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99화>
가끔 임미령은 상상해 본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을 잃은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엄마, 사랑해요.”
“다녀올게요, 여보.”
이제는 흐릿한 얼굴들.
생각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심장이 끊어질 것 같아, 억지로 삭제시킨 얼굴들이 비집고 올라온다.
“……안타깝게도 두 분 다 사망하셨습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세상을 원망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을까, 나 자신을 원망했다.
미친 척 가방을 챙기고, 알림장을 들춘다.
아침을 차리고, 점심을 차리고, 저녁까지 차리고…… 돌아올 수 없는 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정신 차려, 미령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언니,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다시? 또다시 이런 고통을 겪으라고?
죽고 싶었다. 죽으려 했다.
이 고통을 끝내려면 죽어야만 했다.
그래, 죽자.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의 문턱에 올라섰을 때.
그분이 계셨다.
“무엇을 그리 슬퍼하십니까.”
“어차피 버린 목숨, 저를 위해 써 주시겠습니까.”
임미령이 처음으로 그분을 뵈었던 날이고.
그날, 그녀는 그분의 신실한 종이 되었다.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얻은 한 줌의 안식.
믿음의 대가는 망각이었고, 이 ‘망각’이라는 안식이 임미령을 살린 것이다.
그분의 뜻대로.
눈을 뜨면 기도를 하고, 눈 감기 전 기도로 마치는 생활.
그분의 뜻대로.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짐승들을 교화시켜 나갔다.
그분의 뜻대로.
이단들을 처벌하며 그분에게 바쳤다.
매일 같이 피로 점철된 나날.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인간임을 포기한 짓도 저질렀다.
그래서 뭐? 나는 인간이 아니다. 그분의 종이다.
망각이란 약에 인간 임미령은 죽은 지 오래. 여기 있는 건 그분의 신실한 종, 셀루티스의 대사제 임미령이었다.
하얀 사제복을 입은 임미령이 신단으로 걸어간다.
신단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레드 카펫처럼 그녀를 환영한다.
이 또한 그분의 배려이리라.
임미령은 성호를 긋고는 맨발로 조심스럽게 피의 카펫을 밟았다.
늘어진 사제복 끝자락은 핏물에 빨갛게 물든다.
피로 흥건한 계단 위로 하얀 발자국이 찍힌다.
저벅, 저벅.
계단 옆에 있던 사제들이 입을 모아 기도한다.
그분의 뜻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되뇌었던 그 말.
그래, 그분의 뜻대로. 이 더러운 세상은 그분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
신단 꼭대기에 다다른 임미령이 몸을 눕힌다.
핏물이 하얀 사제복을 타고 붉게 물들지만, 임미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시작하세요.”
대기 중이던 사제들이 와서, 그녀의 팔을 벌린다.
오른팔을 펼쳐 족쇄를 채우고, 왼팔을 벌려 채우고.
양다리를 묶어 채운다.
그리고, 세운다.
역십자.
머리가 땅에 닿고 다리가 하늘로 뻗은, 세계의 부조리를 상징하는 셀루티스의 상징이 임미령을 통해 재현됐다.
“대사제님, ‘신혈’을 놓겠습니다.”
임미령의 몸으로 주사가 박힌다. 혈족 계승을 담은 약, ‘신혈’.
문득 그녀의 머리를 스쳐 가는 ‘아이’의 모습. 부모에게 버림받고 죽기 직전, 구해 준 아이였다.
대모님, 대모님. 참 많이도 따른 아이였고, 직접 ‘에밀’이라는 세례명도 내려 줬다.
‘그러고 보면 남긴 것이 아예 없진 않네요.’
‘아이스 쉬프트’를 담은 ‘신혈’이 그녀의 체내로 투입된다.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수명이 느껴진다. 영혼이 깎여 나가는 것도 느껴진다.
서서히 얼어 가는 손끝과 발끝.
동상의 고통. 산 채로 감각이 얼어붙는 고통 속에서도 임미령은 신을 찾는다.
“그분의 뜻대로…….”
나는 그분의 종이다.
오직 그분을 섬기기 위한 존재.
이 목숨, 그분에게 받았으니, 그분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
웃으며 눈을 감는 임미령.
타천사들이 달려들었다. 성스러운 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신단 위로 앉은 타천사들은.
아그작.
먹었다.
임미령을 먹었다.
“……그분의…… 거름이 되리라…….”
거짓된 믿음의 결말.
그렇게 임미령은 살아 있는 제물이 되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 * *
공략 2일째.
형과 누나와 대화 중에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다.
“레드 게이트는 이름 없어?”
“……너 아카데미에서 뭘 배운 거니?”
“민지야, 동생이 모르면 가르쳐 줘야지 왜 타박이야. 형이 설명해 줄게. 잘 들어.”
레드 게이트는 불시에 생긴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데 게이트 이름을 어떻게 짓겠나.
여담이지만 게이트 레벨도 공략 후에 몬스터 종류와 난이도 등을 고려해 매기는 것이지, 공략 당시에는 그러려니 하는 거란다.
“그럼 이름도 공략 후에 붙어진 거야?”
“대부분 그렇지.”
“클리어를 실패할 경우에 붙기도 해. 악명처럼.”
“호오.”
재미있었다.
이 레드 게이트란 것.
……
…
공략 5일째.
새삼 우리 집 사람들은 머리보다는 몸이란 것을 깨달았다.
내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에는 많이 모자라다. 그래서 찾아갔다.
누나의 똑똑한 친구 은빛나를.
“헤에? 레드 게이트 공략법이 궁금한 거구나? 잘 왔어. 이 누나가 그쪽으로는 전문가지. 에헴!”
레드 게이트는 발생 즉시 몬스터를 토해 낸다. 전문 용어로 ‘역류’라고 하는데, 이렇듯 역류한 몬스터는 본능적으로 주변의 생명체를 죽인다고 한다.
“선공 몬스터든 비선공 몬스터든 상관없이요?”
“응, 무조건 죽여. 음, 이걸 어떻게 표현…… 맞다. 광란 상태 알지? 단체로 광란 상태에 빠진다고 생각하면 편해.”
이렇듯 레드 게이트는 24시간, 끊임없이 몬스터 토해 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레드 게이트를 어떻게 공략하느냐. 게이트랑 똑같아. 이렇게 들어와서 보스를 잡으면 돼. 단! 밖에서 방어하는 병력이 필요해.”
이렇게 우리가 떠드는 이 순간에도 밖으로는 몬스터가 역류하고 있다.
그래서 ‘수비대’가 필요하다.
그들의 역할은 ‘공략대’가 게이트를 클리어할 동안 쏟아지는 몬스터를 막는 것.
그러니 최대한 빨리 클리어해야 한다.
피해를 줄이려면.
……
…
공략 8일째.
지휘관 은빛나와 참모들이 이제껏 나온 정보를 토대로 이 게이트 레벨을 ‘6레벨’로 규정했다.
생각보다 높지 않다.
다크엘프가 쏜 화살 위력, 정령의 위력, 개체 수, 필드의 크기, 각종 트릭을 종합해서 낸 거란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도 있었다는데.
“필드하고 몬스터만 보면 5레벨인데, 개체 수가 지나치게 많은가 봐.”
“그래…….”
“아무래도 어떠한 수단을 써서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것 같데.”
“그게 가능해? 게이트는 인간이 간섭하지 못한다고 배웠잖아.”
“나도 그렇게 알아서 아빠한테 물어봤는데.”
진유리가 몸을 밀착하더니.
“성물이나 제물을 이용해서 ‘오염도’를 늘리는 방법이 있대.”
“……허, 악용할까 봐 안 가르쳐 준 거구나.”
“그런 거지.”
“어쨌든 고맙…….”
순간, 스쳐 가는 기시감.
아주 근본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잠깐. 야, 너 지휘부 회의 못 들어가잖아. 근데 네가 이런 정보를 어떻게 알아?”
“기혁아, 아마추어처럼 왜 그래.”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말하는 진유리.
“당연히 몰래 들었지. 네가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나 잘했지?”
“하…… 진유리. 이 또라이.”
“히히.”
……
…
공략 11일째.
가족들과 몸을 부대끼는 열정적인 대화(물리)도 좋지만, 진도하와 마법적 지식을 나누는 심도 깊은 대화도 좋았다.
“음, 이 메테오 술식, 너무 무겁지 않아요? 아저씨는 마나 소모에 자유로우니까 할 수 있는데 보통 마법사한테는 맞지 않겠는데요.”
“그러면 기혁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볍게, 이런 식으로 바꾸면…….”
“호오, 정말로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덜어 내는 거죠. 대충 8.5클래스 정도로요.”
“클래스를 덜어 낸다라…….”
“사실, 아저씨나 저나 이제 클래스에 구애될 레벨은 아니잖아요.”
“실로 옳은 말입니다. 불은 불이고, 물은 물이죠.”
“플레어나 플레임 버스터나 불이고, 아쿠아 볼이나 아쿠아 버스터나 같은 물이죠.”
“멋집니다. 제 말을 완전히 이해하셨군요!”
“뭘요.”
하하하!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며 웃는데 은빛나와 누나, 그리고 진유리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이해했니?”
“헤…… 이해했을 것 같아?”
“형님! 저한테도 물어봐 주세요!”
“……이해했어요?”
“아뇨!”
……뭐, 누나는 검사니까. 괜찮다.
근데 유리야, 넌 거기 끼면 문제 있는 거 아니냐.
심히 걱정됐다.
……
…
공략 17일째.
순조롭게 게이트를 공략 중인데, 한동안 잠잠하던 타천사와 광신도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상하다. 쟤들이 왜 저기 있어?
“……민지야, 내가 잘못 보는 거 아니지?”
“……다크엘프들이랑 같이 있는 거면, 맞아. 나한테도 그렇게 보여.”
“헤에…… X됐다…….”
분명 다크엘프는 선공형 몬스터인데, 녀석들은 다크엘프 곁에 멀쩡히 서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뭔가 잘못됐다.
……
…
공략 23일째.
왜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아무래도 이 게이트, ‘타천사’가 먹은 것 같다.
내가 이 사실을 알려 주자, 지휘부 사람들은 충격에 빠진다.
“타천사가 보스를 섭취하면, 보스가 된단 말입니까?”
“직접 본 거예요. 옵티멈 사람들은 알 건데요. 제가 어머니한테 보고했거든요.”
“맞아요. 저도 목격한 적이 있어서 알아요. 정황상 여기 게이트의 보스는 이미 먹힌 것으로 보이고요. 어쩌죠, 두 분?”
은빛나가 의견을 구하는 두 분은 아버지랑, 진도하다.
“하하하! 뭐가 문제인가. 뚫으면 그만인걸. 젊은이들, 패기를 가져! 뒤는 어른들이 봐줄 테니까. 푸하하!”
“……좀 경망스럽게 웃지 않으면 안 되나. 후우…… 뜻이 기우는 데로 하시죠. 저도 여러분 뜻을 따르겠습니다.”
고민하던 은빛나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변수가 나타난 이상 기존 플랜은 지울게요. 속도를 올리기로 하죠. 그리고, 기혁아.”
속도를 올린다는 말을 하며 나를 보는 은빛나.
“백호하고 산군, 붙여 줄게. 사흘 안에 ‘오브젝트’ 다 깰 수 있겠어?”
“…….”
사흘?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틀이면 충분해요.”
* * *
어둠이 내려앉은 숲.
빗발치는 화살 사이로 박기혁이 질주해, 검을 내리그었다. 어둠을 뚫고 ‘달빛’이 번쩍이며 정면에 있던 적들이 절단된다.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박민지.
곧이어 그녀가 백색 섬광으로 변해 일대를 휘젓는다. 눈으로 쫓지 못할 속도. 인식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신속의 영역에서 박민지가 적을 벤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는 다크엘프.
그러나 퇴로를 막고 선 사람은, 박수혁.
그의 검, ‘천하’가 황금색으로 물들기를 잠시…….
공간이 분쇄됐다.
한 마리도 도망칠 수 없다. 갈기갈기 찢겨 버리는 다크엘프 무리.
“형, 누나.”
“먼저 가.”
“정리하고 가마.”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박기혁.
그의 곁으로 드래고니안을 착용한 진유리가 따라붙는다.
“마법진은?”
“완벽해.”
진유리가 설치한 마법진은.
‘인식 저해 차단 마법.’
얼마 전 ‘사마귀 여왕의 궁’에서 ‘킹메이커 작전’을 행할 때 펼친 마법진이다.
용의 눈을 가진 진유리는 일단 봤던 마법은 어느 정도 재현 가능했고, 여기 ‘오브젝트’ 주위를 차단할 정도는 충분했다.
밑그림은 완벽하다.
둘이 눈을 마주치더니 속도를 높였다.
파앙-!
소닉 붐이 일어나며 허공을 꿰뚫는 두 사람.
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의 시야에 목표물이 보인다. 백여 마리 다크엘프의 호위를 받으며 잠들어 있는 우드 골렘.
족히 건물 하나 크기의 저 우드 골렘이 우리가 찾는 ‘오브젝트’였다.
이 오브젝트는 각각의 속성을 가지고 살아 있으며, 보스에게 속성에 맞는 버프를 준다.
저기 잠들어 있는 우드 골렘의 속성은 ‘재생’.
실시간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재생’ 속성으로, 필히 죽여야 하는 놈이다.
일단 다크엘프부터.
“내가 할까?”
“내가 할래.”
진유리의 등 뒤로 날개가 생성된다.
붉은 마나로 이뤄진 날개가 완성되는 순간.
워 아머, 드래고니안의 장갑이 오픈.
장갑 아래 숨겨져 있던 마석들이 빛을 발했다.
인페르노(改)
Inferno
드래고니안을 통해 쏘아진 인페르노.
네 가닥의 붉은 광선이 지면을 꿰뚫었다.
폭발하는 불꽃, 비산하는 시체들.
지면 위로 불꽃이 끓는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그렇게 마지막 한 마리의 다크엘프가 불꽃에 소멸됐을 때.
마침내 오브젝트, 우드 골렘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에 맞춰 박기혁의 등 뒤로 ‘신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포메트, 아수라, 펜릴, 키메라.
대악마의 얼굴이 어둠의 뚫고 안광을 내뿜었고.
하늘에 육망성 마법진이 새겨졌다.
“배운 건 써먹어야지.”
술식 전개.
메테오(改)
Meteor
구웅-!
구름을 뚫고 떨어지는 운석.
속성이 ‘재생’이라면 재생하기 전에 죽이면 된다.
약식 메테오라 조금 크기는 작지만 저 정도 우드 골렘을 상대하기에는 문제없다.
화려한 불꽃으로 번쩍이는 운석이 우드 골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충돌한다.
폭발한다.
콰아아앙!!
“일단 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