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208화>
인류를 수호하며, 더 나아가 세계의 균형을 수호하라.
신의 명령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여덟 상위 존재.
인류는 이 신의 대리인에게 무한한 존경과 경애를 담아 ‘수호령’이라는 칭호를 붙이게 된다.
하지만 말이다.
희생, 봉사, 헌신, 화합, 발전, 수호……
실로 숭고한 대의를 지닌 채 이 땅에 현신한 수호령이지만, 모두가 이 대의에 공감하며 따르는 것은 아니다.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저 태사자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우리는 신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같은 위대한 존재들이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다? 대단히 비상식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헌신하고 봉사하는 건 인간이어야 맞죠.”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신은 우리에게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지키라고 명령했지, 어떤 식으로 ‘지켜야’ 할지는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우리들의 자유라는 겁니다.”
태사자는 에우리아처럼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위그드라실처럼 숭고한 의무를 고수하지 않으며, 황룡처럼 신에게 근원적인 분노를 품지도 않았다.
안위와 영달.
놀랍게도 이게 태사자가 원하는 전부였다. 신의 대리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세속적인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세속적이란 것은 달리 말하면, 가장 인간다운 것.
그래, 가장 인간답게 사고하는 수호령.
그게 바로 태사자였다.
“깊이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이것은 거래이자 약속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힘을 주고, 여러분은 제게 ‘충성’을 바치면 됩니다.”
“그래도 지칭하는 말이 그럴싸해야죠. 이제부터 이 약속을 ‘기사도’라고 합시다. 저는 여러분의 주군이 되고 여러분은 저의 기사가 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런 태사자에게 인간은 노예였다.
말 잘 듣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노예들.
대신 주인으로서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 그뿐인가? 검술이나 마법 같은 힘까지 전수해 주고, 그들을 권력의 요지에 앉히기도 했다.
물론 전부 태사자 자신을 위해서였지만, 이유야 어쨌든 그들에게도 좋은 거 아닌가?
실로 완벽한 관계였다.
“이 정도면 나보다 충실히 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수호령은 없을 거야.”
놀랍게도 태사자는 이렇게 깊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발전을 의도적으로 강제했다는 데에 눈곱만큼의 거리낌도 없었다. 아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노예라면 주인이 허락한 테두리 안에 있어야 마땅한 법.”
내가 허락한 영역 안에서, 내가 허락한 힘으로, 내가 가르쳐 준 무기를 들고, 내가 주입한 사고방식으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너희는 내가 내려 준 것만을 취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노예의 자세이리라.
“나는 지금이 좋다.”
인간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으며 절대자가 된 지금이 좋다.
“더없이 만족한다.”
나는 인간이 언제까지나 나의 노예이기를 바란다.
철저히 내 발바닥을 핥으며, 내가 내려 준 것만을 누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힘을 철저히 제어했다.
누구보다 인간을 깊이 이해하기에, 힘의 관계가 역전되는 순간 지금까지 이뤄 왔던 주종 관계 또한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임을……
태사자는 확신했다.
그렇기에 감히 나를 이렇게 몰아세운 이 녀석은, 이 녀석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죽여 본보기를 세워야 한다.
내가 만든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크아아아앙-!!
* * *
고유 마법을 퍼붓던 태사자가 갑자기 울음을 토해 내더니, 이제는 자기와 비슷한 사자들을 소환해 냈다.
암사자들이 이를 드러내더니, 일시에 달려들었다.
분명한 적의.
기필코 나만큼은 죽이겠다는 건가. 의지가 너무 노골적이라 세 살 아이도 알겠다.
“풋.”
실소를 흘리며 대응에 나섰다.
검은 안개 뭉치가 주변을 장악, 곧바로 안개 안에서 내 고유 마법 ‘아포칼립스’가 장전, 달려드는 사자는 물론 시야 전부에 불벼락이 작렬했다.
곧이어 공세가 정리되자, 분노한 태사자가 울부짖으며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확실히 위력이나 규모 면에서는 이제껏 내가 겪어 본 마법 중 수위를 다투지만.
이게 위협이 되냐 안 되냐는 다른 문제다.
‘또야?’
너무 지나치게 단순하고 반복적이니까.
막는 것도 한두 번이지, 슬슬 이 지루한 패턴에 한숨이 나올 지경.
저쪽이 분노한 채 공격하면 나는 방어하고, 다시 열 받아서 공격하면 역시나 막히고…….
머리를 굴리는 것도 없고, 트릭을 섞는 것도 없는 순수하게 격으로 밀어붙이는 공격들.
어찌도 이렇게.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제국 시절 나는 절대자였다.
인간계 최강자.
더 이상 적은 없고 겨룰 상대가 없다.
그래서 그 자리에 안주하겠나? 내 이 지랄 맞은 성격에?
어림도 없는 소리.
그때부터 상위 존재를 찾아갔다. 같은 인간에서는 적이 없으니 말이다.
제국에도 상위 존재가 있냐고?
여기보다 훨씬 많다.
예를 들자면 저기 서쪽 해안의 레비아탄이라든가, 엘프 세계의 하이엘프 로드 같은 애들.
수호령보다 격이 훨씬 낮은 놈부터, 수호령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놈까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놈들을 마주했다.
다시 말해, 이 몸은 상위 존재라는 녀석들을 질리도록 상대해 봤고.
‘이 녀석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거지.’
지축이 흔들린다.
이미 녹아내린 대지가 부르르 떨리더니, 곧이어 끔찍한 열기가 솟구쳤다.
마법의 흐름이나 규모, 격에 비추어 볼 때 ‘헬 파이어’나 ‘어스퀘이크’ 같은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태사자만의 고유 마법일 터.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했던가? 그게 분명하다.
요리해 볼까.
섬세하게.
신기 ‘허무’를 이용해 마법에 간섭.
일단 접촉하면 여기부터가 중요하다. 괜히 완벽하게 통제하려고 밑바닥부터 들쑤시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빠르게 해석해서, 핵심적인 몇 가지만 바꾼다.
가령, 조준한 포탄의 궤도를 살짝 수정하는 것처럼, 수치 몇 개만 바꾸면.
마법은 나를 빗겨 갈 것이다.
이렇게.
쿠르르륵-!!
균열이 난 대지 사이로 용암이 솟구친다. 솟구치는 용암들이 사자 형상을 이뤄 어지럽게 이를 들이박았다.
그리고 내가 떠 있는 이 공간만큼은 빗겨 가고 있었다.
이게 상위 존재의 단점 첫 번째, ‘치밀함의 부족’이다.
기술의 숙련도와 치밀함이 부족하다.
이 녀석들은 힘을 타고난다. 일개 존재가 소유하기에는 규격 외의 힘.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절대자’의 운명을 걸어갈 개체다.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세계의 한 축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 그대로,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녀석들.
이런 놈들이 기본기를 배울까?
헬파이어를 매직 미사일처럼 쏴도 마나가 넘치는데, 이런 놈들이 효율이란 단어를 알기나 할까?
적어도 내가 아는 상위 존재들 중 그런 놈은 하나도 없었다.
이 점은 평소처럼 자신보다 격이 낮은 대상을 상대할 때는 아무런 상관없다. 그냥 찍어 누르면 되니까.
문제는 나처럼 밑바닥에서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놈이다. 자신들의 강점인 ‘격의 차이’가 무너졌을 때, 상위 존재는 더 이상 내세울 게 없게 된다.
그때 비로소 기본기가 빛을 보인다. 본인의 힘을 얼마나 이해하고 숙련이 되어 있느냐.
극단적으로 말해, ‘진실된 실력’ 말이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상위 존재는 맥을 못 춘다. 앞서 말했듯이 너무 강한 힘을 지녔기에 본인의 실력을 갈고닦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태사자가 대규모 마법을 퍼붓지만, 내가 가볍게 이를 파훼하고 넘어가는 게 그 증거다.
분노한 녀석이 포효하며 지랄 발광을 하지만 패턴은 뻔하다.
압도적인 힘으로 나를 짓뭉개고 싶겠지. 근데 쟤, 자신이 쓰는 마법을 얼마나 이해를 하고 쓰는 걸까?
지금 나를 향해 덮쳐오는 저 해일이나, 속박할 요량으로 덮쳐오는 저 쇠사슬은?
고유 마법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담긴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
단언컨대, 상상 이상으로 무지할 거다.
태어날 때부터 왜인지도 모르게,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한 힘이다. 나처럼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며 이룬 성과가 아닌 이상에야 그 의미를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난다.
허무가 안개를 뿜어내고, 태사자의 마법이 나를 덮쳤지만.
잠시 뒤, 여전히 나는 같은 자리에 전혀 전과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떠 있었다.
“왜! 왜!! 통하지 않는 거냔 말이다!!”
봐라. 태사자의 언령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거.
별다른 의지를 실은 것도 아닌, 그저 분노를 토해 냈음에도 말 자체가 ‘언령’이 된다.
물리력을 가진 언령이 주변을 휩쓴다. 불쌍한 대지는 또 망가졌다.
“그거야, 네가 모자라서지.”
“말도 안 된다. 내가 모자라다니. 나 태사자가!”
다시 한번 몰아치는 언령.
나는 ‘블링크’로 가볍게 공간을 뛰어넘어 뒤쪽으로 위치한다.
“그러니까, 평소에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았어야지.”
“이 자식!!”
나는 웃음을 지우고, 차갑게 녀석을 노려봤다.
“마법사란 마도의 길에서 진리를 ‘찾는’ 존재다.”
이미 진리를 가졌다고 해서 멈추는 게 아니라, 영원히 찾아야 한다. 내가 가진 이 진리가 맞는지 고찰하고, 또 다른 진리가 있진 않을까 의심해야 한다.
그런데.
“넌 뭘 했나?”
“뭐라?”
“그저 주어진 힘에 우쭐했겠지. 그게 너와 나의 차이다.”
“다, 닥쳐!”
상위 존재의 결정적 단점, 그 두 번째.
“너희는 치열함이 결여됐다.”
너무도 쉽게 얻기에 탐구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영감은 그랬지. 천재의 가장 큰 적은 만족이라고.”
만족은 성장을 멈춘다. 멈춘 것은 썩어 가고, 썩은 것은 결국 추하게 끝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멈춘 이여, 추하구나.”
진심으로 경멸을 담아 바라본다.
“닥쳐라!!”
분노한 태사자가 분노하더니, 주위가 뒤집어졌다.
그 순간, 허공을 깨트리고 나오는 것. 전에 한 번 봤던 여섯 인영, ‘태사자의 분신’들이다.
태사자가 녀석들을 집어 삼켰다. 으적으적, 산 채로 씹혀진 분신들.
드디어 먹었구나.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곧이어 분신을 섭취한 태사자의 격이 출렁이더니 한층 더 강해졌다. 일순간이나마 거의 두 배 이상 강해진 태사자.
“각오해라.”
“그 말 몇 번 하는지 모르겠다.”
“이이익!!”
빛이 사라진다.
암전이 찾아온다.
밤새 싸워 분명 아침 해가 뜨고 있던 하늘인데, 이질적인 어둠으로 가득 찼다.
어둠이 달려든다. 마치 성난 사자처럼.
그러나.
내 손짓 한 번에.
내 위로 빛이 떠오른다.
빛이 확장되고, 확장되어 빛은 별이 되고, 별은 달이 되며, 어둠을 지웠다.
태사자는 이번에도 막혔다라고 생각하는지 길길이 날뛰며 재차 마법을 준비했다. 아마도 은연중에 이렇게 계속 몰아치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이야.
이쪽이 사양이다.
“이제 노는 건 끝이야.”
이 지겨운 싸움을 끝내자.
손가락을 튕겼다.
딱-!
내 손짓에 긴장하던 태사자가 놀란 고양이처럼 주변을 살핀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상 현상은 없다.
안심하는 녀석이 송곳니를 드러냈지만…….
당연히 안 보이지.
네 몸에 새겨져 있으니까. 정확히 태사자의 뱃가죽을 뚫고 빛나고 있는 ‘육망성’.
내가 여섯 분신들과 싸울 때 심어 놓은 아포칼립스였다. 거인의 힘으로 만들어진 아포칼립스.
아포칼립스
Apocalypse
시간이 멈춘다.
공간이 얼었다.
나와 태사자가 마주한 이 공간.
수억 개의 육망성이 별처럼 반짝인다. 육망성이 다시 육망성을 이루고, 그 육망성이 다시 육망성을 이루며 무한의 세계가 펼쳐진다.
“거인.”
내 몸 안에 숨겨져 있던 거인이 몸집을 키웠다. 순식간에 태사자보다 커져, 이 세계를 내려다볼 만큼 커진다.
그리고 난 신기 ‘허무’를 내던지며.
명령한다.
“문 열어.”
거인의 손이 허무를 잡아 육망성의 중심에 집어넣었다.
육망성들이 사 차원의 문으로 변한다. 거대한 문, 이걸 뭐라고 부를까.
처음 펼치는 마법.
고민해 본 적이 있다.
진리의 문? 세계의 문? 심연의 문?
모르겠다. 어쨌든 문이 열리며 눈부신 빛으로 배경이 바뀐다.
심연이 사라지고, 광휘가 자리 잡은 공간.
나는 떨고 있는 태사자를 향해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어서와, 나의 세계에.”
“……!!”
내가 법칙이며.
내가 세계인 방.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신’이다.
거대한 문이 닫혔다.
치열했던 싸움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한 마무리였다.
* * *
한편, 바다 건너 중국에서는.
“후우…… 후우!!”
“조금만, 조금만 힘내십시오.”
출산의 고통에 무림맹주 난설이 이를 꽉 깨물었다.
“맹주님, 힘드시면 비명을 내지르셔도 됩…….”
“닥쳐라…….”
살기 담긴 눈으로 부하를 노려본다.
스승님의 분신이며 우리의 결실이다. 어찌 감히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는가.
난설의 눈빛에 부하는 목을 바짝 움츠리며 뒤로 빠졌다.
“맹주님, 힘을 주셔야 합니다!”
“흡……!”
“더! 더!”
“흐읍!!”
난설은 젖 먹던 힘을 다해, 하체를 밀어냈다.
그렇게 몇 시간 뒤.
“머리가 보입니다, 맹주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밀어내고, 밀어낸다.
출산에 내공을 쓰는 것이 좋지 않다는 속설에, 혹여나 스승님과 나의 분신에 나쁜 영향을 줄까 마나가 아닌 순수한 힘만으로 전력을 다해 밀어냈고.
마침내.
그 결실이 세상에 나왔다.
“응애애애-!!”
“아들입니다! 맹주님, 아들입니다!”
난설은 그제야 안도했는지 눈을 감았다.
“다행이로구나.”
“황룡 님께 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러거라.”
곧이어 문을 열고 들어선 황룡이, 건조한 표정으로 아이를 안아들었다. 난설은 탈색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우리의 결실입니다.”
“……드디어.”
나의 새로운 몸이…… 모든 신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그릇이…….
완성됐다.
황룡의 눈동자가 아이를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