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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명가의 마왕님-161화 (161/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161화>

“흐응~.”

클래식이 울려 퍼지는 방 안. 여자가 거장의 명곡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붉은 양가죽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꼬는 여자. 마찬가지로 붉은 치파오 사이로 드러난 맨살이 육감적으로 보였다.

지이잉- 테이블 위에 있던 폰이 울리고.

슬쩍, 곁눈질로 문자를 보는 여자.

-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미스 반.

내용만 봐도 누구에게서 온 건지 짐작할 수 있었고, 여자는 같잖다는 듯 피식 웃는다.

“왕자님이 몸이 닳았네요.”

암살이 그렇게 쉬운 줄 아나.

목만 뎅겅 하면 그건 살인이지 암살이 아니다. 무릇 암살이란 철저하고 은밀해야 하는 법. 상당한 준비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하긴, 그래서 왕자님이겠죠.”

찰나의 순간, 여자의 눈에 혐오가 깃든다.

쟤가 배고픔을 알겠나, 생존을 걱정해 봤겠나.

평생을 스스로 쟁취해 온 여자의 입장에서 왕자는 철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우리 귀한 쩐주님이시니까 신경 써 줘야지.”

왕자를 위해 상황을 알아보려고 폰을 드는데.

그때.

탈칵-!

문고리가 돌아가며, 한 남자가 들어선다.

“…….”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정장을 입은 백인 남성. 이상할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한 남자였다.

여자가 리모콘으로 클래식을 끄고는 남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소식 기다렸는데 때맞춰 오셨네요.”

“…….”

“여전히 과묵하시네요. 앉으세요. 차는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커피? 보이차? 저는 보이차를 추천해요. 이번에 들어온 건 유독 향이 좋아요.”

“……돈은?”

“오자마자 돈 이야기예요? 여기, 차예요.”

남자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차를 보다, 슬쩍 옆으로 치웠다.

“난. 남이 준 것은. 함부로 먹지 않는다.”

“어머, 섭섭해라, 우리가 남이었나요. 저는 저희가 긴밀한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함께 의뢰도 꽤 했고요. 흐응~.”

“…….”

여자가 요염한 눈빛을 보냈지만 사내는 목석처럼 무표정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여자는 피식 웃는다.

“딱딱하다니까아~ 알았어요. 자, 여기.”

찻잔이 치워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통장. 남자가 눈웃음치는 여자를 무시하며 통장을 확인하는데.

“계산. 잘못됐다.”

적어서? 아니.

계약서에 쓰인 액수보다 훨씬 많았다.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눈썹을 까딱였다.

“세 명치고는 좀 많죠? 조금 더 넣었어요. 워낙 일 처리가 깔끔해서 말이죠. 표정 좀 풀어요.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본회’에서도 승인한, 아주 깔끔한 보너스랍니다. 보, 너, 스.”

“…….”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앞에 둘이야 그렇다 치지만 ‘스티브 보크’는 어떻게 처리한 거예요?”

“늘 하던 대로.”

“쳇, 비법이라 그거죠.”

스티브 보크라 하면, 한때 스타 히어로의 팀장으로 있었을 만큼 강한 실력자인데, 남자는 그런 이를 이렇다 할 잡음 없이 암살했다.

그것도 왕궁 한복판에서.

“당신 때문에 왕가가 발칵 뒤집혔어요. 누가 알았겠어요. 왕궁에서 사람이 죽어 나갈 줄은. 둘째 왕자는 부랴부랴 ‘대리인’을 찾고 있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스티브 보크 정도의 실력자를 찾기도 힘들뿐더러, 설령 찾았다 해도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곳에 오는 바보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후훗.”

“관심. 없다.”

“어머, 벌써 가시게요?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안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본회’에서 당신을 영입ㅎ…….”

“의뢰는 끝.”

“알았어요. 잘 가요, ‘쓰리(Three)’. 아니, 전 ‘쓰리’인가?”

“……!”

‘쓰리’란 단어에 통장을 품에 넣은 남자가 멈칫했지만, 이내 문고리를 돌리며 문을 나갔다.

닫히는 문과 함께 사라지는 인기척. 아마 이 근방에서 남자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으리라.

*   *   *

석유.

과거 전문가들 사이에서 석유가 마석을 대체할 연료로 언급되며 석유의 가치가 급부상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만 해도 심각했던 이야기. 세계 주식 시장과 선물 시장이 요동쳤고, 역사는 이를 ‘오일 쇼크’라고 기록한다.

나중에서야, 이게 헛소리라는 것이 밝혀졌다.

전문가와 몇몇의 작전 세력이 합작한 작품.

접근성이나 희소성, 모든 부분에서 마석의 효율을 따라올 수 없다는 결론이 나며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던 석유의 가치는 금세 꺼지게 됐고.

많은 이들이 한강에서 소주를 까며 석유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석유는 굳이 에너지원이 아니더라도 쓸모가 많다.

화학업이나 중공업, 하다못해 우리가 일상에서 입고 다니는 옷에도 석유가 들어간다.

다시 말해 석유의 소비는 꾸준했고, 가치 또한 여전히 보존된 상태.

이게 무슨 말이냐면.

유전을 보유한 산유국들은 여전히 막대한 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표적인 산유국이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였다.

……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

셰이드 왕조의 왕궁.

2왕비 파티마가 기거하는 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1왕비가 암살당하며, 2왕비는 사실상 셰이드 왕조의 정실로 불리게 됐다.

무능하지도, 그렇다고 유능하지도 않은 왕과는 다르게 2왕비 파티마는 야망이 있었고, 넘치는 야망에 걸맞은 명석함도 지녔다.

이런 그녀에게 자연스레 권력이 뒤따랐고, 2왕비 파티마는 이 기세를 몰아 자신의 장남인 ‘무함마드’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쾅-!!

“암살당했어요! 여기, 제 궁에서 암살당했다고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네? 다들 입이 있으면 말씀 좀 해 보세요!”

궁으로 모여든 이들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친 모습은, 흥분한 2왕비의 모습이다. 평소 온화하기로 유명한 그녀를 생각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비가 저렇게 흥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큰일 났다. ‘왕위 계승전’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주. 이 시간 안에 ‘대리인’을 구하지 않으면…… 무함마드는 끝이다.’

‘그저 그런 대리인을 구하는 것쯤이야 간단하지만…… 이번에는 왕위 계승전이야. 최소 스티브 보크 정도의 실력자여야 하는데…… 그게 쉽나.’

‘칼을 갈더니 4왕비가 결국 한 수를 냈구나.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미치겠군.’

왕위 계승전.

사우디 왕가의 왕위는 무조건 장남에게 계승되는 게 아니다.

신성시되는 숫자 5의 의미를 담아 왕위 계승 순위 5위까지 끊고, ‘대리인’을 세워 결투를 치른다. 그렇게 최후의 승자가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받는 것이다.

눈치 빠른 이는 벌써 눈치챘을 거다.

그렇다.

이번에 죽은 ‘스티브 보크’가 바로 여기 파티마의 장남, 무함마드의 대리인이었다.

이로써 무함마드의 대리인 셋은 모두 죽었다.

쨍그랑.

흥분한 파티마가 물 잔을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프랑스의 코쟁이가 사라졌을 때도 아무 말하지 않았어요. 아프리카 연합의 계집이 부상당하고 부족으로 돌아갈 때도 참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스티브 보크까지 암살당했어요. 제가 얼마나 참아야 되는 건가요.”

“…….”

“말씀을 하세요. 다들 벙어리가 됐나요? 아니면 여러분은 제가 왕위 계승전을 포기하기를 바라나요?”

“아닙니다!!”

“고정하시옵소서, 왕비시여.”

“절대로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모여든 대신들이 일제히 손사래를 쳤다.

여기 있는 이들 전부 2왕비파였고 2왕비가 왕위 계승전을 포기하는 순간 운이 좋으면 낙향, 아니면 숙청되어 저세상으로 향할 운명이었다.

사실상 2왕비와 운명 공동체.

“그렇다면 뭐라도 의견을 내 보세요. 이제 저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요?”

“새로운 대리인을…….”

“새로운 대리인 같은 뻔한 소리는 하지 마세요. 제가 바보인가요? 그건 이미 하고 있어요. 제가 여러분에게 원하는 의견은 뻔한 말이 아니라, 이 난관을 극복할 획기적인 방법이에요.”

“허…… 음…….”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침묵이 흐르는 자리.

“하…….”

파티마의 한숨이 유독 또렷하게 들려온다.

이 정도로 한심했었나. 이런 놈들을 데리고 왕위를 노린다는 게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그때, 이 불편한 침묵에서 대신들을 구해 줄 구세주들이 등장했으니.

“어머니, 흥분하지 마십시오. 건강에 해롭습니다.”

“어마마마…….”

첫째 무함마드와 늦둥이 막내인 이스마일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올해 28살이 되는 무함마드와 7살이 되는 이스마일.

솔직히 무함마드는 왕위 계승 순위를 떠나 이상적인 군주의 상이다. 파티마를 닮아 명석하고, 선왕의 몇 안 되는 장점인 포용력까지 지녔다.

굳이 흠을 찾으라면 초인이 아니란 게 유일한 흠인데.

사실 셰이드 왕가에서 초인이 왕위에 오른 적이 몇 번이나 있나. 이건 흠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결점이 없는, 이상적인 군주.

2왕비 파티마도 이런 무함마드의 능력을 알았기에 본격적으로 왕위 계승전에 참여한 거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의 등장에 한풀 꺾인 파티마가 손을 휘저었다.

“……잠시 휴식하지요. 다들 바람 좀 쐬고 오세요. 다시 올 때는 최소한 그럴듯한 의견 하나씩은 말해야 할 거예요.”

도망치듯 사라지는 대신들.

모두가 사라지자, 잔뜩 굳어 있던 파티마의 얼굴이 솜사탕처럼 스르르 녹더니, 금세 밝은 얼굴이 되어 이스마일을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왕자님들, 어쩐 일이십니까.”

“이스마일이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러언. 왕자, 이 어미가 보고 싶었습니까.”

수줍게 ‘……네에.’라고 속삭이는 이스마일.

귀여운 이스마일의 모습에 무함마드와 파티마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냥 즐거워할 때가 아니다. 이내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미소를 지웠다.

“보크 씨 암살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셨습니까.”

“네, 그래요. 미안해요, 왕자. 어미의 실수 때문에 왕자가 곤란해졌어요.”

“어머님의 실수가 아닙니다. 저라고 저쪽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줄 알았겠습니까.”

“까득. 그러게요. 4왕비, 그 더러운 년이 신성한 왕위 계승전에 독을 풀었어요.”

현재 유력한 계승 후보로 떠오른 세력은 총 셋이다.

첫 번째가 2왕비 파티마를 중심으로 한 무함마드파.

두 번째가 현 왕의 동생인 파이살 대공파.

마지막 세 번째가 4왕비 아샤를 중심으로 한 살만파

무함마드가 배다른 동생인 살만을 생각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 좋기로 유명한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일은 드문 일. 그만큼 살만은 개차반으로 유명했다.

“살만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아이의 잔혹성은 왕궁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니까요.”

“하, 대공파에서도 벌써 희생자가 둘이라고 하네요. 뿌리는 속이지 못한다는 선조님의 말씀대로예요. 어쩜 어미와 자식이 세트로 더러운지…….”

“왕위를 계승하는 자리이니만큼, 이 자리는 신성한 법인데. 자객을 쓰고 암살을 서슴지 않다니…….”

셰이드 왕가를 위해서라도 살만파에게 왕위를 넘기면 안 된다.

둘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오늘은 둘째가 오기로 한 날 아닙니까?”

“왕자, 그 아이 이야기는 하지도 마세요.”

“또 왜 이러십니까. 화 푸시기로 했잖습니까.”

“하, 그 가스나가 하는 짓을 보세요. 이 어미가 화가 안 나게 생겼습니까.”

둘째는 모처럼 태어난 왕가의 초인이다. 그만큼 왕과 왕비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원하는 것을 모두 누리며 살아왔다.

“왕자도 알 거예요. 그 기집애가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말에 제가 어떻게 했는지.”

“잘 알죠. 왕가의 어른들이 반대할 때 어머니가 직접 나서 한국 유학을 보내 줬잖습니까.”

“맞아요! 근데! 그런데!!”

이 망할 것이 몇 주 전에 소식이라고 전해 온 편지에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그것은 초음파 사진, 아기의 사진이었다.

“……뭐 어쩌겠습니까. 이미 임신했다는데요. 그리고 알아보니까 그 남자, 능력도 좋지 않습니까.”

“혈족이라 했죠. 그나마 어미가 참는 게 그 이유 때문이에요. 셰이드 왕가에 혈족이 섞인다면 엄청난 경사니까요.”

“맞습니다. 복이죠.”

“그래도 이번에는 참지 않을 거예요. 아주 따끔하게 혼내야지. 왕자도 이번만큼은 말릴 생각 마세요.”

“알겠습니다.”

무함마드는 안다.

말은 저래도 어머니의 둘째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지.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에 며칠째 안절부절하다, 왕가로 인사하러 온다는 소식에 왕실 전용기를 내줄 정도였다.

그때, 이스마일이 꼼지락대며 엄마를 올려다본다.

“어마마마, 누님 오는 거예요?”

“왕자, 누나가 보고 싶어요?”

“네, 누님 보고 싶어요.”

“이제 곧 볼 거예요.”

누나를 본다는 생각에 들뜬 것일까. 파티마의 품에서 이스마일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마치 ‘별’처럼.

*   *   *

그리고, 몇 시간 뒤.

이스마일 앞에 선 박기혁과 봄이는.

“아빠! 얘한테서 이상한 게 보여!”

“응? 진짜네? ‘성운’을 품었네?”

성운(星雲).

검왕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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