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31화>
“많이 먹어!”
김밥이 산처럼 쌓여 있다. 대충 봐도 50줄은 넘겠는데?
종류도 다양하다.
스테디셀러인 기본 김밥부터 마요네즈로 변주를 준 참치, 한국인의 입맛 불고기, 화끈 개운한 맛 땡초. 마지막으로 우리 봄이가 가장 좋아하는 돈가스 김밥까지.
분식집 메뉴판에 쓰여 있는 종류는 다 가져온 것 같다.
이걸 진유리가 만들었다고? 진짜?
믿을 수 없다. 쟤 삼겹살도 제대로 못 구웠잖아!
“……솔직히 말해 봐. 사 온 거지? 아니다. 너희 식구들한테 부탁한 거 맞지?”
“또또 섭섭한 소리! 봄아, 너희 아빠 어쩌니?”
“아빠! 언니가 다 말았어!”
“아, 아니. 그게…….”
네 과거를 생각해 봐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봄이가 곁에 있어 차마 하지 못했다.
“믿음이 없는 당신을 위해!”
“위해!”
“그럴 줄 알고 준비했단 말씀!”
“말씀!”
추임새 무엇?
나 잠깐 미국 갔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다.
어쨌든 진유리가 폰을 똑똑 건들더니 내민다.
동영상이었다.
익숙한 공간이 보인다.
진도하의 집 거실. 진유리는 이곳에서 김밥을 말고 있다.
유해련과 함께.
“허…… 이걸 찍어?”
“누가 의심할 것 같아서. 내가 안 해서 그렇지 요리 잘해. 그치, 봄아? 봄이는 언니가 한 떡볶이 먹어 봤지?”
“응! 언니가 한 떡볶이 맛있어. 아빠, 의심하지 마.”
“의심은 나쁜 거야.”
“나빠!”
윽!
해맑게 ‘나빠!’라고 하는 봄이.
진유리는 봄이를 잡고 ‘귀여워어어-!’ 호들갑을 떨며 볼을 부비고, 우리 딸내미는 자지러진다.
생각해 보니까, 평소라면 내 다리 위에 앉아야 할 봄이가 진유리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있다.
빠직!
심술 나네.
뭔가, 뭔가 생전 느껴 보지 못한 질척하고 음습한 느낌.
이게 말로만 듣던 질…… 투?
뭔가 부지런히 준비하는 진유리. 아공간에서 버너를 꺼내더니, 부탄가스도 꺼낸다.
탁탁, 능숙하게 밑바닥을 때리고는 버너에 장착.
치익, 불이 오르는 걸 확인하고는 냄비를 올리고, 생수통에 물을 붓더니.
라면! 라면을 꺼낸다!
“와…….”
얼마 만의 라면이야. 미국 와서는 입도 대지 않았으니, 거의 두 달 만이다. 그 매콤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 쓰읍. 벌써부터 군침이 싸악 돌았다.
“평소대로?”
“평소대로.”
진유리가 시크한 표정으로 다섯 봉지 묶음을 탁탁 쳤고, 곧이어 샤륵- 마나로 자른 뒤, 면을 투하했다.
그 환상적인 장면에 난 넋을 잃어버렸다.
“아빠 언니한테 반했어! 눈이 반짝여!”
“…….”
자존심 상해 차마 답은 못했지만.
……겁나 멋져.
* * *
진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면발을 뒤집으며, 곁눈질로 슬쩍 본다.
‘넘어왔어.’
잘못 본 게 아니다. 박기혁의 눈이 몽롱하다.
틀림없다. 자신의 매력 어택이 박기혁의 심장에 적중한 거다.
‘성공!’
역시 답은 라면이었다!
외국 나가면 가장 생각나는 음식 1위. 김치와 라면.
프리즘 지식인은 틀리지 않았다. 고마워요, 지식인. 제가 별점 많이 쏴 줄게요!
그러고 보면 라면이 사랑의 묘약은 아닐까. 왜, 연인들 사이에 ‘라면 먹고 갈래?’라는 말도 있잖나.
그래도 우쭐해지면 안 된다.
나대지 마라 심장아. 아직 아냐.
큼큼.
진유리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건넨다.
“너는 어떻게 아빠한테만 편지 쓰고 내 거는 쏙 빼먹냐.”
“……남이사.”
“응? 뭐라고?”
“아니야. 도하 아저씨랑은 이야기할 게 있어서고, 넌 자주 통화했잖아.”
“어쨌든, 조금 섭섭했잖아. 다음번에는 내 거도 해 줘.”
“뭐…… 알았다. 다른 이야기는 없고? 엔진은 해결했대?”
“아아, 엔진. 맞아. 그 이야기도 듣긴 들었어. 근데.”
금강산도 식후경.
“라면 다 됐으니까 나중에 이야기! 자, 먹어!”
냄비째 주자, 정신없이 먹는 박기혁.
뜨거울 만도 한데 그릇에 퍼서는 코를 박고 먹는다. 누가 보면 마시는 줄로 알 정도였다.
“크으으-! 이거지!”
박기혁의 감탄이 내장 저 끝에서부터 올라온다.
오랜만에 느끼는 강렬한 매운맛이 감격스러운 모양. 몸까지 부르르 떨어 댔다.
전율에 몸을 떨던 박기혁이 김밥을 들었다. 젓가락으로 드는데, 김밥이 몽땅 딸려 온다?
“네 앞에 놓인 건 일부러 안 자른 거야. 통째로 먹으라고.”
“맙소사.”
빛이 난다.
빛유리, 당신은 도대체…….
반가운 얼굴로 김밥을 잡고 입에 넣는 박기혁.
우적우적, 복스럽게도 먹었다.
“자, 여기 김치. 김장 김치인데 맛있어. 먹어 봐.”
우물우물.
“참치 김밥이야. 너 이거 좋아하잖아.”
끄덕끄덕.
“모자라면 말해. 아직 많아.”
끄덕! 끄덕!
이런 사소한 챙김에 스며들다 보면.
‘언젠간 내 것이 된다는 거지.’
진.유.리. 이름 석 자가 박힌 박기혁이라.
상상만 해도 소름 돋아!
“으이구, 천천히 좀 먹어. 입에 묻었잖아.”
진유리가 박기혁의 입가에 묻은 밥풀을 닦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달다. 달콤하다.
미국. 라면. 성공적.
그녀는 밥풀을 곱씹으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 * *
‘반한 건가?’
박봄은 김밥을 우물거리며 아빠와 언니를 번갈아 봤다.
‘반한 거 같아!’
현지가 그랬다. 좋아하면 눈이 반짝인다고. 그 말을 듣자 봄이는 생각해 봤다.
아빠가 봄이를 볼 때의 눈을.
“우리 딸내미.”
“봄아, 뭐 먹고 싶어?”
“아빠랑 놀까?”
봄이의 눈에 아빠의 눈은 별님처럼 항상 반짝이고 있었다.
아빠는 봄이를 사랑한다.
아빠의 눈은 빛난다.
반하면 눈이 반짝인다.
현지의 말은 옳다.
땅땅!
박봄의 사고 회로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아빠하고 언니…… 언니하고 아빠.”
둘 다 봄이를 좋아한다. 봄이도 둘 다 좋아한다.
화살표가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니까 삼각형이 그려진다.
아빠, 딸기 언니, 봄이…… 이렇게 세 사람이 꼭짓점이 된 삼각형.
삼각형은 늘 옳다.
두 개를 그리면 별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아!’
박봄이 돈가스 김밥을 먹던 손을 빼서 양쪽에 팔짱을 낀다.
오른쪽에 박기혁, 왼쪽에 진유리.
“삼각형!”
“응?”
“봄아?”
“우리는 삼각형이야!”
베시시 웃는 박봄.
박봄(7세).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알게 되다!
두둥!
……
…
그리고 한 발짝 뒤에서 세 사람을 지켜보던 버찌는.
“미냐아옹-.”
- 뭐 하냐옹…….
우걱우걱 음식을 먹으며 좋아 죽는 박기혁.
그런 박기혁을 보며 음흉하게 웃는 진유리.
박기혁과 진유리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는 박봄.
고양이는 생각한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옹.
* * *
한편 박기혁과 박봄, 진유리가 숙소에서 회포를 푸는 사이, 정작 이 셋의 만남을 주선한 김연희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빴다.
그녀의 첫 번째 행선지는 하이 캐슬.
사회생활이란 게 그렇지 않나. 순서가 있고 절차가 있다.
아무리 레드 드래곤이 보자고 했다고 다짜고짜 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실무진이 먼저 만나 저쪽이 원하는 것과 이쪽이 원하는 것을 조율하는 게 먼저.
“잠시만요. 제가 말해도 될까요? 제가 이해하기로 귀하의 이야기는 인공 정령석에 대한 대가로 마석을 비롯해 옵티멈이 서부로 진출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이야기인데…….”
“초면에 죄송하지만 저희 옵티멈이 서부에 진출하지 않은 건, 못 해서가 아니라 안 하는 겁니다. 어차피 서부의 게이트는 ‘레드 드래곤’ 님께서 관리하시는 거잖아요.”
“저희 옵티멈은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하길 원합니다. 이곳 서부는 저희에게 매력적인 땅이 아니에요.”
미국 경제의 허브는 뭐니 뭐니 해도 뉴욕의 월가다.
이 뉴욕이 있는 곳은 동부.
투자와 경제처럼 시장에 밀접한 옵티멈이 동부에 여력을 집중하는 것은 당연했고, 실제로 옵티멈 미국 지사도 동부에만 세워져 있다.
“차라리 이렇게 하죠. 대금 깎아 드릴 게요. 물량 늘려 드릴게요. 대신 기술을 주세요. 인공 정령 기술요.”
“에이~ 설마요. 제가 도둑도 아니고 전부를 달라고 하겠어요. 그냥 일부만, 곁가지만 주세요. 그래야 저도 뭔가 명분이 서지 않겠어요?”
애초에 금전적인 부분을 노리고 들어가기에는 폐쇄적인 서부는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다.
그래서 김연희는 기술을 노리기로 했다.
인공 정령.
인공 정령은 유출된 적 없는 서부 ‘궁전’만의 독점 기술.
그러니, 일부만 가진다고 해도 의미 있는 성과인 것이다.
“잘 생각해 보고 연락해 주세요. 스케줄이 바빠서.”
두 번째 행선지는 엘리멘탈 학파의 궁전.
더 정확히는 이곳 엘리멘탈 학파의 총수이자, 미 서부를 대표하는 히어로.
엘리멘탈 마스터, 로크샨을 만나러.
“반갑습니다, 킴.”
“반가워요, 로크샨.”
“거의 10년만이군요. ‘멕시코 레드 게이트’ 때 보고 처음이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로크샨과 김연희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향한다.
당시 멕시코에 레드 게이트가 생성되며 도시 하나가 통째로 지워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아무리 멕시코라도 엄연히 국가. 도시 하나가 날아가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알고 보니 이 ‘레드 게이트’ 뒤에는 ‘진화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에 각국에서 지원대를 파견했었다.
이때 한국 대표가 김연희의 옵티멈이었고, 미국 대표가 로크샨을 앞세운 궁전의 정예들이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이번에 하이 캐슬과 거래가 잡혔어요.”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인공 정령석을 도입하게 됐죠. 그동안 꽉 막힌 교수들 설득하느라 답답해 소멸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 소멸이라니. 로크샨답네요.”
“아마 거래는 순조로울 겁니다. 수호령께서 강력히 원하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정보네요?”
“어디 가서 말하지 마십시오.”
로크샨 입장에서도 김연희는 반가운 손님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드디어 기대하던 만남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니까.
“제 제자가 당신의 아들에게 신세 지고 있습니다.”
“들었답니다. 윌리엄이었죠. 기혁이가 윌리엄 때문에 편하게 지낸다고 들었어요.”
“언제 한번 자리를 만들고 싶은데…….”
“로크샨, 사실대로 말해 봐요. 이게 본론이었죠?”
“아하핫! 들켰습니다!!”
“설마, 아까 정보를 흘린 것도……?”
“역시 똑똑하신 분이랑 이야기하니 편하군요!”
사실 이 만남의 의미는 단순히 반가운 얼굴을 만나는 것만은 아니다.
이후에 향할 곳을 위한 빌드 업.
김연희가 오늘 마지막으로 향할 곳.
머저리 하나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악연이 얽히고설킨,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가.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옵티멈의 여제이시여.”
“챈들러 릴라드입니다.”
챈들러 가문이었다.
* * *
밤늦은 시각.
봄이는 일찌감치 잠든 시간이 되어서야 어머니는 별장으로 도착하셨다.
“왔어요, 엄마?”
“오셨어요, 어머님?”
“그래그래, 뭔데 둘 다 나와. 봄이는?”
“자요.”
“식사는 하셨어요, 어머님?”
“말도 마라. 아, 속 부대끼네. 하여튼 여기는 음식을 뭘 그렇게 느끼하게 먹어. 좀처럼 적응이 안 돼…….”
“라면 끓여 드릴까요?”
“어머? 라면 있어?”
“씻으세요. 얼른 끓여 드릴게요.”
“됐어, 됐어. 어디 남의 집 귀한 자식을. 기혁아, 출동.”
“네, 끓이겠습니다.”
잠시 뒤, 내가 끓인 라면과 진유리가 싼 김밥이 차려졌을 때, 어머니는 편한 복장으로 방에서 나와 젓가락을 드렸다.
그러고는 말하는데.
“음, 내일 챈들러가로 갈 거야.”
“의외네요? 이야기 잘됐어요?”
“일단은. 악감정은 없는 걸로 보였어.”
“그래도 위험하지 않겠어요, 어머님? 그게, 챈들러는 그, 저희 쪽이랑 불편하잖아요.”
“글쎄, 내가 독심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확신할 순 없지. 다만 이제 와서 우리 쪽에 악감정을 가져 봐야 저쪽이 얻는 이득이 없어.”
사라진 챈들러 머레이. 그 머저리가 정식 후계자였다면 몰라도.
가문에서도 골칫덩이였단다. 어차피 파문 아니면 격리가 될 운명이었다나.
“골칫덩이 복수로 척을 지기에는 엄마가 만만하지는 않잖아.”
“하긴.”
“그러네요. 그러면 왜 보자고 하는 건가요? 어차피 빙정 받고 끝난 이야기를요.”
“말 잘했어, 유리야. 지금부터 말할 게 그거거든. 박기혁, 너는 특히 잘 들어. 네가 만든 결과니까.”
사실 명예가 손상됐다는 것은 1차적인 문제다.
챈들러 가문의 진짜 문제는 입지가 좁아졌다는 것이다.
어디서?
서부, 궁전들 내부에서.
왜?
“네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어? 동부의 메카닉 마스터한테 일러바쳤지.”
“아!”
“아?! 너 잊고 있었어?”
“……네.”
“으이구. 여튼, 네가 동부에 먼저 손을 뻗으면서 챈들러가의 입장이 난처해진 거야. 뭐, 딱히 네가 잘못 처리한 건 아니지만.”
요약하자면 이거다.
서부와 동부는 같은 미국임에도 서로를 엄청 견제한다. 그런데 내가 동부에 서부의 치부를 넘겼다.
그러면? 이것을 빌미로 온갖 공격을 쏘아 내겠지. 선동과 날조 따위가 아닌 팩트로 후려치는 정쟁.
서부는 부들부들 떨면서 이 사태의 원흉인 챈들러 가문을 성토했을 테고.
“현재 챈들러 가문은 궁전 내부에서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지.”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를 초대한 거다.
“너랑 다 풀었다면서 액션을 취하고 이번 사태를 한낱 해프닝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음.”
또라이 하나가 나름 유서 깊은 한 가문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네.
“근데, 그뿐만은 아닌 것 같아.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운 제안을 하더라고.”
“제안요?”
“응.”
어머니가 마지막 국물을 말끔히 비우시고는 나와 진유리를 번갈아 봤다.
그리고 이어질 말에 우리는 정말 강하게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너희들. 8레벨 게이트, 본 적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