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35화>
진도하의 집무실.
진도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평소 얼음장 같던 그의 표정을 생각하면 심히 놀라운 변화였지만, 그럴 만도 하다.
상대가 그토록 기다리던 박기혁이었으니까.
“설마 했는데, 정말로 재료를 구했다고요. 놀랍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기혁.”
- 마침, 의외로 답이 멀지 않은 곳에 있더라고요.
“혹시 출처를 말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절대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순수한 호기심에 묻는 겁니다.”
- 오해 안 해요. 근데 전화로는 하기 그렇고. 그냥, ‘레드 드래곤’이라고만 알고 있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 아, 그리고.
“걱정 마십시오. 저 혼자만 알고 있을 테니까요.”
- 역시, 도하 아저씨는 좋아요. 척하면 척, 잘 통한다니까요.
“우린 친구 아닙니까.”
- 친구. 좋네요.
하하하하!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선상을 바라보며,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우.
진도하는 자신에게 이런 친우가 생겼다는 것에 진심으로 고맙고 행복했다.
한창 통화하던 중, 진도민이 집무실로 들어선다. 형인 진도하의 부름에 온 것이다.
진도하는 예를 표하는 동생에게 눈빛으로 인사하고는 계속 통화를 이어 나갔다.
“……다음 주에 돌아온단 말이죠. 그럼 ‘마룡기’ 제작은 언제로 계획할까요? 기혁이 미국으로 떠난 지도 2개월쯤 됐으니까…… 볼일도 봐야 하고, 다음 달 즈음으로 할까요?”
- 아뇨, 어차피 밑 준비도 끝났는데 질질 끌 이유 있나요. 저 귀국하고 바로 진행하죠.
“시원해서 좋습니다. 저희 쪽도 그렇게 준비하죠.”
- 아! 안 그래도 그거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뭐든 말씀하세요.”
- 초기 제작 물량은 열 대 정도로 할까 싶어요.
멈칫!
진도하의 표정에 균열이 생긴다.
10대……?
진도하는 바쁘게 부품들의 재고를 떠올려 봤다.
모자라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모자라다!
“10대라면…….”
-생각보다 많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저희는 5대 정도로 예상했습니다.”
- 그게요. 저희 가족들 하나씩 맞춰 주려고요. 아버지랑, 형이랑, 누나랑, 저랑, 봄이랑 이렇게 다섯요. 어머니는 오리지널 말고 차라리 보급용으로 달라고 하더라고요.
“아아, 그래서였군요.”
본래 마룡기 제작 프로젝트는 박기혁이 아이디어 및 설계도를 제공하면, 진룡가는 자금 및 제작 전반을 지원하기로 한 기획이었다.
이렇듯 정확히 지분을 절반, 5:5로 나누기로 한 프로젝트.
다시 말해 박기혁 자신이 다섯 대를 가져간다는 말은, 진룡가에도 다섯 대를 줘야 한다는 말이었고, 총 합쳐서 10대.
정확한 계산이었다.
- 그리고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 진룡가에 배정된 다섯 대 중에 한 대는 유리 주고 싶은데…… 그, 저 나가 있을 동안 고생도 했고, 그…… 봄이도 잘 보살펴 주고, 얘가…… 그냥! 그냥 보답하고 싶어서요!
“하하. 부담 가질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고맙습니다.”
진도하는 모자란 제 딸까지 챙기려는 박기혁의 고운 심성에, 끝내 ‘부품이 모자라서 10대 건조하기는 힘들 것 같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도.
- 그럼, 제가 보내 준 양식으로 선정해 주세요.
“다음에 만날 때는 전화가 아닌 얼굴을 마주하겠군요.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세요.”
- 아저씨도요.
툭, 수화기를 놓는 순간, 진도하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방금 전의 환한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평소의 냉기를 풀풀 날리는 진도하로 돌아온 그는.
“도민아.”
“말씀하신 보안 준비는 끝났습니다. 박기혁 님이 도착하시는 순간 저희 운룡대가…….”
“아니.”
그때 동생의 말을 끊는 진도하.
“도민아, 지금 보안이 문제가 아니다.”
“네?”
불과 얼마 전까지 몇 번이고 보안, 보안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갑자기 왜?
진도민이 이에 정중히 물었고, 진도하가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한다.
10대를 제작해야 되는데 부품이 모자란다는…….
시시각각 나빠지는 진도민의 표정.
“얼마나 준비돼 있지?”
“……6대. 무리하면 7대 정도는.”
“3대 분량 채워야 한다.”
“……무…….”
“다음 주까지.”
“…….”
“절대로.”
“……예.”
‘무리’라는 단어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진도민이었지만, 형의 살벌한 눈에 차마 뱉지 못했다.
“가족회의 개최한다. 운룡대, 용아병, 아룡원(兒龍園). 전원 참석. 예외 없다.”
……
…
불을 밝혀라.
푸쉬이익-
진룡산 정상에서 한 줄기 불길이 치솟았고, 곧이어 진룡산 전체가 불길로 환하게 물들고 있었다.
진룡가의 가족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 * *
진도하와 이야기를 끝낸 나는, 나대로 준비에 나섰다.
물론 우리 봄이는 천재라 준비 따위는 필요 없지만 그래도 완벽한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마침 타이밍도 좋고.
아침 햇살이 창을 통과하고는 내 눈을 비췄다.
분명히 커튼을 치고 잤는데 무슨 햇빛이냐며 눈을 뜨는데. 앞에 웬 천사가 있다?
“봄아?”
“아빠, 햇님 떴어!”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봄이.
“눈떠! 눈 똑띠 떠!!”
“아빠 졸려.”
“졸리지 않아요! 일어나야 해요! 아침이에요! 씻어야 해요!”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
“안 돼요! 게으름뱅이!”
게으름뱅이? 요 꼬맹이가…… 아침마다 유치원 가기 싫다며 베개에 머리를 박는 사람이 누군데.
아직 약속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아빠를 못 살게 구는 봄이.
오늘은 오랜만에 아빠랑 단둘이서 동물원 가는 날이라 저렇다. 갑자기 어머니의 스케줄이 바뀌며 유리가 우리 김연희 여사를 에스코트하게 된 것.
덕분에 우리 부녀는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제 유리의 얼굴이 볼만했다.
부탁하는 어머니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아이, 어머님. 당연히 제가 같이 가야죠. 불러 주지 않으셨으면 섭섭할 뻔했어요.’라고 아부하더니, 우리 쪽에서는 ‘어떡해. 도시락도 싸 놨는데!’라며 울상을 짓더라.
근데 우리 봄이도 장난 아닌 거 있지.
요 앙큼한 게 어제 유리가 있을 때는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아쉽다며 칭얼대더니, 침대에 눕고 내 품에서 잘 때는 ‘아빠, 아빠. 내일 뭐 할까? 봄이 기대돼!’라며 잔뜩 좋아하더라.
……진유리. 대체 봄이한테 뭘 가르친 거야.
어쨌든 소소한 건 넘어가고.
중요한 건 이거다.
보고 있나, 진유리?
아무리 네가 친해졌다 해도 봄이의 마음속 1순위는 아빠란 말씀이시다. 에헴!
“아빠,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상한 표정. 못났어!”
“못나면 아빠 싫어?”
“못나도 괜찮은데, 늦으면 싫어! 얼른 일어나!”
엄한 선생님을 연기하는 건가,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며 앙증맞은 눈썹을 꿈틀대는데.
으으으~.
“딸내미, 너무 귀엽잖아!”
“아아아! 안지 마아!!”
“안을래에에~.”
“안 돼에에! 빨리 준비해야 한단 말야! 봄이 화낼 거야!”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직 시간은 한참 남았다. 동물원 열릴 시간도 한참 뒤고, 예약했던 식당들은 아직 문도 안 열렸을걸.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선생님 모드로 변한 봄이의 보챔에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봄이가 이토록 나가고 싶은데 뭘 못해 주겠나.
대충 배만 채우고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오랜만에 뛰어갈까?”
“응!”
“봄이 타.”
엉차, 엉차. 내 목에 다리를 올리는 봄이.
여기서 잠깐.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는 별장이다.
이름 모를 산 중턱에 세워진 저택.
그러니까, 보통은 차량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잔뜩 신난 봄이가 외쳤고.
“출동!”
난 쏘아지듯 도약했다.
바람이 내 얼굴을 쳐 댔고, 봄이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우와아아아!! 빨라!”
“신나?”
“신나! 더 빨리!!”
“꽉 잡아.”
봄이의 손이 내 머리를 움켜쥐고, 한층 속도를 올렸다.
이곳은 미국. 초인에 대한 규제가 한국보다 한참은 널널하다. 고로 차보다 빠른 아빠가 될 수 있다는 말씀.
순식간에 휙휙 바뀌는 풍경들.
울타리가 있는 등산로에서, 나무들이 줄 세워져 있는 길로 들어섰고…… 우리 앞으로 어느 명화의 한 장면 같은 길이 펼쳐진다.
“우와아아!”
“그러게!”
예쁘다.
천연의 색이 낼 수 있는 조화에 나와 봄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높이서 보고 싶어.”
“그럴까.”
“저기! 저기 제일 높이 오른 나무!”
잔잔하게 흐드러진 나무 사이로 홀로 피뢰침처럼 솟아 있는 거목(巨木).
우지끈,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땅을 박차고 단숨에 뛰어올랐다.
아슬아슬하게 한 발로 나무의 꼭대기에 안착.
세상이 다 보인다.
호수도 산도, 모두 우리 아래에 있다.
밑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 다른 환상적인 그림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예뻐…….”
몽롱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봄이.
머리를 움켜진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혹시 무섭나 싶어 올려다보는데 내 눈에 비친 봄이는 환하게, 저 태양보다도 더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
“좋아?”
“응…… 행복해.”
행복하다…….
흔한 표현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입에 올리기 힘들어진 단어.
아이의 순수한 감정이 나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아빠도 행복해.”
흐드러진 숲? 저 멀리 반짝이는 호수?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
이런 것들이 아니다.
아빠의 행복은 바로 너.
박봄이다.
“봄이가 행복하면 다 좋아.”
미소 지으며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 * *
사무실 소파에 앉은 진유리가 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재미있는가 보네.”
SNS에 올라온 박기혁과 박봄의 사진.
동물원에서 찍었는지, 갖가지 동물들이 배경으로 나와 있다.
그럼 뭐 하나, 둘의 얼굴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커다란 박기혁과 빵실빵실한 박봄이 사진 가득 웃고 있었다. 배경이 바뀌어도 구도가 비슷해서인지 다 그 사진이 그 사진 같다.
“하여튼 박기혁, 센스가 없어.”
박봄이란 사기 캐릭터를 데리고서 이딴 사진밖에 못 찍어?
모델이 아깝다,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갔을 텐데.”
그래야 이런 세심한 부분을 신경 써 줬을 텐데.
진유리의 귓가로 악마가 날아든다.
‘지금이라도 가!’
‘금방 가잖아! 봄이도 널 보면 좋아할 거야!’
그때 반대편 귓가로 천사가 날아든다.
‘안 돼!’
‘기껏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빠진 거잖아. 참아야 해!’
그렇다.
진유리가 김연희의 비즈니스를 도와줘 봤자 얼마나 도와주겠나. 그저 박기혁과 봄이를 위해 한발 빠져 준 것이었다.
“하~ 나도 많이 인간 됐다.”
제 잘난 맛에 살던 나였는데, 이제는 배려도 할 줄 알고.
새삼 이런 자신의 변화가 놀라운 진유리였다.
그렇게 진유리는 한 손에 커피를 든 채 SNS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그때, 자신의 앞에 말도 없이 앉는 남자.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에는 ‘어머님’의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미소를 지었다.
“저 모르세요?”
“아? 혹시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
“아니…… 그게, 하……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사실 이 남자는 미국 음악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다. 뛰어난 퍼포먼스와 거침없는 입담으로 한창 인기몰이중인 남자.
여기 온 것도 광고 때문에 왔다가 미팅이 미뤄져 카페에 온 것.
본래 남자의 캐릭터대로라면 미팅이 미뤄졌다는 것만으로도 화를 내며 돌아서야겠지만, 여기가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프리즘’ 서부 지사라는 점과, 지금 미팅을 하는 사람이 프리즘의 최대 주주 ‘옵티멈의 마녀’라는 소리에 수그린 채 카페로 온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제껏 본 적 없는 신비로운 외모의 동양인 미녀가 눈앞에 떡 있으니, 언감생심 찔러 본 것이었고.
남자가 은근슬쩍 자신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쯤하면 알겠지?’라는 얄팍한 수작질이었다.
하지만.
‘얘 뭐지?’
진유리는 TV도 잘 안 보는 여자다.
그나마 본 것이 박봄과 함께 보는 ‘캡틴 타이거’인데, 알아듣지 못할 빠른 미국 노래를 어떻게 알겠나.
‘모르는 얼굴인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모르는 얼굴.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혹시 ‘어머님’ 김연희에게 말을 전하려고 온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남자가 이후에 뱉은 말에 진유리가 애써 짓던 미소가 와장창 깨져 버렸다.
“음, 평소에 음악을 듣지 않으시나 봐요. 제 음악을 모르시네요. 하는 수 없죠. 쿨 하게 갈게요. 당신, 아름다워요. 번호 주세요.”
“이게 장난하…….”
잠시나마 고민했던 자신의 모습에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진유리의 입에서 본격적으로 욕이 나오려는 찰나.
우웅- 띠링~!
실로 기가 막힌 타이밍에 진동과 함께 그토록 기다리던 울림이 들린다!
SNS에 박기혁과 박봄의 사진이 업데이트된 것.
철조망 사이로 호랑이랑 입을 맞대고 있는 봄이 사진이다.
“크윽.”
시, 심장이. 심장이 아야 해.
몹시도 귀한 사진. 이건 소장해야 한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저장 버튼을 누른 뒤, 무슨 보물처럼 쓰다듬으며 사진을 듬뿍 감상했다.
“……저기, 저기?”
“바빠요.”
“네?”
“가세요.”
“……그, 번호는.”
“헛소리 그만하시고, 좋은 말할 때 가세요.”
진유리가 사진에 눈을 박은 채 대충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진유리의 태도에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격하게 반응한다.
뭐라 뭐라…… 나를 가지고 놀았다. 모욕했다. 무슨 해괴망측한 단어가 들리는데.
딸칵.
진유리는 통역기를 꺼 버렸다.
“어쩌라는 거야. 짜증 나게.”
근데 너무 대놓고 꺼 버려서일까. 이른 본 남자가 더 지랄 발광하는데.
남자를 말리는 사람이 달려오고, 주위에 앉아 있던 이들이 자리를 피한다. 주목이 끌리며 웅성웅성 소란이 일어났다. 몇몇은 폰까지 빼내어 이쪽을 찍고 있는 상황.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확히는 봄이 사진에 집중하는데, 정신 사납게 날파리가 앵앵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뿐이었다.
콰아앙-!
이후로는 안 봐서 모르겠다.
여전히 진유리의 눈은 봄이의 사진을 향해 있었으니까.
“어쩜 이리 예쁠까.”
주변이 쑥대밭이 되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봄이가 웃고 있는데.
진유리가 먼지 속에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