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명가의 마왕님-96화 (96/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96화>

이 이야기는 박건이 셀루티스를 처음 쫓았을 때의 이야기다.

대게 수호자는 국가에서 특별한 지원 요청이 없는 이상, 자유 시간을 가진다. 자연히 박건도 한창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놀고 있었다.

자식들이랑 검호식 대화(물리)를 하거나.

소중한 우리 봄이랑 캡틴 타이거 놀이를 하거나.

그래도 심심하면 사랑하는 아내의 회사로 놀러가거나.

이렇게 박건이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한 통의 연락이 온다.

“건아, 나 성철이다. 저녁에 시간 되냐.”

집행부장 지성철.

수호자 때부터 알던 친한 형이었다.

“이번 기회에 셀루티스를 확실하게 박멸할 생각이야. 한 손 거들어 주시면 안 될까. 부탁한다.”

안 그래도 노는 게 지겨웠는데, 전투라니.

박건은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결정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박건의 모든 대외 업무는 마누라의 허가가 떨어져야 했기 때문.

“셀루티스? 셀루티스라…… 웃기다, 진짜. 그걸 나한테 말하지 않고 당신한테 바로 찔러 본 거야? 성철 오빠 집행부장되더니 많이 약아졌어.”

“잠깐만, 전화 좀 할게…… 성철 오빠, 이렇게 나올 거야? 뭘 오해야. 제대로 말해. 이런 식으로 나오면 협조 못 한다?”

박건은 지나칠 정도로 기분파다. 감정적이고, 선택을 할 때 즉흥적인 부분이 많다.

이건 박건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

놔두면 어디로 튈지 모르니, 김연희는 항상 남편을 외조(본인 말로는 뒤치다꺼리)해야 했다.

어쨌든 김연희와 지성철이 잘 조율해 지원은 무사히 통과.

건이는 자유의 몸이에요!

검 한 자루만 들고서 유유자적 길을 나섰고.

그가 도착한 곳은 중국 하얼빈. 중국을 양분하는 암흑가 ‘삼합회’의 세력권이었다.

“이놈들을 처리하면 된다고?”

“네, 전부 셀루티스에 마석을 공급하는 자들입니다. 몇몇은 국내에서 셀루티스와 관련된 사건으로 수사를 받다 종적을 감춘 이들도 있습니…….”

“아, 아, 됐소. 난 귀찮은 건 질색이니까, 내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사실, 지성철이 다른 수호자들을 제외하고 콕 집어 박건에게 부탁한 이유가 있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홀로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임무. 더욱이 타국의 영토이기에 특별한 지원도 바랄 수 없다.

이런 조건에서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지성철의 머리에는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암살, 첩보, 폭파, 납치, 교란 등.

모든 특수전이 가능한 명실상부 최고의 스페셜리스트.

박건.

이게 이 사내의 본모습이었다.

뭐? 박건이?

감정적이고, 바보처럼 웃을 줄만 알고, 정의나 의리를 부르짖는 이 호구 같은 남자가?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다.

백야(白夜).

하얀 밤.

모순된 단어. 이중적인 표현.

이것이야말로 박건의 본질이자, 본능이었으니.

박건의 눈동자가 하얗게 빛나는 순간, 그는 특수전 최강의 스페셜리스트로 변하는 것이다.

박건은 철저하게 대상을 지웠다.

자고 있는데 암살은 기본.

푸쉭-!

“……!”

번화가 한복판에서도 암살은 계속된다.

“큽!”

“쉿. 조용. 금방 끝낼게.”

때론 정보를 취하고, 동시에 역정보를 흘린다.

자중지란을 일으키며 가장 취약한 틈으로 검을 쑤셔 넣었다.

삼합회 세력권이라 위험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지성철의 걱정은 기우라고 말하는 것처럼, 박건은 정말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명단의 이름들을 지워 나갔다.

타천사의 깃털을 구한 것도 이 때쯤이었다.

이밖에도 재창조, 계시, 구원, 먹이 확보 등등, 지원선을 끊으며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는데.

그때, 막 작전이 마무리될 때쯤, 우연히 급습한 셀루티스의 종교 시설에서 충격적인 정보를 입수한다.

“신전?”

타천사. 자기들 말로는 ‘구원’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는 계획.

그리고 이 신전이란 것은…….

“이거, 레드 게이트잖아?”

그렇다.

셀루티스는 레드 게이트를 열 생각인 것이다.

강제로…….

*   *   *

제단에 바친 수많은 시체들.

손과 발이 어지럽게 얽혀 있고, 시체의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러내린다.

그렇게 모인 선혈이 강을 이루고, 이 피의 강 한복판에서 임미령이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모으고 있다.

기도한다.

이것은 당신을 위한 제물이니.

그분이시여, 부디 우리의 소망을 들어주소서.

임미령이 하늘을 향해 목 놓아 외쳤다.

“그분의 뜻대로!”

임미령의 선창에 뒤에 있던 수많은 셀루티스 사제들이 하늘을 향해 따라 외친다.

“그분의 뜻대로!!”

모여진 신성력이 게이트로 빨려 들어간다.

퍼플 게이트의 색이 한층 진해진다.

임미령은 다시 하늘을 향해 간절하게 외쳤다.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뜻대로!!

다시.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뜻대로!!

또다시.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뜻대로!!

광기가 전염된다.

스스로를 불태워 신을 찾는 자들.

이것이 광신(狂信)이라.

그리고 마침내, 이름 없는 신이 이름을 가질 때.

거짓된 믿음은 타락한 신성을 가진다.

파지직-!

번쩍이는 섬광.

“아아아…… 그분이시여.”

퍼플 게이트는 없다.

이제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붉은, 피를 닮은 붉은빛 게이트만이 있을 뿐이었다.

“형제님들, 갑시다. ‘신전’으로.”

*   *   *

많은 인류학자들이 언급했다.

만약 이 세계가 멸망한다면, 그 이유는 ‘레드 게이트’ 때문일 거라고.

레드 게이트(Red Gate).

인류 최대의 재앙.

지금 박기혁 앞에 놓인 재앙의 정체다.

박기혁이 숲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나무 사이, 수풀 사이로 보이는 음영들. 셀루티스의 ‘신앙 성가대’가 그를 포위한 채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살기.

빈틈이 보이면 언제라도 찌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박기혁도 저들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마귀를 쥐는데, 정작 선공이 날아온 곳은 하늘?

쇄앵-!!

나선형 얼음 부메랑들이 나무를 베며 들이닥쳤다.

까다로운 궤적으로 날아온다. 어째 이것들은 가면 갈수록 경험치가 높아지는 것 같은지.

박기혁은 지랄 맞다 생각하며, 마법진을 띄웠고.

실드를 전개. 그대로 돌파했다.

그때 실드에 맞고 튕겨 나간 얼음 부메랑이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박기혁의 뒤를 쫓았다.

자세히 보니 부메랑은 어느새 ‘새’로 변한 상태.

발현 중인 능력을 변형한 것.

구현계 능력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야만 할 수 있는 기술이다. 아이스 쉬프트가 빙 속성 ‘구현계’라더니, 이제야 좀 ‘구현계’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적들.

그때, 후두두둑-!! 얼음 새가 허공을 가리며 내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그 모습에 박기혁은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봄이랑 소풍 갔을 때, 비둘기 떼가 와르르르 날아가는 모습이 꼭 이랬는데.

그렇게 잠시 감상하는 그때.

“……?!

느껴지는 마나의 파장?

이건?

순식간에 판단이 선 박기혁이 발을 멈췄다.

동시에 여섯 겹으로 늘어난 마법진이 박기혁의 전신을 가리는 순간.

폭발하는 얼음 새.

비산하는 파편.

그리고 이 파편에 닿는 모든 것들이.

얼어붙는다.

쩌저저적-!

상태 이상, 빙결.

극도로 끌어올린 빙결에 일대가 얼음 송이로 변한다. 유일하게 멀쩡한 곳은 한곳, 박기혁이 서 있는 곳뿐

“하, 어이가 없네.”

정작 ‘아이스 쉬프트’의 본래 주인인 챈들러 머레이는 변형은커녕 혈족의 힘을 반의반도 못 꺼내 써먹었는데, 몬스터란 녀석들은 변형을 유연하게 발현한다.

이걸 챈들러 머레이가 모자라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타천사가 대단하다고 말해야 하나.

“어쨌든.”

이목을 끄는 것은 성공한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이 녀석들의 발을 묶는 것.

박기혁의 아래로 마법진이 그려진다.

육망성, 여섯 개의 선으로 이뤄진 별.

여섯 개의 선에 어둠이 피어오른다.

박기혁의 내면세계에 갇힌 제물들을 연료 삼아 타오르는 어둠.

흑마법 제어

인탱글(改)

Entangle

쩌저저저적!

여섯 개의 선들이 원을 뚫고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선을 중심으로 새겨지는 또 다른 육망성들. 수백 개의 육망성들이 일대를 가득 메운다.

벗어날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

이제 이 일대는 박기혁의 영역.

그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이곳을 나갈 수 없다.

인탱글로 퇴로를 끊은 순간.

그거 아냐?

“너희들은 포위됐다.”

반격이 시작된다.

공간을 뚫고 나오는 죽음의 군세.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공간이 깨지며 스켈레톤들이 일거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이 반격의 방점은……

다다다닥-!

빛살처럼 달려오는 인영.

인영은 하얀빛으로 변하더니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전장을 가로지른다.

한 번, 두 번…… 여섯 번. 지상을 누빈 섬광이 하늘의 타천사를 지나쳤다.

7번의 섬광. 그리고 그 끝에 나타난 건.

박민지. 신속의 검사.

검호류 신속

북두칠성(北斗七星)

촤륵-!

섬광에 닿았던 적들이 일거에 절단, 피를 뿌렸다.

땅에 안착한 박민지. 그녀의 등 뒤로 박기혁이 섰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는 모습.

하지만 그거 아는가.

“봤지. 열일곱.”

“아니지 누나. 내기는 지금부터지.”

“까다롭긴.”

그들은 검호고.

지키는 것보다 부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검은 섬광과 하얀 섬광이 전장을 찢어 버리고 있었다.

*   *   *

한편 박기혁과 박민지 남매가 신들린 듯 적을 썰고 있는 사이, 반대쪽에서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모두 라인 지켜!”

은빛나가 라인을 정리하고는 마나를 일으켰다.

허공에 생겨나는 현들. 총 46개의 마나로 이뤄진 현들이 생성되고, 은빛나가 현을 켰다.

천사의 행진

Angel‘s March

힘찬 선율이 흘러나온다.

팀 전체에 흘러드는 활력.

피로는 지워 내고, 그 자리에 고양감이 채워졌다.

눈에 띄게 좋아지는 움직임.

이렇게 버프까지 줬는데 명령을 못 알아먹으면 그땐 맞아도 할 말 없겠지.

본격적으로 은빛나의 닦달이 시작됐다.

“몇 번을 말해. 균형 맞추라니까?”

“B조! C조! 뒤쪽으로 반보 후퇴, D조는 한 보 전진. 한 보라니까! 한 보! 쟤는 또 뭐야. 라인 안 지킬래!”

“좋아, 지금이야. 지금 완벽하거든. 그러니까 지키면서 버텨. 명심해. 우리 역할은 모루야. 맛깔나게 맞으면 돼! 쉽지? 다 힘내자!”

이렇게 전선을 안정시킨 은빛나.

이제 다음 차례를 위해 무전을 드는데.

“으으으.”

흔들리는 은빛나의 손. 진정이 안 된다.

너무 좋아서.

아직도 믿기지 않다. 검호를, 무려 세 명의 검호를 지휘하다니!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

세상에, 내게도 이런 일이.

은빛나의 가슴에 내적 눈물이 흐른다.

‘엄마, 엄마 딸. 성공했어.’

후우, 후우.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은빛나가 무전기를 든다.

“섹터C, 상황은?”

- 백호, 순조롭다.

- 흑호, 마찬가…… 누나…… 아! 진짜 야이……!

- 야이? 너 욕했니?

- 치사하게!!

어딘가 모르게 격앙된 박민지의 목소리. 평소 조용하며 차분하던 목소리 톤이랑은 완전히 다르다.

오랜 세월 함께 지낸 은빛나는 친구의 변화를 단번에 눈치챘다.

즐기고 있구나.

하긴, 뭐든지 수준이 맞아야 즐거운 법.

아무리 은빛나가 지휘로 커버를 해도 백호단과 박민지의 실력 차는 극명하다. 그래서 친구는 항상 본신의 힘을 억누르며 싸워 왔는데, 지금 비슷한 수준의 동료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이 동료는 자신과 완전히 동류인 가족.

신이 난 거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이 전쟁을 진심으로 즐기는 거다.

“이쪽은 문제없겠어.”

신이 난 검호가 얼마나 강한지 은빛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곁에서 지켜봐 왔으니까. 자신이 직접 지휘해 봤으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심호흡, 심호흡.

다시 마음을 정돈하고.

마지막 무전을 돌리는 은빛나.

“에, 에이스. 발견했습니까?”

- 여기는 에이스…….

*   *   *

“……찾은 것 같다.”

붉은빛, 원형의 마나장.

레드 게이트가 있었다.

“위치 확인. 일단 복귀한다.”

박건의 망토가 펄럭인다. 펄럭이는 망토가 어둠에 녹아들고, 박건도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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