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62화>
과거, 제국 시절, 나는 수많은 강자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전장에서 명성을 떨치던 용병왕의 무릎을 꿇린 것도 나다.
콧대 높은 드워프 로드의 골렘을 산산조각 낸 것도 나다.
엘프 여왕을 지키던 세계수 수호자의 활을 꺾은 것도.
모든 기사들의 우상이었던 검성의 검을 꺾은 것도.
바로 나, 마왕이었다.
한 시대의 절대자였던 나.
그런데 역사를 통틀어 나 같은 절대자가 없었냐면 또 그건 아니다.
“크크크. 제자야, 기고만장하지 마라. 과거에 너 같은 미친놈이 없었던 것 같으냐.”
고대 시대를 닫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제국.
그 제국의 주춧돌을 세운 ‘건국왕’으로 시작해, 중구난방으로 퍼져 있던 마법을 한데 모아 마법의 대중화를 이룬 마법사의 아버지 ‘아크 메이지’와 ‘블러드 로드’ ‘신의 아들’ ‘예견자’ 등등.
고대 역사서에서나 언급될 법한 영웅들이 영감의 입에서 줄줄이 나온다.
“호오? 표정을 보니 공감하는 것 같지 않구나. 하긴, 방금 말한 이름들은 곰팡내 나는 역사서에서나 나오는 이름들이니까. 공감하지 못할 만하지.”
역시 영감은 나를 잘 알았다.
솔직히 그랬다.
영웅들이라고 했지만, 실존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는 인간들과 비교해서 이겨 봤자 뭐가 남나.
애초에 비교군이 잘못된 거지.
그래서 영감은 셋을 콕 집어 추려 줬다.
“녀석, 까다롭긴. 하면 비교적 확실한 자들을 꼽아 줘야겠구나. 보자…….”
첫 번째는 ‘엘더 퀸(Elder Queen).’
“친화력이라는 단어가 의미 없던 엘프. 정령왕의 환생이라 불리던 엘더 퀸이다.”
그녀의 탄생일에 맞춰 정령들이 기쁨의 춤을 췄고, 첫 정령을 부른 의식에서 대지의 정령왕이 응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200년 전 ‘종족 전쟁’ 시기.
격화되는 전쟁의 불꽃을 단신의 무력으로 꺼트리고 전 대륙을 평화 협정 자리에 앉힌 괴물.
두 번째는 ‘불가사의(不可思議).’
“네가 생각하는 자가 맞다. 동화책에서 나오는 그 ‘불가사의’지.”
이름 그대로 불가사의한 존재.
인간인지, 엘프인지, 드워프인지…… 어떠한 것도 밝혀진 게 없다.
다만 하나 알려진 건, 때와 장소 상관없이 우연처럼 찾아와 내기를 제의한다는 것.
내기는 ‘대상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요구하는데 이 내기에서 지면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이기면 ‘소원’을 이뤄준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이 불가사의의 강함이 드러난 사건은 불과 100여 년 전, 해상 왕국 ‘마칼리움’에서 벌어진다.
내기의 승자가 ‘이 더러운 나라를 지워 주세요.’라는 소원을 빌었고, 불가사의는 단 일 수에 마칼리움을 수중 도시로 만들었다.
마지막, ‘검왕(劍王).’
“검왕, 가장 최근의 분이지. 어렸을 때 스승의 어깨너머로 봤던 기억이 있어.”
검을 들지 않았음에도 검왕이라 불린 인물.
그래서 검을 든 대마법사라고도 불린 인물.
태어나면서부터 꿈을 실현하는 ‘성운’의 힘을 소유했고, 때문에 그의 검은 ‘변화’의 속성을 지녔다. 이건 단순히 검의 형태가 변하는 것을 넘어 법칙마저 변화시킬 수 있는 신의 권능이었으니.
“검왕은 최강의 절대자였다. 마왕인 너와 비교해도 말이다.”
그러니 자만하지 마라, 제자야.
추억 속 영감은 약 올리듯 웃고 있었다.
……
…
‘진짜 있었잖아.’
봄이와 놀고 있는 이스마일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저 꼬맹이가 품고 있는 기이한 씨앗. 어떠한 법칙도 수정, 혹은 변화시킬 수 있는 권능.
성운(星雲)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한눈에 알아봤냐면, 기록에서 본 적이 있어서다.
검성의 이마에서 광채가 반짝였다. 불빛이 너무도 찬란해 떨어지는 유성 같았는데, 검왕은 이것을 ‘성운’의 권능이라 칭하였다.
물론 이 기록은 검왕이 능력을 펼쳤을 때를 기록한 거겠지만, 이미 ‘진리’를 깨우친 내 눈에는 보인다. 이스마일의 이마에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근데…….
“정말 별 모양이었어. 기록하고 똑같네.”
“별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내가 급히 무함마드에게 사과하는데, 진유리가 쓰읍, 눈치를 주며 말했다.
“……기혁이 너, 이야기 제대로 안 들을래? 이거 실례야. 실례.”
실례라는 말을 진유리에게 듣는다는 게 자존심 상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현재 우리는 손님으로 초대받은 자리. 주인이 성대하게 대접해 줬는데, 손님이 주인의 이야기에 귀조차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건 명백한 실례다.
나는 무함마드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오히려 사과해야 할 건 저희입니다. 첫 만남에 실례를 한 것은 저희가 먼저 아니겠습니까.”
“아아…….”
“부디 무례를 잊어 주시길.”
무함마드가 다시 생각해도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이걸 설명하려면 시간을 잠깐 돌려야 한다.
메리의 전용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활주로에서 곧바로 리무진을 타고 이동했다.
차 하나 없는 도로를 달리는 리무진.
아니, 낯 시간에 차가 없다고? 궁금해서 집사에게 물어보니 왕의 명령이 있었단다. ‘최대한 정중히’ 모시라고.
그래서 우리를 태운 리무진은 단 한 번의 브레이크도 밟지 않으며 달렸고, 융숭하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의 환대를 받으며 왕국에 도착하는 순간.
“어서 오…….”
“공주우!!”
“어머님, 잠깐만요. 나 애! 여기 아기 있어요!”
“정말! 정말! 너어는 정마알!!”
이렇다 할 인사도 하기 전에 메리의 어머니인 2왕비가 잔뜩 잔소리를 퍼붓더니, 메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당연히 죄인이 된 준우도 그 뒤를 따랐고.
우리는 뻘쭘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 여기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
“…….”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말이 없어진다.
무함마드는 당시의 부끄러움에, 나는 당시 메리를 몰아치는 왕비님의 포스에.
그렇게 분위기가 다시 뻘쭘해지려고 하는데, 진유리가 재빨리 치고 들어왔다.
“아니에요. 저는 왕비님이 이해가 되는걸요. 공부하라고 유학 보낸 딸이 이, 이, 임…… 아아, 어떻게 해. 상상만으로도 현기증 나.”
“진유리, 죽을래? 봄이 보면서 말하지 마라.”
안 된다, 악마야.
봄이는 안 된다고!
“어쨌든 저도 왕비님 입장이었다면 그랬을 거예요. 아, 물론 메리와 준우는 정말 잘 어울리지만요.”
“하…… 하…… 감사합니다. 부인은 자비로우시군요.”
“부, 부인?!”
“부인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두 분이 워낙 잘 어울리셔서.”
“어머, 보는 눈이…….”
나는 재빨리 진유리의 이야기를 끊으며.
“우리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아까 말한 그거, 그…… 왕위 계승.”
“계승전입니다.”
“맞아. 왕위 계승전. 지금 그거 때문에 왕궁이 뒤숭숭하다면서요?”
“왕위 계승전이 무슨 문제겠습니까. 모든 게 살만파의 폭주 때문입니다.”
무함마드의 안색이 다시 진지해지며, 이야기가 계속된다.
왕위 계승전.
대리인, 대리인이었던 이들이 암살당하고 유력한 용의자는 4왕비의 아들인 살만 왕자라는 것.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다소 무거운 분위기다.
그런데 분위기와는 별개로 난 이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익숙한 거네.’
흔한 왕위 다툼 아닌가.
‘대전사’ 간의 결투로 왕위를 계승한다는 게 파격적이기는 하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다. 여러모로 제국을 살았던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의 싸움이라…… 내 경험상 이런 권력 싸움의 공통점은 선과 악이 불투명하다는 거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즉, 지금 내 앞에서 부드러운 말투로 조곤조곤 설명하는 무함마드가 선인지, 악인지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무함마드가 명석하다는 평은 실제로도 맞는 말인 건지, 이런 나의 변화를 귀신 같이 눈치채고 내용을 바꿨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이 나이에 왕위를 잇는다는 게 부담스럽습니다. 가능만 하다면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정말요?”
“그렇습니까.”
“아직은 그냥 한 명의 인간으로 즐기며 살고 싶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요. 하하.”
그러며 딸 사진을 보여 준다.
정이 듬뿍 담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성분이 아내신가? 품에는 천사 같은 아기가 잠들어 있다.
예쁘긴 진짜 예쁘네.
“음, 그러니까. 지금 왕자님의 말은…… 본인은 쉬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정확합니다, 부인.”
그때, 나는 조금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왕위를 포기하는 길은 없습니까.”
“야! 박기혁!”
“넌 좀 빠져 봐.”
“…….”
보통의 권력자라면 이런 물음에 화를 내는 게 보통인데, 확실히 무함마드란 사람은 보통 이상인가 보다. 살짝 곤란해하더니,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확실히…… 그것도 방법이지요. 다만.”
무함마드가 쓰게 웃는다.
“저 말고 대안이 있었다면요.”
현재 왕위 계승에 떠오른 세력은 셋.
무함마드와, 무함마드의 작은아버지인 대공, 그리고 살만 왕자.
“살만은 이미 설명해 드렸듯이 잔인하고 흉폭한 성격으로,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아이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개인적으로 알아보셔도 괜찮습니다. 왕궁 근처만 돌아다녀도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살만은 제외.
남은 건 대공인데.
“작은아버지는 훌륭한 어른이시죠. 인품이나 학식,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게도 자상하신 분입니다.”
“단, 종교관이 문제입니다. 작은아버지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종교관을 가지셨습니다. 정확히는 급진파죠.”
“안 그래도 ‘아프리카 연합’ 내에서는 종교적 문제가 끊이질 않는데, 나름 온건파로 중동을 중재하던 저희가 급진파로 돌아서면, 그때는 정말 파국입니다.”
한 명은 성격 파탄이고 한 명은 광신도라…….
집안싸움에, 정쟁에, 종교까지 더해졌다. 이거 완벽한 삼위일체네. 상상만으로 골 때렸다.
무함마드도 그런지 쓰게 웃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인다.
“저 개인을 위해서나 이 국가를 위해서나 왕은 저 무함마드가 돼야 합니다.”
정황을 제대로 모르기에 100퍼센트 믿는 건 아니지만, 만약 무함마드의 말이 진실이라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답이었다.
그러면 이제 나올 말은 뻔한데.
무함마드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래 말을 꺼낸다.
“그래서 부탁컨대, 제가 박기혁 님을 대리인으로 모셔…….”
그때.
“아빠아!!”
봄이가 그의 말을 싹둑 자르고 들어오더니.
“나 ‘엘’이랑 놀러 갔다 올게!”
이스마일을 데리고 우다다다 방을 나갔다.
그런데 방금 잘못 봤나? 손잡은 거 맞지?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아니라고 해 줘.
* * *
봄이는 ‘엘’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엘’은 이스마일의 애칭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형밖에 사용하지 않는 애칭 말이다.
여튼 봄이는 엘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이마에 예쁜 보석을 숨기고 있는 것도 그렇고, 눈이 초롱초롱한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누나 말입니까?”
“누나! 그래, 오늘부터 봄이는 누나야. 엘의 누나.”
누나잖아! 언니에서 타이틀이 하나 더 늘었다구!
이게 어른의 맛인가. 봄이는 실로 만족스러웠다.
그런 의미에서.
“떡볶이를 먹어야 해!”
“떡볶이?”
“떡볶이를 몰라?!”
“떡볶이가 무엇입니까?”
“빨갛고, 말랑말랑하고, 친구끼리 꼭 먹는…….”
봄이가 작은 머리통을 굴려 가며 설명해 보지만, 엘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힝, 떡볶이의 대단함을 가르쳐 주고 싶은데…….
이익, 안 되겠어!
결국 설명을 포기한 봄이가 덥석, 엘의 손을 잡았다.
“가자. 누나가 떡볶이 사 줄게!”
“네에?”
“틀림없이 좋아할 거야! 누나만 믿어.”
“저기, 저기요.”
“아빠아!! 나 엘이랑 놀러 갔다 올게!”
“자, 잠깐만요!”
이 시기의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 큰 건 흔한 일.
봄이는 왜소한 엘을 끌고 가다시피 방을 떠났다. 방문을 나서는 엘의 볼이 발그레 붉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