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53화>
오랜만에 포위된 상황.
객관적으로 보자면 위급한 상황이 맞다. 아마 이 세계에 들어와서 가장 위급한 상황일 거다.
그런데 이상하다.
가슴은 뛰는데, 정작 마음은 평온하다.
달려드는 창칼에 집중을 하는데도 머릿속은 과거로 돌아간다.
내가 제대로 검을 쥔 날.
스켈레톤을 강화시키기 위해 ‘습득’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짜고짜 마탑 소속 용병을 찾아갔던 날인 것 같다.
“근접전을 잘하는 비결요? 흠, 도련님은 마법사 아니신가. 어차피 후방에서 마법으로 지원할 건데, 굳이 미천한 저에게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가르쳐 드립죠.”
“절대 눈을 감지 마십시오. 쫄면 뒤지는 겁니다.”
눈만 떠도 7할은 살아남는다.
이름도 모를 용병의 조언이었지만, 나는 허투루 듣지 않았다.
새삼 그때를 생각하며 눈을 똑바로 뜬다.
정면에는 여전히 대사제 3인방.
하늘에서는 아이스 쉬프트로 만들어진 사슬낫이 어지럽게 쇄도했고, 옆에는 정예 사제들이 독을 뿌려 댄다.
전후좌우.
모두 막힌 상황이지만, 또렷이 뜬 내 시선에는 보인다.
저기 오른편 골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이 얼어 있는 사제가.
저기가 길이다.
바로 발차기로 가격한다. ‘안 돼.’라는 두 글자를 완성하지도 못 하고 터져 죽는 사제. 나는 곧장 골목 안으로 뛰어들며 일직선상으로 마귀를 찔렀다.
검호류 쾌검술
섬광 꿰뚫기
찌르는 힘으로 자연스레 투척.
내 손에서 쏘아진 마귀가 내 앞에 있던 적들을 모조리 꼬치로 만들었다.
쉴 틈이 없다. 달리자.
곧바로 마귀를 뽑고는 하늘로 뛰어올랐다. 발아래에 마법진이 발현, 마법진을 밟고 옥상으로 올라 다시 달린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배운 거였다.
달리는 거.
“기사의 덕목 중 가장 첫 번째가 뭐인 줄 아십니까. 검술? 아닙니다. 기사도? 하하. 물론 중요합니다만 아닙니다.”
“기사의 덕목. 그 첫 번째는 체력입니다.”
“이 무거운 갑옷을 입은 상태로 다리를 멈춘 순간, 갑옷은 관짝이 되는 겁니다.”
멈춘 기사는 죽은 기사다.
한창 전투술에 심취해 기사들을 쫓아다닐 때 배웠던 내용이다.
은퇴한 황실 근위기사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꽤 강했었다.
아, 참고로 이 양반이 자연의 마나를 느끼려면 맨살로 느끼는 게 최고다, 라고 말한 양반이다. 덕분에 나는 발가벗고 몇 년을 보내며 마왕과 괴물 이전에 ‘변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었다.
달린다.
더 빨리. 더 멀리.
호흡이 닿는 데까지.
정확히 일직선상으로 뚫고 달려갔다.
적이 있으면.
베고.
뭉개고.
바스러뜨린다.
“막아!”라는 소리가 “모…… 못 막아!!”라는 절규로 바뀔 때까지, 나는 달리며 적을 지워 나갔다.
“개싸움. 이 형님이 개싸움 전문이지. 잘 들어. 개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약한 놈부터 조지는 거야. 그, 뭐라더라? 이거 유식한 말로 있잖아. 맞다. 약자멸시. 약자멸시!”
“약한 놈부터 차례대로 담궈. 제일 약한 놈을 담그지? 그러면 그다음으로 약한 놈이 제일 약한 놈이 되는 거야. 그렇게 차례대로 올라가면, 나중에는 대가리도 제일 약한 놈이 돼 있어.”
“공포는 최고의 무기야.”
“큭.”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던 용병왕이 생각난다. 애가 좀 모자라지만 착하긴 착했어.
그럼 공포를 이용해 볼까.
계속해서 달리면서 정보를 취합한다. 스켈레톤 군단에게 전해지는 정보 중 약한 놈. 약한 놈들을 찾아냈고.
마침내 망토 ‘전우’를 휘날린다.
휘날리는 ‘전우’가 내 몸을 가리길 잠시.
바로 시야가 점멸하며 하늘 위에 있는 나.
현재 나를 공격하는 놈들 중 가장 덜떨어지고 약한 놈. 타천사들부터 조진다.
마치 타천사에게 업힌 형국.
녀석의 등 뒤에 올라탄 난 마귀를 단검으로 교체, 녀석의 목에 갖다 댄다.
그리고 검날이 목에 닿는 순간, 인근의 타천사들 등 뒤에서는 스켈레톤들이 소환돼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단검을 빼 들었고.
검호류 발검술
단두대
푸쉬시시식-
한 부대의 타천사가 목을 잃고 추락했다.
올라온 김에 혼란을 부추기자.
제물도 넘치니 아공간에서 절규하는 녀석들을 깡그리 모아 큰 거 한 방 떨어트린다.
마법진이 내 손을 떠나 구름 위로 솟구치더니.
잠시 뒤…….
구름을 뚫고 내려치는 운석.
메테오(改)
Meteor
기존의 메테오보다는 한결 작지만, 그래도 파괴력만큼은 모자라지 않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폭발에 휘말리며 도시 한쪽이 폐허로 변했다. 저기 커다란 타워, 저게 도쿄 타워였나. 어쨌든 타워가 옆으로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힘없이 꼬꾸라졌다.
그사이 나는 다시 스켈레톤을 타고 땅 아래로 내려와, 다시 달린다. 자욱한 연기를 뚫으며 겸사겸사 정신 못 차리는 적들의 머리를 수확해 나갔다.
그때, 내 뒤로 느껴지는 위험 신호.
발목을 꺾어, 옆으로 구른다.
쿠우웅-!!
방금 전 내가 있던 자리가 움푹 파였다. 곧이어 먼지 구덩이를 뚫고 돌격하는 여자.
대사제 요한나였다.
“불신자 녀석!!”
요리조리 피해 다녔는데 결국 귀찮은 녀석에게 잡혔다.
하긴 야만족에 갖다 대면 얘는 귀찮은 축에도 못 들지. 걔네들이야말로 내가 본 진짜배기 또라이니까.
“마왕, 턱을 당기면.”
“어깨가 나온다.”
“왼다리가 4도 기울면.”
“오른다리가 빠진다.”
“검을 내려치고 0.3초.”
“목이 경직된다.”
“히히. 싸움은 언제나 옳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상대가 짜증을 낼 때면 언제나 짜릿하다.”
신이 내렸다는 신체를 가진 야만족 쌍둥이.
흔히 야만족들을 어리석은 걸로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이 녀석들, 보기보다 엄청 똑똑하다.
녀석들은 우월한 신체에서 비롯된 인간 이상의 감각을 이용, 적을 분석해 낱낱이 파헤친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뭐? 미각은 어떻게 쓰냐고 묻지 마라. 상상만으로도 소름 돋으니까.
야만족 쌍둥이에 비하면 이 대사제는 쓸데없이 좋은 무기만 든 허접이나 다름없다.
“죽어라!”
메이스가 내려쳐진다.
알면서도 당하는 사실. 인간은 공격할 때 가장 무방비하다.
‘쌍둥이들이라면 궤적을 유추해 냈겠지만.’
나는 그냥 발로 팔꿈치를 걷어찼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메이스의 궤적이 빚나가고 그 빈틈으로 나의 주먹이 쏘아졌다.
완벽한 카운터.
이건 무조건 맞는다.
외부의 개입이 없다면.
“자매님!”
역시나 들려오는 목소리.
시간이 비틀린다.
그리고 난 이 순간을 기다렸다.
“하아…… 마왕, 당신은 예의라는 걸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건가요. 지금이 몇 시인데 불쑥 찾아와서 싸우자니…….”
“현실 조작을 당했을 때 대처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현실을 관조하는 거예요. 어차피 조작된 현실도 현실이니까요.”
“잠깐만요. 그런데 왜 제가 이런 걸 당신에게 설명하고 있죠?! 하…… 또 당했어. 맨날 당해.”
억울해하는 성녀의 표정이 생각난다. 언젠가는 복수할 거라고 해서 이번 생에는 틀렸다고 놀려 댔는데.
어쨌든, 현실 조작마저 꿰뚫은 나다. 시간 조작이라고 불가능하겠나.
한발 떨어져 관조(觀照).
마치 유령이 되어 나를 보듯 제 3의 시야에서 현실에 접근한다.
대사제의 시간이 빨라진다.
나의 주먹을 앞에 두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릴 정도로, 녀석의 시간은 빠르게 돌아간다.
나는 그 시간의 흐름에 몰래 편승해서 단검을 들었고, 중장갑을 입은 대사제 녀석의 목에 단검을 틀어박았다.
푸욱!
“커헉-?!”
“자매님!!”
최전선에서 나를 막던 대사제가 쓰러지며 급속도로 균형이 무너진다.
녀석들도 이를 아는지 급히 치료를 하려고 달라붙었다.
목을 완전히 꿰뚫었지만 광신도라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자.
내가 마귀를 들자, 예상대로 성화가 내려친다. 하나하나가 생명으로 불살라 이뤄진 불꽃들.
파괴력만큼은 가히 탑 티어다.
그러나 파괴력이 강하면 뭐하나. 단조로운데.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셋이 뭉쳐서 까다로웠던 거지 따로따로 놓아두면 생각 이상으로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다.
거인 소환.
나의 그림자를 타고 거인의 상반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거인의 손에 아포칼립스로 이뤄진 검이 들리자, 발작하듯 외치는 녀석.
“아미트 형제님!”
시간 조작이 다시 펼쳐진다.
나에게는 못 거니까, 아예 나와 저들 사이의 공간에다가 시간 조작을 걸어 버렸다.
바보인가.
이미 파훼됐는데도 미련을 못 버린다.
어쩌면 저걸 진짜 신의 힘이라 믿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일단 쓰고 간절히 기도하면 혹시나 싶은 거려나.
만약 그렇다면.
“전장에서 ‘혹시?’라는 의심이 든다면, 이미 실패다. 확신 없는 행동이란 말이거든.”
“확신이 없으면 죽는 거다. 전장이란 그런 곳이야.”
영감의 말이고.
고로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
“세계에 접촉할 수 있는 건 너만이 아니야, 멍청아.”
“……!!”
시간 조작을 할 수는 없지만, 뒤틀린 조작을 복구하는 건 나도 가능하다.
시간 조작을 거꾸로 파훼한다.
녀석이 ABCD…… 순서대로 간다면 나는 ZYXW…… 이런 식으로 시간 조작을 역순으로 되돌렸다.
녀석의 눈동자가 떨린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입은 무언가를 외우고 있다.
“아, 아크 엔젤 님.”
음, 설마 했는데, 역시나 기도다.
이 순간, 녀석의 운명은 결정 났다.
“잘 가.”
공간에 막힌 듯 느려졌던 거인의 검이 다시 속도를 되찾았고,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을 찾다 끝내 찌부러졌다.
덤으로 목에 검이 꿰뚫린 걔도 함께다.
쿠웅-!
“…….”
무섭도록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냥 꽂혀 있는 대검 주변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보고 ‘죽었다.’ 여길 뿐.
“네, 네놈!!”
“안 도망갔네?”
부들부들 떠는 대사제.
“네가! 네가 망쳤다! 조금만, 조금만 더했으면, 청소를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그랬다면 이 땅은 진정으로 구원을…….”
“개소리 작작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못한 걸로 보면서 구원은 무슨 구원이야.”
“네놈…….”
“시끄럽고.”
공기가 아깝다.
그냥 죽어라.
거인의 대검이 아래로 강림한다.
정신을 차린 대사제가 몸을 빼내며 성화를 쏘아 내 보지만, 애초에 저걸로 죽일 작정이 아니었다.
“넌 시체도 아까워.”
“……!!”
흑마법 소환
허무 심연충
녀석이 몸을 피한 뒤쪽의 공간이 갈라지며, 스멀스멀 촉수들이 뻗어 나왔다.
꽈악, 촉수에 붙잡힌 녀석.
성화를 쓰려고 하는데, 내가 쏜 매직 미사일이 녀석의 손가락을 날려 버렸다.
“끄아아악!!”
손가락과 함께 반지가 땅을 굴렀다. 이로써 녀석이 가진 가장 강한 무기가 사라졌다는 말.
놓으라며 발악을 해 보지만 촉수는 놓질 않는다.
“오랜만에 본다야. 잘 지냈지?”
촉수가 살랑인다.
나름대로 인사하는 건가. 웃음이 나왔다.
“약간 상했는데, 그래도 먹을 만할 거야.”
먹어, 한마디에 강아지처럼 똥꼬발랄하게 대사제를 대리고 허무 세계로 사라지는 허무 심연충.
키에에엑.
“아아아악-!!”
공간이 닫히며, 이로써 대사제는 끝.
이제 남은 건 마지막 저 쫄보 놈인가.
손가락을 탁탁 털며 말한다.
“보고 있는 거 알아. 나와, 쫄보 새끼야.”
그 순간, 빛이 터져 나오며 눈부신 광채 속에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옥 같은 피부에, 하얀 머리, 온통 백색으로 이뤄진 인간…….
“저거 아무리 봐도 인간 아닌데?”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거 인간 아니다.
신기해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운데, 아크 엔젤이 입을 열었다.
“인간, 훌륭하다. 너라면 나를 모실 자격이 충분하다.”
뭐라 지껄인다. 나를 모시면 제 1종이 되어 부와 명예 모든 것을 누릴 것이라 블라블라…….
“흠, 분명 개도 아닌데.”
왜 개소리를 할까.
사실, 아까부터 이쪽의 호기심을 건드는 건 따로 있었다.
“질문 하나만 하자.”
“허락한다. 너는 자격이 있다.”
“자격은 네가 정하는 게 아니고. 너 기간트랑 무슨 관계냐?”
“…….”
입을 다물고 있지만 눈 끝이 파르르 떨려 왔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무언가 근원적인 두려움.
“됐어. 말하지 마. 기간트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건방진…….”
아크 엔젤이 노기를 터트렸다. 후광이 찬란하게 빛나며 주위를 감싸고, 구원자들과 타천사들이 날개를 펼치며 녀석의 주변에 시립했다.
“수호령이라 자처한 놈이 졸개들 뒤에 숨냐.”
“인간, 지금이라도…….”
“닥쳐. 힘 빠지니까.”
모양 빠진다. 내가 이딴 놈을 잡으려고 개고생을 했나 자괴감마저 들었다.
괜히 말 섞었다. 빨리 끝내야겠다.
쾅-! 바닥에 다리를 구른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검게 물들며 하늘을 가리고…….
잠시 뒤.
투둑- 투둑- 투두두두둑-
떨어지는 물. 아니, 물이 아니다. 붉고, 끈적하며, 불쾌한 방울로 타고 내리는 건.
피.
피가 떨어진다.
저건 구름이 아니다. 내 제물들을 가둬 놓은 감옥.
귀곡성이 들려온다. 죽여 달라는 망자의 절규가 이 공간을 지배했다.
준비는 끝.
대장이란 놈이 반칙을 했으니, 나도 아군을 부른다.
“얘들아, 현신.”
공간을 뚫으며 비집고 나오는 나의 ‘신체들’.
오른팔
바포메트(Baphomet)
현신(現身)
“주인이시여, 이번에는 이들입니까.”
왼팔
아수라(阿修羅)
현신
“……제물…… 많다…… 처리…….”
오른발
키메라(Chimera)
현신
“배고프다. 배고프다. 죽인다. 죽인다.”
왼발.
펜릴(Fenrir)
현신
“헥헥.”
신체들이 내 옆으로 나란히 섰고.
그 뒤로 스켈레톤들이 마룡기 ‘전우’를 펄럭이며 시립. 마지막으로 거인의 본체까지 소환되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짓밟아.”
학살의 시간이다.
* * *
한편, 두 초월적인 존재의 싸움에 도쿄가 무너지는 가운데.
멀찍이 떨어진 숲에서 늙은 노인이 걷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나무를 지나치며 노인이 달라진다.
살짝 굽었던 허리가 반듯하게 펴지고, 하얗게 샜던 머리가 검게 물든다. 백색의 피부는 마치 이 땅의 사람들처럼 황색으로 변해 간다.
그렇게 걸음을 걸으며 변화가 진행됐고, 나중에는 어딜 봐도 평범한 20살 청년이 된 존재.
변화를 끝낸 청년이 숲 한쪽에서 도쿄 쪽을 바라봤다.
뒤늦게 레드 게이트에서 토해 낸 몬스터가 들이닥쳤는지, 불길이 치솟고 있다.
“상정 밖. 어떻게 인간이 신격을 부술 수 있지.”
맞다.
이 존재의 정체는 셀루티스의 교황.
동시에 기간트의 첫 번째 워 아머.
알파였다.
“오메가를 세워 두는 것은 탁월한 선택.”
겁이 많은 알파는 항상 대역을 세워 뒀고, 그게 바로 자신의 분신인 ‘오메가’였던 것이다.
“손익 계산.”
전자 회로가 맹렬히 회전한다.
대사제 중 절반 이상이 죽은 것은 손해.
절반이나마 신격을 얻은 것은 이득.
총평.
“이익.”
인간의 목숨으로 얻을 수 있는 평균 ‘신격’의 양. 이 데이터만으로도 이번 일은 충분히 이익이었다.
“셀루티스는 다시 세우면 그만. 기간 산정. 70년.”
얻은 신격으로 굳이 수명을 늘리지 않아도 되는 기간이다. 알파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띠리리리-
울리는 벨소리.
당황하는 알파.
정지된 듯 한참 동안 멈춰 있다.
그때.
띠리리리-
다시 울리는 벨소리.
알파가 가슴을 내려다본다. 벨소리가 울리는 것은 그의 가슴팍 정중앙. 명치가 있는 곳.
거기에는 알파의 핵이 있는 곳이다.
알파가 가슴을 눌렀다.
디리리릭, 구형 전화기의 태엽 감기는 소리가 들리며 통신이 연결된다.
- ……거 뭐 이렇게 느려. 야, 들리냐!
“누구.”
- 누구긴 누구야. 네 인형 부순 놈이지.
“박기혁?”
- 그래, 나다. 어떻게 인사도 안 하고 도망가냐. 응?
알파가 긴장하며 묻는다.
“어떻게 내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었지.”
- 그거, 별거 아냐. 사실 알고 보니까 내가 널 알고 있었더라고.
박기혁이 피시식 웃음을 흘리더니, 회심의 단어를 뱉는다.
- 알. 파. 기간트한테서 도망간 놈. 너 맞지?
“…….”
- 이야, 살아 있는 건 기간트한테 들었는데, 셀루티스가 네 작품일 줄이야. 너 능력 좋다.
“오히려 내가 놀랍다. 나의 정체를 안 것을.”
- 칭찬이지? 고마워.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이제 난 사라질 것이다. 너는 나를 못 잡을 것이고, 나는 내가 지닌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다.”
- 그래? 섭섭한데.
“말장난은 끝이다. 잘 있어라, 인간.”
알파가 통신을 차단했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거의 지워진 그였지만 방금 전에는 조금 두려웠다.
마치 자신의 창조주인 기간트를 마주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기분만큼은 진짜였다.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적어도 박기혁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숨을 죽이는 게 나쁘지 않을지도…….
“인정한다, 박기혁. 넌 매우 위험한 인간이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쑥스럽게.”
“……!!”
돌아보자, 거기에는 스켈레톤. 검은 연기에 휩싸인 스켈레톤이 보였다.
살점이 붙고.
근육이 살아나며.
장기들이 갖춰지고.
모든 것이 완성됐을 때.
거기에 있는 건.
박기혁. 웃고 있는 박기혁이었다.
“잡았네?”
거인의 손이 알파를 움켜잡았고.
모든 게 끝났다.
일본 사태도.
셀루티스도.
알파의 자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