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200화>
불이 꺼진 방.
흐트러진 차림의 황룡은 침대에 누워 권태로운 눈으로 TV를 바라본다.
- 현재 테러로 한국으로 향하는 모든 창구가 막혔…… 중국은 이 탓에 인공 정령석 수입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 당의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오래도록 가지 않을 거라 예상했습니……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압되고 있으며 현재 시각, 테러리스트 잔당은 제주도를 점거한……
수호자 적봉을 죽이며, 자신들을 복수자라 천명한 테러 집단.
그러나 시작만 당당했을 뿐, 한국은 혼란을 수습하며 발 빠르게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고 있다는 뉴스였고, 마지막으로 ‘중국도 이런 테러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라는 앵커의 인사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어두운 방에 한 줄기 빛이 비친다.
하얀 빛 속에서 걸어오는 나체의 여인.
“무엇을 보시나요.”
중국 최강의 무인이며, 무림맹주인 여인.
동시에 당 내부에서도 영향력을 발휘, 관과 무림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진정한 일통을 이룬, 옵티멈의 김연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여인.
중국은 여인에게 존경을 담아 부르니.
至, 지극히. 尊, 존귀하다.
지존 난설.
여인의 정체였다.
“아…….”
난설은 TV를 보며 탄식을 터트린다.
테러가 순조롭게 진압되고 있다는 소식인데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 저기에 자신이 만들고 스승님이 가르친 ‘귀영대’의 일부가 참여했다는 사실이 생각난 거다.
‘멍청한 자식들.’
시간도 벌지 못하다니.
난설은 속으로 이를 갈며 침대 위로 올랐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됐다. 겨우 이 정도로 위그드라실의 영토가 흔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을 번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황룡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난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제주도 쪽에 자리 잡은 아이들은 오래 버틸 거예요. 우리 쪽 군대도 움직였으니, 저쪽 병력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거고요.”
주절주절, 두서없이 변명하듯 뱉어 내는 난설.
아마 이 모습을 누군가가 봤다면 기겁했으리라. 그 난설이 볼이 붉히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고?
평소의 난설과는 180도 반대의 모습이다.
그때, 황룡이 손을 든다.
“됐다. 굳이 변명할 필요 없다.”
“……뒤처리는 깔끔하게 할게요.”
“…….”
답이 없다.
잠시나마 난설의 눈에 우울함이 깃든다.
실망한 게 분명해.
난설에게 황룡은 부모였고, 지아비였으며, 이 세상 전부다.
그런 황룡을 실망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상처.
벌을 받아야지.
지금 이 순간, 귀영대의 사망이 확정됐다. 어떤 식으로든 난설은 스승님을 실망시킨 귀영대를 죽일 것이다.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이게 난설이 황룡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이라도 인원을 더 투입하는 게 어떨까요.”
“어떻게.”
“방법이야 많죠. 귀영대를 더 투입해서 제주도 쪽을 지원해 줘도 되고, 아니면 본래 목적인 ‘에우리아의 분신’을 확보하는 곳에 투입해도 되고요.”
“그 건은 태사자가 맡기로 했다.”
“그래도요…….”
“됐다.”
이 일은 태사자에게 모두 넘긴 상황. 황룡이 더 나설 필요는 없다.
“태사자는 심계가 깊고 계산적이다. 녀석이 움직였다면 일을 성공시킬 확신이 있단 말이겠지.”
음흉하기로 유명한 태사자의 분신이 갔다고 들었다. 이름이 ‘프로토’였던가.
굉장히 무성의한 이름이다.
여하튼 녀석이 태사자의 분신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원하는 바를 쟁취할 거다.
그 옛날,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마법의 나라였던 영국을 ‘기사의 나라’로 바꿨던 것처럼…….
“우리는 과실만 챙기면 된다.”
황룡이 TV를 끄고는 난설을 안았다.
* * *
수호령은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른 만큼 자신 있어 하는 분야도 다르다.
일례로 한국의 위그드라실은 ‘수호령은 철저한 방관자여야 한다.’라는 가치관만큼이나 마법, 정령, 주술. 그리고 진법처럼 일정 영역을 지키는 방어 기술이 탁월하다.
인간을 사랑하고 가여워하는 에우리아는 ‘집단 지성’과 ‘충술’을 이용해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력을 끼쳐, 아프리카 연합을 세워 분쟁을 막는 데 힘썼다.
황룡은 무공을, 미 동부의 기간트가 ‘알파 기어’를, 미 서부의 레드 드래곤이 ‘인공 정령’을.
이처럼 각 수호령은 자신만의 능력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태사자의 능력은 뭘까?
이 질문을 영국에서 하면 백이면 백, ‘기사도’라고 말한다.
마탑이 득세하던 영국에서 기사를 부흥시켰으니까. 이를 증명하듯, 태사자는 공식 선상에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채로 등장한 적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사람은 당연히 태사자가 기사라고 여겼다. 갑옷으로 무장하고, 검을 든 채, 용맹하게 적진으로 전진하는 기사.
그래서 종종 기사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데.
하지만 말이다.
놀랍게도 태사자의 능력은 ‘기사’랑은 전혀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가 멀리한 ‘마법사’에 가깝지.
태사자의 분신, ‘프로토’가 걸음을 옮기며 ‘주문’을 외웠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개연성을 무시하는 힘.
데우스 엑스 마키나.
태사자가 만들어 낸, 오직 태사자만을 위한 마법 주문.
박기혁이 이걸 봤다면 ‘여기도 고유 마법이 있었네?’라고 말했을 거다.
그렇다.
태사자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 고유 마법이 인간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경계했다.
인간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점점 수호령에게 기대지 않을 테고, 종국에는 입장이 반대가 되겠지. 그래서 태사자는 ‘마탑’을 자신의 손안에 가둬 이 힘을 숨겼다.
당시 마탑은 세계 마법의 큰 축을 담당하던 곳.
태사자는 이 마탑을 점거하여 인간의 마법 수준을 임의로 제어해 온 것이다.
산 위로 겹겹이 마법들이 세워졌다.
환상 마법으로 눈을 가리고, 동서남북에 탑이 세워지며 외부의 침입은 물론이고 내부의 탈출을 막는다. 이것도 모자라 산 전체를 돔 형태의 장벽으로 막아 버렸다.
이렇게 외부와 내부를 분리하고는.
사냥개를 푼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사자병
마나가 요동치며 흙이 뭉친다.
꾸물꾸물, 슬라임처럼 꿈틀대던 흙뭉치는 곧이어 사자로 변해 있었다.
백수의 왕인 그 사자 말이다.
사자 떼가 산을 따라 맹렬히 질주했다. 프로토는 검을 뽑으며 가장 가까운 사자의 등에 올라탔다.
곧이어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인간.
용호 재능 교육관의 선생님이었다.
“전부 대피시켜! 현수야 넌, 교장 선생님 부르고!”
“선생님은…….”
“난 시간을 끌게. 빨리 가!”
용호 재능 교육관은 초인을 길러 내는 곳인 만큼 교사진들도 초인들이 많았다. 남자도 한때는 현역으로 유명했던 사람이고.
하지만.
“커헉!”
상대는 태사자의 능력을 이어받은 존재다.
단칼에 남자가 두 동강 난다. 롱소드에 척추까지 깔끔하게 베인 것이다.
“인간 주제에, 어디서.”
아버지 태사자는 그랬다.
인간은 자신들에게 복종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복종하기 위해…… 이 말인즉, 노예란 뜻 아닌가.
주인에게 저항하는 노예는 처형이다. 내 세상에 노예 혁명은 없다.
프로토는 가차 없이 죽였다.
사자 떼가 사람들을 덮쳤다. 평화롭던 학교에 사자의 송곳니가 틀어박혔다.
폭력과 굉음, 고통과 비명.
참혹한 학살의 현장.
프로토는 자신을 막던 초인들의 비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순조롭다. 이대로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고, 흔적을 지운다. 그리고 목표물인 ‘에우리아의 분신’을 회수하면 된다.
그렇다면 탈출했던 권속은? 기이한 마나로 아버지의 흥미를 끈 그 녀석은 회수하지 않을 생각인가.
설마, 그러겠나.
프로토는 태사자의 분신이다. 그는 다 계획이 있다.
본래 분탕질로 시간을 끌며 그 특이한 ‘권속’의 위치를 찾으려고 했지만, 박수혁이라는 놈을 비롯한 수호자들이 테러를 너무도 손쉽게 정리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플랜B
‘박봄이라고 했지.’
박기혁의 딸을 납치해, 인질을 교환하면 된다.
실로 완벽한 계획.
이쯤이면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할 거다. 그렇다면 다른 ‘동생’들을 제치고 자신이 앞서나가겠지.
프로트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가 놓치고 있던 사실.
이곳 용호 재능 교육관의 용은 진룡을 의미하고, 이곳에는 진룡가의 원로들인 ‘아룡원’의 인원이 투입됐다는 점이다.
“모두 마법 전개.”
앱솔루트 실드
Absolute shield
우윳빛 돔 형태의 마나 막이 학교 본관을 감쌌고, 사자들이 머리를 박고는 발라당 뒤로 나자빠졌다.
그냥 실드가 아니라, ‘탄성’을 추가하며 방어력을 극대화한 실드.
몇 번의 시도를 해도 같은 결과여서일까? 수백 마리의 사자 떼가 으르렁대며 실드 주위를 둘러싸고 잠시 숨을 골랐다.
잠깐의 대치 상황.
잠시 뒤, 그들의 주인인 프로토가 등장한다.
가로막고 있는 노인들을 본 프로토.
잔뜩 인상을 찌푸린다.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던 일이 번거롭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누구지?”
프로토의 물음에 대표가 나온다.
용호 재능 교육관의 교장이자, 한때는 운룡대주 자리에도 있었던 진성재였다.
“우리 쪽에서 물어야 하는 게 순리 아니겠나. 이곳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곳일세. 무슨 목적으로 이곳을 습격했나.”
“회수해야 할 인간이 있다.”
“저런…… 납치범이었군.”
노인들의 뒤에서 혀를 차며 수근대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이 말세라며, 젊은 놈이 흉악하다며, 대체 부모가 누구기에 자식 교육을 저따위로 시켰을까, 그래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을까 부끄러워서.
제 딴에는 작게 말하는 것 같은데.
다 들린다.
오히려 조용해서 더 잘 들린다.
“이 자식들이…….”
“말버릇도 심하구먼.”
“닥쳐라!”
“이런 이런. 예의가 없는 건지, 교육을 못 받은 건지, 그렇지 않으면 본성이 쌍놈인 건지. 여하튼 답이 없어요.”
“이익!”
이제껏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노골적인 험담에 프로토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그가 어딜 가서 이따위 취급을 받아 받겠나.
인내심이 끊겼다.
프로토의 가면 뒤로 금발의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이를 본 진성재가 소리 질렀다.
“온다!”
포위 중이던 사자들이 하늘로 날아오더니, 다시 변화를 이룬다.
검.
기본형 검, 롱소드였다.
수백 자루의 롱소드가 일제히 학교를 가리키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레이저
일직선상에 있는 모든 것을 지워 버린다.
방어 마법들이 실시간으로 모습을 감춘다. 그나마 있는 것도 겨우 몇 번의 저항이 전부.
시간이 없다.
진성재와 노인들이 일제히 부채를 펼쳤다.
‘실력 차는 분명하다.’
‘반격은 불가능.’
‘무조건 막아서 시간을 끌어야 해.’
노인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마법을 전개, 방어 마법을 연속으로 세웠다.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대결이 이어졌다.
숨 막히는 대치 상황. 서로의 마나를 담보로 한 소모전.
그리고.
이 싸움에 먼저 마음이 급해진 건 프로토였다.
“젠장! 노예 자식들이!!”
신속하게 목표를 회수해서 ‘공간 도약’으로 벗어나, 마련해 놨던 신분으로 한국을 뜰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노인네들한테 발이 묶였다.
벌써 40분이 넘었다.
지금도 한참은 늦은 시각. 조금만 더 있으면 돌이킬 수 없었다.
한계에 부딪친 프로토는 결국.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되는데.
오른손으로 왼팔을 잡더니.
제 팔을 뽑았다!
푸쉭-!
피가 튀고.
진성재와 노인들이 놀라는 순간.
프로토가 제 팔을 담보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전개한다.
권속 소환
뿌연 연개와 함께 등장한 것은.
권속.
이제껏 프로토가 삼킨 ‘권속의 계약’들의 대상들이다.
남녀노소, 허름한 환자복을 입은 인간들.
팔까지 뜯어내며 소환한 게 겨우 인간들? 진성재와 노인들이 의문을 가지는데.
이때가 그들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권속들이 달려가는데, 실드를 통과한다.
마나가 완전히 소멸된 육체. 그렇기에 마법을 무시한다.
그 대가로 자아와 자유를 빼앗겼지만, 프로토가 그딴 걸 신경 쓸 리 없었다.
아이를 닮은 권속이 실드를 순식간에 통과해 노인의 몸을 덮쳤다. 기껏해야 10살 정도 되는 아이. 고사리만 한 손으로 노인의 어깨를 잡아채는데.
쿠직-!
뜯겨나갔다.
“크으으윽-!!
이 권속들은 이미 육체적으로 가공된 권속들.
괴력을 뿜어냈다. 마법 무시에 괴력.
그렇다. 지금 이 권속들은 가히 열화판 ‘거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제깟 놈들이 막을 수 있나.”
아버지께서 무려 ‘수호령’을 상대하려고 만든 것인데.
격이 다르다. 때문에 인간 수준의 기술은 저 권속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진성재와 노인들, 어떻게든 버텨 보고 있지만 이미 한계였다.
프로토는 잘려진 어깨에 회복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곧 있으면 실드가 무너질 거라 믿으며 옷을 정리했는데.
그 순간.
들려오는 외침.
“선생님들을 놔줘!”
앙증맞은 목소리와 함께 하얀 검기가 권속을 지나쳤다.
저기 아이가 내보낸 검기인가. 제 키만 한 대검을 휘둘러 저항해 본 모양인데…… 노력은 가상하다만, 소용없다.
프로토는 코웃음을 친다.
“풋. 소용없다. 인간의 기술으…… 응?”
싹뚝?
잘려 나가는 권속.
다리가 두동간 난 채 무너졌다.
“이게 무슨…….”
그때, 들이닥치는 창이 또다시 권속을 찔렀다. 한 방에 녹아내리는 권속.
검과 창을 든 아이.
인간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규격 외의 존재를 무너트릴 수 있는, 같은 규격 외의 인간.
박봄과 박헤나였다.
“좀 있으면 아빠 올 거야.”
“알아.”
그때까지만.
두 아이가 무기를 잡고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