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56화>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 왔다.
새벽부터 눈을 뜬 진유리가 번쩍 몸을 일으켰다.
“으아아아…….”
헤어, 메이크업, 드레스……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야. 다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시간 없어.”
진유리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정신을 차리고는 힘차게 화장실로 향했다.
평소 게으르기로 유명한 진유리가 새벽부터 움직이는 이유.
언제나 그렇듯 박기혁 때문이지. 정확히는 ‘어머님’ 김연희에게서 온 한 통의 문자 때문이었다.
- 제가잘할게요어머님♡
유리야, 화족 측에서 기혁이를 꼭 만나고 싶다고 하네? 아줌마가 유리 좋아하는 거 알지?
일견 아무것도 이어지는 게 없는 문자 같지만, 박기혁 한정 눈치 100단인 진유리는 단번에 의도를 캐치해 냈다.
화족 측에서 기혁이를 꼭 만나고 싶다고 하네.
= 개수작을 부리려고 하네?
아줌마가 유리 좋아하는 거 알지?
= 아줌마가 유리 믿는 거 알지?
“그럼요, 어머님. 저만 믿으세요.”
착착.
화장실 거울에 비친 진유리가 물기 가득한 뺨을 때리며 전투력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 고조된 전투력을 고스란히.
“엄마! 엄마아!!”
엄마 깨우기에 쓴다.
진유리가 자고 있던 유해련을 흔들어 깨웠다. 아직 해도 안 뜬 새벽인데 손길에 인정사정이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워낙 야전 생활을 오래했던 유해련답게, 그녀는 잠귀가 밝다. 진유리가 방문을 열 때부터 이미 수면 안대 아래에 있던 그녀의 눈은 떠 있는 상태.
“엄마아아! 일어나아아아!!”
수면 안대를 살짝 옆으로 들춰 딸을 바라본다.
“왜.”
“엄마! 일어날 시간이야!”
“…….”
유해련이 슬쩍 시계를 본다.
5시 55분. 기가 막히네.
“진유리, 지금 몇 시야.”
“곧 있으면 6시야.”
“……장난해?”
“내가 엄마한테 장난을 왜 해! 지금 나가서 머리하고 화장 받고 옷 사면 거의 3시라고. 봄이 데리고 기혁이 만나러 가면 빠듯하단 말이야. 어서 일어나! 약속했잖아!!”
“…….”
진유리의 말대로 유해련이 약속하긴 했다.
중요한 약속이 생겼는데 입을 옷이 없어도 너무 없다. 볼 사람도 없고 같이 가 주라, 엄마.
이렇게 말하는데 어느 엄마가 거절하겠나? 당연히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데…….
이 새벽에 가자고 할 줄은 몰랐지.
‘이걸 죽여, 살려?’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나는 상황이지만, 저 망할 것은 자신의 작품이다.
견뎌라, 유해련.
견뎌야 한다.
“알았어. 나가 있어. 엄마 준비하고 나갈게.”
“응응! 양치만 하고 와! 어차피 숍에 가잖아. 나는 시동 걸어 놓는다아~.”
“……오냐.”
유해련은 ‘어디까지 가는지 해 보자.’라는 표정이었지만, 이걸 신경 썼으면 진유리가 진유리겠나.
결국 새벽부터 진룡산을 나오는 모녀.
“……그래서, 희땡이가 보낸 문자 때문에 이러고 있다고?”
“응.”
“줘 봐. 어디 한번 보자.”
“아! 엄마아! 남의 폰을 왜 보려고 해.”
“쓰읍! 봐야 알지. 잠깐만 기다려 봐…….”
유해련은 ‘잠깐’을 반복해서 말하며 기어코 딸의 폰을 빼앗는다.
‘제가잘할게요어머님’…… 김칫국을 한 사발로 들이켰다. 대체 이것은 누굴 닮아서 이렇게 뻔뻔한지.
“내용은 별거 없네.”
“어때. 싸하지? 내가 맞지?”
“맞아.”
진유리는 순전히 감으로 싸했겠지만, 유해련은 일본의 폐쇄적인 화족 문화를 잘 안다.
“100퍼센트 혼인 동맹이야.”
“그럼 그렇지! 느낌이 싸하다 했다니까!”
“일본 쪽 애들이 원래 그래. 자기 가족 아니면 못 믿거든.”
“그래서 나의 기혁이를 꼬드기겠다?”
“걔들 입장에서 보면 최고의 선택이지.”
현재 국내에 있는 일본 화족 동맹 입장은, 한마디로 낙동강 오리알. 사자성어로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이다.
“인연도 없던 타지에 가문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정착했어. 말이 통해, 문화가 같아. 매일이 막막할 거야.”
“막막하긴, 화족들 부자로 유명하잖아. 돈도 많은데 뭐가 문제야.”
“돈이 다가 아니란다. 재산이 많아 봤자 그건 일반인 기준이지. 왕처럼 군림했던 과거만 하겠니. 아니, 아니지. 급박한 상황이라 가산을 제대로 정리 못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진짜 절박하긴 하겠네.”
“그래서 답답한 상황을 풀 답이 박기혁이다?”
“기혁이는 검호니까.”
진룡과 검호.
한국을 대표하는 혈족.
이들과 혈연으로 묶인다면 기반을 잡는 것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다.
“짜증 나…… 그냥 일본으로 돌아가면 안 돼? 어쨌든 걔네들이 당한 게 셀루티스 때문이라며, 셀루티스 사라졌으니 다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야.”
“뭐, 틀린 말은 아니야.”
근데 정답도 아니다.
진룡의 안주인으로서 대외 업무를 담당하는 유해련이 보기에, 일본 국민이 화족에 가진 불만은 이미 극에 달했다.
화족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단지 지역 사회에 확고한 기반을 가졌기에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섞어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근데, 지금은 어떠한가.
모든 기반이 무너졌다.
돌아가면 이전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까?
쉽지 않지.
“셀루티스가 한 것은 단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뿐이야. 모든 게 업보지.”
업보(業報).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뿌린 대로 거둔 것이니.
차창으로 유해련의 차가운 표정이 비치고 있었다.
* * *
“우리는 피해자입니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뭘 얼마나 잘못했습니까. 돈이 많은 게 죄입니까? 혈족으로 태어난 게 죄입니까.”
개소리.
“화가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태어나 보니 혈족이었고, 이미 선대에서부터 가진 게 많았을 뿐입니다. 가진 것을 누리지도 못 합니까? 안 그래요.”
“말이야 바른말이지, 저희 같은 혈족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합니까.”
이것도 개소리.
“옳습니다! 안보에 힘쓰지, 초인 양성에도 힘쓰지. 우리 혈족들이 중심을 잡고 있으니 초인 산업도 발전할 수 있는 겁니다.”
“뭣도 모르는 비초인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저희보고 탐욕스럽다 하는데, 정작 탐욕스러운 건 쥐꼬리만 한 세금을 내면서 요구만 하는 저들 아닙니까.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이랑은 이야기가 안 되는 겁니다. 이잉.”
“검호의 일원인 박기혁 군이라면 누구보다 저희를 잘 이해하실 거라 믿습니다.”
마지막까지 개소리다.
심지어 개소리를 하면서 동의까지 바란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화족 동맹 인물들. 그들은 자신들을 화족 동맹의 중역들이라 말하며, 나를 잡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해 내는 중.
이 순간 가장 압권인 건, 저들은 자신들이 죽어도 옳다고 믿는 거다. 심지어 몇몇은 신념까지 보이며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이 정도면 개한테도 미안할 지경이네.
이런 생각은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송새벽도 비슷한 모양.
선글라스를 쓴 송새벽은 상상 이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화족 동맹의 모습에 질릴 대로 질린 것 같았다.
밑바닥까지 보여 주겠다는 약속은 지킨 것 같긴 하네.
계속 불만이 이어지고, 나는 이제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감상하고 있는데, 다행히 눈치 있는 이들도 있던 모양.
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을 알고 사람들을 말렸다.
여기 이 젊은 사람처럼.
“그만하시죠, 선배님들. 손님을 모셔 놓고 저희끼리만 이야기하다니요. 이 무슨 추태입니까.”
평소라면 눈치 빠른 이 남자를 칭찬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난 이 남자를 도저히 좋게 봐줄 수 없다.
얘가 바로 송새벽의 어머님을 버린 가문인, 오니 가문의 현 가주거든.
아무튼.
“말 잘했네. 이름이 오니 요시나오라 했던가? 고마워.”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건 없어. 너는 나중에 따로 볼 거니까.”
“……?”
의문을 남기는 녀석을 뒤로한 채, 다른 이들을 눈에 담는다.
나이 지긋한 노인도 있고, 아줌마, 아저씨…… 30대로 보이는 청년과 어른 사이의 애매한 나이들도 있다.
하나, 내 눈에 비친 저들은 똑같다.
병X들.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은 병X들이다.
“하고 싶은 말은 다했어?”
“……?”
“다했냐고.”
“저기…… 박기혁 씨, 아무리 그래도 반말은 좀…….”
“아무리 그래도 나이라는 게 있는데, 말은 높이시는 게…….”
“얼씨구?”
지들이 말할 때는 아주 모터 달린 듯 떠들더니만 나한테는 예의를 찾고 앉아 있네. 이게 일본식 예의범절인가, 아니면 화족의 상식인가.
만약 후자라면.
“망할 만하네.”
“……!!”
“뭐 좀 물어보자. 너희들 부끄럽지도 않아? 왜 이렇게 당당한데?”
과격한 전투 방식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데, 난 굉장히 신중하다. 싸움에 들어가기 전에 철저히 조사하고, 아군과 적군을 판명, 만약 사건이 있다면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판단한 뒤에 움직였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본 화족 동맹은.
악이다.
“너희는 자꾸 너희가 피해자라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 너희나 셀루티스나 똑같아.”
내 오랜 경험상 나쁜 놈의 경중을 나눌 필요는 없다. 일단 나쁜 놈은 전부 나쁜 놈이다.
신앙과 믿음을 이용해 사람을 농락하는 셀루티스나.
무력과 권력, 금력을 독차지해 사람들을 착취하는 화족 동맹이나.
똑같다.
“무슨 그런 망발을!”
“말 다했습니까!”
“아니,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닥치고 듣기나 해.”
후쿠오카에서 도쿄로 가는 도중 지나친 지역에서 화족을 좋게 말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어떤 사람은 너희를 보고 지배자라 했어. 어떤 사람은 너희를 보고 왕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주인님이라고도 했지.”
“근데 공통적으로 빠트리지 않는 내용이 있었다. 그게 뭐냐면.”
“너희가 개자식이란 거지.”
불만이 있어도 말할 수 없다 했다. 불만을 내비치는 순간 작게는 따돌림, 크게는 부당 해고처럼 생계를 위협받게 된다.
힘으로 짓누르고, 돈으로 목줄을 매는 비열한 수법.
난 이런 족속들을 많이 봤다. 과거 제국의 귀족들이 꼭 저랬다.
쥐꼬리만 한 힘으로 사람을 멸시하고 착취하는 자들.
약자의 고통으로 스스로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반대로 자신보다 강한 이에게는 바짝 엎드려 아부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들.
제국의 귀족들이 꼭 저랬고, 그래서 내가 귀족들을 싫어했다.
“전 국민이 너희를 싫어해 들고 일어났어. 적어도 반성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남 탓, 남 탓. 전부 바보 같은 사람들의 잘못. 아까 뭐라 했지? 우리가 중심을 잡아 준 건데, 알지도 못하면서 주절주절.”
“이게 너희들이 말한 긍지고 명예야? 쪽팔리지 않아?”
물론 일부 명예로운 귀족들도 있다.
베풀 줄 알고, 나눌 줄 알며, 사람 무서운 줄 아는 그런 자들.
그러나 적어도, 지금 내 앞에서, 자신들은 그런 이들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저들은 아니었다.
“니들이 그런 이들과 달랐다면 여기에 앉지도 않았어. 이미 일본에 있지.”
“너희들도 아는 거잖아. 지금 가 봤자 환영받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시간이나 때우는 거지.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가려고.”
“왜, 내가 틀렸어? 틀렸다면 말해 봐. 어디 들어 보자.”
나의 무자비한 팩폭에 방 안이 싸늘해졌다.
중간까지는 극렬히 저항하며 내 말에 토를 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지막이 되어서는 그냥 닥치고 내 말을 들었다.
아니, 들어야만 했다.
내 마나가 저들을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내가 여기 왜 왔게? 너희들 상판이 궁금해서야. 대체 어떤 새끼들이 일본에 똥을 싸질러 놨나, 정말 궁금했거든.”
“솔직히 난 너희들이 나를 만나고 싶다기에 사과하려는 줄 알았다. 내가 너희들이 싼 똥 치우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냐. 염치가 있다면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그렇게 왔는데, 한다는 소리가 개소리, 개소리…… 죄다 개소리야. 아오, 씨X. 욕 나오네.”
말하다 보니까 화나네. 따지고 보면 봄이랑 함께 못 했던 것도 얘들 때문 아닌가.
분노에 진심이 섞이자 마나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여기저기 기물이 흔들리다, 이제는 방 안에 있던 기물들마저 흔들렸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스승님.”
송새벽의 목소리에 나는 ‘후…….’ 하고 과장되게 한숨을 뱉고는 마나를 거뒀다.
그리고.
“너. 너만 남고 다 꺼져.”
한 명만 남고 다 내보낸다.
이제 방 안에는 나와 새벽이, 그리고 단 한 명이 남은 상태. 그 한 명은 아까 오니 가문의 가주라고 불리던 사내였다.
“저는 왜…….”
“아…… 너는 사과할 게 남아서.”
“사과라면…….”
내 눈짓에 새벽이가 선글라스를 벗고, 곧이어 드러난 눈을 본 사내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왜냐하면, 자신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기이할 정도로 검은 동공.
오니 가문의 ‘요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