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32화>
현대의 세계 경제는, 그 나라의 ‘게이트’ 숫자와 더불어 이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는 ‘초인’의 질에 따라 판가름되는 실정이다.
이 게이트가 나라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게 현 동아시아의 상황이다.
중국은 넓은 땅덩어리와 미어터지는 인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게이트 숫자를 지녔다.
어느 전문가가 말하기를.
“소국이라 부르기에는 초인이 너무 많고, 대국이라 부르기에는 게이트가 너무 적으니, 중국이라 불린다.”
이런 인구 대비 적은 게이트 숫자는 중국의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고, 현재 중국의 ‘문파 경제’와 ‘숭무 사상’의 토대가 되고 있다.
반면, 정반대의 경우가 있는데, 그게 일본이다.
일본은 ‘창조주의 편애’를 받는다는 옆 나라 한국과 비견될 만큼 많은 게이트를 보유하고 있다.
하나, 문제가 있는데.
그건 바로 이 많은 게이트를 소화할 ‘초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
“매년 일본의 초인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말이 됩니까! 게이트가 있어도 사냥을 못 하고 있어요! 저 외국인들의 배만 불리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전부 탐욕스러운 ‘화족’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혈족’을 독점하고 있어요. 옆 나라 한국을 본받자고요!!”
게이트는 많고 이를 소화할 초인은 적다.
이런 기형적인 상황 탓에 일본 경제를 비롯한 문화 전반에 기형적인 성장이 이뤄지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일본의 보이지 않는 계급이라 불리는, ‘화족’이었다.
초인은 있는데 게이트가 없는 중국.
게이트는 있는데 초인이 없는 일본.
이 두 나라의 장점을 모아 놓은 게 바로 이 두 나라 사이에 있는 한국이었다.
“한국은 창조주의 편애를 받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미쳤어요.”
국토에 비해 말도 안 되는 게이트 밀집도.
초인의 숫자는 또 얼마나 많은지, 높아지는 출산율이 비례해 초인의 숫자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그 말 많기로 유명한 세계 ‘혈족’ 순위에서 단 한 번의 이견 없이 언제나 상위권에 오르는 두 가문. ‘검호’와 ‘진룡’의 보유국이기까지.
그뿐만인가?
가장 온화하고 자애롭기로 유명한 수호령, 위그드라실까지 있네?
이 무슨 창조주의 편애인가.
마나의 축복을 정통으로 맞았다고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니다.
그래서인가, 근대화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은 단 한 번도 꺾이지 않고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중국, 일본, 한국.
서로 이웃한 세 나라의 사정이 이토록 극명하게 갈린 결정적 이유.
게이트(Gate).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이며, 동시에 그 나라의 경제 수준을 보여 주는 지표였고.
최종적으로,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건이었다.
* * *
다음 날, 일찌감치 일어나 챈들러가로 향한 나는 챈들러 릴라드와 마주했다.
“반갑습니다. 챈들러 가문의 가주 챈들러 릴라드입니다. 어려운 발걸음 하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시대극을 뚫고 나온 것 같은 정장과, 기품 있는 은발.
챈들러 릴라드의 첫인상은 멋들어진 노신사였다.
처음 악수를 나눌 때만 해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반갑습니다. 박기혁입니다.”
봄이를 소개할 때도 아주 좋았다.
“이쪽은 제 딸 봄입니다.”
“안녕하세요. 박봄이에요! 아빠 딸이에요. 얘는 버찌예요. 제 동생이에요. 버찌야, 인사해.”
“오, 아기 천사가 내려오셨군요. 반가워요, 봄이 양.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근데 문제는 진유리 때였다.
악수하는 둘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데, 농담으로도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더라.
뭐랄까, 먹이를 두고 다투는 맹수의 눈빛이라고나 할까.
“이쪽은 제 친구 진유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유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진룡의 딸이여. 진룡은 잘 계십니까.”
“안 그래도 아버지가 안부 전해 달라고 했어요. 저희 ‘기, 혁’이도 잘 부탁한다고, 꼭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하, 하, 하. 부디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시길. 저희 챈들러 가문 전부 ‘박, 기, 혁’ 님을 환영하고 있으니까요.”
둘이 힐끔힐끔 날 보는데.
난 매몰차게 외면했다.
바라건데, 제발 무슨 일이든 나랑 엮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이야기인 만큼 봄이랑 진유리가 빠지고 나와 챈들러 릴라드의 독대 시간.
릴라드는 외관과는 다르게 과감했다.
한 가문의 가주임에도 선뜻 허리를 굽힌 것.
“저희 가문의 수치가 기혁 님에게 무례를 범한 것도 모자라, 기혁 님의 가족분을 다치게 했습니다. 가주로서 가문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미 사과는 받았습니다. 보상도 충분했고,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상처도 회복됐습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솔직히 이미 끝난 일로 이렇게 초대받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오늘 만남도 이 말을 전하러 온 것이고요.”
“기혁 님은 충분할지 몰라도, 저희 가문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디 과례라 생각하지 마시길.”
웃긴다.
내가 괜찮다는데 본인들이 괜찮지 않단다.
이후로도 계속 이상한 대화가 오고 간다.
미국에 대한 첫인상이며, 게이트는 어딜 갔다 왔고, LA 날씨는 마음에 드는지.
분명히 ‘챈들러 머레이’ 때문에 왔는데,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제야 감이 잡혔다.
이 노인에 대해.
개인이 아닌 가문을 위해 사는 자.
기꺼이 가문의 부품이 되고, 이를 일생의 영광으로 아는 자.
챈들러 릴라드는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과거 제국 시절, 수많은 귀족들과 부대껴 온 나는 잘 안다. 이런 자들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사람 진을 빠지게 해, 대화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온다.
어렵게 말하면 ‘귀족적 수사법’이고.
쉽게 말해, 더럽게 귀찮다는 거다.
대응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같은 귀족이 되어 귀족적인 대화를 몇 시간이고 즐기는 것.
실제로 귀족들의 싸움을 ‘엉덩이 싸움’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이거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일어나는 놈이 지는 거니까.
귀찮은 거 싫어하는 내가 이걸 할 리 없으니까, 패스.
그럼 다음은 두 번째인데……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방법이다.
나는 머리를 쓸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곧이어 몸에 배어 있는 예의범절을 지워 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 자신감을 채워 놓으며, 마나를 개방했다.
“……!!”
멈칫, 얼어붙는 릴라드.
나는 그를 향해 딱 잘라 말했다.
“확실히 말하죠. 저는 귀찮은 걸 싫어합니다. 빙빙 둘러말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이것저것 엮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러니 확실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세요.”
귀족을 상대하는 두 번째 방법.
그냥.
찍어 누르면 된다.
“당장.”
* * *
방 안 가득 넘실대는 마나에 챈들러 릴라드의 표정이 굳었다.
‘……훨씬 더 강하군.’
며칠 전 확인한 조사단의 보고서에는 박기혁이 S급 히어로라고 쓰여 있었는데.
‘조사단을 갈아엎어야겠어.’
이 소름 돋는 마나만 봐도 아니다.
S급 그 이상. 미 대륙 최강의 히어로라 칭송받는 ‘무법자’ 존 C. 타일러와 같은, 규격 외의 초인이었다.
이 나이에, 이 정도의 무력을 가질 수 있다니.
경악스럽다 못해 경이로웠다.
이렇게 되면 이 만남의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저희 챈들러 가문은 귀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원래는 친분 관계 정도였지만 이 정도의 무력을 본 이상 달라졌다.
문득 아쉬웠다. 진유리와 함께 온 걸 보면 진룡 가문과 엮여 있는 것 같은데, 저 틈을 끊을 수는 없을까.
어떻게든 박기혁과의 연결 고리를 강화시켜야만 했다. 지금 챈들러 릴라드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저쪽은.
“됐어요. 생각 없어요.”
명백한 거절.
하지만 한 번으로 포기하는 릴라드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시작이지.
숨겨 두었던 패를 꺼냈다. 이제껏 꼭꼭 숨겨 두었던 8레벨 게이트의 존재를.
“저희 가문은 혈족 ‘아이스 쉬프트’의 특성상, 남극과 북극과 같은 극지에 연구소를 항시 운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 언급했듯이, 속성을 단련하는 가장 무식하고 효율적인 방법은 해당 속성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챈들러 가문은 본인들의 혈족 계승 ‘아이스 쉬프트’를 강화시키기 위해 극지방을 이용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남극 기지에서 ‘퍼플 게이트’를 발견했고, 측정 결과 이는 ‘8레벨’로 판명됐습니다. 저희는 이곳의 공략을 박기혁 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릴라드는 자신 있었다.
무려 8레벨 게이트니까.
8레벨 게이트가 무엇인가. 현존 최고 레벨 게이트다.
현재 세계에 알려진 8레벨 블루 게이트는 셋.
프랑스의 ‘마계 13구역’과, 아프리카 연합이 관리하는 ‘공중도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의 ‘이상 세계(異狀 世界)’.
여기서는 매년 천문학적인 이익이 쏟아진다.
“8레벨 게이트의 가치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블루 게이트는 아니지만 퍼플 게이트라도 그 가치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와 한국이 각각 유럽과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평가받는 데에는 이 8레벨 게이트의 영향이 적지 않다는 게 세계의 평가였다.
“오히려 보스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박기혁 님에게는 더 좋은 소식 아니겠습니까?”
일회성 8레벨 게이트지만, 덕분에 보스를 잡는다.
최초 클리어 시 보스가 드랍하는 아티팩트와 부산물을 생각하면…….
릴라드는 확신했다. 이 거래는 절대 거절할 수 없는 거래란 것을.
‘원정 기간이 기니까, 거기에 가문의 여식들도 함께 참여시키면 돼. 아무리 박기혁이 냉정해도 전우로 엮이게 되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계산대로 된다면, 박기혁을 ‘긴밀한’ 관계로 엮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이미 이후의 플랜까지 완벽하게 그려 놓고 계획한 릴라드였다.
거절 따윈 염두조차 두지 않았고, 이미 박기혁의 입에서 ‘Yes.’라는 말이 나왔을 때의 인사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싫은데요.”
“예?”
“싫다고요.”
그의 기대를 처참히 배신하는 박기혁이었다.
* * *
불편한 자리를 끝내고 별장으로 돌아온 난, 씻고 드러누웠다.
“아, 좋다.”
빈둥빈둥.
역시 쉴 때는 할 일 없이 뒹구는 것이 최고다.
한창 뒹굴거리고 있는데, 그림자가 비친다. 보나마나 진유리다.
“진짜로 안 갈 거야?”
“미쳤냐. 내가 거기 가게.”
미국 원정도 지겨워 죽겠는데, 또 거길 가라고?
“그래도 8레벨 게이트잖아. 뭐가 나올지 어떻게 알아. 아닌 말로 국보급 아티팩트라도 나오면.”
“나오면?”
“나오면…… 딜이라도 할 수 있지.”
“됐다. 귀찮게 나올게 뻔하다.”
내가 아까 릴라드 같은 인간을 귀족이라 했잖나. 이런 귀족들은 엮이면 엮일수록 피곤한 부류다.
모든 일에 꿍꿍이를 숨겨 놓고 사람을 제 입맛대로 휘두르려고 하거든.
“여지를 주고, 다음을 남기고, 일이라는 둥, 거래라는 둥…… 이리저리 엮이게 되면 나중에는 보기 싫어도 봐야 해. 싫다 그거. 피곤하다.”
“그래도 거기 갔다 오는 게 너한테 이득이잖아.”
“……얘는 아까부터 왜 계속 날 보내려고 해. 수상한데. 바른 대로 말해. 너 그 양반한테 뭐 받아먹은 거 있지? 얼마나 받았냐.”
“섭섭한 소리 할래. 다 널 생각해서 해 주는 거지. 내조, 내조 몰라?”
“내조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솔직히 이번 미국행에서 기간트를 보지 못했다면 8레벨 게이트라는 말에 혹했을 수도 있다.
근데 아니잖아? 이미 기간트와 함께하며 얻은 깨달음이 어마어마하다. 이걸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기에도 바쁜데, 굳이 거길 가서 귀찮아지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 난.
“봄이랑 놀끄야. 흐흐.”
“……하, 봄이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8레벨 게이트를 포기하는 사람은 너뿐일걸.”
“포기가 아니라 거절이다.”
“어쨌든.”
“근데 봄이는? 너랑 씻으러 들어갔잖아.”
“낮잠 타임. 곯아떨어졌어. 피곤한가 봐.”
“그러니까 데리고 있으라니까. 괜히 애 피곤하게.”
“야, 너 나 안 갔으면…… 됐다, 말을 말자. 뭐 먹을래? 차려줄까?”
“오, 차려 주면 고맙지.”
스르륵 부엌으로 가는 진유리.
슬쩍 보니 녀석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뭐 좋은 일 있나.
그렇게 진유리가 해 준 볶음밥을 맛나게 먹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얘가 실력이 꽤 괜찮네. 확실히 맛이 좋다.
다 먹고서 다시 바닥과 하나가 된 나.
“아, 맞다. 너 어제 하던 말 계속해 봐라.”
“뭐.”
“마룡기 이야기했잖아. 도하 아저씨가 마룡기 엔진으로 뭐라 하셨다며.”
“아! 맞다.”
“정신 좀 차려라.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왜 잊고 그래.”
“나한테는 그거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거든.”
“뭔데.”
“됐어. 오늘부로 사라졌으니까. 하여튼 사람이 어지간히 완벽해야지, 안심을 할 수가 없어요. 안심을.”
뭐라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하긴, 진유리였지. 또 또라이 병이 도졌다고 생각했다.
“여튼, 아빠가 그랬어. 마룡기 거의 제작 다 됐대.”
“오!”
“끝까지 들어. 근데 엔진에 중요한 부품이 계속 오작동을 하는 것 같더라고.”
“뭔데.”
“그건 몰라. 아빠가 말하길 ‘마나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동시에 마나 동조율은 높은 물질’이 필요하대.”
“전에 보내 준 ‘기간트의 철’은 써 봤어?”
“안 돼. 몇 번을 해 봐도 안 돼서 스트레스 엄청 받으셨던데.”
“음, 그럼 심각한데.”
마나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동시에 마나 동조율은 높은 물질.
진도하가 정리가 안 돼서 두서없이 말한 것 같은데,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나의 상위 격인 물질이 필요하단 거잖아.”
“그게 그렇게 돼?”
“어.”
확실히 어려운 문제다.
마나의 상위 격인 물질이라…….
당장 생각나는 게 거의 없다. 생각나는 것도 전부 제국에서나 볼 법한 물건들.
아리아의 성물이 여기 있을 리는 없잖아?
“조금 생각해 보자.”
일단은 가서 보고 말해 줘야겠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그런데 며칠 뒤.
나는 의외의 만남에서 이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 있네.”
마나의 상위 격인 물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