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59화>
이상할 정도로 일이 없는 날이 있다.
온 세상이 나를 향해 ‘쉬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날.
김연희에게는 오늘이 딱 그랬고,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유해련의 집으로 찾아가게 되는데.
“해쫑아, 나 왔ㅇ…… 너 뭐 해?”
“어, 왔어?”
쟤 뭐 하냐.
김연희의 시선에 종이를 잡고 낑낑대는 유해련이 보인다.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 색종이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인 저 종이는…….
“학 종이? 너 학 접어?”
“보면 몰라?”
“웬 학이야?”
“우리 손녀가 부탁해서 하고 있다. 너도 여기 와서 앉아서 도와. 옛날부터 손재주는 네가 더 좋았잖아.”
“그거야 네가 워낙 똥손이라…….”
잠깐만!
무심결에 대화하던 도중 퍼뜩 든 생각.
유해련의 자식은 아들 하나 딸 하나, 이렇게 둘이고 둘 다 결혼은커녕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
고로 저 망할 것이 말하는 손녀는 높은 확률로.
“……이년이 또 약을 파네. 봄이가 왜 네 손녀야. 걔 내 손녀야.”
“희땡스, 오늘도 시작이야? 이제 인정하자, 희땡아. 봄이도 나보고 ‘이쁜이 할머니’라고 하는데.”
“누구 마음대로.”
“일단 앉아. 학 접으면서 해. 봄이가 필요하대.”
“거기까지는 동의하지.”
여느 때처럼 시작된 봄이 쟁탈전.
자존심 강한 두 할머니의 승부가 펼쳐진다.
봄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며, 요즘 봄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봄이랑 어디를 갔으며, 같이 뭘 했는지.
“나는 봄이랑 지난 주말에 쇼핑 갔거든.”
“그게 언제적인데 아직도 그 이야기야. 지겹다 지겨워. 나도 지지난주에 갔거든.”
“지난 주말과 지지지지지난 주말과 같아? 아이에게 일주일은 세상이 바뀌는 시간이라고.”
“하! 얘 말하는 본새 좀 봐라? 야! 난 봄이 때문에 ‘캡틴 타이거’ 극장판에 투자도 했어.”
“어쩌라고! 꼴랑 돈 몇 푼으로 사랑을 사려고? 애들은 말이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중요한 거야. 멍청아!”
“이이이! 똥멍청이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믿기지 않을 거다.
한국 에이전트계의 공포라 불리는 옵티멈의 마녀가 ‘똥멍청이!’라 욕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고, 마찬가지로 한국 마법의 종주인 진룡가의 안주인은 ‘에베베베~.’ 하며 잔망스럽게 혀를 놀리고 있다.
대체 이 얼마나 하찮고 창피한가.
차를 들고 온 수행원마저 얼굴을 붉히며 나갈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나서야 만족한 두 사람.
두 사람이라고 이 하찮은 대화에서 무슨 의미를 부여하겠나. 그냥 흔한 친구 사이의 농담 따먹기지. 왜, 그런 거 있잖나. 그냥 아무 주제로 생각 없이 떠들다 보면 복잡했던 머리도 진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두 사람은 어지간히 즐겼던지, 개운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며 마무리했다.
아, 물론 봄이 이야기를 마무리한 건 아니다.
“곧 봄이 유치원 졸업인 거 알지? 초등학교 어디로 갈 건데.”
“음, 아직 고민 중인데.”
“어디 읊어 보시죠, 김 여사.”
“음…….”
김연희가 한동안 고민한 것을 친우에게 고했다.
“원래는 가까운 초등학교에 보내는 것인데…….”
보통의 방법이었고 그만큼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참고로 검호 3남매 모두 이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일까? 김연희는 이 보통의 방법의 치명적인 단점도 잘 알고 있었다.
저 나이 때의 아이들은 ‘재능’을 ‘다름’으로 받아들인다. 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친구를 피하며 배척하고, 나중에는 따돌리기까지 한다.
“……기혁이처럼 따돌림당할까 봐 걱정되네.”
“하긴, 봄이가 어지간히 특출해야지. 걱정될 만해.”
“그러다 봄이가 화라도 내면, 큰일 나.”
“음…… 맞아. 정말, 큰일 나.”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침음을 뱉는다.
박봄의 재능이 생각나서.
솔직히 봄이 봄이 하며 귀여워하지만, 저 쪼그만 아이에게 얼마나 어마 무시한 재능이 잠들어 있나.
저 재능의 일부만 개방해도 공포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박봄의 손짓 하나에 사람이 죽는다.
과한 말 같나? 절대 아니다. 박봄의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천사 같은 봄이가 누굴 때린다는 건 상상도 안 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또 모르니까.”
유해련이 끙끙대다 입을 열었다.
“그건 패스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다음은?”
“음, 다음은 사립 영재 학교에 보내는 거야.”
각 분야에서 영재들만 모이는 학교.
이 영재에는 ‘마나’를 빨리 깨우친 아이도 포함됐고, 이런 ‘마나’ 전형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따로 모아 기초적인 마법이나 검술을 조기 교육하기도 한다.
“여기라면 봄이도 편하지 않을까? 비슷한 애들이 많으니까.”
“나도 아는데, 거기 괜찮아. 우리 진룡 애들도 많이 들어갔거든.”
“그치…….”
결정의 무게추가 기울었음에도 김연희의 고민은 깊어졌다.
문제는 여전하니까.
강해도 너무 강하다.
규격 외의 강함.
영재 학교에 간다 해도 달라진 게 있을까.
그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야 이해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봄이는 겨우 그 정도 수준이 아니잖나.
겨우 마나를 각성한 아이들이 봄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무리다.
“너무 걱정하지 마. 기혁이가 잘 가르치고 있잖아.”
유해련의 위로에 김연희의 표정이 와락, 찡그려졌다.
“……그게 더 불안해.”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하아~ 뭘 부수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에이, 설마…… 아무리 기혁이라도 봄이 일인데.”
“그럴까? 그렇겠지? 기혁이도 정도가 있겠지?”
김연희와 유해련이 설마하며 서로 슬며시 웃음을 짓고 있던 그때.
그들은 몰랐다.
그 설마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 * *
송새벽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원래라면 오늘 이 자리는 온전히 송새벽만의 자리였다. 일본에서 받은 혈족의 정보를 취합해 송새벽에게 전수하려고 마련된 자리였는데…….
뜬금없이 박봄이 추가됐다.
“새벽아, 오늘 봄이도 함께할 거야.”
“내가 너무 방치한 것 같아. 가르칠 건 가르쳐야겠어.”
진유리의 말을 빌리자면, 박봄이 허접들에게 맞은 게 충격적이었단다. 걔들 전부 한때는 일본 최고의 재능이라고 평가받은 후기지수들이었는데, 박기혁의 눈에는 허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나 보다.
근데 당시 송새벽이 가진 의문은 이런 종류가 아니었다.
‘봄이라면…… 7살이잖아. 그 나이에 훈련받을 게 뭐가 있다고…….’
궁금했지만, 참았다.
그리고…… 기어코 봄이는 훈련용 게이트에서 새벽이에게 ‘안녕하세요.’ 배꼽 인사를 했다.
오늘도 귀여웠다. 절로 아빠 웃음이 지어졌다.
동시에 궁금했다.
대체 스승님은 봄이에게 뭘 가르치려는 걸까.
하지만 의문은 곧 풀렸다.
“봄아, 어젯밤에 아빠가 뭐라고 했지?”
“응! 내 몸은 내가 지켜야 된다 했어.”
“아빠가 평생 지켜 줄 거지만, 그게 봄이를 어리광쟁이로 키우겠다는 말은 아니야.”
“봄이는 언니야! 의젓해질 거야.”
“예전에 여행할 때 기본기는 배웠지? 오늘은 간단하게 ‘마법’을 모두 익힐 거야.”
“응! 열심히 할게요!”
벌써 기본기를 배웠다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짜 마법을 익히는 봄이. 정정하겠다. 이건 단순히 익힌다는 말로도 모자라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저장해야 한다고 할까?
박기혁이 마법을 펼친다. 박봄은 이를 스르륵 본다.
곧이어 박기혁이 펼친 마법이 그대로 재현된다.
완벽히 똑같이 말이다.
이게 끝이다.
“하…… 하…….”
보고 있는 송새벽도 믿기지가 않지만, 과장 하나 안 보태고 100퍼센트 진실이다.
마법을 배우는 게 이렇게 쉬운 것이었나. 자신의 친구들은 마법 하나 배울 때 기를 쓰고 공부하던데. 이 광경을 보여 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멀었는데…….
“마법은 계속해서 공부해야 해. 아빠가 또 뭐라고 했었지?”
“마법사의 공부는 끝이 없다!”
“그래, 이제 봄이도 마법사니까 세상이 주는 배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해. 할 수 있겠어?”
“응!!”
“자, 다음으로 가자. 이제 봄이가 좋아하는 ‘별’ 배울 거야.”
“드디어-!”
별이라면 박기혁의 아포칼립스를 말하는 건가. 아포칼립스가 무엇인가. 박기혁만을 위한 마법이 아닌가.
꿀꺽.
송새벽은 기대감에 손에 땀을 쥐고 둘을 주시했다.
그리고, 뜻밖의 장면을 보게 된다.
“봄이, 날개 펼쳐.”
“날개 변신!”
박봄의 뒤로 빛무리가 펼쳐지더니, 날개가 생겨났다.
손바닥만 한 하얀 날개.
아기 천사인 큐피트의 날개처럼 앙증맞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박봄.
이때, 이미 송새벽의 턱은 반쯤 열려 있었다.
“집중.”
“집중!”
“천천히 아빠의 마나를 따라와.”
“응.”
곧이어 박기혁이 박봄을 뒤에서 안고는 손을 잡고 펼쳤다.
두 사람은 손을 포갠 채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린다. 주문이 이어질수록 대기의 마나가 반응하고 있었다.
격하게 날뛰는 건 아니다. 차분하게, 또렷하게…… 종국에는 웅장하게 마나가 진동하고.
허공에 그어지는 선.
여섯 줄기의 선이 서로 교차하더니 육망성이 그러졌다.
박기혁의 시그니처인 육망성 마법진.
다만 봄이의 육망성 마법진은 박기혁의 마법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박기혁의 육망성이 깊은 어둠인 ‘심연’을 담고 있다면, 박봄의 육망성은 눈부신 빛인 ‘광휘’를 담고 있었으니까.
얼라이브(탄생:誕生)
Alive
……
…
위이이이이잉-!!
순백의 섬광이 터지며 숲이 ‘삭제’당하고 있다.
소리도, 징조도 없다. 대단위 마법처럼 화려한 폭발도 없다.
그저.
하얀 육망성 권역 안에 있는 모든 형질이 빛과 함께 삭제될 뿐이다.
“세상에…….”
송새벽은 눈을 비비며 사라진 숲을 봤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뻥 뚫린 숲.
이게 말이 되나.
얼이 빠진 송새벽의 눈이 이 상황을 만들어 낸 박봄으로 향했다.
“우와아!! 아빠아!! 봤어! 성공했어!! 봄이가 성공했어!”
“우리 봄이 잘했어!”
“헤헤헤. 봄이 잘했어? 대단해에?”
“고러엄. 대단해!”
빛이 줄어들고, 삭제된 숲을 확인한 박봄이 공중에서 박수를 친다. 주인을 칭찬하듯 앙증맞은 날개가 힘차게 파닥거렸다.
박기혁은 그 옆에서 유영하며 그런 박봄의 머리를 쓱싹쓱싹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송새벽은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작 7살이라고, 7살! 조금 있으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가 숲을 ‘삭제’시켰다.
물론 범위 마법이라기에는 조금 작지만 완성도만큼은 토를 달 필요가 없는 완성된 마법이었다.
아니, 아니지.
‘대관절 저게 마법이 맞긴 한가.’
솔직히 모르겠다.
아무리 송새벽이 무투계 초인이라지만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게 아니다. 한데 지금 박봄이 쓰는 마법은 처음 본다. 아니, 저런 마법은 보지도 듣지도 못 했다.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다.
“이제 다음. 되돌려 보자.”
“응응!!”
박봄이 박기혁의 품에 안겨 손을 뻗었다.
“되돌려라…….”
박기혁의 ‘아포칼립스’가 모든 것을 지우는 파괴를 담았다면, 박봄의 ‘얼라이브’는 탄생이라는 뜻답게 공격보다는 다른 쪽으로 발전했다.
바로 이처럼.
다시 광휘의 육망성이 그러졌다.
정확히 박기혁의 육망성과는 반대로 마법진이 완성되고.
그 순간.
얼라이브
Alive
사라졌던 나무들이 뿌리부터 생성되기 시작.
풀들은 이미 제 모습을 찾아 팔랑거렸고, 돌도 정확히 그 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빛무리가 사라졌을 때.
모든 것이 다시 되돌아왔다.
전과 똑같이.
아포칼립스의 반대편에 위치한 분신.
얼라이브(Alive).
이것이 박봄의 고유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