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07화>
칠성 그룹이 에이전트 사업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오래도록 에이전트 사업을 준비 중이던 칠성.
억 소리 나는 로비를 통해 마석 사업권을 따내고, 이도 모자라 경찰, 관리국, 집행부 등등 에이전트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기관들에게도 협조라는 이름의 돈다발을 안겨 줬다.
이렇게 밑 준비를 끝냈다면 이제는 실질적인 전력을 늘릴 시간.
레이드에 사용되는 장비와 소모품을 비롯해 마석을 처분할 거래처까지 뚫었고, 개인 파티나 소규모 에이전트, 소위 ‘강소 에이전트’를 영입해 몸집 부풀리기에 나섰다.
그렇게 몇 년의 투자, 돈을 화수분처럼 뿌려 가며 쌓은 준비는 드디어 결실을 맺었고.
그게 ‘미라클(Miracle) 에이전트’였다.
규모만으로는 3대 메이저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의 에이전트.
실제로 많은 업계 관계자들은 미라클이 에이전트 업계에 돌풍이 될 거라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예측에도 칠성 회장 연정운은 한 가지 아쉬웠다.
“한 방이 부족하구나. 강력한 한 방이.”
연정운은 에이전트를 사업적 시선으로 본다.
브랜드가 성공하려면 그 브랜드를 대표하는 강력한 한 방이 있어야 한다.
현재 전자 업계를 봐라. 프리즘이 스마트폰 ‘스텝’ 내놓으며 단숨에 세계를 휩쓴 것을.
부랴부랴 JB가 ‘솔라 시리즈’를 내놓았지만 강한 임팩트가 부족해 2위 자리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었다.
프리즘의 ‘스텝’ 같은 강력한 한 방. 에이전트로 치면 옵티멈의 ‘검호’처럼, 모두의 뇌리에 박힐 한 방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아쉬움이 들 때마다 연정운의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
“멍청한……! 그때 박기혁을 잡아야 했었다.”
분명히 칠성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박기혁.
막 피어나는 재능에 누구보다 먼저 접촉했다.
물론 그 만남의 시작이 덜떨어진 아들의 실수 때문이라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상인에게 중요한 건 결과지, 과정이 아니다.
“설마 그때가 가장 저점일 줄이야. 이렇게 오를 줄 알았다면 그때 어떻게든 잡았어야 했다.”
사실 연정운은 계속해서 박기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퇴원을 하고 건강을 회복한 그 시점부터.
일단 검호잖나.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혈족. 검호라는 피 하나만으로도 박기혁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마나 허무증이었다고 한들 피는 어디 가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의 판단 미스는 이 정도일 줄 몰랐다는 것이다.
박기혁은 1학년 중간고사에서 절반 이상의 조를 해체시켰다.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인재들이 모인 아카데미. 이런 애들이 모인 곳에서 독보적인 재앙으로 군림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보여 준 마법은, 이제껏 세상에 없는 신개념 마법으로 마법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이건 확실하지 않지만, 이듬해 진화단이 저지른 ‘대규모 납치 사건’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얼마 전에 발생한 ‘레드 게이트’에서도 한몫했다는 말도 있고.
현재 박기혁의 주가는 상한가를 치다 못해 차트를 뚫었다.
더 문제는, 이게 대체 어디까지 올라갈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들어가야 해. 박기혁이야말로 미라클의 마스터 키야. 그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돼.”
연정운도 안다. 박기혁을 영입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하지만 참된 상인은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투자하고, 결과를 내는 법이다.
그가 딸, 연수지를 부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연수지, 박기혁을 유혹해라.”
“……하, 바쁜데 불러 놓고 하는 말이 유혹하라고요? 아빠,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아빠 진짜 인성에 문제 있어요. 진심으로요.”
“내 인성은 내가 알아서 하마. 넌 박기혁을 내 앞에 데려다 놔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 아빠? 전에 한 번 까인 거 알잖아요. 더군다나 걔 정상 아니라고요. 그 시, 시, 시체를…….”
“시체 좋아한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능력도 확실하고.”
“몰라서 물어요? 아빠, 저도 여자예요.”
“대신 성공한다면, 칠성은 네 꺼다.”
“……전부?”
“전부. 말끔하게. 정훈이 몫도, 다른 식구들 몫도 다 없이 너 홀로 전부 가지게 해 주마.”
“일단 해 볼게요.”
칠성 그룹 전체가 매물로 올라왔다.
연수지도 상인의 피가 흐르는 인간. 상대가 칠성을 걸고 베팅을 했다면 이쪽도 당연히 시도는 해 봐야 한다.
최대한 예쁘게, 그러면서도 박기혁이 가장 존경한다는 어머니 ‘김연희’의 모습이 연상되듯, 분위기를 맞추고 그를 만나러 갔다.
다시 본 박기혁은 전보다 체구가 커진 것은 물론이고, 외모도 기대 이상이었다. 뭐랄까, 훈훈해졌다고 해야 할까.
그래, 시체 좋아하면 어때. 다른 재벌들은 바람이다, 사생아다, 뭐다 해서 시끄러운데 차라리 시체랑 노는 게 훨씬 낫다.
그렇게 연수지는 진지하게 박기혁과의 미래를 그리며 손을 내밀었는데.
“누구세요?”
누구…… 세요?
누구세요라니?
그렇다. 연수지는 완전히 잊혀 버린 것이다.
이후에 말을 했지만.
“아…… 아! 기억나네요. 그때 저 안내해 주신 분이구나. 반가워요. 우리 잘해 봐요.”
누가 봐도 대수롭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한다. 아니, 피곤한데 빨리 인사 끝내고 가자는 듯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됐나.
자신이 누구인가. 칠성 그룹의 연수지다.
웬만한 재벌은 명함조차 내밀지도 못한다는 그 연수지란 말이다!
배경 하나만 봐도 한국에서 그녀를 능가할 여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거기에 배경만 믿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일신의 능력 또한 출중한 데다, 솔직히 얼굴도 어디 가서 꿀리진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그런데 첫 만남에는 시체에게 밀리고, 두 번째 만남에는 기억조차 못하다니.
그래도 일단은 꾹 참았다.
맞아. 얘는 검호야. 검호라면 그럴 자격이 있지.
연수지는 억지로 합리화하며, 자존심을 굽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하자고 말했는데.
“죄송한데요. 저 술 안 마십니다. 근손실 나요. 그럼 이만.”
“야, 진유리, 차 태워 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너랑 놀러 가는 거 아니니까. 오늘 도하 아저씨랑 ‘마룡기’ 작업하는 날이야.”
KO.
처참하게 깨졌다.
혼자 남겨진 연수지는 이를 갈았다.
“좋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쯤 되자 오기가 생긴다.
“한 비서, 전에 내가 말했던 거 나왔어? 구해 둬. 얼마를 써도 상관없으니까 구해 두란 말이야.”
결심했다.
박기혁. 가져야겠다.
아니, 설령 내 걸로 만들지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날 인정하게는 만들어야겠다.
두 번 다시 날 보고 ‘누구세요?’라고 말하는 일은 없게 만들어 주마.
연수지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연수지와 만난 다음 날.
현장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다행히 비교적 가까운 인천 쪽이 배정된 상황. 우리는 각자 출발해 약속된 장소에서 모이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난 진유리 차를 타고 있는 중이다.
현재 진유리는 흥분 상태. 어제 나랑 진도하가 만지던 마룡기 작업을 보고는 줄곧 저 상태다.
“……대단했어. 진짜 아름다웠다니까. 어떻게 마법을 구체화해서 ‘금속’을 만들 수 있지? 그런 발상은 어떻게 한 거야. 대단해, 기혁이는.”
“적당히 해라. 칭찬도 한두 번이지, 벌써 몇 번째야.”
“싫은데. 100번 할 건데? 아쉬워. 재료만 더 있었으면 몇 번 더 시도했을 수 있었을 건데. 울 아빠도 말 안 했지만 엄청 아쉬워하던걸.”
“아냐, 어제가 적당했어. 더 이상은 무리야.”
“겸손하기는. 얼른 다시 보고 싶다.”
황홀하다는 듯으로 그 모습을 기억하는 진유리.
솔직히 내가 봐도 대단하긴 했다.
순수 마법 물질만으로 이뤄진 금속이라니. 마왕이었던 전생에도 떠올리지 못한 물건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제 걔 있잖아.”
“걔?”
“연수지. 우리 담당. 나 걔 마음에 안 들어.”
“애초에 너한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긴 했냐?”
“왜 없어. 너, 메리, 준우랑은 금방 친해졌어. 우리 시스터TMI도.”
“그래그래, 알았다. 그래서 왜 마음에 안 드는데?”
“너한테 막 꼬리 치잖아. 막 아는 척하고, 눈웃음 살살 부리고. 특히 옷! 옷 봐. 그거 딱 어머님 룩이라고.”
“어머님? 해련 아주머니?”
“아니! 우리 어머님.”
“설마 우리 엄마 말하는 거야?”
“얘가 왜 이래. 그럼 당연하지. 어머님이 또 있어?”
황당하다. 저 당당함 뭐지.
언제부터 내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가 된 거야.
어이가 없어 보는데, 저쪽은 이미 잔뜩 흥분해 있다.
“봐봐. 단정하게 넘긴 머리, 여성 정장, 쇄골이 살짝 도드라지는 셔츠. 거기에 브로치로 포인트. 내가 알아. 몇 번을 봤는데!”
“……어떻게 매일 보는 나보다 더 잘 아냐.”
“흥, 이래서 아들 키워 봤자 소용없다니까.”
“또, 또 주접떨고 있다.”
그런데 잠깐만.
아까 뭐라 했지? 여성 정장?
내 시선이 진유리의 머리부터 아래를 내려다봤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
“쿡.”
“여성 정장…….”
“킁.”
“쇄골이 살짝 도드라지는 셔츠.
“에헴.”
“브로치로 포인트…….”
“어때? 신경 좀 썼어. 아, 걱정하지 마. 평상복은 여기에 있으니까. 이건 전투복이야, 전투복! 오늘 그 여우에게 멋지게 선전 포고 하는 거지.”
“그,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그럼, 질 수 없지.”
두고 보라며 섬뜩하게 웃는 진유리.
이제 좀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항상 새롭다. 새롭게 미친 것 같다. 이것도 재주다. 언제나 발전하는 또라이라는 게.
그렇게 약속 장소에 도착. 일행들과 합류해 이동했다.
* * *
본격적인 현장 수업의 시작은 시청 안에서 시작됐다.
“먼저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말할게요. 나이트의 주 업무는 ‘레드 게이트’ 처리예요. 이렇게 수사, 혹은 경호 지원 업무는 말 그대로 ‘지원’일 뿐이에요. 부수적이란 거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단 말인가요?”
“그럼요.”
내 물음에 연수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되도록 해 주는 게 좋아요. 노동에 비해 페이가 작지만, 이런 게 하나하나 모여 실적이 되거든요. 실적이 쌓이면 무기 같은 장비 지원도 해 줘요. 국가 행사에도 초대될 수 있고요.”
그러고 슬쩍 일행들을 보더니.
“근데 여러분들은 필요 없긴 하겠네요. 이제 본론으로 갈게요.”
아공간 배낭에서 패드를 꺼낸 연수지.
그녀가 패드에 떠 있는 서류를 보여 주며 설명했다.
“이게 마나 사용 허가증이에요. 원칙적으로 이 허가증이 없는 상태에서 사용되는 모든 마나는 불법이에요.”
마법이 아닌 마나.
그러니까, 초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이능력은 게이트 밖에서는 펼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법으로 막아 놔도 쓸 사람은 써요. 저도 몇 번 써 봤고요. 여러분도 써 봤을 거예요. 상대를 해하는 것처럼 인적 물적 피해만 없으면 암묵적으로 넘어가는 게 사실이에요. 단.”
연수지가 손가락 세 개를 뻗는다.
“지금 말할 두 가지는 절대 하면 안 돼요.”
하나.
“범위 마법.”
둘.
“정신계 마법.”
범위 마법은 학살의 위험을 지녔고, 정신계 마법은 인간의 인격을 무너뜨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중간중간 다시 설명해 줄게요. 따라오세요.”
나이트 창구로 간 우리는 무언가를 써야 했다.
쓰고, 또 쓰고…….
하지 않겠습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주의하겠습니다.
체크, 체크. 전부 서류 작업이었다.
“지루하죠? 보다시피 나이트는 서류에서 시작해서 서류로 끝날 정도로 이 종이를 많이 봐야 해요. 이게 싫어 헌터로 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니까요.”
그때, 메리가 손을 들었다.
“질문 있어요. 매번 이래야 되나요?”
“일단 절차상으로는 그런데…… 여러분 모두 에이전트 들어갈 거잖아요. 에이전트에 들어가면 배정된 담당자가 이 일을 대행해 주죠.”
진유리가 개구지게 말했다.
“우리 전부 걱정 없겠다. 어.머.님.이 다 해 주실 거 아니야.”
찌릿찌릿-
잠깐이지만 연수지와 진유리 사이에 번개가 튀었다.
“……서류 다 썼으면 얼른 자리를 옮겨 볼까요.”
다음은 경찰서였다.
활동을 할 경찰서에 가서 공문을 확인해야 한다나.
“나이트가 국가에 소속됐다고 아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이 아니에요. 엄밀히 말해 나이트는 프리랜서죠. 국가가 협조를 요청하면, 나이트는 일정한 대가를 받고 움직이는 거랍니다.”
경찰서에서 보는 공문은 이 협조 요청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받는지.
“여기에 이렇게 사인을 해야 잠시나마 국가 소속이 된 거예요. 그 증거로 경찰에 협조를 구할 수 있죠. 경찰관님, 부탁 좀 할게요.”
그렇게 우리는 경찰관이 내준 사건 기록을 검토해 초인 범죄가 상습적으로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 * *
도심 한가운데.
번잡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두 남자가 이야기 중이다.
“쉽다니까!”
“……그, 그치만.”
“하, 답답하네. 따라와 봐. 형이 어떻게 하는지 보여 줄게.”
남자가 손을 비비며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적당한 대상을 물색.
여기서 대상은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명품 백이 보인다.
저거다.
눈짓으로 보여 준다. 저거라고.
“잘 보고 있어.”
스르르륵, 귀신처럼 움직이는 남자.
손을 뻗었다. 바람이 모여서 형체를 이루고, 바람의 칼날이 번뜩였다.
남자가 백을 짼다. 가볍게 잘려 나가는 백. 잘려 나간 틈으로 지갑을 빼낸 남자는 유유히 일행의 곁으로 돌아왔다.
“봤지?”
“네, 잘 봤어요. 솜씨가 제법이네요.”
“그래, 형이 이…….”
우쭐해하려는데, 생각해 보니 여자 목소리다.
‘X됐다!!’
눈치챈 남자가 뒤도 안 돌아보고 튀려 했지만.
남자의 시야를 꽉 채우는 주먹?
뻐어억!
우당탕, 나가떨어지는 남자.
여자, 연수지는 일어서려는 남자의 가슴을 밟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했다.
“이처럼 마나는 아주 간단한 응용만으로 범죄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죠. 준우 씨, 여기 지갑 저분한테 갖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