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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명가의 마왕님-188화 (188/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188화>

- 유리야, 아침부터 미안한데 아줌마가 부탁할 게 있어. 시간 나면 기혁이 좀 봐 주겠니?

- 아줌마가 기혁이한테 뭘 부탁했는데,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는 거 있지. 집에 애들도 있을 건데 밥은 제대로 먹나 모르겠어. 걱정되네.

- 당연하죠, 어머님. 안 그래도 들르려고 했어요. 저만 믿으세요. (하트하트 곰돌이)

*   *   *

주말의 시작을 알리듯 화려한 토요일 아침.

따사로운 햇볕이 하루를 열고, 어스름이 걷힌 산 아래로 거대한 저택, 검호가(家)가 모습을 드러낸다.

성벽처럼 우람히 솟은 담벼락.

담벼락을 따라가면 거대한 철문이 나왔다.

어림잡아도 10미터는 훌쩍 넘어 보인다. 앞에 선 것만으로도 기가 죽을 만큼 위압적인 철문.

문에는 검호가를 상징하는 호랑이가 신장처럼 그려져 있었다.

우웅- 덜컥!

문 앞에 멈춰 선 차량. 창문 틈으로 진유리의 팔이 빼꼼 나오고, 리모컨을 누른다.

틱!

간단한 알림음과 함께 열리는 문.

위압적인 철문이 미끄러지듯 양쪽으로 열리고, 차량은 그 사이로 들어간다.

처음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때부터 가슴이 쿵쾅거릴 거다.

내가 검호가에 초대받다니!!

이어서 기대한다. 이 문 안에는 얼마나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나, 이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검호가의 문이 열리는 순간 대부분 실망하는데.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열렸을 때 그들의 앞에 나타나는 풍경은.

황량한 평야.

끝.

농담 같지만 이게 끝이다.

이 정도 규모의 땅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텐데…… 꽃들이 만발한 정원은 물론이거니와 텃밭, 수목원, 인공 호수, 산책로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을 텐데…….

없다.

상쾌한 초록빛도 없을뿐더러, 싱그러운 꽃은 더더욱 없다.

그냥 녹음 자체가 전무하다.

왜냐하면, 소용없으니까.

어차피 이놈의 집구석이 심심하면 갈아엎으니까. 칼 한 번 휘두르면 꽃이며 나무며 작살 나고, 검기 한 번 뿌리면 잔디고 뭐고 갈려 버린다.

이에 우리 김연희 여사, 매번 극대노하며 ‘제발 싸움은 게이트에서 해!!’라고 호통 쳐 보지만, 당장 그때뿐이다.

말을 들으면 그게 검호겠나.

눈만 맞으면 검을 빼 드는 이 집구석에 통할 리 만무했고, 매번 가슴만 쳐 댈 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황량한 평야는 이 집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차가 들어설 수 있는 길이나마 마련된 게 다행일 정도일까.

박기혁 왈 세기말 감성이라던데.

풋, 진유리는 코웃음을 쳤다.

‘이게 감성이면 애들이 그린 그림은 예술이지.’

진유리의 차량이 차도를 오르길 잠시, 드디어 검호가에 도착한다.

어디 유럽의 궁전처럼 양쪽으로 세워진 호랑이상. 그 옆으로는 3층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그 사이로 우뚝 솟아 있는 건물.

누가 봐도 저기가 본관이라는 걸 알 만큼 압도적인 크기였다.

끼익-!

대충 주차한다.

사실 주차라고 할 것도 없다. 그냥 세워 둬도 될 정도로 공간은 많다. 대형 버스 30대가 들어와도 괜찮을 크기인데 후방 주차고 전방 주차고 뭐가 의미 있겠나.

검호 특유의 허례허식 없는 구조가 안 그래도 넓은 공간을 더 넓게 보여 줬다.

차에서 내린 진유리가 자연스럽게 위를 본다.

시선에 걸린 건 창문.

오른쪽 안쪽 3층 집. 박기혁의 집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바라보는 창문은 봄이와 헤나가 쓰는 방의 창문이었다.

역시나 커튼이 쳐져 있다.

“이 게으름뱅이들…….”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자고 있어.

보나마나 뻔하다.

“……밤늦게까지 놀다가 잔 거겠지.”

게임기를 버리든지 해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진유리가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진유리도 게으름하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여자 아니었던가.

하나, 지금은 다르다!

그때의 진유리가 아니다!

본격적으로 박기혁과 연인 관계가 된 뒤, 봄이와 헤나를 살뜰히 챙기려고 부지런이란 것을 장착한 것!

집 안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첫 번째 방.

아이들의 방이다.

문을 연다.

역시나 예상대로 캄캄하다. 밖은 태양이 인사하는 중인데, 여기는 아직도 한밤중이다.

불을 켜자, 엉망이 된 방이 보인다. 바닥에 널려 있는 장난감이 치열했던 지난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진유리가 한숨을 내쉬며 한 발짝 내딛는데, 부스럭 걸리는 것이 있다.

인형이다. 캡틴 타이거와 엔젤 드래곤이 쌍으로 누워 있다. 누가 봐도 봄이 거다.

당연하게도 근처에는 ‘자이언트 버그’도 보인다. 쟤로 말할 거 같으면 헤나의 생일날에 맞춰 등장한 캡틴 타이거의 신캐릭터다.

여러 가지 곤충으로 변할 수 있다나. 헤나가 쓰는 능력과 많이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헤나의 최애캐다.

인형들 근처에는 블록 병사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다.

왜, 기혁이가 만들어 준 전술 교육용 블록 놀이 있잖나. 마나로 움직이는 그거. 어젯밤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지 블록 병사들이 방 전체에 쓰러져 있었다.

진유리는 발에 밟힌 블록 쪼가리를 보며 머리를 꾹꾹 눌렀다.

“……내가 못 살아.”

어질렀으면 치워야지. 치우는 사람은 따로 있어?

투덜거리면서도 방을 정리하는 진유리.

정리하며 나가자, 게임기가 보인다.

전원을 끄고 자는 것도 까먹었는지 불이 깜빡이는데, 방 정리하느라 엉거주춤 바닥을 기고 있는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아, 열 받는다.

웃긴 건, 저거 진유리 본인이 선물해 준 거다.

박기혁이 장난감은 이미 많다며 딱 잘라 사 주지 않는 걸, 진유리가 ‘애들이 게임도 하고 그래야지! 사! 다 사!’라며 호기롭게 사 준 건데.

감히 네가 나를 조롱해?

열린 아공간을 향해 게임기를 내던졌다.

“너, 압수.”

샥샥, 빠르게 정리하고 차륵-! 활짝 창문을 열고, 클린 마법으로 먼지를 날렸다. 이놈의 먼지는 하루만 안 치워도 이렇게 많다.

방 안에 있는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충분히 큰 평수지만 놀랍게도 이곳은 공부방이자 놀이방이다. 침실은 따로 있다.

마찬가지로 침실은 밤중.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침대. 방 한편에 퀸 사이즈 이 층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어차피 큰 집이니까 침대를 두 개 놔둬도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애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기어코 쟁취한 2층 침대다.

‘서로 자기가 2층을 쓴다고 싸웠지.’

그런데 지금 봐라. 1층에서 함께 뒤엉켜 자고 있는 걸. 이럴 거면 2층 침대는 왜 샀니?

진짜 귀여우니 넘어간다.

버찌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박기혁과 함께 연구실에 있나보다.

그러면 이제 할 일을 해 볼까.

촤르르륵-!!

활짝 커튼을 젖힌다.

어두웠던 방이 순식간에 환해진다. 그러자 ‘우우웅.’ 칭얼대며 필사적으로 빛을 피해 머리를 박는 아이들.

베개를 찾다 서로의 몸으로 파고드는 게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더 재워야 하나.’ 진유리의 마음이 약해질 정도다.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자, 이제 더 이상 견디기 힘든지 부스스 눈을 뜨는 아이들.

“언니…….”

“아…… 줌마.”

“일어나. 밥 먹어야지. 어서.”

이마에 뽀뽀를 하며 궁디를 팡팡 때리자, 아이들이 엉거주춤 화장실로 향했다. 그 틈에 빠르게 클린 마법으로 청소하고,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아빠 데리고 올 테니까, 다 씻고 1층으로 내려와. 알았지?”

“네에~!”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번에는 지하 1층.

박기혁 전용 지하 연구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저기 또 하나의 문이 보인다.

눈부신 성과물을 낸 것치고는 지나치게 안일한 보안이지만, 괜한 걱정이다.

여기는 검호가.

적어도 한국에서 검호가에 숨어 들어오는 간 큰 놈은 존재치 않는다. 그럼에도 숨어 들어와서 걸리면?

단언컨대 시체조차 찾지 못하리라.

사람이 없을 때 들어온다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그럴 때면 이놈들을 상대해야 한다.

연구실을 지키는 해골. 스켈레톤 군단.

사실 스켈레톤이라 부르기도 뭐하다.

하나하나가 데스나이트급인데 어떻게 스켈레톤이라고 칭하겠는가.

“안녕, 버찌야. 아빠는?”

연구실 탁상에서 자고 있던 버찌가 ‘냐앙~.’ 하며 한쪽을 가리킨다.

고맙다며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치자, 곧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거대한 소파에 누워 있는 박기혁.

밤새 연구하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다

‘어쩜 자는 모습도 멋있지.’

내 남자, 멋져라.

움찔움찔, 진유리의 콧잔등이 꿈틀댄다. 못된 생각을 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흐흐흐. 입은 이미 음흉하게 웃고 있다. 입술을 핥는다. 기분 탓인가, 벌써 달콤하다.

그렇게 진유리가 뒷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가는데.

그때.

“안 잔다.”

진유리의 앞길을 막는 목소리.

하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누가 잡아먹는다니. 맛만 본다고, 맛만.

와락, 뛰어드는 진유리.

활기찬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잘 먹었습니다아!!”

봄이와 헤나는 동시에 일어서, 경쟁하듯 싱크대에 밥그릇을 넣으려고 달려간다.

“내가 먼저야!”

“아냐, 내가 먼저야.”

“아빠가 뛰면 안 된다 했다.”

“그치만 헤나가…….”

“아냐, 봄이가.”

“쓰읍!!”

내가 나무라자, 그제야 서로 양보하는 두 아이.

겨우 그릇 빨리 치우는 게 뭐라고 저러는지.

밖에서는 참 의젓한 두 딸인데, 집에만 오면 아가가 되는 것 같다. 어머니가 어리광이라며, 이맘때 애들은 다 그렇다고 하셔서 대부분 좋게 넘어가고 있다.

그때 유리가 애들 영양제를 챙겨 주며 말했다.

“봄이, 헤나. 오늘 어디 가는 줄 알고 있지? 놀 생각하지 말고 준비해야 해.”

“네에-.”

“알았습니다아.”

어디 가나?

애들이 식당에서 사라지자, 물어봤다.

“어디 가?”

“까먹었어? 오늘 애들 옷 사러 백화점 간다고 했잖아.”

“아아…….”

난 또 뭐라고. 유리가 애들 데리고 백화점 가는 건 일상에 가깝다. 신경 쓸 필요 없단 말이지.

그래서 신경 끄고 대접에 있는 시레기국을 들이켜는데, 이어지는 말에 시레기 국을 뿜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다음 주에 아주버님 여자 친구 보는 거 알고 있지?”

풉-!

“잊었구나…….”

콜록, 콜록.

“무슨 말이야? 언제 말했어?”

“하…… 그제, 그저께 말했잖아. 본다고.”

“무슨, 네가 언제 그렇게 말했냐. 할 수도 있다고 말했잖아.”

“그게 그거지. 아무런 준비도 안 하려고 했어?”

수혁 형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년쯤 전이다. 형의 말로는 유럽 출장 중에 만나게 됐다는데, 성격이 잘 맞아서 사귀게 됐다고 들었다.

그 후로 간간이 안부만 묻다가, 이제 결혼을 전재로 만날 생각인지 인사를 시켜 주겠다는 말은 했다.

근데, 이렇게 빨리 할 줄은 몰랐지.

“누군지는 알아?”

“당연하지. 며칠 전부터 연락도 하는걸.”

“…….”

진유리가 자랑하듯 폰을 들이민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은발 백인의 사진이다. 예쁘다기보다 아름답다, 우아하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외모였다.

“어때. 완전 엘프지?”

“진짜.”

감탄하는데, 한편으로 자존심 상한다.

우리 형 여자 친구인데 나는 모르고 쟤가 알다니. 한동안 너무 연구실에 박혀 있었나, 절로 반성하게 된다.

“그건 그렇고, 연구는 어떻게 잘 진행되고 있어?”

“대충.”

“오! 어디까지 진척됐는데? 뭐더라? 권…… 권…….”

“권속의 계약.”

“그래, 권속의 계약. 전에 말하기로는, 정체불명의 괴질에 권속의 계약을 심었다고 했잖아.”

권속의 계약.

상위 지성체가 하위 지성체를 계약으로 묶어 놓는 것을 권속이라고 한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냥 노예와 다를 바 없으니까.

사실 나도 이 권속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모른다.

내가 권속을 처음 본 것은 전생에서 악룡을 처치하러 갔을 때고, 알다시피 악룡을 죽이며 내 생은 끝났다.

자세하게 연구해 볼 시간이 없었다는 것.

만약 당시에 권속을 보지 못했다면 이게 권속의 계약인지 몰랐겠지.

그래서 며칠간은 이게 뭔지 조사하기 바빴다. 대체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왜 사람들을 죽이는지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권속의 계약은 이상한 괴질에 ‘첨가’된 형태였다.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여기서 핵심은 시간이야. 오랜 시간 괴질이 진화하며, 첨가된 권속의 계약까지 함께 기형적으로 진화한 거지.”

“우리가 아는 마나 암으로?”

“아마 이걸 만든 놈도 이런 형태로 변할 줄은 몰랐을걸.”

“그럼 사망자는? 계약이라면서. 왜 죽는데?”

“이게 기가 막힌데.”

계약이라 하면 무릇 계약자와 계약 상대자가 있어야 한다.

근데, 이 계약에는 ‘계약자’가 있어야 할 칸이 공석이다. ‘계약 상대자’만 있는 거다.

그게 뭐 어째서? 오히려 그러면 권속이 되지 않는 거 아니냐, 물을 수 있겠지만.

이 권속의 계약이란 건 존재를 걸고 하는 계약이다. 계약이 무효화되면 계약과 함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거다.

“뭐야. 무조건 죽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대신 조건이 많이 붙어.”

지금까지 밝혀낸 정보는 이렇다.

“일단 초인이어야 하고, 마나의 총량이 일정 수준 이하여야 해. 마나를 받는 유전 인자가 기형적이어야 해. 그 안에서 무작위로 걸리는 거야.”

“잔인해…… 무작위라니. 이게 게임도 아니고. 게다가 또 뭐? 일정 수준 이하? 약한 게 죄야?”

“나한테 따지지 마. 밝혀낸 걸 말해 주는 거니까.”

“그럼 아이들은? 아이들이 걸리는 건.”

“나도 몰라. 어제 새벽까지 연구하던 게 그 부분이거든.”

“재수 없네.”

“재수 없지.”

“하아, 일단은 더 듣고 싶지 않아. 오늘 애들 데리고 나가는데 안 좋은 모습 보이기 싫어.”

진유리가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며 나갈 채비를 한다.

“갈 거야?”

“그래야지. 넌? 집에 있을래?”

“난 연구나 더하려고.”

“알았어. 난 애들 데리고 간다.”

미간을 찌푸리며 사라지는 진유리.

사실 진유리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이 권속의 계약은 기본적으로 동등한 격의 존재에게는 걸지 못한다.

상위 존재가 하위 존재에게, 예를 들어 전생으로 따지자면 악룡이 인간이나 몬스터에게 거는 것처럼 격의 우위가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상위의 격인 존재라면.

‘수호령.’

이 일에 수호령이 관련돼 있다.

*   *   *

그리고 얼마 뒤.

진유리가 백화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간.

옷을 들고 탈의실로 가는 두 아이를 보는데, 그녀의 눈이 가늘어진다.

위협을 감지한 파충류의 눈동자처럼.

“……뭐지.”

누군가…….

누군가 이쪽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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