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93화>
산군 박수혁.
최연소 수호자이자, 무결점의 검사라 불리는 그가 검을 빼든 순간.
마나의 격류가 공간을 짓눌렀다.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짓눌러 버렸다
구웅-!!
“……!!”
하늘에 떠 있던 유니콘과 페가수스가 아래로 추락한다. 탑승 중이던 삼사자 군단이 어떻게든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겨우 균형을 잡는 게 최선.
잠시 뒤, 달빛을 가리던 수많은 날개들 중.
남은 건 한 쌍.
가디언 ‘루(루 라바다:Lugh Lámhfhada)’가 타고 있는 페가수스뿐이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관망할 수 없다.
닫혀 있던 루의 입이 열렸다.
“너, 누구지?”
“박수혁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산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한국? 수호자?”
“과분하게도 수호자의 직위를 맡고 있죠.”
석고상처럼 단단했던 루의 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한국이라니…….’
한국이라면 아시아의 맹주 아닌가.
초인을 키우는 능력이나, 아티팩트 제작 기술, 게이트 공략법, 대(對)몬스터 전략&전술.
초인 분야에서만큼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나라였다
“수호자가 어째서……?”
“……거기까지 말해야 합니까?”
“말해야 한다. 넌 수호자니까.”
수호자쯤 되는 무력이라면 가히 걸어 다니는 전술핵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출입국 시 당국에 보고 및 허가를 받는 것은 필수였다.
그때 앞으로 나서는 여자.
“토미 주제에 감히 나의 배우자를 가르치려 드는가.”
“넌, 누구?”
“니나 폰 슈코르체니. 프로이센. 7기갑단장이다.”
“……!!”
유럽 내에서 프랑스와 더불어 영국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독일.
독일의 전신으로, 철혈의 군대라 불리는 무장 집단.
프로이센(Preussen).
더욱이 이름도 니나 폰 슈코르체니다. 슈코르체니라면 전설 속 ‘바이킹’을 이은 가문이다.
그러고 보니 여자의 기도가 심상치 않다. 아니, 심상치 않은 정도가 아니다. 옆에 박수혁이 있어서인지 아직까지는 얌전히 있는 것 같지만 절대 자신 아래가 아니었다.
그때, 불현듯 루의 머리에 떠오른 정보.
‘슈코르체니 가문에서 헤라클레스를 낳았다더니, 설마 저 여자가?’
여자면 발키리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닌가?
어쨌든 한쪽은 한국의 수호자이고, 한쪽은 슈코르체니 가문의 헤라클레스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상황이 꼬여도 더럽게 꼬였다는 거다.
“들으셨다시피, 배우자가 될 여인의 부모님께 인사차 들렀습니다.”
“저 여자의 집이 본국인가?”
“독일입니다. 여기서 아주 멀죠.”
“한데?”
“근처에 온 김에 유럽 여행도 했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우리 정도 되면 이렇게 외국에 나오는 게 쉽지 않잖습니까.”
“그러면…….”
“잠깐. 공문을 말하시는 거라면 이미 보냈습니다. 조사해 보시면 다 나올 겁니다.”
“…….”
루가 근처에 있는 삼사자 단장을 노려본다. 단장은 이미 정보를 확인했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책이다.
이런 중요한 정보를 놓치다니.
“제가 성실하게 답해 줬으니, 이제 당신이 제 물음에 답할 차례입니다.”
박수혁이 격납고로 고개를 까딱이며.
“왜 저희 비행기를 수색하는 겁니까?”
“……흉악범이 탈주했다.”
그 순간, 니나의 입에 비웃음이 걸린다.
“지랄.”
바이킹의 혈족을 이은 니나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
루는 현재 ‘거짓’을 말하고 있다.
니나의 입에서 거짓이 나온 순간, 박수혁이 어깨를 풀었다.
“제 배우자가 당신이 거짓을 말한다고 하는군요. 가만 보니,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면.
“싸우자는 것입니까?”
정중히 묻고 있지만, 저 말이 루의 귀에는 달리 들렸다.
제발 싸워 달라! 싸우고 싶다!
맹렬한 투기가 증거였다. 박수혁은 정말 이곳에서 칼부림을 할 생각인 것이다.
옆을 보니 니나 폰 슈코르체니도 무장을 갖췄다. 허공에 입자들이 번뜩이더니, 건틀릿이 채워진다. 그러고는 이쪽을 보며 송곳니를 세운다.
이 여자도 싸우고 싶은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이번 일은 소란스러우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처리할 거면 잡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처리해야 하는 법.
그렇지만 저 둘을 간단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둘 중 하나라면 어떻게든 무력으로 찍어 눌렀을 건데.
‘브류나크’를 들고 있었다면 이렇게 불리한 포지션은 아니었겠지.
아니! 하다못해, 최소한 대화가 되는 인간이 저기 있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지는 않았으리라.
의미 없는 정보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망이 없다는 말.
결국 루는 인내심을 보여야만 했다.
“철수한다.”
가디언의 명령에 삼사자 군단이 무기를 거둔 채,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입맛을 다시는 박수혁.
“결국 가시는 겁니까. 다행이지만…… 쩝, 개인적으로는 아쉽군요. 옛날부터 가디언과 수호자 중 누가 강할까 궁금했는데.”
니나 쪽은 한술 더 뜬다.
“하여간 토미 놈들, 간은 쥐새끼만 해서.”
뒤돌아선 루의 이마에 힘줄이 솟는다.
마음 같아선 당장 창을 던지고 싶다. 저 재수 없는 입에 단창을 꽃아 넣고 싶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그러자 들려오는 목소리.
“이걸 참네.”
“이걸 참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둘 다 개자식이고.
개자식끼리 잘 어울렸다고.
여러모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
…
가디언과 삼사자 군단이 빠지며, 공항이 빠르게 정상화된다.
방송으로 연신 비행 지연을 사과하고, 카트들이 빠르게 비행 준비를 세팅해 나갔다.
늦어진 비행기가 하나둘씩 날아오르는 가운데, 박수혁과 니나도 전용기 쪽으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반쯤 왔을 때.
“언제까지 숨어 있을 겁니까.”
“무슨 말입니까, 혁?”
의문을 표하는 니나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박수혁은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의 시선이 비행기 앞바퀴가 사출되는 틈에 머물고, 입을 열었다.
“나오세요. 만약 이번에도 나오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그 순간.
틈으로 흘러내리는 핏물.
철퍼덕.
바닥에 흘러내리더니, 스멀스멀 기어 박수혁 앞에 당도한다. 곧이어 꾸물대며 변형.
모습을 드러낸 건 남자, 존 도였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땅에 박는 존 도.
“제 아들을 살려 주십시오.”
“…….”
박수혁이 니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
잠시 뒤, 세 사람을 태운 전용기는 영국 공항을 벗어났다.
* * *
이런저런 일과 연구가 겹쳐 잠 못 이뤘던 나날들.
언제 침대에서 자 본 것인지 가물가물할 정도. 그래서 오랜만에 나의 뇌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숙면이라는 선물을.
이른 저녁, 해가 지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아이들은 유리가 데리고 나갔으니, 나의 잠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씀.
자자.
눈을 감고 잠을 잤다.
그런데, 막 잠이 들려는 그때.
우우우웅! 우우우웅-!
“아씨…… 누구야.”
짜증을 담아 폰을 보는데.
어라? 폰이 아니다.
폰이 아니라면…… 머리맡에 있는 오브를 꺼냈다.
진동음을 울리는 오브.
이거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발신자는 박수혁, 형이다.
한창 유럽 일주 중인 형이 웬일로?
이 오브는 가족 전용 통신 오브. 폰으로 할 수 없는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도구다.
설마 수혁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혹시 또 사고를 친 건?!
빠르게 오브를 켰다.
형의 얼굴이 보이고, 나는 급하게 말을 꺼냈다.
“여보세요. 형, 무슨 일이야. 또 무슨 사고 쳤어?”
- 음…… 안녕, 동생아?
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흔드는 형. 그 옆에는 깔깔깔,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은발의 여자가 보인다.
전에 사진으로 봤던 예비 형수였다.
일단 이런 건 둘째로 두고, 오브에 집중했다. 부서진 건물이나 시체는 없나 싶어서.
그 모습에 우리 형, 한숨을 푹 쉰다.
- 걱정 말렴. 사고 친 거 아니니까.
“후, 놀래라.”
내가 이런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안 그래도 내가 사고 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기서 형까지 사고 치면 우리 김연희 여사님 뒷목 잡고 드러누우신다.
아들 된 도리로서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면 왜? 갑자기 통신용 오브가 울려서 얼마나 놀랬는데.”
- 그랬니? 미안하다. 이게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소식이라.
“뭐야. 무슨 일이야.”
- 일단 봐라.
오브의 시선이 바뀌고, 거기에는 잠이 든 아이가 보인다.
붉은 머리칼에, 많아 봐야 봄이 또래의 백인 소년.
자세히 보니까 소년이 잠들어 있는 곳이 반투명한 유리관으로 덮여 있다.
저게 뭐지?
잠시 생각하는 가운데, 형이 입을 연다.
- 마나 암 환자다. 이건 마나 차단벽이고.
“아! 그래?”
어쩐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동시에 갸우뚱, 의문이 든다. 이게 비밀로 할 이야기인가?
형도 눈치챘는지, 빙그레 웃는다.
-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이 아이에게 얽혀 있는 이야기다. 솔직히 나는 감이 안 잡히거든. 그래서 널 부른 거야. 잘 들어 봐.
수혁 형은 ‘이봐요. 당신 차례입니다.’라고 말하며 누군가를 불렀고, 거기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백인에 흐릿한 인상의 미남.
근데 무슨 짓을 했는지, 온몸이 만신창이었다.
- 처음부터 말합니까?
- 아까 전 저희에게 말했던 것처럼 말해 주시면 됩니다.
- 이봐, 너. 애매하게 말하지 마.
첫 번째는 남자고, 다음은 형이다. 그리고 마지막 거친 말은 예비 형수.
흠, 뭔가 말투부터 싸하네.
아무튼, 만신창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영국의 병원에서 시작된 이야기, 마나 암을 가진 아이와 아비, 어느 날 밤 병원에서 나가는 의문의 차량, 숲으로 향함을 수상하게 여긴 아버지가 뒤를 쫓고, 불길한 연구소에 도착하게 된다.
“잠깐, 스탑.”
- 말씀하십시오.
“미안한데, 너 정확히 무슨 능력이야. 수준은 어느 정도고. 어디까지 가능해.”
이거 중요하다. 저 녀석이 무슨 능력임에 따라 느끼는 감각이 다르니까.
예를 들면 단순한 무투계 초인이나 그저 그런 육체파 초인이라면, 여기서 말한 ‘불길하다’는 그냥 기분이 나쁜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맞다.
근데 일정 수준 이상, 혹은 이런 쪽에 특화된 능력이라면 ‘불길하다’는 단순히 기분이 아닌 진짜 뭔가가 느껴지는 거다.
다행히 말이 통하는 놈이다.
이것만으로도 실력자란 소리지.
- 제 능력은 피를 다루는 능력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핏물로 변하는 남자.
“오케이. 됐어. 상당하네. 계속해 줘.”
이어서 말한다.
아버지는 불길했던 연구소를 의심한다. 그러던 중 이 연구소에서 ‘마나 암’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나 암의 정체를 아는 난, 이 대목에서 심각해졌다.
치료라고?
‘권속의 계약’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게다가 이 권속의 계약은 거의 100년 이상을 인간을 타고 다니며 자체적으로 진화한 것.
장담하건대, 이 망할 계약을 퍼뜨린 당사자가 와도 수습하지 못할 거다.
그런데 이어지는 남자의 말은 치료제를 주입받은 환자가 차도를 보였고, 실제로 그걸 봤다는 거 아닌가.
- 여자아이였습니다. 저도 익히 보던 아이였는데, 그 아이가 차단벽을 나와 가족과 부둥켜안고 있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데…….”
- 저도 보면서 이상했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보여 주려는 목적으로 연출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를테면, 짜고 치는?”
- 네, 맞습니다.
여기 이 아버지는 실력만큼이나 눈치도, 감도 좋았다.
작위적인 느낌에 검사실에 잠입한 아버지는 여자아이의 피를 검사한다. 피를 다루는 능력이 빛을 본 것이다.
그리고 알게 된다.
- 생명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말입니다.
“하…….”
알겠다.
저거, 차도를 보인 게 아니다.
‘권속의 계약’을 집행한 거였다.
회복한 것처럼 보인 것은 계약이 수락돼 마나 암의 증상이 사라진 것이며, 생명력이 사라진 것은 권속이 되며 생명력을 갈취당한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뭐, 평범하다.
아이가 끌려가기 직전 아버지가 아들을 구했고, 벗어나려고 했는데 삼사자 군단과 가디언이라는 놈들이 아버지를 추격했다는 거.
결국 공항까지 도주했지만 포위.
모든 것을 놓은 가운데 수혁 형과 예비 형수가 참전하며 저기 함께 있는 것이다.
“잘 들었어. 고생했다. 그래서, 뭘 바라는 건데.”
- 당신이 ‘마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핵심만 말하는 걸 좋아해.”
남자는 우물쭈물하다 무릎을 꿇더니.
- 제발, 저희 아들을, 올리버를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
죽으라면 죽고, 노예가 되라면 노예가 되겠으니.
제발 아들만은 살려 달라.
아버지의 절절한 부탁에 나도 가슴이 찌르르해질 정도.
- 진실. 확고한 진실이다.
- 니나가 진실이라고 말하네.
“그 정도는 나도 알겠어.”
음…….
고민을 좀 해 본다.
아직 권속의 계약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아주 더럽게 진화했거든. 하나하나 추적해서 변화를 해석해야 하는데, 이 해석 작업이 절반 정도다.
그래도.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시키는 건 가능할 것 같은데…….’
결론은.
“일단 봐야겠네. 언제 도착해?”
봐야겠다.
보고 결정해야지.
그렇게 난 얼마 뒤 공항으로 향했다.
잠은?
오늘도 포기다…….
* * *
하지만.
잠을 포기한 가치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래.
완전 있었다.
잠이 문제가 아냐!
“이, 이게 여기도 있었어?!”
“왜?”
“무슨 일입니까.”
“아니!”
나는 소년이 누워 있는 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거 ‘불가사의’잖아!’
엘더 퀸(Elder Queen), 검왕(劍王)과 더불어 제국의 전대 절대자로 손꼽히던 존재.
‘불가사의(不可思議).’
쟤가 바로 그 불가사의의 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