타내는 것들이었다.
각인된 긍지와 자부심이 깨어나자 팽가의 무인들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목줄이 풀린 맹수처럼, 그들은 한 마리 호랑이가 되어 맹렬히 주변을 청소해 나갔다.
마을까지만 가면 된다. 마을까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내공을 쥐어짜냈다.
그리고 무인들의 사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콰직-!
터진다.
선두에 선 무인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터져 버렸다.
비산하는 육편을 맞으며 비명을 지르는 동료들.
“사, 사형!”
“륜아-!!”
모두가 멈춘다.
맹렬히 돌진하던 무인들도, 하늘을 뚫고 치솟던 사기도.
모두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주변이 정적에 휩싸이고,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허공으로 향하는데.
그들의 눈에 비친 양탄자.
붉은 수실 위에 한 마리의 용이 황금빛 비늘을 뽐내며 화려하게 승천하는 양탄자였다.
그리고 그 양탄자에 누워 있는 누군가.
용무늬 자수를 수놓은 적의(翟衣)를 입은 채, 나른한 눈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여인.
“척호대주……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난설, 개년…….”
무림맹주 난설이었다.
“모두 끌고 와.”
……
…
잠시 뒤.
도망쳤던 하북 팽가의 무인들이 하나둘, 무림맹 무인들에게 사로잡혀 끌려 들어온다.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하북 팽가의 내전으로.
“맹주님 오십니다.”
난설의 등장에 흩어져 있던 무림맹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집합했다.
그런 가운데 몇몇이 나와 카펫을 깐다. 역시나 부와 권력의 상징인 ‘붉은색’과 존경하는 스승님, 황룡의 형상을 그려 넣은 카펫이었다.
나른한 시선의 난설이 깔린 카펫으로 사뿐히 다리를 내딛자, 재빨리 그녀의 측근이 황금 포대기를 내밀었다.
난설은 건네진 포대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제 몸보다 더 소중하게, 극진의 예를 갖춰 껴안았다.
그제야 나른하던 표정에 생기가 도는 난설.
그녀가 포대기를 껴안은 채 걷는다. 그녀의 걸음 뒤로 길게 늘어진 적의가 스르륵 바닥을 쓸었다.
“도망자는.”
“모두 추포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이 하북 팽가 전부입니다.”
“…….”
난설은 나른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차가운 연무장 바닥에 무릎이 꿇려 있는 하북 팽가의 무인들. 저들의 절절한 분노와 원망이 피부로 느껴진다.
“좋구나.”
있는 힘껏 증오하라.
이 증오가 모여 나의, 우리의 결실을 성장시키는 원료가 될 테니.
“시작해.”
“존명.”
연무장 위로 그려진 주술진이 빛나는 순간.
증오는 고통으로 변하고, 끔찍한 절규가 이 공간을 가득 채워 갔다.
그리고 난설이 꼭 껴안고 있는 황금 포대기 속 아기가 울음을 토해 낸다. 아기의 이마에는 연무장 위에 그려진 주술진과 똑같은 문양의 주술진이 빛나고 있었다.
더없이 불길하게.
* * *
“응?”
이유 모를 불길함이 빼꼼 고개를 든다.
뭐지? 이 꺼림칙한 기분은?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그렇게 팽팽하게 조여 있던 집중력이 잠깐이나마 무너진 순간.
또깍……!
“……!!”
손가락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고, 바늘이 실선을 벗어나며…… 달고나의 귀퉁이가 부서…… 졌다…….
“아, 안ㄷ…….”
망했다……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부서진 달고나를 본다.
용이 똬리를 틀고 승천하는 모양의 달고나. 바늘 하나로 깎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섬세하며 예술적인 모양인데…….
지금 내게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꼬리가…… 꼬리가 부서졌잖아.
“우와! 아빠 거 부서졌어!”
“박봄, 지금 아버지 아냐. 선생님이야.”
“아, 그치. 헤나, 고마워. 얘들아, 봐봐! 선생님 거 부서졌어!!”
“우와아! 정말이야!”
“정말 부서졌어!!”
이겼다아!
놀 수 있어!!
우와아아아아-!
우리 딸내미가 먼저 함성을 지르자, 곧이어 뒤에 있던 아이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숲속을 방방 뛰는 아이들.
허허, 기운도 좋아라. 수업할 때는 졸려 죽으려고 하더니, 논다고 생각하니까 저렇게 뛰어다녀?
기가 막히고 헛웃음이 났지만 어쩌겠나, 내기에서 졌는데.
본디 모든 영광은 승자가 가지는 법.
아이들의 대표인 봄이가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내 앞에 섰다.
“아빠.”
“선생님.”
“아, 선생님!”
봄이가 몸을 배배 꼬며.
“약속…… 지킬 거지?”
“그래야지.”
약속은 약속.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뒤를 보니 간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꼬맹이들. 만화 속 고양이 캐릭터처럼 똘망 똘망, 눈이 빛나고 있다. 당장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하라고 재촉하고 있다.
허, 이것들 봐라? 귀여움으로 협박하네.
나는 피식 웃으며 그 협박에 져 주기로 했다.
“오후 수업 없음.”
자유 시간이다.
“마음껏 놀아.”
예에에-!!
만세! 어깨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용호 재능 교육관의 아이들이었다.
……
…
한동안 아이들을 맡게 된 것은 전적으로 진유리의 부탁 때문이다.
내가 태사자를 때려잡고서 한국으로 몰래 복귀한 날. 어머니께 잘못했다며 싹싹 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다짜고짜 진유리가 달려들지 않던가.
“지금 들어와?”
“오랜만이야. 애들은?”
“애들은 위에 있어. 애들 보기 전에 잠시만 이리 와 봐.”
“왜?”
“박기혁.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음, 뭔가 싸했다.
어쩌면 어머니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게 진유리다.
요것이 설마 눈치챘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는 역시였다.
“영국.”
“영국은 왜?”
“태사자.”
“얘가 왜 이래.”
“7일 공포.”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나오시겠다?”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아니, 반쯤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뜬금없지만 여자의 직감이란 게 실존할 수도 있단 생각까지 들더라.
그래도 진유리는 진유리, 널 탓할 생각은 없다며 다음부터는 어디 갈 때 이야기나 하라며 넘어가 줬다.
하여튼 이런 점은 매력 있다니까.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대신이랍시고 부탁한 게 있었으니.
맞다. 아이들 이야기가 이때 나온 것이다.
“그럼, 기혁이 너. 이제 할 일 없지? 나랑 같이 애들 좀 봐주자.”
“언제는 내가 안 봤어?”
“봄이랑 헤나 말고, 다른 애들까지.”
“다른 애들 누구? 엘? 올리버? 아, 올리버는 지금 일상생활하고 있지? 말 나온 김에 보러 가야겠네.”
“걔들도 포함해서, 다른 애들 전부 말이야.”
“전부?”
“응, 용호 재능 교육관 아이들 전부.”
“엥? 걔들은 갑자기 왜?”
진유리의 설명은 대략 이렇다.
용호 재능 교육관은 저번의 습격 때 상당수의 시설이 파괴됐고, 희생자도 나왔다.
이에 학교의 책임자인 진도하와 김연희가 격노했고 보안 설비를 제대로 갖추기로 한 것.
그래서 학생들은 한동안 야외 수업을 해야 하는데, 이걸 진유리가 맡고 있다는 거였다.
이걸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아니, 애들을 맡길 사람이 없어서 진유리한테? 이 망나니를 뭘 믿고?
근데 어머니의 말로는 의외로 아이들의 반응이 좋단다. 학부모들도 매우 흡족해하고.
“내가 너 비밀 지켜 줄 테니까, 너도 나 도와줘.”
“무슨 비밀? 그런 거 없다니까?”
“알았으니까 도와줘. 알았지?”
“뭐, 알았어.”
그렇게 난 주말 이 시간, 우리 딸내미와 제자들, 그리고 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야외 수업 겸, 캠핑을 온 것이다.
* * *
박봄은 박기혁의 수업을 좋아한다. 아빠의 수업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항상 새롭거든.
무엇보다 재미있어.
아빠보다 재미있게 수업하는 선생님은 본 적이 없다.
이건 비단 박기혁이 아빠라서 그런 게 아니다. 실제로 박봄의 친구들 전부가 같은 이유로 박기혁의 수업을 기다렸다.
“오늘은 몬스터에 대해서 배울 거야. 따라 외쳐 볼까? 몬스터!”
몬스터!
우렁찬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몬스터. 그러면 수업의 시작은 이걸로 해 볼까.”
말캉말캉. 몽실몽실.
외형에서 위엄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이 몬스터의 이름은 슬라임.
1레벨 최약체 몬스터였다.
“슬라임, 슬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봄이는 아빠의 손에 올려진 조그만 슬라임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포실이야! 작은 포실이!! 박포실 보여? 너 나오고 있다니까!
헤나랑 단둘이 있었을 때면 큰 소리로 외쳤겠지만 지금은 아이들이랑 함께 있으니, 언니로서 의젓하게 있기로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슬라임은 몬스터 중 최약체란다. 맹수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몬스터지. 그렇다면 왜 오늘 선생님이 이 별로 대단치도 않은 슬라임을 들고 왔을까. 아는 사람?”
“몬스터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앗, 저지르고 말았어.
친구, 동생들한테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주책없는 손이 그만.
봄이는 집중되는 시선에 머리를 긁적인다. 그것도 잠시, 아빠와 아이 컨택을 하자 배시시 웃는다.
“정답. 슬라임은 몬스터의 근원이란다. 현존하는 몬스터의 절반 이상이 이 슬라임과 일치하는 유전자를 가졌지.”
때문에 슬라임은 어떠한 형태로도 변형시킬 수 있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이미 포실이를 얻을 때 들었던 내용들이지만, 다시 들어도 재미있다.
아빠는 최고라니까.
물론 몇몇 애들은 ‘슬라임 따위가 뭐야.’라며 하품을 하기도, ‘선생님, 다른 몬스터 이야기해 줘요!’라며 불평하기도 했다.
박봄은 지금 시끄럽게 불평하는 아이들을 똑똑히 기억해 놨다.
나중에 혼내 줄 거야…….
박기혁도 이런 분위기를 읽었을까. 피식 웃었다.
“너희들 슬라임을 무시하나 본데…… 좋아, 어차피 오늘 가르칠 건 슬라임이 아니라 몬스터니까, 슬라임 설명은 넘어가자. 그럼 지금부터 이놈이 뭘로 변할 수 있는지 보여 줄게.”
잘 봐. 재미있을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기 중에 있던 마나가 부르르 떨렸다. 봄이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친숙한 마나, 아빠의 마나다.
이번에는 무엇을 보여 줄까.
두근두근, 나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초집중.
꼴까닥, 침을 삼키는 순간.
아빠의 손바닥 위에 있던 슬라임이 부르르 떨리더니.
퐁실!
증식했다.
몸집을 부풀렸다.
커다란 풍선껌처럼 하늘을 가득 채우는 슬라임.
박기혁이 생각한 만큼 증식했을 때, 슬라임은 변형한다.
“어어?!”
“뭐야!”
아이들의 놀란 비명이 들려온다.
슬라임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무언가 형체를 이뤄 갔으니까.
어느 것은 도마뱀으로, 어느 것은 늑대로…… 개중에는 인간형태도 있었다. 고블린과 오크의 중간쯤 되는 모습.
무수히 많은 슬라임 조각들이 전부 제각각으로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게 슬라임이 ‘진화’하고 있는 과정이다. 저기 보면 너희가 아는 ‘고블린’도 있고, ‘다이어 울프’도 있지. 동물형부터 곤충형, 인간형까지. 이처럼 슬라임은 천의 얼굴을 가졌단다. 그런데도 슬라임을 무시할래?”
아니요!!
아이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그럴 수밖에, 이렇게 황홀한 광경을 보고 있는데.
다시는 우리 포실이 무시하지 마라! 괜히 박봄이 다 우쭐해진다. 이제 이곳에서 더 이상 슬라임을 무시하는 아이는 없었다.
“이것들 전부가 슬라임 자체의 힘만으로 진화했다고 보기에는 힘들어. 여러 요인에 플러스 인자들이 섞여야 가능하지. 하지만, 이놈은 좀 달라.”
변형하는 슬라임 중 하나를 꺼내 온다.
뿌연 안개, 혹은 그림자처럼 생긴 몬스터.
도플갱어였다.
“혹시 도플갱어를 아는 사람?”
봄이가 손을 번쩍 들었지만, 늦었다. 헤나가 더 빨랐다.
“헤나 학생.”
“도플갱어는 암 속성 변형형 몬스터로, 처음 마주하는 대상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변신한 대상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으며, 외형은 여러 가지지만, 일반적으로 그림자를 닮았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훌륭해. 박수.”
짝짝짝짝-
“조금만 고치자면, 처음 본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강한 대상이야. 암 속성보다는 ‘무 속성’에 가깝고.”
대상의 외형과 똑같이 변신하고, 능력 일부를 사용할 수 있다. 때문에 도플갱어는 몬스터 중에서 극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부류로 통하는 것이었다.
“신기한 건, 이 도플갱어는 슬라임과 거의 90퍼센트 이상 흡사하단다. 재미있지 않니? 한쪽은 최약체 몬스터이고, 다른 한쪽은 사람들이 제일 꺼리는 몬스터라는 게.”
그 차이는 뭘까.
슬라임에게는 없고, 도플갱어에게는 있는 것.
“그건 도플갱어가 ‘기생형 몬스터’라는 거야.”
숙주를 찾아 기생한다.
숙주의 힘을 갈취해 생존, 성장하고…… 종국에는 숙주의 몸을 완전히 ‘차지’한다.
“예시로 든 도플갱어를 볼까? 도플갱어는 대상으로 변형 시에 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어.”
이 과정이 숙주를 만들고 기생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기생에 성공하며 자체적으로 성장하고…….
종국에 변형한 대상을 죽이면.
“완전히 그 대상으로 변하는 것도 꿈이 아니야.”
설령 그것이 같은 몬스터가 아닌 인간이라도…… 이론적으로나마 인간이 될 수 있는 몬스터.
그게 ‘기생형 몬스터’의 특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