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20화>
난 좀 더 파 보기로 했다.
자아를 가졌으면서도 영혼은 없는 알파 기어.
형상을 가졌으면서도 육체는 없는 인공 정령.
알파 기어와 인공 정령.
미국 초인 산업을 대표하는 두 상징.
이 존재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여기가 어딘가.
미국이다. 이역만리 타지. 친구들도, 가족들도 없다. 가뜩이나 게이트 안이라 봄이랑 연락도 못 하는 지금.
이곳에서 시간을 때우려면 이런 거라도 있어야 되지 않겠나?
본의 아니게 집중할 환경이 만들어졌고, 난 진심으로 알파 기어와 인공 정령을 연구해 나갔다.
그러다 재미있는 추리를 하게 되는데.
“이거…… 양쪽이 서로를 모르는 것 같은데?”
난 처음에는 이 두 개를 합쳐 호문클루스에 도달하려는 줄 알았다.
근데 이 두 개를 계속 살피자, 묘하게 엇나갔다. 뭐랄까…… 비슷한 것을 추구하는데, 완전히 결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예를 들면 이거다.
산의 정상을 목표로 하는 건 똑같은데 산을 오르는 방향이 완전 정반대, 대척점에 있다.
때문에 서로 볼 수 없고, 서로의 존재조차 알 수 없다. 만약 이 둘이 만난다면 정상에서 만나는 것뿐.
인공 정령과 알파 기어가 꼭 이렇다.
“내 가설이 맞다면 이 인공 정령을 만든 수호령 ‘레드 드래곤’은 ‘마도 공학’에 대해 놀랍도록 무지하고, 알파 기어를 개발한 수호령 ‘기간트’는 마법을 전혀 모른다는 뜻인데.”
실제로 모를 리는 없다.
일례로 지금의 나를 봐라. 힘들었지만 알파 기어를 구하고, 연구 중이잖나.
즉, 존재를 모를 리는 없으니 내 가설이 말이 되려면.
“……‘허락’되지 않은 거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게 ‘만들어진’ 것이라면, 충분히 이런 결과물이 가능하다.
“신이 장난쳤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신이란 놈은 천성이 고약하고 변덕스러우니까.
한편 나는 알파 기어와 인공 정령을 가지고 노는 가운데, 짬짬이 윌리엄을 가르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헉, 헉! 왜, 날지 말라는 거야! 헉, 헉!!”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담긴다. 네 썩어 빠진 정신 상태도 다 그 버러지 같은 육체 때문이야. 닥치고 달려.”
“으아아악-!!”
얘는 재능 자체만 보면 뛰어난 편이다. 특히 정령이란 분야에서만큼은 일가를 이룰 수 있을 만큼 아주아주 뛰어나다. 엘프가 봤으면 환장했을 정도로.
왜 이렇게까지 말을 하냐면, 이 크리스토퍼 녀석의 혈족이 ‘친화’란다. 말 그대로 친화력 자체가 혈족인 샘.
이 부분에서 난 놀랐다. 이거 완전 엘프잖아?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근데 이런 사기적인 능력을 가진 ‘크리스토퍼’ 가문을 왜 난 자세히 몰랐을까.
그래서 의문을 해소하기 가장 쉬운 방법. 당사자에게 대놓고 물었다.
“야, 네 ‘친화력’이 혈족이면 너희 집 전부 정령사야?”
“……그건 아니다. 우리 크리스토퍼 가문은 너희 검호처럼 완벽한 혈족이 아니라, 반쪽짜리 혈족이다.”
원래 크리스토퍼 가문은 겨우 ‘영혼’을 읽는 정도의 능력밖에 없단다. 그마저도 완벽하지 않아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상태. 하는 수 없이 상인 가문이 된 것이란다.
윌리엄은 이 크리스토퍼 가문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난 아이. 영혼을 읽는 능력이 너무 뛰어나, 정령 친화력이 생긴 케이스인 것이다.
“내가 너 같은 혈족을 시기하는 것도 이 때문일 거…… 아악!”
“지랄하네. 멍청한 자식이. 어디서 남 탓이야.”
“네가 내 입장이……! 아악!!”
“변명하지 마. 막말로 네 조건보다 못한 애들 천지다. 걔들이 전부 너 같아? 그냥 넌 인성이 글러먹은 거야. 안 되겠다. 넌 더 처맞아야 해.”
“아악! 아악-! 머리, 머리 놔라!”
“엄살 피우지 말고 나와. 형이 제대로 정신 개조시켜 줄 테니까.”
어차피 인공 정령은 녀석이 가진 크리스로 연구해야 하니, 연구하는 김에 이 썩어 빠진 정신 상태도 함께 고쳐 나갔다.
그렇게 나름 이 끔찍한 곳에서 재미를 찾아가던 와중,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또 나가십니까?”
“팍은 언제나 열심이십니다.”
“하, 동양인들은 부지런하다고 들었는데, 정말인 것 같아.”
갑자기 왜 이래.
심지어 담당관조차도.
“자네, 무리하는 거 아닌가? 쉬면서 하게. 항상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프로야.”
“허허. 또 나가나? 혼자서 너무 많은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말게.”
어, 음…… 뭐지?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의미 모를 자상함이, 굉장히 거북하다.
그래서 살짝 엿들어 봤더니.
“구조율 100퍼센트라…… 거참, 지나치게 열심히군.”
“덥다고 뺄 만도 한데, 인성이 됐어요.”
“아쉽다~ 저런 기특한 애가 우리 소속이었으면 잔뜩 귀여워해 줬을 텐데.”
“팍이 미들 시티에 지원 온 뒤로 부상자가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개체 수 관리도 완벽합니다. 거의 하루에 이백여 마리를 사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들어 봐요, 팀장. 이전에는 구조대가 팀 단위로 움직였는데, 팍은요? 이 모든 걸 홀로 하고 있어요. 이건 대단한 거라고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저런 인재를 이곳에 박아 놓는 게 맞는 건지.”
“맞아요. 에이전트나 팍 개인을 위해서도 상위 게이트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허, 슈퍼 루키 탄생이군.”
그렇다.
내가 연구를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플레임 엔트를 사냥하는 게, 저들 입장에서는 열정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렇게 본의 아니게 열정남이 되어 버린 난 미국에 온 지 2주 정도의 짧다면 짧은 시간임에도 빠르게 존재감을 드러냈고, 담당관의 추천장까지 받으며 미국행 첫 번째 일정을 훌륭하게 마쳤다.
* * *
꽃가람 유치원.
“흥흥~ 룰루룰루.”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박봄. 오늘따라 한껏 기분이 업된 모습이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
사실 박봄은 가족들 앞에서야 방실방실 웃지, 유치원에서는 굉장히 시크한 매력의 얼음 공주님으로 통했다.
그런데 이 얼음 공주님이 갑자기 화사하게 웃으니 애들도, 선생님들도 신기한 상태인 것이다.
“룰루~ 아빠 타이거는 멋져요~ 언니 드래곤은 예뻐요~.”
“선생니임! 박봄 이상해요. 막 웃어요.”
“어머, 찬우야. 그럼 못써! 우리 봄이가 기분이 좋은가 보지, 봄이야? 오늘따라 기분이 행복해 보이네?”
“네에! 봄이는 행복해요! 너무 너무 기분이가 좋아요!”
왜냐하면!!
“오늘 아빠를 볼 수 있거든요!!”
이 얼마나 기다렸던 날인가!
오예 둠칫, 둠칫.
아빠 바라기인 봄이에게 지난 2주는 실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맛있는 걸 먹어도 맛없어. 재미있는 것을 봐도 재미없어. 그 좋아하던 캡틴 타이거도, 한창 꽂혔던 엔젤 드래곤도,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왈칵 눈물을 쏟을 뻔한 적도 있었다.
너무 아빠가 보고 싶어서, 혹시 아빠가 돌아오지 않으면, 봄이 곁을 떠나면 어떨까 싶어서.
그럴 때마다 봄이는 버찌를 끌어안고는 생각했다.
‘맞아. 봄이는 언니야. 언니는 울면 안 돼.’
봄이가 지켜 줘야 해.
딸기 언니가 가르쳐 준 대로 눈 사이에 힘을 꽉 주고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의 시간도 오늘로써 끝!
“오늘부터 통화할 수 있는걸!”
“통화? 그거 언제나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곁에 있던 임현지의 말에, 박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우리 아빠 미국 가서 아무 때나 못 한대.”
“어? 봄이 아저씨 미국 갔어?”
“응.”
박봄은 놀라는 현지에게 더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준다.
“미국은 지금 밤이래!”
“어억?! 지인짜아?”
“응!”
“왜? 지금은 아침이잖아! 저기 햇님 있다구!”
“왜냐면. 지구가 둥글어서래! 봐봐.”
봄이는 유치원 한쪽에 있는 지구본을 돌리며 ‘시차’에 관한 개념을 설명했다. ‘말도 안 돼에!’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임현지.
정확히 어제 진유리가 시차를 설명해 줬을 때의 박봄과 같은 모습이었고, 그 모습을 보자 봄이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오늘도 똑똑했다!
딸기 언니, 고마워요. 언니 때문에 봄이는 똑똑해졌어!
생각하니까 빨리 보고 싶다.
딸기 언니도, 아빠도…….
그렇게 시간이 지나, 유치원이 마치는 시간.
오늘따라 빨리 가방을 챙긴 박봄이 가장 먼저 유치원 문을 나섰다.
“언니이이이!!”
“뽀마아아.”
아줌마들 사이에서 능숙하게 대화를 나누던 진유리가 봄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늘 그렇듯 안은 채 공중 세 바퀴 반을 돌아주면.
“어이쿠, 우리 뽀미.”
“꺄아악!”
“오늘도 즐거웠어요? 행복했어요?”
“응! 응!”
“언니, 뽀뽀!”
“쪽쪽!”
자지러지듯 좋아하는 박봄. 진유리도 봄이랑 뽀뽀를 하며 활짝 웃는다.
박기혁이 미국으로 간 뒤부터 박봄의 귀가는 항상 진유리가 책임졌다.
당연히 누가 시킨 일은 아니다. 진유리 자신이 나서서 하는 일. 책에서 봤는데 ‘엄마는 성장하는 아이에게 안정감을 줘야 한다.’던가. 그때부터 진유리는 기를 쓰고 봄이를 픽업하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모습에 뒤에 있던 아주머니들도 기분 좋게 웃는다.
“보기 좋아요. 정말.”
“어쩜, 유리 씨는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싹싹하다니까요.”
“다 기혁 씨 복 아니겠어요. 저렇게 참한 여자 친구를 둔 것도.”
싹싹해? 참해?
진룡산에 있는 유해련이 들었다면 ‘뭐? 쟤가? 뭐라고?’라며 경기를 일으킬 말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차에 오른 두 사람.
진유리의 차에는 모든 부모들의 필수품인 카 시트가 장착돼 있었다. 당연한 듯 박봄이 카 시트에 오르고, 역시나 당연한 듯 진유리가 자연스럽게 안전벨트까지 매 주면 준비 끝.
“박봄 씨. 오늘 예뻐질 준비 됐습니까.”
“그럼요. 딸기 언니도 준비됐나요?”
“몰론이죠. 출발!”
“출바알!”
차가 출발한다.
목적지는 청담동의 유명 숍. 유명 연예인들 및 셀럽들이 자주 가는 곳으로, 대한민국 유행을 선도한다는 숍이었다.
차륵-
문이 열리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로비로 진유리와 박봄이 나란히 손을 잡고 들어섰다.
“어서…….”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잠시 머뭇된다.
편한 원피스 차림의 여자와 노란 개나리꽃을 닮은 원복의 아이. 누가 봐도 유치원에서 귀가한 아이를 데리고 곧장 온 것 같은 룩이었다.
이곳과는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혹시 잘못 들어왔나? 직원이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유지한 채 묻는다.
“저, 저기. 저희 숍은 예약제로…….”
하지만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다급히 달려오는 민머리 남자.
“스탑! 스따압!! 미영 킴! 그 입 셔러업!”
이 숍의 주인인 ‘아놀드 챤’이었다.
VVIP인 유해련의 개인 전화를 받고는 오후부터 대기 중이었는데, 눈치 없는 직원이 큰 실수를 할 뻔한 것이다.
아놀드 챤은 VVIP를 몰라본 직원에게 눈빛을 흘기고는 곧바로 상냥한 눈으로 진유리와 박봄을 쳐다봤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놀드 챤이라고 합니다. 찬이 아니라, 챤~ 이에요. 이쪽으로. 훗.”
헤어부터 스타일, 메이크업까지.
이로써 준비는 끝났다.
이제 결전의 시간.
비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PC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뒤, 모니터에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
- 여보세요?
“아빠!!”
“기혁아!!”
* * *
어딘가 TV에서 본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통화하면 두세 시간이 훌쩍 간다고. 그때는 말도 안 된다며, 저럴 바에 차라리 만나지, 라며 웃어넘겼는데.
실제로 내가 그러니까.
음…… 정말 이게 되네?
- ……그리고 아빠. 현지 엄마가 로제 떡볶이 해 줬어. 주황색 떡볶이인데 엄청 맛있었어. 그래서 딸기 언니한테 말하니까, 언니가 폰으로 똑똑 눌러서 사 줬어……
- ……그리고 딸기 언니랑 목욕탕도 갔다 왔어. 물 참방참방 수영도 배웠어. 아빠랑 같이 가겠다고 말했는데, 언니가 안 된대. 왜 안 돼?……
- ……그리고 또오, 무슨 일이 있었냐면, 오늘 이상한 아저씨가 머리 만져 주는데, 엄청 예뻤어. 그런데 아저씨가 막 ‘훗’ ‘후훗’ 이렇게 웃는 거 있지이? 웃겼어. 히히……
벌써 3시간째…….
지난 2주 동안 유치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모조리 말할 기세로 덤비는 우리 딸내미. 난 또 이게 왜 그리도 재미있는지, 듣기만 해도 입꼬리가 고장 난 것처럼 승천한다.
그래도 마냥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해서도 안 되는 법.
아빠로써 끊을 건 끊어 줘야 한다.
“봄이, 이제 거기 잘 시간 아니야? 눈에 졸음이 가득한데?”
- 아니야! 잠 안 와!
봄이가 미간에 힘을 주며 ‘봄이는 아빠랑 더 놀 거야!’라고 말한다. 가슴이 짠하다. 저 어린것이 얼마나 아빠랑 놀고 싶으면 저럴까.
그래도 우리 딸, 아빠가 네 취침 시간 다 알아요.
“이제 잘 시간이잖아. 일찍 자고 내일 아빠랑 또 통화하자.”
- 정말? 내일도 하는 거야?
“그러엄!”
말을 하며 봄이를 뒤로 안고 있던 진유리에게 눈짓을 준다. 빨리 애 재우라고. 다행히 진유리도 눈치가 있는지 봄이를 달래 방을 나가…….
음?
화면으로 보니까 저기, 우리 집 아닌 것 같은데.
금세 돌아온 진유리에게 묻자, 아니란다.
- 응, 우리 집이야.
“봄이가 왜 너희 집에 있어.”
- 몇 번 잤는데? 걱정 마. 아줌마한테도 말씀드렸어. 버찌도 데려왔고.
“허…… 지금 봄이는?”
- 내 방에 버찌랑 울 엄마랑 같이 누워 있어.
“……해련 아줌마?”
- 응.
“와…….”
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봄이와 해련 아줌마가 같이 자고 있는 거지. 잠깐 사태 파악이 안 돼 멍하니 있는데.
- ……없어. 야! 야!!
“어.”
- 넌 뭐 하냐고.
“어, 난 카페 왔어. 봐봐. 뒤에 보이지?”
- 진짜네? 시끄럽게 해도 돼?
“상관없어. 노천카페야. 넌 뭐 해? 무슨 일 없었냐?”
- 빨리도 물어본다.
사담을 이어진다.
어휘력의 차이만 있지, 대화 내용은 봄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아카데미 근처에 초밥집이 생겼다는 것이나, 준우와 메르헴이 자신을 따돌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 다 일상적인 일이었다.
- 너 바쁘겠다. 슬슬 이만할까?
“……너 내가 아는 진유리 맞냐?”
- 훗. 왜, 뭔가 달라 보여?
“어.”
뭔가 어른스러워진 느낌? 진유리와 어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진짜 그렇다.
- 할 말 없어?
“어??”
- 할 말 없냐고.
그래도 봄이를 잘 챙겨 주는 것 같아,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다.”
- 별게 다 고맙다. 봄이 일인데.
쿨해!
예전 같았으면 ‘내가 이 정도야. 나 없으면 안 되겠지?’라며 호들갑을 떨었을 건데.
뭐지? 내가 너무 오랜만에 진유리를 본 건가. 왜 애가 달라 보이지.
“너는 뭐 할 말 없어?”
- 으음, 안 그래도 궁금한 게 있었는데.
고민하던 진유리가 입을 열었다.
- 거기 뉴욕이지?
“응.”
- 그럼 동부겠네?
“그렇지.”
- 그럼…….
순간, 눈빛이 달라지는 진유리.
조신했던 눈은 사라지고, 내가 매일 보던 그 똘끼 충만한 눈빛으로 번뜩였다.
그리고.
- 그년 너 찾지 않았어? 로자리아, 그 도둑년말이야.
“그럼 그렇지…….”
-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바람피우면 죽는 거야. 알았어?
“푸핫!”
웃음이 나온다.
- 명심해. 바람피우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았어!?
이제야 진유리 같네. 역시 얘는 이런 매콤한 맛이 어울린다니까.
찝찝하던 게 사라지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 * *
화상 통화가 끝나고 난, 노트북을 덮으며 정면을 본다.
“야, 들었지? 너 죽고 나 죽는 거라는데?”
“불가능해. 내가 더 강하거든.”
내 맞은편에 앉아서 커피를 즐기는 여자.
로자리아 빌랜드 워싱턴.
그녀가 날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