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36화>
이곳저곳 봄이랑 LA 전역을 누비는 가운데, 나는 포장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서 ‘드래곤 레어’로 향했다.
근데, 들어선 순간 레드 드래곤을 보고는 할 말을 잃는데.
“얘 꼴 좀 보게…….”
처음 보았던 금발의 미남이 맞긴 하다.
딱 목 위까지만. 아래는 완전 만신창이다.
오른팔에 통깁스가 쭉 연결되어 가슴팍까지 연결돼 있다. 양 다리에 박은 건 철심인가? 하여튼 희한한 걸 달고서 휠체어를 질질 타고 나왔다.
“너 지금 불쌍한 척하는 거냐?”
“……그런 거 아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내가 드래곤에 대해서 몰라? 허, 보기보다 웃긴 놈일세.”
당연한 말이지만 드래곤쯤 되면 초월적인 재생력을 지닌다. 다만 트롤처럼 즉각적으로 재생하지 못하는 이유는 드래곤의 신체와 장기 하나하나가 너무 고차원적이라, 재생에도 딜레이가 생기는 탓이다.
며칠 전 내가 날린 일격이 치명타였을지언정 회복 불가능한 수준의 상처는 아니란 것이고, 또한 내가 요구한 보상이 조금 많다지만 저렇게 당장 죽을 것처럼 엄살 피울 정도도 아니란 말이다.
“……오해 마라. 나도 자존심이 있다. 이러고 싶지 않다.”
“근데 왜 이러고 있냐?”
“나도 잘 모르겠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네게 베인 상처가 쉽게 낫지 않는다.”
“……그, 그래?”
……음, 거인의 힘 때문인가.
그렇다면야, 조금 이해가 되는 것도 같다. 이 힘은 나도 끝을 알 수 없으니까.
“계산부터 할까?”
“여기.”
쭈뼛쭈뼛 무언가를 건네는 레드 드래곤.
손에 든 건 반지였다. 큼지막한 알맹이가 번쩍이는 루비 반지.
대충 보니 아공간 아티팩트로 보였다.
굳이 물건을 확인하지는 않는다. ‘계약의 서’로 묶인 계약이잖나. 장난질을 할 수 있는 종류의 계약이 아니었다.
“계산은 끝났고.”
레드 드래곤을 바라봤다.
멀뚱멀뚱 이쪽의 눈치를 보는 녀석.
“왜…….”
“인마, 성질 좀 죽여라.”
“인간…… 고작 한 번 이겼다고 무시하지 마라. 본래 이 몸의 힘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너 정도는…….”
“나도 알아. 수호령의 의무라던가.”
“……!”
본래 수호령은 인간계 존속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
인간을 상대할 때는 페널티가 붙는다. 뭐, 페널티가 있든 없든, 지금의 난 웜급 정도는 어렵지 않게 감당할 수 있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건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가,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 묻자. 너 인공 정령, 저 밖으로 얼마나 뿌렸냐?”
“…….”
“어떻게 가는 데마다 너랑 눈을 마주쳐야 하냐? 응? 기간트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
“이제 이해했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수호령은 인간계에 필요 이상의 영향력을 끼치면 안 된다.
이게 수호령의 원칙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 한동안 머물렀던 내가 보기에, 레드 드래곤은 이미 선을 넘어도 심하게 넘었다.
“기간트가 아니었으면 넌 벌써 골로 갔을걸?”
“무슨 말인가.”
“기간트가 균형을 맞춰 주고 있다고, 멍청아.”
물론 일부러는 아닐 거다. 기간트가 이 녀석을 싫어하는 건 진짜니까.
그러나 과정이야 어찌 됐든 둘의 대립으로 균형이 맞춰지고 있는 건 사실. 내가 보기에 이게 ‘신’이 레드 드래곤을 내버려 두고 있는 이유 같다.
“적당히 해라. 대장 놀이도 적당히 하고, 인간도 적당히 부려 먹어. 자신감도 적당히, 욕심도 적당히. 내가 해 줄 말은 여기까지다.”
할 말을 마친 난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여튼 재미있게 놀다 간다.”
이것으로, 여러모로 많은 것을 얻었던 나의 미국행은 종지부를 찍었다.
돌아가자, 집으로.
* * *
옵티멈 김연희 대표, 공항으로 입국. 미국행 성과는?
<특종> 왜 ‘옵티멈의 여왕’은 불모지 하이 캐슬로 향했나?
옵티멈 대변인 “성과를 냈다. 자세한 상황은 곧 발표.”
하이 캐슬 충격 발표. “옵티멈과 공동 연구 진행하기로…….”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분야 ‘인공 정령’과 ‘인공 정령석’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
…
<사진> 공항에 모인 ‘검호와 진룡’ 전설이 이곳에 있다.
남자가 신문 속 사진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박건, 김연희, 박수혁, 박민지, 박기혁, 박봄, 진도하, 유해련, 진유리…….
자신의 원수들이 저기 있다.
형제, 자매, 그리고 대모님을 죽인 자들이 가증스럽게 웃고 있다.
와락, 신문을 구긴 남자가 눈을 감았다.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분이시여.”
그렇다.
남자의 정체는 에밀.
과거 ‘서창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에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셀루티스의 대사제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에밀이 급히 눈물을 훔쳤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방으로 들어온 앙상한 체구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남자.
가토 대사제.
셀루티스 일본 지부를 책임지는 대사제였다.
“가토 대사제님, 오셨습니까.”
“에밀 대사제님, 기도 중이었습니까?”
“아…… 닙니다.”
머뭇거리는 에밀.
가토가 흘깃 구겨진 신문을 스치듯 보고는 말을 이었다.
“임 대사제는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신앙만큼은 최고였던 분이었죠. 진실로 그분을 따랐던 몇 안 되는 종복이었습니다. 그녀라면 지금도 그분의 가장 가까이서 ‘일부’가 되어 있을 겁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 사합니다.”
“뭘요. 형제들끼리 서로 도와야죠.”
가토의 위로에 감정을 털어 낸 에밀.
가토가 맞다.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조금 있으면 목표치의 ‘제물’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군요.”
“삼합회가 생각보다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한국 쪽과 미국 쪽에서 대대적인 단속을 펼친 게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저런…… 불신자들답게 믿음이 부족하군요.”
“그래도 삼합회의 밀수 루트로 각지에 퍼져 있는 ‘구원’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손해는 아니었죠.”
“듣던 중 다행입니다.”
가토는 웃으며 창가로 향했다.
아래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온갖 부조리함에 속박된 사람들. 그럼에도 너무 오래도록 지배당해 왔기에 저항하는 방법조차 잊은 사람들.
가토는 저들에게 뺏긴 권리를 돌려줄 것이다.
‘혁명’이란 이름으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가토의 눈에 도쿄 타워가 비치고 있었다.
* * *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줄곧 진룡산을 오갔다.
이유야 말할 필요도 없다.
‘마룡기’ 때문이지.
이건 자존심 문제다.
내가 이곳에 눈을 뜨고서 주도한 가장 큰 프로젝트인 만큼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었다.
“거기 술식,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조금만 줄이죠. 아! 엔진은 괜찮아요. 엔진은 핵심이니까 다소 빡빡한 게 좋아요.”
“너무 ‘초기 형태’에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마룡기는 ‘구체화된 고유 마법’을 만드는 겁니다. 세상에 똑같은 고유 마법이 없듯, 마룡기 역시 사용자마다 각자 다른 형태로 바뀔 겁니다.”
“시작은 ‘의지’를 받아들이는 여기, 이 부분이에요. 이렇게 받아들인 사용자의 의지를 마룡기 자체적으로 해석 및 연산, ‘진리’를 도출해 냅니다. 이게 기본적인 마룡기의 메커니즘이에요.”
옛날에도 그랬지만, 난 일단 연구실에 박히면 내가 목표한 결과물을 얻기 전까지는 죽어라 부딪힌다.
처음부터 손을 안 댔으면 안 댔지, 타협 따윈 없다는 스타일.
제삼자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피곤한 스타일이었고, 나의 스승, 영감조차도 이런 내 성격에 지랄 맞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진도하는 나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고맙게도 오히려 격려까지 줬다.
“출력이 약간 모자라는군요. 다시 해 보죠.”
“수정이 필요하단 말이죠? 그럽시다. 기혁이 원한다면 해야죠. 못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상상했던 것을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세상에 꺼내 놓을지, 그것 하나만 생각하십시오. 비용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건 저와 저희 가문이 해결합니다.”
운룡대의 철통 보안 속에 최상급 마석들이 운반됐다.
운룡대주 진도민은 무슨 심장처럼 아공간 주머니를 품고 있더라.
그 주위로 운룡대 전원이 호위하고 있는데, 살기를 풀풀 풍기는 게 근처에 오기만 해도 당장 마법을 쏘아 낼 것 같더라.
용아병은 24시간 비상사태로 물 샐 틈 없이 진룡산을 지켰다. 적어도 진룡산 근처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그들의 허락이 떨어져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란 건, 아룡원.
부상이다, 나이 때문이다, 라는 이유로 현역에서 물러난, 진룡가의 학문 발전과 교육을 담당하는 집단이라는데.
난 무슨 전쟁하는 줄 알았다. 무슨 마법 병단을 옮겨 놓은 것 같더라니까. 전부 당장 현역으로 복귀해도 무방할 만큼 강한 마법사들이었다.
그런 마법사들이 나의 손발이 되어 줬다.
참고로 아룡원 마법사 중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40이다. 어찌 됐든 나보다 한참 어른들. 그럼에도 군말 없이 허드렛일을 하더라니까.
내가 다시 한번 진룡의 저력을 느낀 부분이었다.
세계수의 뿌리.
기간트의 강철.
레드 드래곤의 신체.
진룡가의 무한한 지원까지 더해진.
전무후무한 초대형 프로젝트.
마룡기.
완성까지 단 한 발짝만 남았다.
* * *
진룡산.
용아병의 보안 속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랐다.
“도마뱀 녀석, 독이 바짝 올랐구만. 애들을 쥐 잡듯 잡아 놨어. 쯧.”
“당신 아까 내가 했던 말 잊었어? 입조심하라고 했지.”
“걔도 나한테 고양이라고 부르는데.”
“남편아…… 여기 진룡산이다.”
“뭐 어때. 걱정하지 마, 마누라. 당신 남편이 더 세.”
“그 말이 아니잖아, 이 자시ㄱ…… 후우…… 제발 좀……!”
박건의 박건다운 대화에 김연희는 오랜만에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뒤따르는 박수혁과 박민지의 대화는 더 가관이었는데.
“오랜만이네 여기…… 마음에 들어.”
“머리에 싸움 생각뿐이지.”
“어쩔 수 있나, 그렇게 태어났는데. 너는 근질거리지 않아?”
“……천박한 표현 좀 닥쳐 줄래.”
“그래서, 싸우고 싶지 않아?”
“……당연한 것도 묻지 마.”
몸은 솔직한 법.
검호의 본능은 진룡산에 올라선 뒤부터 맹렬히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진룡산 정상에 도착한 식구들을 맞이하는 건,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마법진, 대단위 마법진이었다.
“와아…….”
“규모가.”
“미쳤네.”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그들이지만, 이 정도 규모의 마법진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그 사이로 박기혁과 박봄이 마중을 나왔다.
“오셨어요.”
“할머니!”
“어이쿠, 우리 강세이.”
비로소 완전체가 된 검호가.
대단위 마법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째, 내부로 가면 갈수록 마법진이 더욱 현란해지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중심부에 다다르자, 이제는 마법진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허공을 유영하고 있다. 어항 속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헤엄치는 마법진을 보자, 김연희는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대체 얘는 얼마나 쓴 거야.”
“기둥뿌리 뽑았지.”
“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유해련이다. 감청색의, 어두운 계통 한복을 입은 유해련이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
“오! 해련이~ 이게 얼마만이야.”
“오빠는 여전하시네요. 잘 지내셨죠?”
“고러엄.”
과거 옵티멈의 창단 멤버로 함께 활동했던 전우.
유해련과 박건은 가볍게 서로를 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곧이어 진도하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들어선다. 단정한 두루마기 위로 진룡의 문양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모두가 모였다.
이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 박기혁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봄이, 진유리…… 주위를 훑고는, 마지막으로 진도하와 눈빛을 교환한다.
“바로 선보이겠습니다. 마룡기 프로젝트입니다.”
발을 구르는 순간.
박기혁의 발밑으로 육망성 마법진이 어지럽게 생겨난다.
하나가 아니라 수십, 수백, 수천…… 헤아릴 수 없는 마법진들이 파동처럼 번져 나가고.
쿠쿵!!
그를 중심으로 열 개의 관이 솟아올랐다.
화려한 용이 각인된 관. 적룡과 흑룡이 서로 똬리를 틀며 여의주 하나를 놓고 싸우고 있는 각인이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
단순히 워 아머일 거라 예상했던 김연희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박기혁을 바라봤다.
“보시는 바와 같이 마룡기는 워 아머가 아닙니다. 당연히 알파 기어도 아닙니다.”
자아가 있는 인형? 그런 게 아니다.
이건 ‘구체화된 고유 마법’.
다시 말해.
“여러분의 ‘진리’로 완성되는 병기입니다.”
진리(眞理).
마법사가 꿈꾸는 궁극의 깨달음.
하지만 진리라는 거, 개개인의 안에 잠재된 게 아닐까?
거창하게 말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가능성의 한 갈래가 아닌가.
모든 인간은 무한의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하나 그 빛나는 가능성들의 별들 속 몇을 제외하곤, 그저 하늘에 떠 있는 흔한 별이 되어 사라진다.
이들에게는 자신만의 ‘진리’가 없을까?
박기혁은 아니라고 본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결승선이 있다. 저들은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다.
마룡기는 이 ‘진리’를 강제로 깨우는 병기다.
잠들어 있던 가능성, 도달하지 못했던 결승선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사용자의 입에 강제로 떠먹여 주는 것이다.
설명은 끝.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진유리하고 박봄. 나오세요.”
진유리와 박봄이 손을 잡고 걸어 나오고, 때맞춰 여의주가 광채를 내뿜으며 연기와 함께 관이 열렸다.
“이곳에 들어가면 세 가지만 기억하면 돼.”
첫째. 잘하는 것.
둘째. 필요한 것.
셋째. 원하는 것.
“진짜 그것만 하면 돼?”
“그래.”
너무 쉬운 주문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진유리. 관계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다.
하지만 이 간단한 주문에 모든 게 함축돼 있다.
잘하는 것은 ‘장점’.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자신 있어 하는 분야.
필요한 것은 ‘단점’. 부족하고 보완해야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마지막 원하는 것. ‘이상향’을 그릴 수 있었다.
“거짓을 섞지 마.”
“고유 마법 쓸 때처럼?”
“그래, 네 ‘용언’ 쓸 때처럼.”
진유리한테 다 말했으니, 이번에는 박봄 차례.
다리를 굽혀, 박봄과 마주한 박기혁은 해사하게 웃었다.
“봄이는 아빠가 했던 말 이해했어?”
두리번,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박봄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 하나도 모르겠어.”
당연한 거다.
아직 어린아이, 장래희망조차 정해지지 않은 아이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박기혁은 괜찮다며 박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봄이는 그냥 들어가서 눈만 감고 있어도 돼.”
“응? 그래도 돼?”
“응, 그럴 줄 알고 아빠가 준비해 놨거든.”
박기혁이 박봄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든다.
“이게 다 알아서 할 거야.”
오늘을 위해 만든 목걸이. 쉽게 설명하자면,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기록해 놓는 도구다.
“그냥 눈감고, 목걸이만 꼭 잡고 있어. 할 수 있지?”
“응! 할 수 있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는 봄이.
그렇게 진유리와 봄이가 관으로 들어서고, 진도하와 박기혁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나를 끌어올렸다.
고오오오오오―!
마법진들이 관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듯, 마법진은 서로 뒤엉켜 갖가지 형태로 바뀌어 갔다.
곧이어 관의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온다.
회전이 계속될수록 빛의 세기가 강해졌다.
처음에는 흐릿하게 비치던 빛이, 깜빡임으로 변하고, 선명하게 빛나더니.
나중에는 선명한 광채로 변하며 빛을 발했다.
그때였다. 관이 변하는 것이.
처음은 진유리의 관이었다.
진유리의 관이 사방으로 폭발하듯 떨어지더니, 떨어진 관이 진유리의 주위를 유영하며 변화했다.
네모반듯한 조각들이 색색의 빛으로 바뀌며 형태를 갖추고.
점차 드러나는 형태는 팔, 다리…… 인간의 신체를 닮은 형태였다. 그리고 모든 형태가 완성됐을 때, 진유리의 신체에 합체했다.
그 모습에 박기혁이 피식 웃었다.
‘워 아머에 죽고 못 살더니만.’
마룡기도 워 아머 형태로 만드네. 과연 진유리, 워 아머에 진심인 여자다웠다.
한편 박봄의 관도 변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진유리와는 또 다른 변화. 진유리의 관이 부서졌다면, 박봄의 관은 물처럼 녹아내렸다.
아빠의 말대로 눈을 꼭 감은 채 목걸이를 들고 있는 봄이.
발밑으로 색색의 빛이 변하는 웅덩이가 펼쳐져 있다.
영역을 넓히는 웅덩이…… 마치 동심원을 그리듯 박봄을 중심으로 펼쳐진 웅덩이가 모양을 잡는다.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여섯 줄기의 각기 다른 방향으로 그어지자.
육망성.
박기혁의 아포칼립스가 펼쳐진다.
그 모습에 박기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녀석.’
실로 자신의 분신다웠다.
박기혁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완성된 아포칼립스 마법진 위로 부글부글 거품이 올라왔다. 냄비에 물이 끓듯 거품이 생겨나고 사라지길 반복하다.
어느 순간.
부와아악-!
부풀어 오른다.
바글바글 부풀어 올라, 작은 동산만 한 반구가 생겨나는데.
“슬라임?”
어디선가 튀어나온 말.
맞다.
정확한 표현이다.
흰색의 무체형 반구, 말랑말랑, 몽실몽실. 도톰하고 귀여운 외관.
완성된 박봄의 마룡기는 슬라임이랑 흡사한 모습을 띠었다.
“우와.”
“이게 뭐야아!”
“언니! 언니, 이거 봐! 슬라임이야!”
“그러네? 봄아, 언니 봐. 짜잔, 꼬리 있다.”
“우와아아! 예뻐!”
곧이어 서로의 마룡기를 보며 감탄하는 진유리와 박봄. 주변의 관계자들도 환호하며 저마다의 고생을 치하했다.
하지만, 들뜨기에는 이르다.
환호는 모든 것이 마무리됐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자, 여덟 대 남았습니다. 차례대로 올라오세요.”
마룡기.
세계 초인 역사에 기록될 희대의 병기가 이곳에서 완성됐다.
박기혁의 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