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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명가의 마왕님-205화 (205/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205화>

제국 시절, 이런 말이 있었다.

마왕이 지나간 자리에는 비명밖에 남지 않는다.

초토화(焦土化).

마왕의 상징처럼 전해지는 전략이었다.

수로, 길, 방어 기지를 비롯한 국가 제반 시설을 깡그리 박살 내는 것이다.

도시에서 폐허로, 풍요로운 숲이 황무지로.

이 처절하고도 끔찍한 현장에 남겨지는 건 숨 쉬는 것들뿐.

그래서 비명만이 남겨지는 것이다. 생명체는 비명을 지를 수 있으니까.

혹자는 이 부분을 보고 내게 최소한의 ‘인정’이 있다 평가하기도 했다. 그래도 학살까지는 안 저지르니 다행 아니냐며.

틀린 말은 아닌데, 맞는 말은 더욱 아니다.

기본적으로 나란 놈은 이기적이다.

저 정도로 손을 썼다는 것 자체가 나나 내 주변이 피해를 입었다는 건데, 나는 내 상처가 중요하지 남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다.

당하고는 못 산다.

그러니 억울하면 너희들도 복수해라.

복수는 만인에게 평등하니까.

각설하고, 내가 인간을 살려 두는 건 말랑말랑한 인정 따위가 아니다.

전쟁의 효율 때문이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먹고, 마시고, 싸고, 자야 한다.

이 중에 하나만 못 해도 사람은 굉장히 불편해지고, 두 개 이상이 없으면 사실상 사람은 살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성이 없어진다. 길이 없어진다. 결정적으로 물이 사라진다.

성이 없어짐으로써 보호받지 못하고.

길이 없어짐으로써 물자의 공급이 끊어진다.

결정적으로, 물이 없어지면 인간은 완전히 망가진다.

이제 여기서 시민들이 할 수 있는 대처는 뭘까.

비축 물자를 아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 몇몇 질 나쁜 놈들은 약탈을 하기도 할 거다. 그래 봤자 며칠일까? 자력 구제가 힘든 이상 결국 그들의 끝은 똑같다.

국가에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이게 내가 노린 효율이다.

원래 상대는 나를 막는 것에 중점을 뒀겠지만, 이제 시민들까지 살리고 보호해야 한다. 자연히 인원이 분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상황에 내가 도시 몇 개를 더 초토화시키면?

혼란은 가중되고 나중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될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이때쯤이면 시민들의 분노가 내게서 저들로 향한다.

대체 너희는 뭐 하기에 저놈을 막지 못하냐!

내가 낸 세금을 받아 처먹었으면 우리를 보호해라!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 주변이 불안하면 자신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이기적인 나처럼 말이다.

자,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

원래는 내가 녀석들을 찾아 복수해야 했다. 귀찮게 숨겨진 본거지를 찾고 그들이 대비를 갖춘 방어선을 뚫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저들이 제 발로 나를 찾아와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피해는 더 커지고 시민들의 불만은 커질 터. 이 혼란을 멈추고 싶으면 전력으로 나를 막아야 한다.

굳이 일일이 찾아가지 않아도 알아서 기어 나온단 말이다.

그렇게 나온 놈들의 모가지를 뚝딱, 따면 된다.

봐라.

지금처럼.

*   *   *

“알아서 찾아와 주잖아.”

이보다 효율적인 방법이 어디 있나.

박기혁이 하늘 저편을 바라보고 있다. 불그스름한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 저편에 음영이 진다.

대지를 달려야 할 말들이 하늘 위를 달리고 있다.

전원 유니콘과 페가수스로 무장한, 창공을 질주하는 기병대. 영국을 대표하는 무력.

삼사자 군단.

그들이었다.

휘이이익-!

삼사자 군단이 도착하기에 앞서 한발 빠르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존재, 팔콘이다.

팔콘은 삼사자 군단의 눈으로 수색과 정찰의 역할을 맡는 사역마. 팔콘이 박기혁의 주변을 유영하며 실시간으로 정보를 보냈다.

“적 식별. ‘복수자’ 확인.”

“절대 놓치면 안 된다.”

포위 섬멸.

돌격하라!

삼사자 군단이 랜스를 들어 올린다. 페가수스와 유니콘의 피부 위로 프리즘처럼 빛이 번쩍인다.

곧이어 빛을 뚫고 드러나는 강철의 마갑.

무장을 갖추자, 삼사자 군단이 갈라진다. 양옆으로 빠져나오는 인원들. 박기혁을 완벽히 포위해 갔다.

한편 박기혁은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는 중.

“재미있네.”

하늘을 나는 기마대라니, 가슴이 웅장하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멋짐’이란 것을 알고 있다.

이쪽도 어디 가서 폼으로 질 수 없는 노릇.

사나이답게 멋짐에는 멋짐으로.

혀로 입술을 할짝거리자, 박기혁의 등 뒤로 어둠이 펼쳐졌다. 어둠이 부채꼴처럼 펼쳐져 확장, 드넓은 평야를 다 집어삼켰을 때.

검은 아지랑이와 함께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스켈레톤 군단들.

여기까지는 익숙한 풍경, 지금부터가 진짜다.

스켈레톤 군단의 발밑으로 솟구치는 유령마(幽靈馬).

흑마법 소환

팬텀 스티드

Phantom steed

다그닥, 다그닥.

순식간에 기병대로 병과가 바뀐 스켈레톤 군단.

백색의 두개골에 검은 복면이 씌워지고 푸른 귀기가 깃드는 순간.

“보여 줘. 하늘이 누구 것인지.”

손을 내리는 박기혁.

진격 신호가 울렸다.

선두에 선 스켈레톤 기병이 하늘을 향해 뿔피리를 불고.

뿌우우우우우-!!

스켈레톤 기병대가 하늘을 향해 진격해 나갔다.

설마 돌격에 돌격으로 응수할 줄이야, 삼사자 군단 진영에서 동요가 일어난다. 그러나 기병대라는 병과가 그렇다. 쏘아진 총알처럼 일단 방아쇠를 당기면 돌이키기 힘든 법.

“모두 정신 차린다!”

“우리는 삼사자 군단. 이 나라를 대표하는 창이다!”

“깃발을 세워라. 방패를 들어라. 창을 겨눠라!”

“언제나처럼 우리는.”

“승리한다!”

서서히 좁혀지는 양측.

삼사자 군단 vs 스켈레톤 군단.

하늘을 양분하는 두 기마대가.

이 자리에서.

충돌한다.

우당탕탕-!!

콰직! 콰지지직-!!

뼛조각이 비산한다. 쇳조각이 뜯겨 나간다.

충격에 역소환당하는 스켈레톤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삼사자 군단도 무사하지 못하다. 선두에 섰던 페가수스가 핏덩이가 되어 땅으로 추락하고 있다.

혼란 속에서 삼사자 군단 진형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두! 착검!!”

“난전에 대비하라!”

본래 삼사자 군단은 상대 진형을 일점 돌파, 적의 진형을 분쇄하는 게 주특기다. 그 덕에 그들은 언제나 일방적인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고, 영국을 대표하게 만든 힘이었다.

그런데.

이게 막혔다.

그것도 정면 승부에서.

발이 멈춘 페가수스.

기동력을 잃은 기병대는 죽은 기병대다. 전투력이 급락하고, 스켈레톤 군단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비록 첫 격돌에서 삼사자 군단에게 밀리며 판정패를 당했지만, 어쨌든 저들의 발을 멈췄다. 이제 전투 양상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난전이 됐고, 언제라도 숫자를 보충할 수 있는 스켈레톤에게 난전은 장기나 다름없다.

키에에엑!

팬텀 스티드가 귀곡성을 내뿜었고, 전장 이곳저곳에서 스켈레톤들이 다시 소환됐다.

스켈레톤이 검을 내지른다. 선혈이 튀었다.

삼사자 단원이 방패로 내려친다. 두개골이 부서졌다.

창을 내지르자, 아래로 추락하는 인영. 그 옆으로 파괴된 스켈레톤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상처 입은 단원의 몸에 페가수스의 치료 마법이 깃든다.

반대로 스켈레톤 쪽은 팬텀 스티드의 사기(死氣)를 받아 강화된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전투.

산 자와 죽은 자의 격렬한 전장이었다.

그리고 이 난전의 승자는 삼사자 군단.

성 속성 아티팩트로 전원 무장한 것이 주요했다. 무기의 힘으로 근소하나마 우위를 가져간 그들은 파죽지세로 스켈레톤 군단을 부숴 갔고, 어느새 확실한 우위를 잡게 된다.

확연히 적어진 숫자가 체감되어서일까.

삼사자 군단의 사기가 고조되며, 다시 그들의 기세가 살아난다. 단장은 기세를 몰아 팬텀 스티드의 목을 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진격! 힘내라! 승리가 눈앞이다!”

하지만 너무도 힘겨웠던 전투 탓에 잠시 이들이 망각하고 있는 사실.

그들의 상대는 여기 이 스켈레톤 군단이 아니라…… 박기혁. 지금은 아그네스 리차드인 마왕이다.

짝짝, 박수를 치고 있는 여기 이 남자란 말이다.

“제법이야.”

오랜만에 재미있었어.

박기혁이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치열했던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가로운 모습.

실제로 그는 눈곱만큼도 긴장하고 있지 않다. 저 정도에 쫄리기에는 지금 자신이 가진 패가 너무너무 많다.

여흥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말.

“그래도 즐겁게 해 줬으니까.”

나도 진심을 좀 보여 줄까.

박기혁의 발밑으로 내리깔리는 검은 연기.

이 연기 밑으로 육망성 마법진이 그려진다. 연기에 마법진을 숨기는 연계. 정체가 탈로 날까 한 눈속임이었지만 그래도 효과는 꽤 괜찮았다.

꾸욱.

지면을 발로 누르자.

광활했던 대지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연기 사이로 스멀스멀 촉수가 솟아오르더니, 파아앗! 지면을 뚫고 솟구치는 촉수 더미들.

빌딩보다 더 큰 크기의 촉수가 세워지고, 그 촉수의 표피에서도 끝도 없이 많은 촉수들이 증식하고 또 증식하고 있었다.

거의 빌딩만 한 크기의 촉수 더미들.

한창 전투 중이던 삼사자 군단이 그 압도적인 위용 앞에 얼어붙었다.

“오랜만이다.”

박기혁의 오랜 친구.

‘허무 심연충’ 등장.

“전에 내가 말했던 거 있지. 그거 들어주마.”

허무 세계 제일 밑바닥에서 영원이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뭘까.

자유다.

박기혁은 지금 허무 심연충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거다.

거인이 공간을 열었다. 심연의 저편, 창살에 매달려 울부짖는 영혼들이 보인다.

이제껏 그에게 잡혀,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통받던 제물들. 그들이 죽여 달라 절규하고 있다.

딱 3분의 1을 뚝 떼서 허무 심연충에 심어 넣었고.

“자, 새 몸이다.”

박기혁의 눈에 귀기가 번뜩이는 순간.

빛이 사라진다.

음영이 없어지고.

시간이 정지됐고.

경계가 희미해졌고.

마지막에는, 세계가 점멸한다.

그렇게 찰나의 어둠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회백색 나무 지팡이.

신기

허무

虛無

“마음에 들어?”

지팡이 ‘허무’가 우우웅- 음차원 마나를 풍기며 좋아했다.

“그럼.”

첫 번째 명령.

“저들, 지워.”

지팡이 끝이 삼사자 군단을 가리킨다.

부르르 몸을 떨며 뱉어 내는 한 줄기 검은 섬광. 매직 미사일로 오해할 만큼 작은 크기의 섬광이 창공을 가로질러 삼사자 군단이 싸우고 있던 전장 위에 도착했다.

그 순간.

전장이 어둠에 삼켜졌다.

시동도, 연계도, 일말의 조짐도 없이 즉시.

그 즉시 소멸된 것이다.

“정리 끝.”

그럼 다음 도시로 가 볼까.

박기혁은 휘파람을 불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   *   *

의문의 습격자가 스스로를 복수자라 말한 지 불과 며칠.

영국의 세 개 도시가 초토화됐다. 하루에 하나 꼴로 사라지는 도시.

마실 물이 없다.

그렇다고 이동하자니 길도 차도 부서졌다.

인프라가 무너지며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시민들부터 살려야 합니다!”

“물이 시급해요. 식수도 식수지만 오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요.”

도시가 붕괴, 봉쇄당한 상태.

시민들을 구해야 한다.

영국 정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발 빠르게 구조대를 보내는데.

“오, 신이시여…….”

“이…… 이게.”

도로가 있어야 할 길에 진흙 구덩이가 있다.

차로 지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질퍽질퍽한 진흙탕.

‘복수자’는 도시의 길뿐만 아니라 도시로 이어지고 있는 길 전체를 완전히 못 쓰게 만든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아공간 주머니에 짐을 잔뜩 채워 인원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장비가 못 들어가는 만큼 수도 시설의 재건은 꿈도 못 꾸는 상황.

여기에 복수자에 의해 몇 개의 도시가 또 붕괴되자.

시민들의 인내심은 점차 한계에 다다른다.

“제기랄! 난 이렇게 못 살아. 대체 한 명도 못 잡고 뭐하는 거야!”

“기사는? 마탑은? 삼사자 군단은? 가디언은?! 누가 제발 설명 좀 해 줘.”

그리고 삼사자 군단이 전멸했단 소식이 알려지자.

혼란은 극에 달하게 되는데.

“정부는 이 참혹한 결과를 해명해야 한다!”

“개 같은 놈들아! 그렇게 세금을 뜯어가더니 결과가 이거야?!”

들끓는 불안에 미쳐 날뛰는 영국.

모든 게 박기혁의 의도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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