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명가의 마왕님-195화 (195/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195화>

촤륵-!

날아드는 채찍에 살점이 터지며 핏물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피가 다른 상처의 피딱지 위를 적신다.

이미 가득 차 있는 상처들. 단단해 보이던 등짝은 이미 걸레짝이 되어 있다.

이 무자비한 폭력이.

가디언 ‘루’가 당하고 있는 체벌이었다.

촤륵-!!

“…….”

실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영국을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가디언이건만, 강제도 아니라 스스로 무릎 꿇었다는 것도 웃긴데, 일말의 저항 없이 채찍을 받아들인다니?

이 무슨 질 나쁜 농담인가.

촤륵-!

하지만.

이 존재에게는 그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가디언의 스승이자 주인, ‘태사자’니까.

주인이 내린 임무를 다하지 못한 죄. 이는 벌받아 마땅하다.

촤악-!!

마지막 한 방울의 분노까지 분출한 태사자가 숨을 몰아쉬며 채찍을 손에서 놓는다. 나동그라진 채찍 위로 붉은 핏물이 기분 나쁘게 흘러내리고……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루야.”

“네, 주인님.”

“내가 네게 내린 임무가 무엇이냐.”

“아이를 주시하다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 그 아이는 중요한 실험체였어. 만약 황룡과의 대담이 잡혀 있지 않았다면 내가 직접 관리할 만큼 아주 중요했단 말이다. 그래서 네게 특별히 주시하라고 했건만!”

“죽여 주십시오…….”

루가 철퍽, 핏물 위로 무릎을 꿇었다.

태사자는 그 모습에 짜증이 왈칵 솟는다.

만약 눈앞의 멍청한 놈을 죽여 그 특별한 아이가 손에 들어온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였겠지만, 이미 실험체를 놓친 뒤잖나. 지금 죽여 봤자 소모품이 하나 없어지는 것뿐이었다.

“일어나거라.”

태사자의 명령에 루가 벌떡 일어섰다.

“네 입으로 말해 보거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고작 아이 하나 ‘회수’하지 못한 거지?”

루는 굴종하는 것처럼 머리를 공손히 숙인 채 답한다.

“임무의 실패 요인은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대상의 아버지가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이미 들었다.

몸을 혈액으로 변화시키며 잠입, 은신은 물론, 신체 변형까지 한다는 것.

객관적으로 보자면 은신, 잠입, 요인 보호, 암살 같은 부분에서는 루보다 뛰어났다. 그러니 삼사자 군단과 루의 포위망을 뚫고 공항까지 간 것이겠지.

태사자는 루가 한층 더 한심해 보였다.

“정체는 아직도인가?”

“업데이트된 리스트상, TA(The top of Arena)의 전 멤버였던 쓰리일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그때, TA란 부분에서 태사자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에 주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던 루가 재빨리 설명을 추가하는데.

“빌런 집단 The top of Arena로, 줄여서 TA…….”

“설명 필요 없다.”

이미 아는 곳이다.

그나마 이 세계에서 가장 뜻이 맞는 이가 만든 곳인데 모를 리가 있나.

‘이건 황룡에게 물어봐야겠어.’

곧바로 태사자는 다음으로 넘어가라고 말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두 번째는, 한국의 수호자와 독일의 프로이센이 개입했습니다.”

“쯧.”

혀를 찼다.

태사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프로이센이야 독일의 무장 집단이고, 영국 근처에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겠는데, 수호자는 한국이다. 거기랑 영국이랑 거리가 얼마인데!

대체 평소 보안을 어떤 식으로 관리하길래 국내에 이런 주요 인물들이 들어왔는데 관리도 하지 않느냔 말인가.

더군다나 한국은 위그드라실의 영역이다. 하필이면 가장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

다시 말해, 공식적으로 그 특별한 실험체를 손에 넣을 방법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결론이 나자, 태사자는 손을 휘저어 루의 설명을 끊었다.

“실수는 죄다. 자비는 한 번뿐이야.”

나가 봐.

한마디에 루가 머리를 조아리며 뒷걸음질로 방을 나간다.

어둠이 내려깔린 공간.

선혈이 낭자했고 바닥에는 피가 축축하게 고여 있다. 태사자는 고여 있는 피를 즈려 밟고 자리에 앉았다.

허름해 보이는 싸구려 소파.

피가 튀어 더 볼품없어 보이는 이 소파에 몸을 기대는 순간.

공간 도약

세계가 뒤바뀌더니, 태사자는 어느새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다.

그리고 눈앞의 빈자리를 보며.

까딱까딱.

손을 까딱이는 순간.

공간이 일렁이며 의자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10대 후반?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

한데 이상하다.

이 남자, 머리색을 비롯해 표정, 체구…… 심지어 몸짓조차도 묘하게 앞에 있는 태사자를 닮았다.

태사자는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 끄덕이며 손가락을 남자의 이마에 댔다.

태사자와 남자의 눈이 같은 색으로 빛나길 잠깐.

접촉을 통해 기억이 전이됐고,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온 태사자가 말했다.

“한국으로 가라.”

“Yes, my lord.”

남자가 공간을 뛰어넘었다.

*   *   *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공간.

현재 내가 올리버와 함께 걷고 있는 이 공간은 올리버의 ‘내면세계’다.

“신기해요. 제 안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너만이 아니야. 모든 인간한테는 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

왜 옛날 옛적 봄이를 구했을 때, 그 공간도 봄이의 내면세계였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의 내면세계는 확실히 독특하네.

형형색색의 빛줄기가 가득 찬 공간. 색색의 공간마다 영상이 출력되고 있다.

빨간 줄기에는 주사를 맞는 영상이, 파란 줄기에는 아빠와 이야기하는 영상이, 검은 줄기에는 간호사가 흘린 차트에서 ‘변화 없음’이라는 글자를 엿봤던 영상이 보인다.

다 요것의 기억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 세 번째 제자는 굉장히 복잡한 놈 같다.

“이거 다 네 기억 맞지?”

“네…….”

“기억력 되게 좋구만. 다 기억하고 있네.”

“별로 좋지 않아요. 잊고 싶은 것도 기억해야 하거든요.”

“책도 외울 수 있어?”

“글자 하나도 다 기억해요.”

그래서 책을 한 번만 봐도 된다며 피식 웃는 올리버.

음, 재수 없는데?

재수 없음 추가다.

“그런데, 아저씨.”

“스승님.”

“……스승님, 여기 제 내면세계는 왜 왔나요?”

“음, 왜 왔냐면. 네 병을 보여 주려고.”

올리버는 세상을 마주할 때부터 아팠던 아이다. 이런 아이는 고통이 당연하다.

절망이 익숙해지면 체념하며 나약해지는 법이고, ‘나는 원래 그렇지.’라고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한다.

그래서 나는 스승으로서 판단했다.

“고통의 실체를 직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이제 다 왔어.”

색색의 공간 한쪽 귀퉁이로 갔고.

곧이어 손가락으로 공간을 잘랐다.

주우우욱-!

천이 찢어지는 것처럼 공간이 잘려져 한쪽으로 넘어간다.

잠시 뒤 드러난 공간은, 그냥 일반적인 방이었다.

왜 은행에서 들어가는 개인실 같은 곳 있잖나. 테이블 하나 있는 다소 건조한 공간.

형형색색이었던 올리버의 내면세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올리버는 드러난 공간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게…….”

“계약의 방. 내가 임의로 지은 이름이다.”

한동안 내가 이거 찾는다고 고생했다.

권속의 계약이란 게 굉장히 교묘하게 숨겨져 있더라. 그나마 올리버가 불가사의의 근원이라 마나 색이 독특해서 망정이지, 일반 환자였으면 찾을 엄두도 못 냈을 거다.

“빨리 들어가자. 시간이 얼마 없어.”

“…….”

내 뒤를 따라 올리버가 들어섰다.

“일루 와 봐. 보여 주고 싶은 건 이거야.”

건조한 공간에 놓여 있는 테이블.

아니, 저건 테이블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굉장히 올드한 나무 탁상이었다.

그리고 이 탁상 위에 덩그러니 있는 누런 종이.

“이게 네 병, 마나 암. 아니, 그냥 말할게. ‘권속의 계약’이라는 거다.”

“권속의…… 계약……?”

“마나 암의 본질은 여기 보이는 계약이야.”

“하나도 이해 못 하겠어요.”

“음…… 어떻게 설명할까…… 아! 얼마 전에 아이들이랑 같이 본 뉴스 기억해?”

“어느 부분이요.”

“부동산.”

“네, 기억하고 있어요.”

“그거야.”

내가 적절한 예시를 못 찾아서 궁리했는데, 며칠 전에 애들이랑 뉴스를 보면서 무릎을 탁, 쳤다. 집주인이 사라진 세입자라고 보면 되나? 그러면 전세금이 날아가잖나.

이거랑 비슷하다.

“이 계약서는 권속의 계약서야. 네가 상위 존재의 권속이 되는 계약서거든. 근데, 네가 모셔야 할 상위 존재가 적힌 칸이 없어.”

“그러면 무효 아닌가요?”

“음, 안타깝게도 이 권속의 계약이란 것이 그렇게 말랑말랑하지 않아요.”

무효는 곧 죽음이다.

둘 중 하나다.

이 계약을 완전히 파기하거나, 이행하거나.

근데 파기했다간 몸도 같이 ‘파기’될 테니, 사실상 방법은 하나란 말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말하지 않았지. 안 그래도 힘든 아이인데 이런 사실까지 알 필요는 없다.

“혼란스러워요.”

“굳이 알 필요 없어. 그냥 고통을 직시하게 해 주고 싶었던 거야. 슬슬 나가자. 오래 있으면 안 돼.”

이제 끝.

올리버의 궁디를 팡팡 치며 내보낸다.

우리가 발을 딛고 조금 있자, 찢어졌던 공간이 봉합된다.

이거, 이대로 놔두면 또 옮겨 갈 거다.

난 재빨리 ‘거인’을 깨웠다. 그리고 봉합되는 통로에 마킹을 했다.

얘가 불가사의라서 일반 마나는 씨알도 안 먹히거든.

작업이 끝난 뒤, 나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양반 다리를 하고 앉자, 올리버가 눈치껏 슬쩍 내 앞에 앉는다.

난 웃으며 팡팡, 내 다리를 때렸다.

“여기 앉아.”

“……됐어요.”

“어허, 어서.”

올리버는 외로운 아이다. 이런 아이는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하며 다가가야 한다. 헤나도 이렇게 가까워졌으니까, 맞을 거다.

쫙쫙- 소리가 날 정도로 허벅지를 두드리니, 올리버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 다리 사이에 앉았다.

쏙 들어가는 게 사이즈가 딱 맞다.

“꼿꼿이 서지 말고. 기대.”

“괜찮습니다.”

곧게 허리를 펴서 내게 닫는 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올리버.

나름 녀석의 자존심이리라.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야기해 줬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니까.

최대한 무심한 듯 시크하게.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널 치료할 방법이야.”

“……!!”

놀란 올리버가 동그란 눈으로 내 쪽을 올려다본다. 반쯤 열려 있는 입은 차밍 포인트인가.

슬쩍 손가락을 움직여 입을 닫아 줬다.

“잘 들어.”

이야기에 앞서 고백하자면 아직 마나 암, 그러니까 권속의 계약을 치료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한 80년까지는 뒤졌는데, 아직 이 계약의 초기 형태까지 닿지 못했거든.

그러니 지금 말할 방법은 정확히는 권속의 계약 해결법이 아닌, ‘올리버’ 개인을 치료할 방법이라고 해야 한다.

“전에 이야기했을 거야. 내가 널 뭐라고 했지?”

“불가사의의 근원.”

“불가사의는 뭐라고 했어?”

“현상이라고 했죠.”

“훌륭하다, 제자야.”

현상은 마법의 상위 개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기적이랑 비슷한 급.

“그래서 어떻다고 했지?”

“현상이 그렇듯 번쩍이고 사라진다고 했죠.”

“똑똑해.”

불가사의는 현상을 일으키고 사라진다.

그리고 몸을 바꿔 다시 태어난다.

자, 여기서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성녀는 어떻게 살아 있을까? 성녀가 사용하는 ‘기적’도 분명 현상과 동급이라고 했는데, 왜?

그건 말이다.

“리미트가 있기 때문이야.”

“리미트요?”

“그래.”

성녀 피셜. 기적을 사용할 때 굉장히 세밀한 부분까지 컨트롤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반면 불가사의는 내기에서 지면 ‘소원’을 들어준다. 이건 리미트가 없다. 그냥 다이렉트로 기적에 꼴아 박는 거다.

이 사소한 차이가 살고 죽고의 차이다.

“분명한 제약을 걸어야 한다. 두루뭉술한 제약이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자라면 스물, 서른 개의 제약이든…… 이렇게 걸어서 리미트를 지정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근데 이게 제 치료법이랑 무슨 상관인 거죠.”

“좋은 질문이야.”

그건 바로.

“저 계약서를 네가 쓸 거니까.”

“네??”

“뜻을 생각해 봐.”

제약(制約) : 조건을 붙여 제한함.

계약(契約) : 어떤 일에 대하여 지켜야 할 의무를 미리 정해 놓고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

“비슷하지 않냐?”

“……비슷해요.”

“비슷하면 뭐? 이용할 수 있겠지!”

불가사의란 힘은 브레이크가 없는 고속 열차다. 정면을 달려가다 끝내 죽음으로 돌진하는 고속 열차. 나는 이 열차에 계약이라는 브레이크를 만들어 줄 생각이다.

물론 이러면 제국 시절 불가사의처럼 하루아침에 도시를 침몰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엄청날걸?”

나는 훌쩍이는 올리버의 머리를 남몰래 쓰다듬어 줬다.

*   *   *

지하 연구실.

살금살금 숨어 들어온 박봄.

‘들키면 안 돼!’

두근두근한 가슴을 진정시킨다.

나대지마, 가슴아! 혈족들을 총동원해 평정심을 지켰고, 존재감도 희미하게.

여기에 마법도 쓸까?

아니야. 아빠는 마왕인걸. 괜히 마나 쓰다간 걸려.

이만큼만 OK!

‘준비 끝.’

문틈을 쪼끔 열어 눈을 들이밀었다.

‘아빠가…… 아빠가…….’

저기 있다.

저기! 유리로 뒤덮인 침대 앞에!

‘또! 또!! 올리버랑 놀아!!”

박봄은 3학년이다.

10살.

이제 다 컸다.

게다가 언니다. 언니는 무릇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야 한다.

그래서 꾹 참고 있었지만, 그래도…….

‘섭섭하다구!’

부우- 불을 부풀린다.

나는 안 챙겨 주고 올리버만 좋아해.

‘안 되겠어.’

따끔하게 말해야겠어!

박봄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올리버를 노려본다.

박봄, 방년 10세. 아직은 아빠의 사랑이 고픈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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