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명가의 마왕님-202화 (202/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202화>

내 새끼들이 습격당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적에 맞섰고, 10살의 어린 나이에 죽고 죽이는 혈투에 발을 내디뎠다.

어린것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변명 따윈 하지 않겠다.

모두 내 잘못이다.

대비가 부족했고, 경계를 게을리했다.

무엇보다, 공포가 모자랐다.

고작 도시 하나 지웠다고 기고만장해져서, 나와 내 주변 인물들은 건들지 않을 거라고 착각했던 거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데…….

항상 입으로는 평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해 놓고선, 정작 나 자신은 일상의 행복에 취해 있었구나.

하…….

화가 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잘못은 고치면 된다.

부족했던 것들을 고치고, 게을렀던 자신을 채찍질하면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포를 영혼에 각인시켜 줘야겠지.”

내 주변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공포를, 내가 직접 이 손으로 뼛속 깊이 새겨 주마.

각오해라.

*   *   *

백색의 공간.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박기혁의 눈이 차갑게 번뜩인다. 소름 돋게 차가운 눈. 인간으로서 느껴져야 할 감정 자체가 사라진 눈이었다.

그리고 이런 박기혁의 시선에 한 남자가 비친다.

“이야기를 시작하지.”

남자의 정체는 프로토.

걸레짝이 된 프로토였다.

사지가 기형적으로 비틀려 있고, 관절이 있는 부분에는 흉측하게 뼛조각이 드러나 있고, 갈비뼈도 멀쩡하지 않은지 배도 울퉁불퉁 흉측하게 튀어나와 있다.

이쯤이면 숨을 쉬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프로토는 키득키득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모습. 그 웃음에는 ‘고작 이 정도로 나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냉소가 스며들어 있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냐.”

“지금부터 네가 얼마나 협조해 주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어이구, 무서워라. 하고 싶은 거 다해 봐. 고문부터 하는 게 어때? 손톱도 뽑고, 눈도 뽑고, 머리도 갈라 보고, 기억도 뽑는 거야. 흐흐. 승자잖아? 승자의 권리를 누려 봐.”

“…….”

고문.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으로 상대의 정신을 궁지로 몰고, 원하는 바를 얻는 작업.

정보를 빼내는 데 이보다 효율적인 방법은 드물다.

다만, 이 또한 ‘고통’을 느낀다는 조건이 성립해야 가능한 일.

이 녀석은 해당 사항이 없다.

“같잖은 소리 하지 마라. 육체는 거죽으로 달고 다니는 녀석이.”

“흠, 눈치챘구나? 재미없네.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닌 것 같더니 단번에 알아챘어.”

이렇게 걸레짝이 되어 있어도 프로토는 태사자의 분신이다.

명색이 상위 존재의 힘을 각성한 만큼 마음만 먹으면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것쯤은 가능하단 말.

물론 박기혁쯤 되면 분리된 정신과 육체를 강제로 이어 고문하는 방법도 있지만…….

관뒀다.

계산이 맞지 않으니까. 이 녀석이 저지른 죗값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응징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몇 가지 질문을 할 거다. 답을 하는 것은 네 자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언하자면, 웬만하면 답하는 게 좋을 거다. 난 지금 화가 아주 많이 났거든.”

“훗. 무서운데? 어디, 들어나 보지.”

“처음은 간단하게 가마. 너 태사자랑 무슨 관련 있냐.”

보통은 이름이나 정체를 묻겠지만 박기혁에게 그딴 정보는 하등 필요 없다. 막말로 얘 이름이 프로토인지, 프로틴인지 알게 뭔가. 진짜 흑막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태사자? 태사자면 수호령이잖아. 전혀 모르겠는데.”

“모르긴, 네게서 수호령의 존재가 느껴지는데.”

“음, 안 통하네, 왜 콕 집어 태사자야? 다른 수호령도 많잖아.”

“혀가 길군.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받아들이겠다.”

“대화 예절이 엉망이군. 쯧.”

녀석이 태사자와 연관이 있다는 근거를 대려면 수십 가지는 말할 수 있지만, 박기혁은 굳이 이 녀석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다음. 황룡은 무슨 이유로 이번 일에 협조했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아까는 태사자였고 이제는 황룡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도 될까?”

“아니, 묻지 마.”

“저런, 냉정해라.”

“마지막. 이번 테러 목적이 뭐지?”

“음…… 일관적인 게 좋겠지. 이번에도 노코멘트.”

“그래, 잘 들었어.”

굳어 있던 박기혁의 표정에 균열이 생긴다.

그건 웃음이었다.

차가운 웃음.

애초에 순순히 말해 줄 거라 생각지도 않았다. 그래도 혹여나, 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 일말의 자비를 베풀었는데.

“고맙다. 마음 놓고 조질 수 있게 만들어 줘서.”

짝짝.

박수를 치자, 허공에서 시계가 생성된다.

시침과 분침이 달린 시계.

‘그 시계는 뭐지?’라고 프로토가 물어보지만 박기혁은 대꾸 없이 시계를 잡고서 기다란 손가락을 세워.

도르륵- 도르륵-

시침을 돌렸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게.”

옛날 옛날에 한 생물이 있었다. 박쥐의 날개와, 도마뱀의 몸통, 뱀의 머리를 가진 ‘드래곤’이라는 이름의 상위 존재.

“드래곤. 한때 ‘거인’과 함께 세상을 지배했던 존재지. 어쨌든 이딴 건 알 필요 없고, 이 드래곤이라는 생물이 상위 존재답게 더럽게 오래 살아요.”

드래곤은 유아기인 해츨링만 500년이다.

“근데 생각해 봐. 이렇게 오래 살면 지루하지 않을까? 유희도 몇 번이지, 익숙해지면 덧없어져. 오랜 기간 수면에 들기도 하지만, 역시나 이것도 드래곤의 삶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하고.”

우리가 아는 드래곤의 파괴력을 지니려면 최소 2000살은 되어야 할 정도다. 박기혁에게 얻어터진 수호령 레드 드래곤이 딱 이 수준.

“게다가 이 드래곤이 상위 존재답게 머리가 엄청나게 좋아. 거의 초 단위를 쪼개서 기억할 수 있어. 그런 머리로 거의 1만 년 이상을 사는 거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드래곤은 아니다.

“어떻게 될까?”

결론만 말하자면, 망가진다.

허무함에 함몰되어 자신의 존재를 강제로 망각한다. 그렇게 완전히 지성을 상실한 드래곤은 괴수로 돌변하고, 분노로 주위를 멸한다.

누구인지 알겠나?

맞다.

악룡 타일루스.

제국 시절 박기혁을 죽인 악룡 타일루스는 기나긴 세월의 허무함이 만들어 낸 재앙인 것이다.

“이 공간은 내가 만든 공간이다. 여기서 1000년은, 밖에서 하루지.”

만화에서는 이런 공간에서 수련을 하고 강해지는 것 같은데, 박기혁의 ‘거인’ 내부에 만들어 낸 공간답게 그 정도로 친절한 기능은 없다.

그냥 정말 생짜로 시간만 죽이는, 영혼의 유배지였다.

“너는, 네가 상위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도르륵- 도르륵-

돌리던 시계가 딱 멈춘다.

“이제부터 시험해 보마.”

어디 1000년만 견뎌 봐라.

1000년의 지루함을 견디고도 이런 뻣뻣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때는 인정해 주지.”

시계를 허공에 걸어 두고는 모습을 감춘다.

프로토 혼자 남은 공간.

오로지 백색뿐인, 무의 공간에서.

똑딱.

1000년의 시계 바늘만이 돌아가고 있었다.

31,536,000,000…… 31,535,599,999……

*   *   *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자, 익숙한 향기가 난다.

“녀석은. 처리했어?”

예상대로 진유리였다.

“제주도는 어떻게 하고 왔냐.”

“애들이 위험한데 제주도가 문제야.”

이스마일의 호출에 반응해 학교로 오기 전까지, 우리는 한창 제주도를 점거한 테러리스트를 소탕하고 있었다.

하늘길을 무력으로 뚫고 있었지.

나까지 빠졌으니 겨우 하루 만에 소탕은 불가능.

즉, 그냥 내뺐다는 말이네.

“나도 없는데 너까지 없으면 전력 손실이 심각할 건데.”

“몰라. 내 알 바야?”

“말은 하고 왔어?”

“급하게 와서.”

“잘하는 짓이다.”

“넌 말을 해도…… 나도 놀랬단 말이야!”

놀랬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니었나 보다. 확실히 안색이 좋지 않다.

나는 진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애들은 봤어?”

“자고 있는 거 보고 왔어. 많이 안 다쳤지?”

“봤다며.”

“휴…… 심장 떨려서 자세히는 못 봤잖아. 괜찮은 거 맞지? 어디 심하게 다치거나…….”

“괜찮아. 말끔해.”

물론 이런저런 자상이나, 뼈에 금이 간 거나, 인대의 일부가 찢어진 거, 과도한 마나 사용에 신체에 과부화가 왔지만.

이미 내가 치료한 뒤였다.

이제는 말끔하다.

오히려 걱정은 다른 사람이지.

“어르신들은. 나름 응급처치 해 놨는데, 괜찮아?”

“다른 분들은 안정을 찾으셨어. 정재 할아버지는 아직 의식이 없으셔. 의사 말로는 급한 고비는 넘겼다니 기다려 봐야지.”

의식이 없는 분은 아마 팔 한 쪽이 절단된 분일 거다.

상태가 심각해 급한 대로 남는 제물까지 써 가며 생명력을 보충시켰는데, 아직 회복이 덜 됐나 보다.

“나중에 한번 들러야겠네.”

“그럼 고맙고.”

“다른 희생자들은?”

“우선 아빠하고 엄마가 갔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

“도하 아저씨한테 고맙다고 전해 줘.”

대화를 이어 나가며 무작정 걸음을 옮겼고, 그렇게 우리의 발길이 멈춘 곳은 아이들의 방.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곤히 자고 있는 봄이하고 헤나가 보인다.

서로 2층에 올라가겠다고 며칠을 으르렁댔으면서, 정작 1층에서 서로 꼭 껴안고 자고 있다.

“피곤했나 봐. 잘 자네.”

유리는 작게 속삭이며 애들의 이마를 만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보아하니, 처음으로 상태를 확인하는 것 같다.

이내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안심의 한숨을 내쉬는 유리.

“다행이다. 많이 걱정했는데.”

곧이어 유리는 침대 한편에 눕더니, 애들을 꼭 껴안고는 눈을 감았다.

“너도 올래? 여기 넓어.”

피곤할 텐데 눈이나 붙이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아빠 박기혁이 아니다.

참아라.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난, 밤새 아이들을 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 갔다.

*   *   *

다음 날.

정확히 24시간이 지나, ‘시간의 방’이라고 이름을 지은 공간으로 들어서자.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드는 인간.

“아악-!!”

자칭 상위 존재의 분신이라는 놈이다.

나는 감정 없이 발을 들어 달려드는 놈을 걷어찼다.

퍽!!

“쿠억!”

나가떨어지는 녀석.

그런데 꼴이 이상하다.

어제 봤을 땐 비록 사지는 걸레짝이 되었지만 말끔한 외모에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청년이었는데, 지금 바닥에서 낑낑대고 있는 놈은 어지럽게 털을 기른 노인의 형체를 띠고 있었다.

“시공간에 매몰됐구만.”

여기는 영혼의 공간.

여기서의 모습은 영혼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저기 노인이 된 놈은 기나긴 허무에 영혼이 노화됐다는 것.

“이건 뭐, 완전히 망가졌잖아.”

한 2000년은 버틸 줄 알았는데. 상위 존재라고 떠벌리던 녀석이 겨우 1000년을 못 버티냐.

나는 벌레처럼 바닥을 기는 놈을 혐오스럽게 쳐다봤다.

“뭐든 말할게. 제발 여기서 내보내 줘. 여기 너무 춥고 무서워…….”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리네.”

나는 쓰러져 있는 놈의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여기서 요구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넌 내가 말하라면 말하고, 닥치라면 닥치는 거야. 이해했어?”

“허, 허윽. 네, 네. 알겠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놈.

어제의 그 콧대 높던 놈이랑 같은 놈이 맞는지 의심이 들만큼 아주 순종적인 자세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또 미적거리면 이 자리 바로 뜰 거야. 그럼 넌 또 이 공간에서 혼자 벽을 보며 대화해야겠지.”

“뭐든 말하겠습니다! 준비됐어요!”

“그래, 올바른 자세야. 그럼 시작해 볼까. 너 태사자랑…….”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자신을 태사자의 분신, 프로토라 칭한 놈은 분신이라는 말답게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태사자가 인간의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힘을 ‘분신’에 넣어 키운다.

이때 권속의 계약을 황룡이 시작했다는 정보도 말했다.

이 권속을 흡수해 분신들을 강제로 성장시키는 것. 프로토는 그 첫 번째 시험작이었고, 불과 3년 만에 성인의 육체를 완성하게 된다.

학교를 습격한 건 에우리아의 분신 때문이란다.

헤나 말이다. 태사자와 황룡은 헤나의 존재를 탐냈고, 이를 회수하기를 원한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전에 우리 집에 쳐들어온 놈도 황룡의 끄나풀이란 거지.

이밖에도 정작 이놈이 한국으로 온 건 올리버가 가진 ‘불가사의’를 탐내서였다거나, 무림맹의 숨은 칼이라 불리는 ‘귀영대’가 이번 테러의 한 축이란 것이나.

여러모로 더럽게 엉킨 관계였다.

어쨌든 정보를 얻은 난.

그 즉시 어딘가로 향했다.

“기혁 군, 이 시간에 웬일인가요. 그 검은 뭐고요.”

수호령 위그드라실.

바로 그녀에게.

“진심으로 궁금해서 왔어. 수호령 너희, 저 위에 있는 놈 말 들려?”

내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위그드라실의 눈이 좁혀졌다.

“……무슨 뜻인가요. 갑자기.”

“신의 말이 들리면 녀석이 원하는 역할이 남았다는 뜻이니까 좀 더 지켜볼 거고.”

만약 듣지 못한다면.

“관찰자 주제에 선을 넘었으니…… 처맞아야지.”

그 순간.

몸을 일으키는 거인.

대검을 치켜들었다.

“빨리 말해. 들려, 안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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