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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명가의 마왕님-184화 (184/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184화>

“어째서 이렇게 됐을까…….”

어째서 난 진유리와 같은 천막을 쓰고, 같은 베개를 베고, 같은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일까.

오늘도 난,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져 본다.

*   *   *

근본부터 분석해 보자.

내 생식 능력에 문제가 있는가?

아니, 난 건강하다.

그렇다면 내가 여자를 싫어했던가?

이것도 아니다.

난 여자를 절대 싫어하지 않는다. 나도 남자인데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눈길도 가고 그런다.

다만 그렇다고 내가 여자를 미치도록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호감은 가지만 동시에 귀찮은?

내게 여자란 애매한 포지션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건 타고난 성향인 거 같네. 과거 제국 시절부터 이랬으니까.

젊었던 시절. 시쳇말로 리즈 시절, 난 꽤 인기가 좋았다.

예전에도 말했듯, 제국의 지존인 황제가 사위를 삼고 싶어 안달이 났을 정도거든.

그럴 수밖에. 실력이 워낙 압도적이었잖아?

근데도 흔한 스캔들 한 번 터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내 행동거지 때문이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데, 일단 난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내 삶의 1순위는 ‘마법’. 지금에서야 1순위가 ‘가족’이 되며 많이 인간다워졌지만, 그때는 진짜 마법만 파던 외골수였다.

오죽하면 내 스승 영감탱이가 나보고 ‘고자’를 운운하며 여자 좀 만나라고 했겠는가.

그나마 가깝게 지내던 여자는 성녀가 전부였으니, 이것만 봐도 나의 처참한 이성 관계를 대변하는 대목일 것이다.

음, 첫 번째 결론.

‘여자에 관심이 적은 것은 팩트.’

그럼에도 남자라면 모든 게 왕성할(?) 20살이니만큼, 불꽃같은 사랑이 찾아올 수도 있다.

이 나이 때 아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사랑의 열병에 눈이 멀어 버리는 건 흔한 일이잖나. 나는 아직도 메리가 준우의 엉덩이가 귀엽다는 말을 한 걸 생각하면 정신이 혼미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게.

난 두 번째 삶이잖아?

액면가만 20살이지, 과거 제국 시절까지 다 합치면 대충 계산해 봐도 60은 훌쩍 넘는 나이다.

절정기의 육체에 완숙한 정신이 담긴 상태.

사랑의 열병이라는 것도 현실의 고단함을 깨닫지 못했을 때나 가능한 일인데, 그러기에 내 삶은 지나칠 정도로 염세적이고 치열했다.

두 번째 결론.

‘충동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확인.’

이제 문제로 돌아오자.

나와 진유리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됐는냐.

욕구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흠…… 생각해 보니 이 부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건, ‘가족’이었던 것 같다.

가까이는 부모님과 형, 누나, 봄이와 헤나.

조금 더 넓게 보자면.

내 어린 친구인 한준우와 메리가 있을 것이고 말은 많지만 착한 김하니도 있을 것이다.

아, 제자인 송새벽이도 빠지면 섭섭하지. 한빛 보육원의 아이들도, 동아리의 후배들도.

현재 내 삶의 1순위는 ‘가족’이고 ‘내 사람’이다.

그리고 진유리는 이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유일한 여자였다.

“서프라이즈~! 어머니, 생일 축하드려요~!”

“어머니이~ 요 앞에 지나가는데 어머니 생각나서 들렸어요. 점심 드셨어요? 도시락 싸 왔는데 같이 드실래요?”

“선물은 짜잔! 히히. 이게 요번에 한정판으로 나온 향수라네요. 어머니 생각해서 사 봤어요. 괜찮죠?”

우리 김연희 여사님.

무뚝뚝한 자식들한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시는데 진유리가 딱 나타나 ‘어머니~.’하며 딸처럼 살갑게 대하자, 퍽 만족스러워하시더라.

아버지도 마찬가지.

“아버니임~ 저 왔어요. 그리고 짜잔, 여기 고기도 왔어요. 히히. 애들이랑 마당에서 구워 먹어요.”

“심플한 거, 심플한 거…… 앗, 여기 있네요. 심, 플! 이 텐트는 어때요? 심플해 보이지 않아요? ……에이~ 이건 아니다. 아버님, 이건 사이즈가 너무 작잖아요. 다시 골라요.”

형한테도.

“아주버님, 저 요즘 근접전 훈련하고 있는데 좀 봐주세요.”

“어때요? 괜찮아요? 아, 그게요…… 아무래도 봄이하고 헤나 가르치려면 조금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 의미에서 한 판 더 붙어요.”

누나한테도.

“오늘은…… 젠장……! 너무…… 빨라…… 아악-!!”

“아흐으- 역시 신나게 싸우고 난 뒤에는 목욕이 최고라니까. 물 좋죠, 형님? 여기 온천이 그렇게 유명하대요. 저희 자주 와요.”

진유리의 전 방위적인 애정 공세.

이게 또 다소 무뚝뚝한 검호 가문에는 통했다.

나중에는 부모님이나 형, 누나, 우리 가족 모두가 진유리를 좋게 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 얘를 많이 따르더라.

“딸기 언니이!”

“언니!!”

“얘들…….”

“있잖아, 딸기 언니. 헤나가 봄이보고 언니 아니래!”

“언니, 내 이야기부터 들어. 봄이가 계속 언니라고 해!”

“아……? 숨 좀 돌리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

“아냐, 들어 봐. 막 떡볶이만 먹는다고 뭐라 하는데.”

“질린단 말이야!”

“그…… 그렇게 심한 말을!! 헤나는 봄이가 질려?!”

“지인짜! 내가 언제 네가 질린대. 떡볶이가 질린다구!

“음…… 좋아, 얘들아. 언니가 모두 이해했어. 언니 생각에는 우리 모두에게 대화가 필요한 시점 같은데, 누구부터 말해 볼까. 봄이? 헤나?”

“봄이! 봄이!”

“나! 나!”

솔직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아이 아닌가. 내가 진유리랑 그렇고 그런 사이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진심으로 애들을 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 이때부터였을 거다.

내 마음에 진유리가 스며든 것이.

한 발짝이었다. 딱 한 발짝.

마음의 발이 내딛어지자.

많은 게 달라 보였다.

대책 없던 모습이 도리어 귀여워 보였고, 평소 눈에 들어오지 않던 외모도 가만히 살펴보니 제법 내 스타일이었다.

문득 느꼈다.

이 여자다 싶었다.

모난 성격의 내가 정착할 여자가.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던 것 같다.

*   *   *

“장비 챙겼지? 무기는, 물약은?”

“다 챙겼다니까. 좀 그만해라. 벌써 세 번째다.”

“어머, 세 번밖에 안 했어? 나도 멀었네. 물약은 몇 병이나 챙겼어? 용량은 확인했지?”

손가락이 다섯 개니 잔소리도 다섯 번은 해야 한다는 잔소리론을 내세우는 진유리.

괜히 자극하지 말자. 나만 손해다.

“응? 보호 크림 안 발랐지?”

“그걸 왜 발라.”

“아, 좀! 피부 상한단 말야.”

진유리가 허겁지겁 보호 크림을 발라 주는 사이 우리는 천막에서 나왔고, 눈부신 햇빛이 비췄다.

“날씨 좋네.”

“날씨가 좋으니까 게이트 공략이 훨씬 수월한 것 같아.”

“영향이 없진 않지. 다 발랐으면 얼른 가자. 애들 기다린다.”

“잠깐만. 정리 좀.”

진유리가 머리핀을 입에 앙 물고는 바짝 밀착해, 내 머리를 정돈했다.

쏵 머리를 쓸고, 올백으로 넘겨 깔끔하게 정리한 다음 머리핀으로 똑똑.

마지막으로 전투 슈트의 옷깃을 세우면.

“끝.”

팡팡-!

가슴팍을 치며 흡족해하는 유리.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간다. 몸도 부르르 떠는 게 아주 좋아 죽는다.

매번 이렇게 스타일을 정리해 주는데 대체 이게 뭐라고 할 때마다 이토록 즐거워한다. 뭐라더라, 자기의 색으로 바뀌는 나를 보면 몸서리치게 짜릿하다나.

“뚫어지겠다. 그만 좀 봐.”

“냅둬. 내 남자 내가 보겠다는데.”

“아니, 그 남자가 나니까 그렇지.”

“앗! 방금 대사 좀 섹시했어.

흥, 그 남자가 너지. 너야.

조용히 읊조리며 황홀하다는 듯 반짝이는 진유리의 눈.

옛날이면 이 광기 어린 눈빛에 혀를 찼을 건데, 이제는 익숙하다.

이럴 때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역효과. 한 손으로 진유리의 머리통을 붙잡고 갈 길을 가자.

“오늘 마지막 보스 잡는 날이지? 빨리 끝내고 애들 보고 싶다. 언니 많이 찾을 건데. 힝.”

“네가 찾는 거겠지. 우리 애들이 얼마나 의젓한데. 씩씩하게 잘 기다리고 있을걸.”

“와, 얘 말하는 거 봐라. 아빠가 돼 가지고 이렇게 섬세하지 못해서야.”

“그만. 오늘 보스 잡는 날인 거 알지? 집중해.”

“칫, 어차피 새벽이하고 용준이 가르쳐 주려고 온 거잖아. 나야 후방만 지켜 주면 되지. 관전하는 애들 다치지 않게.”

“알면 똑바로 해.”

“눼에~.”

유리의 약간 삐친 듯한 대답에, 피식 웃으며 머리를 헝클었다.

이런 모습이 밉지 않은 거 보니까, 확실히 나와 유리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게 실감난다.

잠시 뒤. 저편에서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 나와 비견될 정도로 큰 키와 체구. 내 제자 송새벽이었다.

“스승님, 선배님. 오셨습니까.”

“새벽이, 안녕.”

“잘 잤냐.”

“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때려 주고는 그대로 지나쳤다.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지금 당장 레이드 가능합니다.”

확실히…….

스윽 주위를 둘러보자, 이쪽을 보며 묵례하는 공략대의 눈이 형형하다.

곳곳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그래, 얘들 중 태반은 우리 동아리 ‘출구 없는 지옥’의 일원이었다.

그 있잖나. 새벽이 처음 봤을 때 함께 처맞고 기절한 채 지장 찍힌 애들. 걔들이 졸업까지 함께하고 송새벽과 팀을 이뤄 옵티멈에 온 것이다.

진유리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칭찬한다.

“눈빛 좋네. 무장 상태도 깔끔해 보이고. 역시 새벽이. 철저해.”

“아닙니다, 선배님.”

“그럼 이제 애들을 찾아볼까아…… 저기 있네. 쟤들이 내가 지켜야 할 애들이지?”

“그렇습니다.”

아카데미 3, 4학년 학생들.

전문 공략대는, 정확히는 국내를 넘어 세계 5대장인 옵티멈이 고위급 게이트를 어떻게 공략하는지 견학하러 현장 학습으로 따라온 학생들이었다.

“난 이만 빠질게. 조심해, 자기.”

“수고해.”

“가십시오.”

쪽!

손 키스를 날리며 사라지는 진유리.

새벽이는 그 모습에 적잖이 놀라는 것 같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다.

“왜. 적응 안 돼?

“아…… 네…… 뭐…… 그, 그렇죠. 그 진유리 선배님이잖습니까.”

“넌 이상하게 유리를 무서워하더라.”

“저만이 아니라 저희죠.”

“그렇게 따지면 저희가 아니라 모두 아니냐?”

새벽이가 할 말이 없는지 ‘푸흐흣.’ 웃는다.

하긴 진유리가 내 앞에서야 실실 웃는 댕댕이나 냥냥이지,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는 완전 용이다.

깡그리 무시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격이 더럽다는 소문이 자자하지.

“안 그래도 동기들은 스승님과 선배가 사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답니다.”

“나도 믿기지 않는다. 내가 쟤랑 사귄다니.”

“지금 본 걸 말하면 더 믿지 못할 겁니다. 그 진유리 선배가 애교라니…….”

“새벽아, 내가 스승으로서 인생의 조언을 해 주마.”

“네.”

인연을 만나다 보면 이 여자다 싶을 때가 있을 거다.

그럴 때면…….

“잘 버텨 내야 해.”

“잘 버텨…… 네?”

“잊지 마.”

그때가 위기의 순간이야!

“그 위기의 순간을 넘기지 못하면…… 나처럼 되는 거야.”

“……스승님처럼이라니.”

“쓰읍. 아, 눈이 맵구나.”

사담은 이것으로 끝.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용준이는.”

“저기 있습니다.”

“어때?”

짧은 물음.

하지만 이 안에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실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합격입니다. 장기인 ‘시야’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넓더군요. 시야가 넓어서인지 3학년이란 말이 무색하게 침착합니다.”

“용준이는 특히 눈이 좋았으니까. 또? 단점은?”

“단점은 마나의 총량이 적고, 최전열 ‘디펜시브’를 희망하는 것치고는 몸이 턱없이 약합니다.”

디펜시브.

탱커의 세분화된 역할로 ‘공격을 막는다.’라는 데 특화된 포지션이다.

새벽이의 말대로 저 멀리서 좌선을 하고 있는 용준이의 무장은 최전선에서 공격을 막는 디펜시브치고는 지나치게 가볍다.

경갑에, 창. 탱커의 국민 무장이라 불리는 방패마저 버렸으니까.

차라리 근접 딜러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릴 지경.

하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공격을 몸으로 버텨야만 막는 게 아니야. 피해 버리면, 그것도 막는 거 아니냐.”

내가 아는 권용준에게 무식한 보스의 공격을 몇 시간씩 버텨 낼 방어력은 없다.

그러나 보스의 공격을 바보처럼 만들 ‘눈’과 ‘발’이 있다.

“네, 스승님의 말씀대로 용준이의 회피는 일품이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백호를 보는 듯했습니다.”

“과장 아니야. 가끔 누나가 봐주기도 했으니까. 나중에 용준이한테 똑같이 말해 줘 봐라. 좋아 죽을걸? 만약 너희 팀에 넣으면, 실전에도 쓸만하겠어?”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해 리딩 능력이 없으니…… 혼자서는 무리고, 저랑 함께 투 탱커 전략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괜찮네.”

냉정하기로 유명한 송새벽이가 이렇게 평가할 정도면 정말 괜찮은 거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며 정신을 집중하는 용준이를 깨웠다.

“용준아, 갈 시간이다.”

“네, 형.”

나와 송새벽의 옆으로 용준이가 따라붙었다.

쉬고 있던 인원들이 삼삼오오 몰려들고, 공략대 전원이 내 뒤를 따른다.

언덕에 다다른 우리.

그리고 언덕 너머에는, 파충류 형태에 무기를 든 전사. 에이션트 리자드맨 킹이 권자에 앉아 있었다.

Boss.

에이션트 리자드맨 킹. ‘사우르원’ 등장.

“실력 좀 보자.”

등을 떠밀자.

송새벽과 권용준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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