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55화>
월요일 오전.
오랜만에 봄이를 씻겨서 유치원까지 데려다준다.
차를 타는 봄이 얼굴은, 좀 별로다. 오랜만에 유치원 가기 싫다며 아침부터 땡깡을 부리다 할머니한테 따끔하게 혼나서다.
힐끔 조수석을 보니, 우리 봄이 볼따구니가 빨갛다. 어지간히 심통이 난 모양.
“……할머니 미워.”
“할머니는 봄이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그래두…… 봄이는 아빠랑 있고 싶은걸.”
웃음이 나온다.
주말 내내 한 몸이 되어 있던 우리인데.
나는 움직이기 귀찮아 뒹굴뒹굴, 봄이는 아빠 배에 누워 뒹굴뒹굴.
거실에는 온통 장난감 블록이 널려 있고, 만화는 얼마나 많이 봤는지 주제곡이 환청처럼 들릴 정도다.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었다. 처음에는 시켜 먹을 뻔했는데 때마침 진유리가 ‘이럴 줄 알았다.’며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더라.
짜식, 센스가 있어.
어쨌든 이렇게 아빠 껌딱지가 되었던 봄이인데, 이 욕심꾸러기는 아직도 성에 안 차나 보다.
드디어 유치원 앞에 도착한 차.
오랜만에 보는 아줌마들과 간단히 인사하고는 봄이 앞에 쭈그려 앉는다.
“……다녀올게요.”
“수업 재미있게 듣고, 친구들이랑 잘 놀고, 밥 많이 먹고.”
“응…….”
봄이 얼굴에 기운이 없다.
기운 없는 봄이…… 귀여워.
“유치원 마치면 아빠가 데리러 올게.”
“……지, 진짜!”
우울한 봄이의 눈이 한순간에 번쩍 뜨인다.
“아빠, 오늘 봄이 데리러 올 거야?”
“고럼!”
“진짜지? 정말이지? 약속했지?!”
“진짜지! 정말이지! 약속했지!!”
아빠가 왔으니 당연히 데리러 오는 게 맞는데, 우리 봄이는 이게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좋아라 한다.
이게 당연한 건데…….
젠장…….
당분간 오래 나다니지 말아야지. 미안해 죽겠네.
안 되겠다. 이 기분으로는 도저히 못 쉬겠다.
깜짝 선물을 조금 앞당겨야겠다. 빨리 집에 가서 준비해야지.
나는 그길로 집으로 돌아와 연구실로 향했다.
* * *
이것저것 다 떠나, 개인적인 측면에서 이번 일본행은 내게 많은 것을 선물해 줬다.
한번 정리해 볼까.
“첫 번째는 일본의 유명 혈족에 대한 자료.”
근데, 왜 내가 찾아와야 준다는 거야…… 어쨌든 각설하고.
사실 이건 내 제자 새벽이를 위해서 어머니에게 부탁한 거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혈족 ‘오니’를 제대로 가르쳐 주려는 뜻으로.
혈족 정보란 게 엄청난 가치를 지닌 건 사실이지만, 이걸 활용하는 건 절대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혈족의 피를 이어받아야 하지 않나.
혈족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마땅히 쓸데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어머니 입장에서는 혈족들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고, 이를 목줄로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거래를 한 것이었다.
그랬는데.
“상황이 달라졌단 말이지.”
활용할 방법이 생겼다.
일본이 저 꼴이 나면서 의도치 않게 저 혈족의 정보가 중요해진 것이다.
“의도치 않은 소득이었지.”
연구실 지하, 거의 운동장만 한 크기의 공간.
원래는 지하 대련장으로 쓰였던 곳이 내 부탁으로 비워져 있었고, 대신 그 빈자리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은.
시체.
하얀 날개를 달고 있는 타천사와 구원자의 시체들이었다.
두 번째 수확물.
타천사와 구원자의 시체. 정확히는 ‘혈족들을 배터지게 처먹은 타천사와 구원자’다.
죽어 시체가 됐지만 혈족의 정보는 어디 가지 않는다.
물론 죽은 시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지극히 제한적이라, 겨우 해석이나 하면 다행인 정도지만.
지금의 경우는 다르다.
많잖아? 엄청 많잖아?
이번 일본행에서 내가 얻은 타천사와 구원자의 시체들만 해도 네 자릿수는 가뿐히 넘는다.
0.1퍼센트에 1000을 곱하면 100퍼센트가 되는 것처럼.
극미량의 정보라도 이 정도로 숫자가 많으면 완전한 하나를 만든다.
절대 불가능이 아니다.
그래서 정보를 완전한 혈족으로 재구성하면.
“봄이 줘야지.”
내가 뭣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도 이 시체들을 차곡차곡 회수했는데. 다 봄이 선물로 주려고 한 거였다.
물론 여기서 고려해야 할 부분은 있다.
이미 봄이 안에는 검호를 제외하고도 16개의 혈족이 숨 쉬고 있고, 위그드라실이 준 ‘조화의 열매’로 겨우 안정되어 있다.
여기에 이 혈족들을 집어넣는 건, 미친 짓이다. 설마 아빠인 내가 금쪽같은 내 새끼에게 그런 짓을 하겠나.
“다 방법이 있지.”
말 나온 김에 작업해야겠다.
이건 어차피 하루 이틀 만에 완성되는 선물이 아니니까.
“버찌야, 데려와.”
“냐아아앙-!(응, 아빠).”
책상에서 나를 구경하던 버찌가 문밖으로 나가더니, 곧이어 제 몸보다 훨씬 큰 슬라임을 데려왔다.
포실포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무한의 그릇.
봄이의 마룡기 ‘박포실’ 되시겠다.
“이거 먹어.”
포실포실.
포실이가 슬렁슬렁 움직여 타천사 한 마리를 집어삼켰다.
잠시 뒤 파르르 떠는 박포실. 몽실몽실한 표면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타천사를 차곡차곡 소화시켜 나갔다.
이렇게 포실이를 이용해 타천사를 흡수하면, 내가 정보를 정제, 가장 순수한 혈족의 조각을 모아 완성해 봄이에게 차근차근 전달해 줄 생각이다.
아빠의 미래 대비라고나 할까.
“20살이 될 때면 여기 있는 혈족 다 소화할 수 있겠는데.”
뿌듯해라.
이건 대충 이렇게 처리하고.
이제 세 번째로 넘어간다.
세 번째 수확물이 뭐냐면, 장식장 한쪽에 주르륵 세워져 있는 물건들이었다. 조각상에, 의문의 책, 촌스러운 모양의 넥클리스도 있고, 빨간 보석이 박힌 브로치도 있다.
그런 가운데 굉장히 낯익은 물건도 보이는데.
철제 갑옷과 메이스.
내게 목이 뚫린 대사제가 입고 있었던 성(聖)갑과 성(聖)무기였다.
그래.
여기 있는 건 전부 성물이었다. 셀루티스가 만들어 낸 성물들.
“광신이든 우상이든 상관있나.”
다이너마이트도 원래는 채석장이나 건축용처럼 인류에 도움을 주려고 만들어졌다 배웠다. 인간의 욕심이 이를 살상용 폭약으로 만든 것이고.
이처럼 물건은 죄가 없다. 물건을 사용하는 인간이 문제다.
“적당히 가공해서 봄이 거 하나 맞춰 주고, 새벽이 무기도 하나 만들어 주면…….”
정 안 되면 마룡기 만들 때 재료로 써도 되니까, 여러모로 활용도 높은 게 성물이었다.
“자, 이제 마지막.”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앞서 말한 소득도 엄청나지만, 이거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딱!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기자 지하 천장과 바닥에 육망성 마법진이 생성되고, 두 개가 이어지며 원통형 공간이 완성됐다.
아포칼립스로 만들어진 감옥.
이곳에 투옥 중인 존재.
시작을 뜻하는 알파와, 끝을 알리는 오메가였다.
둘이지만, 사실상 하나나 다를 바 없다. 오메가는 알파에게서 파생된 신체 일부 격이니까.
실제로도 아크 엔젤의 모습을 한 오메가는 영혼이 빠진 듯 멍청하게 앉아만 있고, 대화는 알파가 모두 했다.
“……나를 어쩔 셈인가.”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강철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알파.
저게 알파의 실제 모습이다. 내 심상 세계에 갇히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고민 중이야.”
“인간, 내가 고민을 덜어 주겠다. 차라리 나를 풀어 줘라. 나를 이용한다면 네게 모든 부와 명예를 모두 주겠다.”
“…….”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라 인간. 네가 날 제거한다고 무슨 이득인가? 없다. 힘을 얻는 것도 부를 누리는 것도 아니다. 내 정체를 까발린다면 잠깐의 명예는 얻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금방 잊힐 거다.”
“…….”
“네가 날 제거하지 않고 생포한 데는 이런 이유가 반드시 포함됐을 거다. 너는 힘을 가졌고, 굉장히 합리적이니까.”
“내가 좀 합리적이지.”
“맞다. 그러니 나랑 손을 잡고…….”
“합리적으로 널 어떻게 개조하면 우리 봄이가 좋아할까?”
“……머…… 뭐?”
황당해하는 녀석을 보며 나도 같이 황당해한다.
“뭘 놀래? 왜, 설마 내가 널 그대로 놔둘까 봐?”
“……?!”
“인마,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사람도 이런데, 하물며 몬스터인 너는 오죽하겠냐.”
“아니다! 나는 몬스터 따위가 아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너 인간 먹었잖아.”
한번 인간에게 입을 댄 몬스터는 반드시 다시 인간을 찾는다. 왜냐하면 그게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길이니까.
내 말에 분노하다, 이내 실망하고 체념하는 알파.
얘 봐라. 하는 짓이 여우네.
비웃음이 걸린다.
“같잖은 연기 집어쳐. 너 거기서 나오면 또 통수 치려는 거 다 아니까.”
내가 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
이놈은 기간트 손에서도 도망간 놈. 같은 짓을 또 저지르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런데 난 얘를 봄이한테 선물해 줄 작정이거든,
“난 말이야, 기간트처럼 물렁물렁하지 않아. 기간트야 도망을 가든 뭘 하든 그것마저도 ‘재미’니까 넘어갔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내 심장 같은 봄이다. 일말의 위험 요소도 용납할 수가 없다.
내 뒤에서 거인의 상체가 드러나더니 우악스럽게 알파를 휘어잡는다.
그러고는.
“먼저 더러운 영혼부터 세탁하자.”
“……!!”
거인이, 집채만 한 거인이.
알파의 머리로 몸을 욱여넣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 * *
두근두근! 두근두근!
째깍째깍.
홀쭉이 초침이 움직일수록 봄이의 심장이 요동쳤다.
3초, 2초, 1초.
드디어 수업 끝!!
만세~!
제일 먼저 나가기 위해 호다닥 달렸다.
조심하라는 선생님의 말이 들리지만…… 죄송해요, 선생님. 봄이가 지금 좀 급하거든요.
신발을 신었다. 앙증맞은 발을 야무지게 집어넣는 봄이.
저 문 너머에 아빠가 있다.
확실하다. 벌써부터 아빠 냄새가 나잖나. 봄이는 아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내일 뵙겠습니다아!”
의젓하게 배꼽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두두다다다닥-!!
“아빠아아아!”
“봄아!”
아빠의 품에 폭 안기는 봄이.
날아갈 것만 같아.
기분 탓만은 아니다. 진짜 반쯤 날고 있어서 그런 거였다.
거구의 박기혁이 번쩍 들어 올리자, 세상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봄이.
역시.
“아빠 최고!”
“아빠 최고야?”
“응, 아빠는 봄이한테 언제나 최고야.”
행복해. 아빠 품에 안긴 봄이.
포근한 아빠 냄새가 가득하다. 최고야.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 했던가.
행복 위에 더 큰 행복이 있었으니, 박봄이 아빠의 손을 잡고 문을 연 순간.
“우……! 우와아아아……!”
모야모야! 이게 뭐야!!
박봄의 눈앞에 있는 것은 천사였다. 말로만 천사가 아닌, 하얀 날개가 있는 진짜 천사.
그것도 하나가 아니야! 둘! 둘이나 있다구!
믿겨지지 않는지 연신 눈을 비비는 봄이. 맞아. 엔젤 타이거를 닮은 천사가 확실해!
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이게 선물이 맞나요?! 맞다고 해 주세요. 간절하게 눈빛을 보내자, 박기혁은 씨익 웃는다.
“아빠가 말했지? 기대하라고! 이제부터 얘들이 봄이의 ‘날개’야.”
“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박기혁의 품으로 달려드는 박봄.
“나도 날개가 생겼어! 이제 검만 들면 봄이도 엔젤 드래곤이야!”
“어이쿠, 아빠가 조만간 검도 만들어 줄게.”
“진짜지?!”
“진짜지!”
“정말이지!? 약속했지?!”
“정말이지! 약속했지!!”
“꺄아아악! 아빠아!”
쪽쪽쪽.
입술 펀치가 이어진다.
너무 강력해 정신을 못 차리는 박기혁. 몽롱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 버린다.
“봄이 좋아?”
“응, 너무너무 좋아.”
“봄이가 좋으니까 아빠도 좋아.”
“헤헤. 내가 더 좋아!!”
배시시 웃는 봄이.
얘가 천사가 아니면 누가 천사일까. 이 앞에 천사인 인형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윽! 안 되겠다. 일어나야지. 이렇게 하루 종일 문 앞에 있겠어.”
“봄이는 아빠랑 같이 있으면 상관없어.”
“……봄이 못 본 사이에 더 강해졌구나.”
“히히.”
“그래도 안 돼. 손 씻고 밥 먹어야지. 대신 밥 다 먹으면 아빠가 ‘날개’ 쓰는 법 가르쳐 줄게.”
“응! 할래.”
박봄이 박기혁의 넓은 등짝에 찰싹 달라붙었다.
떨어지지 않겠다는 기세로 말이다.
……
…
<봄이의 일기>
봄이는 아빠가 좋다.
선물을 준 것도 아빠라서 좋다.
같이 노는 것도 아빠라서 좋다.
아빠랑 함께한다면 무엇이든 다 좋다.
봄이는 그냥 아빠가 최고 최고 좋다.
-끝-
* * *
한편, 송새벽은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겨 있는데.
- 송새벽이, 잘 지냈어?
오늘 점심에 온 전화. 발신자는 그의 스승인 박기혁이었다.
반가웠다.
안 그래도 자신 때문에 일본이랑 엮인 게 아닌가, 걱정되고 궁금했는데 이렇게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자 안심이 됐던 송새벽이었다.
그런데, 문제의 발언은 이때 시작됐다.
- 너, 보여 주고 싶다 했었지. 너희 부모님을 버린 자들한테.
“아버지와 어머니를 버린 자들에게, 똑똑히 보여 줄 겁니다. 당신들이 버린 자들의 아이가 이렇게 강해졌다는 것을, 제가 보여 줄 겁니다.”
- 내일 시간 비워 놔. 복수가 얼마나 달콤한 건지 알려 줄 테니까.
복수.
복수의 시간이라……
그날, 송새벽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