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103화>
한창 꿈나라에 있을 시간.
박봄이 침대에서 뒤척였다.
잠결에 손을 휘젓는다. 버찌를 찾는 손. 멀찍이서 박봄을 보던 버찌가 스르르 걸어가 박봄의 품으로 쏘옥, 들어갔다.
쓰담쓰담.
좋아, 보들보들, 빵실빵실, 버찌 궁둥이 좋아.
“최…… 고…….”
최고로 좋아…….
잠깐!
번쩍!
눈을 뜨는 박봄.
“몇 시야?!”
시간은 6시 55분.
늦었어!! 박봄은 벌떡 일어나, 가방이 있는 쪽을 본다.
어제 하루 종일 쌌던 가방. 박봄의 작은 머리통을 굴리고 굴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선택한 물건들이었다.
“있어.”
다음은 옷. 옷걸이에 걸려 있는 티를 본다.
오늘을 위해 할.머.니가 특별히 마련해 준 주문 제작 캡틴 타이거 티셔츠!!
티셔츠에는 붉은 타이즈를 입은 캡틴 타이거와 하얀 타이즈를 입은 엔젤 드래곤이 등을 맞대고 있다.
“히히히. 이뻐.”
극장판 신캐릭터 엔젤 드래곤. 공주님처럼 가녀린 체구와는 다르게 커다란 대검을 든 게 반전 매력이었다.
요즘 봄이가 한창 꽂힌 캐릭터.
저 대검 영롱한 거 봐.
몽롱한 눈으로 엔젤 드래곤을 쓰담쓰담했다.
지금 입을까? 머리하고 입을까? 한창 고민하던 봄이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버찌야! 이럴 때가 아냐! 빨리 언니한테 와. 시간 업써!”
“냐앙?”
왜 가만있는 나를 건드냐옹?
버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봄이를 보다, 체념했다는 듯 폴짝 뛰어 봄이의 어깨에 앉는다.
도도도.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간다.
“할모니 아냐, 할무니도 아냐. 할.머.니.”
아르르르, 입을 푼 후 ‘할머니. 할머니.’를 되뇌이며 할머니 방 앞에 선 봄이는 다급히 노크를 하고는.
“할머니!! 봄이 왔어요!”
“강새이, 할머니 여기 있다.”
그런데 정작 들리는 목소리는 뒤?
뒤를 보자, 김연희가 커피를 마시며 패드를 보고 있다.
우다닥 달려가 안기는 봄이.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야. 잘 잤니? 어디, 얼굴 좀 보자. 웃챠.”
한참 볼을 부비던 두 사람이 자리를 잡는다.
“손님, 머리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엔젤 드래곤처럼 해 주세요!”
“걔가 새롭게 나온 캐릭터지? 엔젤 드래곤이 좋아?”
“네, 엄청 좋아요.”
흐뭇하게 웃는 김연희,
“……돈값은 하네.”
“할머니, 뭐라고 했어요?”
“혼잣말이란다. 할머니가 책임지고 엔젤 드래곤처럼 해 줄게.”
후다닥 씻고 머리를 말린 후 김연희가 봄이를 앞에 앉힌다. 그리고 머리를 묶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은 뭐 할 거야?”
“바닷가 갈 거예요. 바다도 보고 물고기 보고, 아! 네모도 볼 거예요. 바다 요정 네모! 할머니, 네모가 뭐냐면요…….”
김연희는 네모가 뭔지 아주 잘 안다.
어제 함께 봤으니까. 그제도, 그끄제, 그글피에도 4번이나 저기 거실에서 함께 봤으니까.
‘베어 엔 팍스(B&F)’에서 만든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인데, 희한한 색의 물고기가 아빠를 찾으러 가는 거다.
참고로 ‘베어 앤 팍스’는 김연희가 상당량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이기도 했다.
얼마나 알차게 ‘네모’랑 놀았던지 재잘재잘 떠들던 봄이가 마지막으로.
“생선구이도 먹을 거예요.”
“……!”
멈칫!
새, 생선? 방금까지 물고기랑 친구 하려고 했던 애가 친구를 먹겠다고?
김연희는 합리적인 의심을 한다. 설마 얘, 생선이 뭔지 모르나?
그리고 그 의심은 맞았다.
봄이는 아직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식탁 위에 오르는 생선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그래. 맛있게 먹으렴.”
일단은 지켜 주자. 나중에 더 크면 가르쳐 줘야겠다.
봄이의 입은 쉬지 않는다.
생선구이 먹고, 백사장도 걷고, 케이블카를 탈 거란 부분에서는 ‘케이블카’가 생각나지 않아 ‘줄 타고 슈우우욱 가는 거!’라며 퀴즈를 내기도 했다.
이때쯤 가족들도 거실로 들어섰다.
새벽 운동을 마친 박건은 언제나처럼 호탕하게 웃었으며.
“상쾌한 아침!! 오, 사랑하는 여보와 사랑스러운 손녀. 좋구나, 좋아! 하하하.”
박수혁은 언제나처럼 반듯한 차림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봄이도 잘 잤니?”
아침잠이 모자란 박민지는 잠옷을 입은 채 엉기적엉기적 식탁에 앉았고.
“……하으으음.”
모두 식탁에 앉았을 때, 박기혁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하, 이걸 놓고 와서.”
“아침부터 어디 갔었어?”
“동아리실에 카메라 놓고 와서요. 그거 들고 왔어요.”
박기혁의 가슴에는 봄이와 똑같이 캡틴 타이거와 엔젤 드래곤이 등을 맞대고 있었다.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 * *
바다 보러 가는 길.
나는 오랜만에 잡는 운전대를 신중하게 돌리는 중이다.
내 옆에는 나랑 같은 티를 입은 봄이가 한창 부시럭거리고 있었는데.
“네 이름은 ‘찍찍이’야. 안녕, 찍찍아. 버찌도 인사해.”
“냐옹~.”
“들었지? 반갑대. 너도 인사를 해야 하는데…… 끄응.”
봄이가 끙끙대며 만지는 구슬.
저 어른 주먹만 한 투명 구슬이 뭐냐면, 카메라다.
그냥 카메라가 아니라 마도 공학으로 만들어 낸 ‘오브형 카메라’
왜 있잖나. Vlog인가 뭔가 하는 거. 봄이가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우리 여행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서 구해 줬지. 우리 봄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 새벽부터 아카데미에 간 것도 이것 때문이다. 개조한답시고 손봤는데, 모르고 놔두고 왔지 뭐야.
어쨌든, 무사히 들고 와서 봄이의 손에 들렸으니 됐다.
“끄응.”
“잘 안 돼?”
“아냐…… 할 수 있어.”
원래는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봄이가 스스로 알아보겠다고 해서 그냥 놔두는 중이다.
전에 본 책에서 그랬다. 아이가 직접 뭔가를 하려 할 때 부모는 답답해도 기다려 줘야 한다고.
“왜 안 돼지? 일어나. (툭!) 일어나라고. (툭툭!).”
……잘못해서 부서질 수도 있겠지만, 예비용으로 두 개 더 있다. 하나쯤은 버려도 상관없다.
한창 봄이가 카메라랑 씨름하는 가운데, 차도 고속 도로로 접어들었다.
날씨도 좋고, 길도 뻥 뚫려 있고,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에 기분이 절로 상쾌해졌다.
그때, 부르르 떨리는 폰.
내비 옆으로 ‘잘 갔다 와.’로 시작된 메시지가 보였다 사라졌다. 보낸 사람은 안 봐도 알 수 있다. 진유리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안 그래도 방학인데 뭐 하냐는 말이 나왔다.
막내인 김하니는 보충 수업을 하기로 했고, 한준우랑 메르헴은 어디 여행 간다더라. 호텔 잡아서 장기 호캉스를 즐긴다던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다.
이제 남은 건 문제의 진유리.
진유리는 일정이 없다고 불쌍하게 말하며 나를 쳐다봤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데려가!’, ‘나랑 놀아 줘!’라고 무언의 암시를 주는데, 어쩌겠나. 봄이랑 가기로 했는걸.
그래도 정말 의외인 게, 봄이랑 간다고 하니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봄이는 인정이지. 잘 갔다 와. 올 때 선물 사 오고.”
그러며 예쁜 사진이나 찍어서 보내 달라네?
솔직히 놀랐다. 나는 막 떼를 쓸 줄 알았거든. 왜 저번처럼 바닥을 뒹굴며 ‘필살 빼액’을 시전할 줄 알았는데, 얘가 무슨 좋은 약을 먹었는지 굉장히 쿨 하게 보내 줬다.
‘얘도 슬슬 철이 드나.’
그렇다면 다행이다. 저 망나니 누가 데리고 살지 캄캄했는데,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
한창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봄이는 아직도 카메라 ‘찍찍이’랑 씨름 중이다.
쪼물딱, 쪼물딱.
씹고 뜯고 만지고, 짜증 내고, 달래고.
이러다.
띵동-?!
“아빠! 된 것 같아! 찍찍이 깼어.”
“한번 해 봐.”
“응, 잘 봐. 꼭 봐야 돼.”
봄이가 마나를 일으키며 오브를 허공에 던지고.
순간.
또동-!
반짝임과 함께 허공에 뜬 오브.
오브의 중앙에 십자가 생기더니 바쁘게 움직이며 초점을 잡았다.
“됐다! 됐다! 찍찍이 눈떴어.”
“오, 대단한데!”
우리 봄이는 카메라, 아니, ‘찍찍이’ 쪽을 보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러더니, 포즈를 잡으며.
“안녕하세요! 나는야 봄! 나는야 버찌!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봄이를 바라보다…… 아! 타이밍을 놓쳤다!
“……박기혁!”
“뿌우우! 그게 뭐야. 이렇게, 이렇게. ‘나는야, 기혁.’ 이래야지. 다시. 이번에는 잘해야 돼.”
“응, 아빠가 잘할게.”
“좋아.”
하나, 둘, 셋. 액션!
봄이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나는야 봄이!”
또 재빨리 버찌를 들고는.
“나는야 버찌!”
그리고 난 손을 들며.
“나는야 기혁!”
“우리능!”
잠깐, 봄아. 이건 대본에 없는 건데?
당황한 나, 길 잃은 눈. 하지만 봄이는 이런 나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재차 대답을 강요했다.
“우리느은!!”
“봄이와 아이들?”
“아냐! 우리느으은!!”
뭐지, 뭐라 하지.
“거…… 검호 패밀리??”
“버찌!”
“미야아…… 아옹?”
“좋아, 아주 좋아쓰.”
흥분하며 박수치는 봄이. 퍽 흡족한지 입이 세모꼴로 웃고 있다.
나와 버찌는 그런 봄이를 황당하게 보는 중.
“굉장하네…….”
“하아앙……(응……).”
방송계 여러분.
여러분이 원하는 인재가 여기 있습니다.
* * *
같은 시간. 옵티멈 본관.
김연희는 언제나처럼 커피 한 잔을 들고서 모니터에 붙은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다.
박건의 증명사진부터 박수혁의 아카데미 졸업식 사진. 박민지가 백호단 단장으로 취임하던 사진. 박기혁이 조장으로서 첫인사를 하던 사진.
여기에 몇 년 전부터 한 칸을 차지하는 박봄의 사진까지.
정말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귀여운지.
의지가 될 남편 놈까지 귀여운 게 문제라면 문제이지만, 그래도 귀엽기라도 한 게 어딘가. 저 생명체가 귀엽지도 않았다면 벌써 한참 전에 멸종당했을 거다.
그러나 그녀는 알까. ‘사상 최강의 인간 흉기’라고도 불리는 박건을 귀여워하는 사람은 세상 천지에 오직 김연희 하나뿐이란 것을.
그뿐인가.
박수혁도 밖에 나가면 ‘무결점의 검사’, ‘차기 수호자’라며 경외의 대상이고, 박민지도 어느 통계에서 ‘절대 적으로 만나기 싫은 초인 랭킹’ 1위. ‘피도 눈물도 없는 초인 랭킹’ 1위를 차지할 정도다.
그럼에도 김연희의 눈에는 아직도 이불에 오줌 싸고 우는 아들이고, 밥 안 먹는다고 땡깡을 부리는 딸일 뿐이다.
“생긴 건 날 닮았는데.”
이상한 건 지 아빠를 닮아서.
김연희는 턱을 괸 채 가족들의 사진을 보다, 가끔은 손가락을 쓸고, 배시시 웃으며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즐길 수는 없는 일.
똑똑.
“들어오세요.”
일해야 될 시간이다.
비서실장이 들어와서 평소처럼 일정과 프로젝트 진행 사항, 이밖에도 특이 사항에 대해 브리핑해 줬다.
“……칠성 그룹에서 다음 달에 에이전트사를 발족한다고 합니다.”
“소규모 파티와 공략대를 긁어모으더니, 기어코 이쪽에 발을 담그네요.”
“네, 에이전트 명은 ‘미라클(Miracle)’이라고 하며, 강남 사옥을 쓸 것 같습니다.”
“강남? 칠성 그룹 강남 쪽 사옥이라면 청담동에 있는 그거요?”
“그렇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거기 엔터 관련 회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네, 칠성 산하의 엔터 회사 ‘더블 에스’가 있었습니다. 칠성 그룹 쪽에서는 엔터 쪽을 정리하며 에이전트에 집중할 생각 같습니다.”
“의외네요. 거기서 재미 좀 본 걸로 아는데…….”
“에이전트 대표는 전 칠성 유통 대표 최태민. 하지만 저희 비서실은 최태민은 간판이며, 수석 팀장 ‘연수지’가 실질적인 운영을 한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연수지? 음…….”
어디서 봤더라.
생각날 듯 말 듯한 기분…… 아!
“작년 협회 파티에서 봤구나!”
대부분 고령층이 주였던 모임에서 유독 젊었던 여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걔가 연수지였다.
“꽤 똘똘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혹시 연수지에 대한 정보는 있나요.”
“그럴 줄 알고 준비해 놨습니다. 여기.”
비서실장이 건넨 패드를 본다.
“성적도 우수…… 본인 능력도 좋고…… 졸업할 때 팀원 전원을 데려간 것으로 보면 리더십도 준수하네요.”
김연희가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쳤다. 숙고 중이라는 그녀의 제스처.
“더 조사해 봅니까?”
“네, 계속 조사해 보세요. 칠성에 자금 들어간 거 있나요.”
“아직은 없습니다.”
“조금만 넣어 보죠. 칠성 쪽이 이번에는 칼을 간 것 같네요.”
“이건 비공식 정보입니다만, 칠성 그룹에서 박기혁 군을 노리고 있다 들었습니다.”
“네? 뭘 노려요? 우리 막둥이를요? 허, 스카우트라도 한대요? 얘들 너무 갔네.”
“그것보다 더 간 것 같습니다. 혼인으로 묶을 생각…….”
“쿨럭!!”
“여기, 손수건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한번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아직은 신경 쓰실 정도까진 아닙니다만, 저희 쪽으로 이런 혼인 관련 이야기가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긴.
김연희도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해 보자,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게 더 이상하다.
전부 미혼에, 얼굴도 날 닮아서 빠지지 않고.
검호라는 혈족답게 다 강해.
오히려 찔러 보지 않으면 바보일 정도인데?
“뭐, 적당히 대응해 주세요. 애들이 알아서 하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투자 관련해서.”
“아! 말 끊어서 죄송한데, 그 저번에 ‘픽쳐스’있죠. 거기 투자금 늘려 주세요.”
“픽쳐스라면…… 두 달 전에 투자한 특촬물 콘텐츠 회사 말입니까?”
“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비서실장의 말에 김연희는 오늘 아침이 생각나 배시시 웃었다.
“음, 돈값을 하더라고요.”
픽쳐스.
콘텐츠 회사로 대표작은 ‘캡틴 타이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