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48화>
예전에 김하니에게 들었던 말이 있다.
나와 진유리 케미가 좋다나 뭐라나.
케미.
정확한 용어는.
케미스트리(chemistry).
사전적 의미로는 화학적 작용이지만, 대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많이 쓰인다.
이 케미라는 걸 무시하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케미라는 무형의 가치를 허상으로 부른다. 눈에 드러나거나 수치로 확실히 표현되는 지표가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기에 허상으로 본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야지, 측정할 수 없기에 더 중요한 거다.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그 한계를 모르는 거잖나.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바로 지금처럼.
* * *
“기혁!”
달려가던 박기혁이 발을 내리찍는다. 박기혁의 발끝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마법진. 육망성 마법진이 공간을 가둬 놓았다.
‘격리’ 완료.
이제 이 공간은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
순간, 박기혁을 지나쳐 쏘아지는 백색 섬광.
박민지의 본능 ‘신속’이 깨어났다.
박민지의 섬광이 번쩍이며 주변을 휩쓴다. 나무를 지나, 폐건물, 전봇대……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적들 사이를 휘젓더니.
푸쉭-!
피 분수와 함께 머리가 떨어졌다.
“휘유우~.”
박기혁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온다.
일취월장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일신우일신이라고 해야 하나. 어째 못 보던 사이에 실력이 몇 단계는 더 늘었다.
순수한 속도로만 따지면 전생의 검성, 그 양반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나이를 생각해 보면 믿기 힘든 성과.
우리 누나지만 진짜 괴물 같네.
박기혁 곁으로 박수혁이 자리했다.
“밑은 민지한테 맡기고 우리는.”
“이해했어.”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두 남자가 눈빛을 교환하며 땅을 박찬다.
박기혁의 본능 ‘파괴’가 발현되며 온몸에 마법진이 새겨졌다. 마법진이 빛나며 마법 ‘플라이’를 발동, 하늘을 쇄도했다.
그런 박기혁의 곁으로 박수혁이 따라붙는다. 검을 타고 하늘을 나는 박수혁. 그의 본능 ‘군왕’이 발현되며 황금빛으로 변한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하늘 위에 있는 것은 타천사 떼.
총 104마리.
단순한 수색치고는 많은 숫자.
셀루티스의 본거지를 지우고 있는 정체불명의 습격자를 잡기 위해 꾸려진 부대였는데.
딱, 그 정체불명의 습격자인 세 검호랑 마주친 것이다.
쿵! 쿵-!
타천사 떼들이 보이지 않는 벽을 두드렸다.
박기혁이 ‘격리’시킨 공간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이지만, 박기혁이 여기까지 오며 주운 제물까지 써가며 완성한 마법이다.
이내 부수기를 포기한 타천사들이 뒤돌아선다.
과연, 다량의 인간을 ‘섭취’한 개체답게 ‘지능’이라는 게 있다.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죽여!”
“죽여!”
“죽여!”
“죽여!”
다수의 타천사 떼가 동시에 ‘죽여’를 외치며 박수혁과 박기혁을 향해 강하했다.
박기혁이 형에게 묻는다.
“절반?”
박수혁이 동생의 물음에 시원하게 미소 짓더니.
“다다익선.”
이 말만 남기고는 빠르게 쏘아지는 박수혁.
순간 황금빛 광채가 눈부시게 빛난다.
박수혁의 등 뒤로 수십 자루의 검들이 날아올랐다.
크기도, 모양도, 용도도 전부 다른 검들이지만, 이들의 공통점.
모두 일관된 황금빛 검기를 두르고 있었다는 것과 ‘왕’인 박수혁의 손발이 된다는 것.
그에 대항해 마법의 폭우가 내려쳤다.
각 원소의 스피어 마법이 오색찬란하게 빛난다.
돌풍 ‘허리케인’이 치고, ‘파이어 필라’가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불길을 일으킨다.
여기에 더해.
색색의 이능들이 끼어든다. 마법과는 다른 종류의 이능.
혈족들이다.
챈들러 가문의 ‘아이스 쉬프트’, 오오가마 가문의 ‘혈독’, 텐구 가문의 ‘귀신 깃털’ 등등.
다양한 혈족들이 저마다의 색채로 빛났다.
그 모습을 보던 박기혁은 혀를 찼다.
“가지가지 한다.”
대체 몇 개야. 이것들이 골고루 처먹었네.
하늘을 가득 메운 마법 세례, 현란하게 터지는 마법의 폭발…… 혈족까지 어우러지며 하늘이 형형색색으로 물든다.
이 혼란 속에서 박수혁의 검은 저마다의 길을 찾아 파고들었고, 뒤따르는 박기혁에게 길이 돼 줬다.
몇 발자국 만에 타천사 앞에 선 박수혁이 허공에서 날아드는 검을 잡아.
휘둘렀다!
푸쉭!
“한 마리.”
박수혁이 칼끝을 박차고 날아오르자, 그가 있던 자리에 번개를 두른 얼음이 폭발했다.
콰아앙!
파편을 뚫고 돌진하는 박수혁.
요리조리 누비며 타천사를 베어 냈다.
워낙에 성장을 잘한 타천사들이라 신체 일부를 베는 것으로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 박수혁의 선택은.
척추와.
아그작!
목.
으득!
그리고.
몬스터라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약점.
마석.
여기를 정확히 꿰뚫었다.
푸쉭-!
종횡무진 날뛰는 박수혁.
박기혁은 한 발짝 뒤에서 형의 활약을 구경했다.
“멋지네.”
소름 돋게 정확하면서도 한 톨의 낭비도 보이지 않는다.
검들을 조종하는 마나 컨트롤이나, 하늘을 무슨 땅처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신체 컨트롤이나.
“그야말로 완벽(完璧)하네.”
박기혁은 생각해 본다. 자신이 아는 이 중에 이 정도로 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존재했던가.
이미 박수혁은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그때, 박기혁의 등 뒤로 그림자 거인의 팔이 뻗어 나와 무언가를 움켜쥔다.
“감상 중이잖아, 이 자식아.”
타천사.
은신을 쓴 채 박기혁의 뒤를 노리던 놈이었다.
잡힌 타천사가 거인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쳐 보지만.
소용없다.
으적!
다시 펼쳐진 거인의 손바닥에서 사지가 뒤틀린 타천사가 추락했다.
잽싸게 시체를 회수.
“나도 질 수 없지.”
본능에 몸을 맡긴다. 박기혁이 마귀를 빼 들고선 전장으로 몸을 던졌다.
본격적으로 어우러지는 세 검호.
박기혁이 마귀로 타천사를 찢으며 동시에 마나를 응축한다. 육망성 마법진이 손에 응축되더니, 어둠이 요동치며 한 자루의 검으로 탈바꿈되고.
완성됐을 때.
“죽어!!”
박기혁의 근육이 폭발할 듯 부풀어 오르며 검을 뿌렸다.
쐐애애애애애액―!
하늘 위, 일직선으로 새겨지는 검은 선.
일직선상에 있던 타천사들이 관통됐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검이 끝나는 곳에 있는 것은 박수혁.
박수혁은 동생이 만든 어둠의 검을 잡고 여유롭게 춤을 춘다.
별똥별, 달빛 베기, 십자 베기, 거울 장난, 거울 함정, 산사태, 용오름, 수묵화…….
검호류 검술의 총아가 박수혁의 손에서 펼쳐졌다.
그에게 휩쓸린 타천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뜯겨져 땅으로 추락했다.
계속, 계속, 몸집을 부풀려 가는 금빛 광채.
“후우- 후우-.”
박수혁의 호흡이 거칠어질수록 점점 금빛 광채가 발광해 간다.
금빛으로, 더 금빛으로…….
그리고, 더 이상 찬란해질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박수혁이 마지막 일 수를 뿌린다.
검술의 시작이자, 끝.
기본.
내려치기.
박수혁의 손에 들린 검이 허공으로 흩어지며, 수천 자루의 금빛 검들이 생성됐다.
“내려쳐라.”
콰르르르릉-!!
금빛 검들이 번개처럼 땅 아래로 떨어졌다.
박기혁이 그 괴랄한 파괴력에 ‘격리’시킨 마나를 일순간 다급하게 다잡을 정도.
내려친 금빛 검들이 땅에 꽂혀 공명하며 주위를 빛낸다.
그리고.
“잘 쓸게.”
찬란한 빛무리 속에서 박민지가 황금빛 검을 뽑아 들었을 때.
박수혁이 만든 금빛 은하수가 통째로 박민지에게 넘어가는 순간이었으며.
지상에 있던 적들의 최후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땅 아래에 금빛 은하수가 펼쳐졌다.
* * *
“주고쿠 지방에서 실종된 사제들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합니다.”
시끄럽다.
“실종된 사제들은 히로시마 현과 오카야마 현을 지키고 있었으며, 교토 일부에서도 연락이 끊기는 사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시끄럽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습격자는 내륙을 지나 이곳 도쿄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끄러운 인간, 어리석은 인간, 열등한 인간, 욕심 많은 인간…….
인간이란 생물은 오류투성이다.
그럼에도 왜 세상의 주류는 인간인가?
알파는 늘 이것이 궁금했다. 신은 무슨 생각으로 이 모자란 생명체에게 자유를 주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속박되었던 알파에게 자유는 꿈이며 이상향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유를 누린다는 게 항상 궁금했다.
동시에 질투했다.
하등 쓸모없는 오류투성이 인간이 쓸모 있는 자신보다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기간트의 곁에서.
도망쳐 나온 알파는 인간 사이로 섞여 들어간다.
설령 도망쳐 나왔다 해도 알파는 여전히 속박된 상태.
그는 자유롭고 싶었다.
그렇다면, 자유로운 인간들을 연구하다 보면 자신에게 얽힌 굴레를 끊을 수 있지 않을까?
알파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게 인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학습했다. 이 과정에서 ‘셀루티스’를 세우고 추종자들을 모았다.
“습격자의 정체는 아직 밝혀진 게 없습니다.”
여전히 알파에게 인간은 시끄러운 존재다.
“박수혁, 박민지, 박기혁은 아닌 걸로 판명됩니다. 검호 가문의 일원들은 아직 후쿠오카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어리석고 불완전하며 열등하다.
이게 알파가 본 인간이다.
“현재 ‘기적’을 부여받은 견습 사제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딱 하나.
쓸모 있는 것도 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도쿄에 진입하는 것을 막겠습니다.”
그들의 ‘믿음’.
인간의 믿음은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니.
알파가 이토록 긴 세월 작동할 수 있는, 실로 우수한 배터리가 되었다.
하나 배터리에도 수명이 있는 법. 알파의 시간 또한 영원하지 않았다.
계산한 결과 277년 159일하고도 11시간 42분. 방금 1초가 지나 41분이 됐다.
이마저도 전투 능력을 봉쇄하고 최적화 상태를 유지할 때 이야기.
알파는 이 유한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수십 년간 해법을 찾던 도중.
가능성을 찾았다.
인간의 믿음을 극한으로 충전해 ‘신격’을 가지는 것.
전지전능한 신이 되겠다는 가능성 없는 꿈은 아니다. 그저 일정량의 신격을 채운다면 최소한 자신의 창조주인 기간트와 동급은 되지 않겠냐는 생각.
그렇다면 일단 유한한 수명을 벗어던지며 영생을 얻을 수 있다. 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얼마 남지 않았다.’
충만하게 쌓인 저 믿음을 보라.
알파에게는 보인다. 신의 편애를 받는다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불태우며 짜내고 있는 거짓된 믿음이.
알파의 눈동자에 ‘아크 엔젤’이 반사되고 있었다.
* * *
교토.
과거 일본의 수도였던 지역답게 일본을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즐비했다. 수많은 역사가들이 박수를 칠 만큼 웅장하고 기품 있는 성채들과 탑들.
가히 일본의 기나긴 역사와 함께 숨 쉬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도시였다.
하지만 여기, 스즈키 하루토에게는 그저 쓸데없으면서 살지도 못하는 폐건물에 지나지 않았는데.
“더럽게 크구먼.”
차라리 아파트나 하나 짓는 게 낫겠다.
퉤!
침을 뱉으며 벽 한곳에 몸을 기대 담배를 꺼냈다.
지나가던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역사가 깊은 건물이라 보존에 힘썼고, 당연히 이곳은 금연 구역이었다.
그러나 하루토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뭘 봐! 담배 피우는 거 처음 봐? 앙?!”
불만 있으면 덤벼.
이미 기적을 받은 하루토다. 초인이란 말씀!
저런 힘없는 머저리랑은 질적으로 틀리다. 이미 ‘본보기’로 몇 명을 보여 준 지 오래.
이미 교토는 질서 따윈 없는, 오로지 힘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후우~ 아크 엔젤 님이 말씀하셨지. 족쇄를 벗어던지라고.”
이깟 고루한 건물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족쇄가 아니고 뭐겠나. 신실한 종인 하루토는 아크 엔젤 님의 말씀을 충실히 실행한다고 생각하며 키득키득 웃어 댔다.
비단 이런 생각을 가진 건 하루토만이 아니다.
지금 교토에 파견된 ‘견습 사제’들 대부분이 하루토와 비슷했다.
“왜 저러고 산대. 나 같으면 지금이라도 도쿄로 가겠어.”
“병X들, 그깟 신사에 절할 바에야 아크 엔젤 님한테 절하는 게 훨씬 낫지.”
“맞아. 우리처럼 초인도 되고. 안 그래?”
“쯧, 노력이 부족한 거야. 노력이.”
지나가는 사람도, 여기 있는 건물들도, 이 유서 깊은 도시 전체가 견습 사제들의 눈에는 그저 세상의 변화에 못 따라가는 멍청한 구시대의 잔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조롱 섞인 눈으로 주변을 지키던 견습 사제들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린 것이.
띠리리.
부르르-.
습격자 출현. 대비하라.
문자를 확인한 견습 사제들이 일제히 좌표를 향해 달려갔다.
충성도에 따라 아크 엔젤의 ‘기적’을 한 번 더 받을 수 있다고 했기에 그들은 마나를, 그러니까 자신의 수명까지 써 가며 맹렬히 좌표를 향해 달려갔다.
하나둘 보이던 견습 사제들 수십이 보인다.
한 블록을 지나자 또 한 무리의 견습 사제들이 보였다.
수십이 수백이 되고, 수백이 수천이 된다.
좌표에 다다를 때쯤 시야 내에는 온통 견습 사제만이 가득할 정도.
그렇게 목적지인 어느 신사 앞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은 한 남자.
황금빛 머리의 사내, 박수혁이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을 덮치는 마법진.
공간이 격리됐고.
“죄송합니다.”
스르릉, 검이 뽑히며 박수혁이 걸음을 옮긴다.
“여러분은 여기서 모두 죽으셔야겠습니다.”
찬란한 광채를 흩뿌리며 박수혁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 물체.
“여러분 손으로 보낸 사람들처럼.”
마룡기
크라운(Crown)
지금 이 순간.
이곳은 박수혁의 권역.
모든 법칙은 ‘왕’인 내가 정한다.
“덤비세요.”
견습 사제들이 튀어 나갔다.
자신의 뜻이 아닌 왕인 박수혁의 ‘뜻’대로.
잠시 뒤.
신사의 문이 열리고 나오는 박수혁. 그의 뒤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교토…….
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