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46화>
당연한 말이지만 김연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망명 절차가 통과됐잖습니까? 이제 저들은 엄연히 우리나라 소속입니다.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 주셔야죠.…….”
“일본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거 누가 몰라요! 다 알아요. 아니까 제가 이러고 있는 거 아닌가요! 언제 저희 쪽에서 일방적으로…….”
“……장관님, 우리 한번 솔직해져 볼까요. 이번에 망명자들이 무슨 조건으로 왔고, 무엇을 넘겼는지, 저는 대충 감이 잡히거든요?”
“……압박요? 하, 하하. 정말 왜 그러세요, 장관님. 저 김연희예요. 김.연.희. 제가 장관님을 압박해서 뭐가 남는다고 그러세요. 할 거면 더 위를 노리죠. 안 그렇겠어요?”
거래는 완벽했다.
옵티멈은 일본에서 화족 동맹의 주요 인원들을 구출해 준다.
화족 동맹은 구출 작전에 드는 제반 비용 및 천문학적인 성공 보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구출하는 혈족에 대한 ‘적극적인’ 정보 제공을 약속한다.
훌륭한 거래였다.
개인으로서도, 옵티멈의 입장에서도.
심지어 국가로서도.
모든 면에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해야 하는 거래가 맞았다.
김연희도 그래서 제 자식들을 일본에 보낸 것이고.
하나, 세상일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듯, 뜻대로만은 되지 않았다.
“……저쪽에서 대화에 응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손가락만 빨라는 건가요? 뭐라도 방법을 세워야죠.”
“……장관님도 보셨잖아요. 자국민에게 미사일을 쐈어요. 막말로 우리나라가 안전하다는 보장은 어디 있나요.”
“협상은 정상일 때 하는 거예요. 걔들 지금 제정신 아니라니까요.”
문제의 시작은 일본 내각의 폭주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내각과 화족이 대립한다. 내각은 중앙 집권화를, 화족은 지방 분권의 강화를 외치며 서로를 견제한다.
이 사이에서 맞춰진 균형이 일본의 역사이며 현 체제였다.
김연희는 이번에도 이 균형이 깨지지 않을 줄 알았다.
약간은 선을 넘었지만 그래도 늘상 그랬듯, 적당한 시기에 내각이 먼저 손을 내밀면 화족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숙이며 적당히 넘어갈 줄 알았단 말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미사일을 날렸다. 여기에 도쿄의 인접 화족 몇몇이 멸족됐다는 것이 알려지며 선을 세게 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딱 여기까지만 했다면 비록 선을 넘었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빡대가리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을 품었는데.
셀루티스.
자국에 미친 광신도 놈들을 풀어 버린 것이다.
“잠깐, 잠깐만요. 증거라니요. 증거가 없으면 못 움직인다고요? 제가 보증한다니까요!! 곧 증거도 제출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 일어난 사건, 셀루티스가 개입한 게 확실해요. 파견 나간 인원들을 비롯해 제 자식들까지 모두가 ‘타천사’를 확인했어요. 전에 레드 게이트, 그 사건 일으킨 놈들요.”
“이보세요, 당신. 사태 파악 못 하시고 있는 건 당신이에요. 제가 지금 제 이득 때문에 이러고 있는 줄 아세요?”
바다 건너 인접 나라가 셀루티스의 본거지가 될 판.
“이대로 셀루티스가 일본에 정착한다면…… 그다음은 어디일까요? 네?”
다음 타자는 뻔하다.
한국. 우리나라였다.
때문에 필사적으로 ‘개입’을 촉구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비서실장이 다급한 표정으로 대표실 문을 열었다.
“대표님!! TV! TV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모컨을 든 김연희.
브라운관이 켜지며 처음 보는 여자가 보인다. 백발, 백미, 새하얀 피부에, 입술마저 새하얗다.
등 뒤로 비치는 은은한 백색의 역십자 후광이 신성한 분위기를 풍기고, 또렷하게 뜬 눈동자에는 기이할 정도로 깊은 어둠이 도사리는.
흡사, ‘인형’ 같은 여인.
- 인간들이여, 내가 수호령 ‘아크 엔젤’이다.
아크 엔젤이 공식 석상에 등장했다.
* * *
- 모든 인간은 소중하다. 너희들은 가능성을 가졌고 오롯이 스스로 빛날 자격이 있다. 나는 이런 인간들을 사랑하고 아낀다.
-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유롭나? 자유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본인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들이여, 너희는 진심으로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가?
- 너희들은 구속되어 있다. 제도? 규범? 인간들은 내게 사회가 정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말했다. 그게 법이고, 세상은 법이 있어야 평화롭다 했다.
- 하지만 그런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니었다. 인간이 완전하다고 보는가? 인간은 근본부터가 불완전한 존재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법이 완전하다는 건 모순이다.
- 나는 너희가 가여워 이 땅에 강림했다. 왜 스스로 족쇄에 묶이나? 본디 인간은 평등하노니.
- 구속된 인간들이여, 문을 열어라. 억압의 족쇄를 풀어라. 그리고 힘을 쟁취하라.
-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
…
이로써 일본은 완전히 셀루티스에게 점령당한 것이다.
* * *
박기혁의 마귀가 타천사의 허리로 날아들었다.
촤륵-!
허리째 두 동강 나 쓰러지는 타천사.
하나 타천사의 숨은 멎지 않았다. 스스로 회복 마법을 쓰며 필사적으로 살려고 발버둥 쳤다.
박기혁의 발이 머리를 으깼다. 그제야 타천사의 움직임이 멎는다.
“쓰읍, 전에는 곱게 죽더니.”
처음 본 타천사는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그때는 적당한 몬스터 수준? 척추가 끊어지면 즉사하는 수준이었다.
한데, 오랜만에 만난 타천사는 완전히 달랐다.
트롤과 엇비슷한 재생력, 신체를 절단하는 걸로는 숨이 끊이지가 않았다.
게다가 도대체 안 보이는 동안 뭘 먹었는지, 별 희한한 능력들을 다 선보이고 있었다.
타천사들이 얼음으로 검을 만들더니 박기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얼음 검에 은은하게 덮힌 녹색의 검기.
독이었다.
박기혁은 모르겠지만 ‘오오가마’ 가문의 혈족인 ‘혈독’.
피를 타고 흐르는 독이라, 조합을 알지 못하고 때문에 해독술이 없다는 극악의 독술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독술이 담긴 검이 움직이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이 또한 ‘마사무네’ 가문의 검술로 검에 닿는 모든 저항력을 무시하는 검술이었다.
이렇듯 다양한 혈족들을 ‘섭취’하면서 타천사는 박기혁이 기존에 알고 있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다.
챙- 챙- 챙-!!
박기혁이 마귀를 바쁘게 휘두르며 타천사들의 검을 막아 냈다.
“이것들이랑 검을 나눌 줄이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매섭다.
검의 깊이 따위는 없지만 완력과 생명력, 몬스터 특유의 살기까지 더해지자 오히려 인간이 상대하기 껄끄러운 검술로 변했다.
웬만한 수준의 인간이 아니라면 상대하기 힘들 수준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새벽이는 안 되겠네.”
이쪽은 웬만한 수준의 인간이 아니다.
박기혁의 손이 우악스럽게 선두에 선 타천사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콰직!
한 손으로 부서트렸다.
동시에 박기혁 뒤쪽의 두 놈에게 마법진이 그려졌다. 육망성 마법진이 완성되는 순간, 땅에서 가시가 솟아나 머리까지 관통했다.
그 옆에는 거인의 팔이 이미 타천사 한 마리를 움켜쥔 상태. 움켜쥔 주먹 안에서 한 줌의 핏물로 변해 찌그러지는 타천사였다.
검, 마법, 거인의 힘까지.
박기혁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취하자, 주변이 쑥대밭이 돼 버렸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쪽은 인간과, 어지간한 존재들의 범주를 넘는 박기혁이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타천사 떼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허공으로 날아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사방으로 찢어지는 타천사.
박기혁은 쫓아가려다, 허무하게 웃는다.
“또냐.”
이게 현재 상태다.
타천사들은 박기혁을 죽이려는 게 아니다. 습격과 도주를 반복하며 묶어 두려는 속셈이었다.
이런 전투는 비단 박기혁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박민지. 그리고 반대편 건물 뒤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나오는 박수혁.
전부 타천사의 견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도망가더라.”
“시간을 끌고 싶다는 거지. 자.”
박민지가 모퉁이에 기댔고, 박수혁은 동생들에게 에너지 바를 나눠 주고는 대충 자리를 잡고 쉬었다.
“짜증 나. 오빠는 괜찮아?”
“참아. 원래 우리는 사람들 구출하러 왔잖아. 어쨌든 구출은 순조롭게 되고 있으니까 너무 그렇기 신경 쓰지 마.”
“형, 말은 그렇게 해도 표정은 별로인데.”
“형이라고 별수 있냐…… 니들 맘이 내 맘이지.”
셋 다 표정이 그리 좋은 게 아니다.
어쩌겠나, 검호의 본능이 만족하지 못하는데.
그들 입장에서 타천사들은 감질나게 흥만 돋우고 도망가는, 짜증 나는 족속들이었다.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싸우자니 현재 전황이 굉장히 미묘하다.
박민지가 분에 못 이겨 화를 냈다.
“대체 이해가 안 돼. 왜 일본 애들은 셀루티스를 보호하는 거야!”
“일부잖아, 일부.”
“일부라도! 그 일부 때문에 지금 상황이 꼬이고 있잖아.”
“‘기적’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거지.”
박기혁의 말에 두 사람이 한숨을 내쉬며 동의했다.
아크 엔젤의 출현, 셀루티스의 등장.
일본이 셀루티스에 점령된 걸 알게 된 타국들이 일본의 해방을 위해 연합군을 조직했는데.
정작 일본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기적’이 행해졌으니까.
아크 엔젤은 ‘평등의 기적’이란 이름으로 일반인을 초인으로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인간을 초인으로 만들다니.
그런데 이게 한둘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초인이 됐다. 매일 같이 이렇게 ‘기적’을 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걸 TV로 생중계까지 했다.
이러자, 일본인들은 혹시나 자신도 초인이 될 수 있을까 아크 엔젤을 신이라 칭송하며 도쿄로 몰려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근데 진짜일까? 초인 된 거.”
“글쎄…….”
“아니, 가짜야.”
딱 잘라 말하는 박기혁.
왜? 둘이 눈빛으로 묻자, 그가 말을 이었다.
“마나를 느끼는 건 선천적인 거야. 이건 후천적으로 깨닫거나 바꿀 수 있는 성질이 아니야.”
성장기를 지난 인간이 마나를 깨닫지 못한다?
그 사람은 태생적으로 마나를 못 받아들이는 인간인 것이다.
이런 인간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마나를 못 깨우친다. 왜냐하면 가능성 자체가 0이니까.
“기혁아, 그러면 TV에서 보여 주는 건?”
“너도 봤잖아. ‘파이어 볼’ 쓰는 거. 그건 어떻게 설명해?”
맞다.
그럼에도 ‘기적’을 받은 인간은 분명 마법과 같은 이능을 사용했다.
법칙을 깨트리는 일.
불가능한 일이 펼쳐진 것이다.
이에 박기혁은 고민해 봤다. 설마 진짜 신인가?
그에 대한 답은 즉시 나왔다.
아니, 절대 아니다.
박기혁은 한때 진리에 가장 접근했다는 ‘마왕’이었다.
신은 인간에게 놀랍도록 무지하다. 자비? 구원? 평등? 이딴 감정 자체가 거세된 존재란 것이다.
그러다 불현듯 한 가지 가설이 생각나는데.
“내 눈으로 보지 않아서 확실히 말할 수는 없는데…….”
마나는 세계의 에너지다.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에너지.
이 마나랑 가장 비슷한 기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으며, 느낄 수 있는.
인간이면 당연히 가져야만 하는 것.
“아무래도 ‘생명력’을 사용한 것 같아.”
“새, 생명?”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보통의 인간은 자신의 생명력을 인위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건 일종의 리미트다. 자연의 시간에 따라 서서히 사용해 늙어 가는 것. 이게 자연스러운 거다.
근데 이 리미트를 지워 버리게 되면, 인간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사용할 수 있게 돼 버린다.
“……그러면 마나를 대신해 생명력을 사용할 수 있지.”
“그걸로 마법이 가능해?”
“말해 뭐해. 오히려 사용하기도 더 쉬워. 순도도 좋고.”
마나가 내 몸 밖에 있던 것이라면, 생명력은 원래부터 자신 안에 깃든 힘이다. 한 번 거친 힘과 원래부터 깃들어 있던 힘, 무엇이 컨트롤하기 좋을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박수혁이 무엇을 생각하다, 차갑게 굳었다.
“잠깐만, 기혁아.”
“듣고 있어.”
“……생명력을 사용한다는 건, 수명을 사용하는 거야?”
“정확해.”
사태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목숨을 담보로 이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걸릴까. 마법을 마음껏 사용한다는 가정 아래.”
박기혁은 잠깐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일 년. 아무리 길어야 일 년이야.”
허락되지 않는 힘을 사용한 대가.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