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72화>
박기혁이 에우리아의 부탁을 고심하는 시간.
박봄과 헤나는 급속도로 친해져 갔다.
“봄이는 인정할 수 없어.”
“너만이야? 나도야. 나도 인정 못 해.”
“좋아, 다시 붙어!
“좋아, 덤벼!”
……오해하지 마라. 친해지는 거 맞다.
오고 가는 주먹 속에 싹트는 가슴 뜨거운 우정. 둘은 분명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봄이가 이겼어! 네가 먼저 울었잖아!!”
“네가 먼저 울었거든!”
“여기 봐봐. 봄이 눈에 눈물 안 흘러내렸잖아. 넌 흘러내렸고. 봄이가 이긴 거야!”
“아, 아냐! 이 바보야!!”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봄이는 바보 아냐!!”
“자기가 자기 이름 부르면 바보야!”
“이이이익!! 너어어어!! 이리 와.”
“헤헤. 메에롱-!”
사실 둘이 가까워지는 건 운명이었다.
닮았으니까.
박봄은 박기혁에게서, 헤나는 에우리아에게서.
둘 다 어린 나이임에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힘을 소유하고 있다.
웬만한 성인조차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힘.
이러할진대 또래 아이들이랑 제대로 섞일 수 있겠나.
일례로 박봄은 유치원에서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다. 자신이 무심결에 뻗은 팔이나 다리에 친구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헤나도 마찬가지다.
존재 자체가 극비인 헤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이 숲에서만 살아야 했다. 때문에 만난 사람이라고는 열 손가락도 못 채우는 형편.
그중 또래 친구는 전무했다.
만약 두 아이가 편하게 생활한다고 생각해 보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제어도 하지 않으며 편하게. 그 나이 때의 아이처럼 흥미로운 것에는 손부터 먼저 대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생활하면 어떻게 될까.
괴물(怪物).
괴물로 불릴 거다.
그렇기에 두 아이는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 거였다.
인간으로 남기 위해.
한데 이런 두 아이가 만났다.
얼마나 신나겠나?
아이처럼 실수해도 되고.
“악, 미안! 실수했어. 안 아파?”
“히히. 괜찮아. 끄떡없어.”
힘을 제어하지 않아도 되며.
“아-! 너어어! 마법 쓰기 있는 거야?”
“마법 쓴 건 네가 먼저야!”
“마법 아니야! 혈족이야!”
“나도 마법 아니거든? 이거 ‘변태’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봄이는 이만큼 뛸 수 있다.”
“헹. 나는 이~ 만큼 뛸 수 있거든.”
“봄이는 이~~ 만큼 뛸 수 있어! ……어? 어어?!야!! 너어 변신하지 마!”
“변태라니까, 바보야. 나 먼저 간다아~.”
신나! 엄청 신나!
하늘만큼 땅만큼 신나!!
즐거웠다. 함께하는 모든 일이 재미있었다.
하루가 너무 짧았다.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은 뭘 하며 놀까, 기대감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헤나한테 봄이가 첫 번째 친구야?”
“으, 으응.”
“그…… 래?”
“…….”
“…….”
“미안. 용서해 줘. 거짓말했어.”
“응, 그런 것 같았어. 그럼 두 번째야?”
“……세, 세 번째.”
“그, 그렇구나아. 3등이구나아. 누군데?”
“‘아시스’아저씨랑 ‘네피’ 아줌마. 아시스 아저씨는 잔소리가 심해. 매번 조심해야 한다면서 막 다그쳐. 그에 비해 네피 아줌마는 좋아. 내 말이면 뭐든지 들어줘.”
“음, 그렇구나. 그럼 어린이는 내가 처음이네?”
“그렇지!”
“그럼 첫 번째로 하자. 둘은 삼촌과 이모로 하고.”
“그럴까? 그러자! 네가 첫 번째 해.”
“놀러 갈까?”
“그래, 뭐 할래?”
“집 짓자. 저기 개울에서 오두막 지어.”
“좋아.”
두 아이가 손을 잡고 도약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지나가고 있었다.
* * *
침대 안.
에우리아는 평소처럼 침대에 누워 헤나의 배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있잖아! 봄이가 나무로 기둥을 세우면 내가 개울에 있는 돌로 벽을 쌓기로 했거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냐면…….”
재잘재잘.
앵두 같은 입이 쉬지 않고 움직인다. 음절 하나하나마다 ‘신남’이 듬뿍 담겨 있다.
에우리아가 틈틈이 ‘그래요?’ ‘그렇구나.’ ‘대단하네요!’ 추임새를 넣어 주자, 헤나의 텐션이 우주를 뚫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친구가 생긴 것이 저렇게나 좋을까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빨리 놓아주었어야 하는데,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이를 홀로 남겨 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쓰라렸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도 든다.
‘맞아요……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살아야 해요.’
에우리아는 헤나를 박기혁에게 부탁하고서도 한참을 고민했었다.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일까.
헤나를 내가 지키는 게 낫지 않을까.
그냥 이대로 성인이 될 때까지 버텨 볼까.
이조차도 내 욕심이 아닐까.
갈등에 갈등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고, 이 탓에 에우리아의 감정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널뛰었다.
에우리아 본인조차 혼란스러울 정도로.
‘수호령으로서 부끄럽네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혼란이 그녀의 결정에 확신을 가지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냉정하게 보면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다.
겨우 몇 년. 길어 봤자 몇십 년.
물론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지만 영원을 사는 수호령에게는 한 줌의 시간이건만…… 겨우 이 시간을 헤어지는 것에도 이 정도로 동요한다면.
만약 헤나에게 나쁜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현재의 에우리아는 이 질문에 도저히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보내는 게 맞다.
그렇게 에우리아는 힘겹게……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어야만 했다.
“이곳을 떠나요, 헤나.”
이 어미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날아가세요.
* * *
“얼굴이 왜 이래. 울었어?!”
봄이는 판다처럼 퉁퉁 부은 친구의 눈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갔다.
하지만 이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는데.
“끄읍, 끄읍…….”
헤나의 입술이 비뚫빼뚫 흔들리더니.
으아아아앙-!!
결국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서러웠던 건지 목이 터져라 쩌렁쩌렁 울었고, 숲속의 곤충들이 모두 움츠러들 정도였다.
봄이는 그 모습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그때, 아빠가 내가 울고 있을 때 꼭 안아 주던 기억이 떠오른다.
일단 안아 주자.
봄이가 울고 있는 헤나를 안고 토닥여 줬다.
“왜 울어? 봄이, 아니, 나한테 말해 봐. 내가 들어 줄게.”
“히끅, 히끅. 아…… 아줌마가. 아줌마가…….”
“그래, 아줌마가 뭐라고 했는데.”
봄이는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용이 길어졌지만, 요약하자면 에우리아 아줌마가 헤나보고 이곳을 떠나라 한 것이다.
“왜?”
“나, 나를 위해서…… 흐윽, 아줌마 곁에 있으면 안 된대. 흐아앙-!”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잠깐만!”
사랑쟁이 봄이는 잠깐 빠져, 지금은 진지한 박봄이 필요하다.
헤나를 위해서, 아줌마 곁에 있으면 안 된다?
생각하자, 박봄.
조건들을 취합한다.
‘……요정 이모는 수호령이야. 에우리아 아줌마도 요정 이모랑 비슷하니까 같은 수호령일 거야.’
문득 요정 이모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언제였더라? 요정 이모랑 재미있는 역사 공부를 할 때였다. 그때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봄이가 그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렇게 참혹하면 요정 이모가 막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때 요정 이모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럴 수 없어요, 봄이 양. 우리 수호령은 이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존재예요. 항상 중립적이어야 하죠. 제가 전쟁을 막으면 누군가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이 된답니다.”
‘중립. 수호령은 누구의 편을 들어 주면 안 된다…….’
헤나를 다시 봤다. 에우리아 아줌마가 헤나를 왜 떠나보낼까.
‘아줌마는 헤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건 미소만 봐도 알 수 있어. 아줌마가 헤나를 보며 짓는 미소는 아빠가 봄이를 보고 짓는 미소와 닮았거든.’
에우리아에게 헤나는 소중한 사람.
그제야 봄이의 머리에 답이 나왔다.
‘알았다.’
에우리아 아줌마는 헤나의 편을 들게 된 것 같다. 수호령이 헤나의 편을 들면 그것은 잘못된 거다.
무릇 잘못을 하면 벌을 받는 법.
아줌마는 이 벌을 헤나도 같이 받을까, 무서운 거다.
울고 있는 헤나를 다독여 줬다.
“헤나야.”
“흐끅. 응……?”
“아줌마가 너 많이 사랑하는가 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봄이는 다 알아.”
헤나의 퉁퉁 부은 눈을 닦아 주며 최대한 밝게 웃어 줬다.
주머니 속에 숨겨 뒀던 초콜릿을 입에 넣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딸기 언니가 그랬는데, 입에 단 게 들어가면 사람은 진정된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잠시 뒤, 귀신 같이 진정되는 헤나.
역시나 딸기 언니는 똑똑해.
진정된 헤나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사실, 나 다 알고 있어. 아줌마가 헤나 엄마라는 거.”
“그렇구나.”
“아줌마는 내가 엄마라고 부르면 고장 나. 눈도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고 막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해. 그리고 나중에는 슬픈 표정을 지어.”
“그게 싫었어?”
“응, 싫었어. 그래서 아줌마라고 부르는 거야.”
친구의 비밀을 들은 박봄은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비밀도 꺼낸다.
“나도 그래. 나를 낳은 엄마 아빠가 따로 있는 거 알아.”
“정…… 말?”
“아빠한테 이 말을 하면 엄청 당황해. 허수아비처럼 흔들린다? 난 아빠가 그렇게 당황하는 거 처음 봤어. 신기하지?”
“아저씨 무진장 크잖아. 허수아비라니…… 상상이 안 돼.”
“히히. 그래서 안 해. 지금 우리 아빠는 박기혁, 한 사람뿐이니까.
어른들은 착각한다. 애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안다.
하지만 애들도 알 건 다 안다.
단지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까?”
“떡볶이? 그게 뭐야?”
“있어. 진정한 친구끼리 먹는 거야.”
박봄이 당차게 일어서 손을 내민다.
“가자-.”
함께한 시간이 짧고 길고는 중요치 않다. 이미 박봄과 헤나는 진정한 의미의 ‘친구’였다.
* * *
진유리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애들 오는 것 같은데? 뭐라고 하네. 입모양이…… 떡볶이? 얘들 떡볶이 먹고 싶은가 봐.”
“그게 느껴져?”
“밖도 아니고 게이트 안이잖아. 별거 아니지.”
“호…… 멋지네.”
일대에 퍼트렸던 마나로 정보를 모으는 모양인데, 입의 움직임을 감지할 정도이니 마나 장악력 하나만큼은 거의 완숙의 경지에 다다른 것 같다.
“아까 나올 때 만들어 놓고 왔는데 다행이네.”
“만들고 있던 게 떡볶이였어?”
“몰랐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이래서 아빠들이란…… 섬세함이 없어요. 섬세함이.”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본 진유리가 말을 이어 갔다.
“이야기나 계속해 봐. 에우리아가 헤나를 맡아 달라고 한 것까지 이야기했어.”
“그게 끝이야. 여태껏 혼자 고민 중이었지.”
“결론은?”
“안 났으니까 너한테 묻는 거 아니냐.”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어머님도?”
“어머니도.”
그 말에 급 뿌듯한 표정을 짓는 진유리.
이쪽은 급 재수 없어졌다.
“이제야 나를 인정해 주는 거구나. 훗. 그래, 이제 인정해 줄 때도 됐지.”
“……헛소리할래?”
“쑥스러워하긴.”
팍, 인상을 찌푸리는데 내 기분 따위를 신경 쓰는 진유리가 아니다.
진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뀐다. 일생일대의 난제를 만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정신을 집중하는 모습.
그리고 집중의 결과는.
“맡아 주는 게 좋을 것 같네.”
“왜?”
“그게 여러모로 봄이한테 좋을 테니까.”
“자세히.”
“너 봄이가 평범하다고 생각해?”
“…….”
진유리가 음료로 입을 축이고 말을 잇는다.
“네가 미국이다, 일본이다 나다닐 동안 내가 봄이를 맡고 있었잖아. 나 정말 신경 써서 봤다? 혹시나 나를 불편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재미있는 게 보이는 거야.”
봄이가 아이들을 어려워했다.
수업을 할 때도,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때도, 봄이는 의도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지 않았다.
“봄이도 아는 거지. 자기가 보통 아이가 아니란 걸.”
“몰랐네. 현지란 아이랑은 잘 지냈잖아.”
“걔는 좀 특별하더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인데?”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감지력? 감응력? 감응력이 좋겠다. 마나 감응력이 좀 비정상적으로 높아. 그래서 본능적으로 봄이 곁으로 향하는 것 같더라고.”
“아아…….”
“아마 곧 마나도 깨우칠걸. 아니면 이미 깨우쳤을 수도. 복도 많지.”
“그래서, 넌 봄이가 특별하니까 헤나 같은 친구가 있어 줘야 한다?”
“헤나도 마찬가지야. 걔가 평범한 애들과 섞여 있다고 생각해 봐. 당장에 무슨 사달이 나도 이상하지 않아.”
“둘 모두를 위해서.”
“맞아. 핵심이 그거야. 내 주관이지만, 난 올바른 우정이란 수평 관계에서 온다고 생각하거든.”
극단적이지만, 아예 틀린 말도 아니다.
인관 관계의 핵심은 균형이고, 한쪽에 너무 기울어지면 그 관계는 건강하지 못하다.
“다 필요 없고, 너 봄이가 이렇게 행복해하는 거 봤어?”
진유리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무언가를 비춘다.
떡볶이를 먹고 있는 봄이와 헤나.
두 아이가 빨간 양념을 덕지덕지 묻힌 채 웃고 있었다.
“이 미소가 답이야.”
그렇구나.
마음의 추가 확실히 기울었다.
* * *
카이로 시내.
식료품부터 옷가지, 귀금속까지 모든 것이 구비된 대형 아울렛.
한 여자가 폰을 든 채 무언가를 체크하고 있다.
“여기, 식료품 코너에 한번 들를 거예요. 저희가 보이면 바로 의류 코너에 있는 시민들 소개시키고, 우리 쪽 인원으로 채워 넣으세요.”
“알겠습니다.”
“여기서 감자튀김과 콜라를 먹고, 이쪽 모퉁이 길로 들어갈 거예요. 화장실을 가고 싶은지 물어볼 거니까, 혹시 화장실로 간다고 해서 당황하지 마세요.”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체크.
여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사소한 디테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본래 여자의 스타일이 이랬지만, 이건 심할 정도. 하지만 이번 작전의 중요도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약과다.
“잘 들어요. 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이에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돼선 안 돼요.”
그녀의 이름은 네프티스.
수호령 에우리아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헤나가 친구라 부르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음으로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