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14화>
한편, 인천항 부근의 한 부두.
“팀장님, 팀장님! 저기, 저기이!”
“무슨 일…… 엉?”
바다 저편에 보이는 검은 무언가. 어둠인지, 안개인지, 그림자인지 모르는 무언가가 형상을 갖춰 갔다.
점차 인간처럼 변해 가는 어둠.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띤 어둠이, 어둠으로 만들어진 대검을 들었다.
그리고.
어둠이 하늘을 갈랐다.
콰아아아아아앙-!!
“모두 전부 배에 올라타! 빨리!”
대기 중이던 배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바다를 가르는 배의 행렬. 그 가운데, 선두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여자는 연수지.
그렇다.
현재 이곳에 있는 인원들은 연수지와, 그녀의 ‘미라클’ 에이전트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대뜸 연락하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보여 줄 줄이야…….’
그렇다면 대체 이들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그 답은,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에 박기혁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 여보세요. 연수지 씨? 저 박기혁입니다.
- 시간 없으니까 본론부터 말할게요. 혹시 거래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뜬금없이 전화해서는 거래 의사부터 물었다.
무엇을 거래할지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연수지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도 안 차겠나. 아무리 자신이 그쪽에 호감이 있다고는 해도 이건 아니지. 이거 완전 도둑놈 아니야? 라며 당장 끊으려 했다.
이후에 이어진 어떤 말을 듣지 않았다면.
- 아참, 삼합회와 관련된 일입니다.
……말을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니야.
삼합회라면 3대 빌런 바로 아랫자리를 차지하는 빌런 집단.
무슨 일이든 꽤 큰 건이었다.
- 동의한 걸로 알고, 빠르게 말할게요. 지금 인천항 부근에 삼합회의 밀수선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장소는 이 밀수선 내부고요.
- 지금부터 저는 밀수선 내부에 있는 삼합회 녀석들을 모조리 때려잡을 겁니다.
- 그 뒤처리를 연수지 씨와 당신의 에이전트에게 맡길게요. 대신 공적은 다 가지세요.
“공적을 다 가지라니…….”
좀도둑도 아니고 삼합회다.
비록 3대 빌런에 비해 한 수 처진다는 평을 받지만, 그럼에도 삼합회는 세계에서 악명이 자자한 빌런 집단.
이 공적을 다 준단다.
연수지…… 그러니까, 신생 에이전트인 미라클의 실질적 책임자인 연수지로서는 절대 거부하지 못할 거래였다.
“무엇을 내줘야 할까.”
거래는 주고받는 것.
만약 받는다면 이쪽도 뭔가를 줘야 한다.
박기혁은 삼합회를 잡은 공적을 저울에 올렸다. 과연 연수지는 무엇을 올려야 할까.
머리가 쨍하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
연수지는 새삼 박기혁이 달리 보였다.
“직진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절묘한 거래다.
안 그래도 요즘 이런저런 일로 옵티멈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상황.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이를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적잖다.
특히 정부 고위 관계자들.
물론 옵티멈 입장에서야 이딴 거 무시해도 상관없다. 괜히 그들이 세계 5대 에이전트겠나.
그럼에도 옵티멈이 집행부를 비롯한 국가 기관과 발을 맞추는 건, 모두 현 옵티멈 대표인 김연희의 성향 때문이다.
옵티멈의 마녀라는 별명에도 불구하고, 사실 김연희는 ‘상생’을 추구하는 사람.
때문에 옵티멈은 균형을 깨는 힘을 가졌음에도, 어떤 에이전트보다도 이 사회에 잘 녹아들어 있는 것이었다.
“잠깐, 설마 이것도 김연희가 설계한…….”
그때, 연수지의 생각을 자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팀장님!! 도착했습니다!”
“바로 갈게요.”
연수지는 생각을 멈췄다. 지금을 생각할 시간이 아닌 움직일 시간. 현실에 집중했다.
“수리조, 이 선박 어떻게든 붙여 놓으세요! 집행부가 올 동안 최대한 현장 복원해야 됩니다. 관리조도 가담하세요. 전투조는 저랑 함께 승선합니다. 가죠.”
그렇게 선체로 올라선 연수지와 팀원들은.
“……!!”
“헉!”
숨을 죽인다.
말을 잇지 못한다.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시체들.
그마저도 온전한 시체들은 찾기 힘들었다. 모두 이곳저곳 뜯겨져 나갔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호수처럼 갑판 위에 고여 있었다.
그리고 이 죽어 있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존재가 그들에게 다가오는데.
- 주인이 말한 인간들인가.
“너어……?!”
- 오호…… 낯익은 인간이군.
염소의 머리, 기괴하게 솟은 뿔, 불쾌할 정도로 어두운 눈동자.
한때는 연수지의 집에 걸려 있던, 장식품이었던 존재.
대악마 바포메트였다.
- 영혼은 회수했다. 이제 그대들이 나서도록.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처럼 흐른다.
살아 있는 것은 없다.
오직 죽음만이 가득한 공간.
심지어 대악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이곳이야말로 지옥이 아닐까.
그렇게 연수지와 팀원들이 사건을 수습하는 사이, 수평선 뒤로 태양이 숨으며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진룡산 최정상. 진룡가의 가주가 기거하는 저택.
이른 새벽, 아직 해가 채 제대로 뜨기 전에 진유리의 방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야, 진유리! 너 엄마가 방문 그렇ㄱ…… 얘가 왜 이래? 얼굴이, 너 울었어?”
“나중에…….”
“야!”
“나중에 말할게…….”
“얘가 왜 이…… 야! 잠깐, 유리야!”
갑자기 내달리는 진유리.
진유리가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달렸다.
거실을 가로질러, 저택의 창틀을 박차고 날아올라…… 그 순간, 그녀의 주위를 감싸는 붉은 빛무리.
워 아머 ‘드래곤니안 모델-2’를 장착, 하늘로 솟구쳤다.
“야, 진유리! 너 어디 가! 진유리이!!”
엄마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지만, 지금 이 순간 진유리에게는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는다.
비행 허가서가 없는 비행은 불법이지만, 다시 말한다. 진유리한테는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는다.
“드래고니안, 안티 필드.”
- 안티 필드 가동.
“내비게이션 켜.”
- 내비게이션 On. 위치를 지정해 주십시오.
“서울 송화 병원.”
- 위치 지정 완료. 좌표 출력합니다.
“자동 비행 켜. 출력 최대로.”
- 자동 비행 On. 출력 최대로. 예상 시간은…… 87초.
위잉-!
진유리의 주위에 파공성이 원형으로 퍼진다. 조용했던 수면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파공성이 동심원을 그리며 주위를 흔들고.
이 흔들림이 멎는 순간.
진유리는 한 자루의 창이 되어.
하늘을 꿰뚫었다.
콰아앙-!
……
…
잠시 뒤.
병실의 문을 열고서 진유리가 들어선다.
“응? 웬일이냐.”
“너어…….”
환자복을 입은 채 이쪽을 향해 손을 휘젓는 박기혁.
어색하다. 이 병실도, 저 침대로, 저 환자복도…… 모든 게 비현실적이다.
털썩, 힘없이 침대 옆 자리에 앉는다.
그러고는.
“흐어어엉.”
왈칵, 눈물을 쏟아 내는 진유리.
“얘가 왜 이래? 얌마.”
“너, 씨, 진짜. 내가. 얼마나. 걱정. 흐끅.”
“하, 내가 이럴 줄 알고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얌마, 나 괜찮다니까. 멀쩡하다고. 제발 그만 울어, 좀.”
“울음이. 흑. 나온다고. 흐끅.”
“거참, 맘대로 해라.”
머리로 손길이 느껴진다.
크고, 투박하고, 까끌까끌한, 굳은 살갗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따스한, 박기혁의 손길이었다.
* * *
“갔다 올게.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그냥 집에 가. 나 내일이면 퇴원할 거다.”
“알았어. 빨리 올게.”
“뭘 알아. 집에 가라고.”
“알았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그냥 집에 좀 가!”
“어허, 기혁 어린이. 보채지 마세요. 아무리 귀여워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네 맘대로 해라.”
“그럴 거야. 봄이 데려다주고 올게.”
윙크까지 하고 문을 나서는 진유리.
방금까지 펑펑 울었던 애가 한순간에 이렇게 변해? 이런 걸 보고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나?
괜찮다는데도 기어코 자기가 ‘직접’ 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겠단다. ‘직접’을 어찌나 강조하던지, 아직도 메아리가 치는 것 같다.
“제멋대로야.”
그래도 다행인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티가 날 뻔했다.
바짝 조여 놨던 긴장을 풀자, 손이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바들바들 떨려 왔다.
검호, 마왕, 여기에 거인의 힘까지. 있는 힘을 모조리 쓰니 보다시피 이 꼴이다. 과도한 힘을 쓴 후유증이라고나 할까.
“상황 봐 가면서 써야겠네.”
이럴 것 같아서 평소에는 자제한 것인데.
생각보다 세게 맞았다.
그래도 이렇게 한번 말끔히 비워 내고 나니 속은 후련하네.
안 그래도 요즘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았는데, 뭔가 더 성장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일도 수월하게 잘 풀렸다.
어머니 말씀대로 연수지를 이용한 게 주요했다.
- 두 가지 길이 있어, 기혁아. 첫 번째는, 이대로 네가 한 일을 모두 인정받는 거야. 어떻게 보면 가장 간단한 일이야. 네가 한 걸 그래도 인정받는 거니까.
- 넌 일약 스타가 될 거고, 너희 형이나 누나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유명해질 거야. 대신 엄청나게 피곤해지겠지.
- 두 번째는, 이대로 네가 한 일을 숨기는 거야. 공적을 넘긴다고 보면 돼. 명성을 포기하는 대신 실속을 챙기는 거지.
- 무슨 선택을 하든, 엄마는 네 결정을 존중해.
두 가지 선택지.
당연히 나의 선택은 후자였다.
- 휴, 다행이야. 혹시나 했거든. 우리 아들 유명해지고 싶나 해서. 네가 아직 젊잖니.
- 후자를 선택했으면 네 공적을 넘길 사람이 필요해. 가장 비싸게 사 줄 사람이 좋겠지. 진룡은 안 돼. 그쪽은 지금 우리만큼 주목받고 있거든. 음, 모르겠으면 엄마가 한 곳 추천해 줄까?
- 미라클 에이전트. 거기 연수지라는 애가 있어. 너랑 같이 현장 수업 나간 애. 맞아. 걔야. 걔를 이용해.
신생 에이전트, 미라클.
칠성 그룹이 그룹의 사활을 걸고 만든 에이전트란다.
새로 생겨난 것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이는 에이전트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은? 당연히 실적이다. 얼마나 자신들이 많은 일을 했는지 보여 주는 지표이자, 증거인, 실적 말이다.
그런데 무려 삼합회를 잡은 실적을 살 수 있다?
가뜩이나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곳. 이런 실적과 함께 업계에 등장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브랜드 가치를 올릴 수 있다.
저쪽에서는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당연히 전화 한 통에 거래는 성사.
덕분에 난 귀찮은 뒤치다꺼리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편안하게 병원에서 쉴 수 있는 것이고.
“뭐, 그래도 할 일은 해야겠지.”
아무리 뒷정리를 안 한다고는 해도, 한 번은 맞닥뜨린 일이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남은 일을 정리해 볼까.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오브.
예전에 한 번 봤던 통신용 오브였다.
당연히 같은 건 아니다. 이쪽의 성능이 훨씬 좋다. 대충 살펴봐도 거의 대륙 반대편까지 통신이 가능할 거다.
“화상은 불가능. 음성 통신만 가능하게 만들어 놨네.”
아깝다. 면상이나 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경고쯤은 할 수 있겠지.”
딱.
손가락을 튕기자, 병실 문이 마나로 감싸이며 반짝였다.
못 들어오게 막아 놓은 뒤.
“왼팔.”
공간이 찢어진다.
아수라가 보이고, 그 뒤로 영혼들이 절규하며 손을 뻗고 있었다.
다들 이번에 죽은 삼합회 놈들이다.
나는 거기서 한 놈을 지목했다.
“왕차이. 저놈 꺼내 와.”
영혼을 꺼내, 강제로 오브에 박아 넣었다.
이윽고 오브가 반짝이더니.
삐잉- 철컥.
작동된다.
“여보세요? 거기 들립니까?”
* * *
- 여보세요? 거기 들립니까?
어둠 속에서 오브를 지켜보는 남자.
말없이 생각한다. ‘한국말’이라고.
남자는 서랍에서 통역기를 꺼내 착용했다.
- 들리는 거 안다. 인사 정도는 하자. 삼합회의 높으신 분.
우리가 삼합회라는 것까지 알아?
분명히 이 오브는 한국에서 제물을 수급하던 왕차이에게 전해진 거다. 그런데 지금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 연락을 취하고 있다.
일이 얼마나 꼬인 건가…… 남자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 높으신 분이 예의가 없네. 좋아, 나 혼자 떠들지 뭐.
더욱이 이 오브는 그냥 통신용 오브가 아니다. ‘영혼’에 각인된 엄연한 아티팩트였다. 지문이나 홍채 따위가 아닌, 영혼에 각인된 아티팩트,
즉, 당사자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저 한국 놈은 왕차이가 아니다.
대체 어떻게?
- 궁금할 거다. 내가 어떻게 이걸 작동시켰는지.
“……!”
- 영혼으로 잠금 설정을 해 놨더라. 내가 이쪽에는 전문가야.
“……!!”
- 영혼 추출제 쓸 때부터 알아봤는데. 너희, 흑마법사지?
“……!!”
- 생각해 보니 이것들 웃기네. 중국은 마법사 안 키운다며. 근데 너희가 쓰는 건 흑마법이잖아. 흑마법은 마법 아니야? 혹시 뭐, 주술이라고 뻥치고 사용하는 거 아니지?
“…….”
어떻게 알았지……?
실제로 삼합회에서 흑마법은 흑주술, 혹은 심령술로 불리고 있었다.
- 뭐, 어떻게 부르든 너희 자유지. 됐다. 이런 건 넘어가고, 내 용건을 말해 줄게. 귓구멍 열고 잘 들어.
그 순간, 스산하게 바뀐 목소리.
- 경고한다. 관심 꺼라.
오브를 통해 박기혁은 말하고 있다.
관심 꺼라.
시선도 주지 마라.
내 영역에서는 어떤 허튼 짓도 용납하지 않겠다.
- 내가 주는 마지막 경고야. 만약 이 경고를 무시했을 때는…….
순간, 폭발하는 오브.
펑-!!
오브의 파편들이 주위로 튀고.
허공에는 뿌연 연기가 입 모양처럼 변하더니.
- 그땐, 내가 널 찾아갈 거다.
마지막 경고를 남긴 채 연기가 흩어진다.
“……제법이군.”
어둠 속, 파편에 베인 남자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