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93화>
썩둑썩둑.
썰신 무가 고무 대야에 차르르 채워졌다.
“저기 혜숙 씨. 양념 다했죠? 여기 주시면 돼요.”
“네, 미령 씨.”
임미령은 여자가 가져다준 양념을 찍어 맛을 보고, 여자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임미령에게 집중했다.
“흐응, 이럼 안 되는데…….”
“왜요? 이상해요? 맛없어요?”
“네, 심각해요.”
임미령이 정색하는 표정으로.
“심각하게 맛있어요. 이러다 우리 혜숙 씨 봉사 활동 때려치우고 김치 장사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
“어머어머, 미령 씨도 참.”
“하긴 혜숙이가 손맛이 좋아.”
“혜숙이 사장님 되겠네.”
“왜 그러세요. 다들 놀리지 마세요오오.”
깔깔깔, 웃음이 터졌다.
고된 봉사활동에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무슨 맛으로 하겠나. 모두 수다쟁이가 되어 웃고 떠들었고 분위기가 급격히 밝아져 갔다.
그렇게 한창 웃음꽃을 피우던 차에 저 멀리서 커다란 고무 대야를 들고 오는 남자.
“어머? 미령 씨 조카 왔는데?”
“거참, 총각이 잘생겼어.”
“잘생기기만 했어? 착해, 공부도 잘해, 고모도 잘 모셔. 요즘 저런 사람이 어디 있어. 딸만 있으면 시집보내고 싶다니까.”
임미령이 ‘아이, 참.’ 겸양을 떨며 남자에게 걸어갔다.
“여긴 웬일이니?”
“고모님 보고 싶어서요.”
“연락하고 오지. 밥은 먹었어?”
어머 어머! 고모 챙기는 거 봐~ 부럽다, 미령 씨.
주위의 야유 아닌 야유를 받으며 임미령과 조카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을 감싸는 마나의 장막.
순식간에 발현된 마법.
단순히 소리를 차단하는 것을 넘어 설정된 장면과 대사를 보여 주는 교란계 환상 마법이었다.
“대사제님을 뵙습니다.”
그렇다. 조카의 정체는 서창현.
셀루티스에서는 ‘에밀’로 불리는 임미령의 숨은 검이었다.
“죄송합니다. ‘개종의 시간’에는 찾지 않으려 했지만 상황이 급하다 보니.”
“무슨 말씀이에요, 형제님. 저 무지몽매한 짐승들을 개종하는 일이 어떻게 형제님보다 중요할까요. 절대로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대사제님.”
“그래서요. 급한 일이란 게 뭔가요?”
“안 좋은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조만간 ‘군대’가 움직일 것 같습니다.”
“…….”
현재 셀루티스의 전력은 북쪽. 게이트 밀집 구역에 집중된 상황이다.
그들은 이 밀집된 게이트에 몸을 숨긴 채 ‘구원’의 성장을 도모하는 중이었고, 반면 조사대는 게이트를 이용해 전력을 분산, 과도한 피해를 입을까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이 기묘한 구도가 계속되며 현재 전선은 고착화됐고, 이건 시간을 벌어야 하는 셀루티스가 원하던 구도였다
그런데 군대가 내려와?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이르는 국경선을 지키는 군대.
이들이 힘이 없어서 움직이지 않은 게 아니다. 그저 국경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에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가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 이 아슬아슬한 구도는 단번에 깨질 것이다. 틀림없이.
하나 다급히 말하는 서창현에 반해, 임미령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평온했다. 마치 올 게 왔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수도 있죠. 우리가 소란 피운 적이 거의 없잖아요. 어리석은 이단들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는 게 당연하죠. 아마 먹음직스러운 먹이로 보지 않을까요? 치킨이나 라면처럼. 라면은 너무 격 떨어지나? 흠…….”
“…….”
“솔직히 기대 이상으로 대처가 빨라 당황했지만, 결론만 보자면 저희가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됐네요. 끝. 이 이야기는 중요한 게 아니니 끝내요. 그 보다는, 전에 말했던 그거나 말해 주세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혈족을 먹이로 만드는 거요.”
“아, 현재 순조롭게 양산 중입니다.”
“혈족을 복사해, ‘구원’의 먹이로 준다. 정말 멋진 발상이었어요, 형제님.”
“과찬입니다.”
“진화를 믿던 덜떨어진 이단 종자들이 남긴 연구가 이렇게 쓸모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런 거 보면 그분은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니까요.”
임미령이 감탄하더니, 성호를 그으며 짧게 기도한다.
“덕분에 ‘신전’ 건축이 빨라졌다고 하니, 형제님의 공이 아주 커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신전’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죠?”
“걱정 마십시오. 모든 것이 그분의 뜻대로 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뜻대로…… 정말 듣기 좋은 말이네요. 에밀 사제가 각별히 신경 써 주세요. 벽돌 하나도, 한 치의 실수가 없어야 할 거예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야기는 끝.
환상 주문을 펼친 것치고는 실로 간단한 대화였다.
다시 고무장갑을 낀 임미령이 깍두기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왜일까, 서창현이 일어서지 않는다.
임미령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는데, 그가 하고 싶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형제님, 할 말이 더 남았나요?”
기탄없이 말해 봐라, 허락이 떨어지자 서창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시간이 부족합니다.”
“응? 무슨 말이죠.”
“정부의 개입이 빨라도 너무 빠릅니다.”
“그렇긴 해요. 게이트 올 리셋이라니, 상상 이상으로 과격한 대처였죠.”
“네, 게다가 하얼빈과의 연락도 순조롭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암중에서 저희 팔다리를 자르는 세력, 혹은 조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흐응, 마석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는데.”
“현재 전선을 유지하는 중입니다만…… 사실상 이게 최선입니다. 이 상태로면 퇴로를 확보할 시간조차 없습니다.”
“응? 퇴로요?? 문제 될 거 있나요.”
“네?”
“퇴로를 확보할 시간이 없으면 뭐, 다 같이 그분의 품으로 가는 거죠.”
“……!”
당연한 말을 왜 하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뱉은 말.
지금 임미령은 ‘순교’를 각오하고 있다. 자신을 포함한 한국 지부 전 인원의 순교를 말이다.
임미령이 방긋 웃으며 서창현을 바라봤다.
“설마 형제님, 죽음이 두려우신가요.”
“두렵지 않습니다.”
“믿어요. 에밀 사제님이니까요. 그러니 퇴로 확보에 힘쓰지 마시고, ‘신전’에 집중하세요. 그것이 그분의 뜻이니까.”
그런데, 임미령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요. 제가 기억을 잘못하고 있나요. 전에 제가 시간이 없으면 퇴로 따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똑똑히 말한 것 같은데요.”
“네, 그랬습니다.”
“하면 왜 우리 형제님이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을까요? 설마 우리 에밀 사제님 믿음이 부족할 리는 없고, 조금 궁금하네요.”
“그건…….”
다른 사람은 상관없다. 형제님도, 자매님도, 심지어 서창현 본인조차도 상관없지만, 대사제님 임미령만큼은 안전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설마 저 때문인가요, 형제님?”
“…….”
“하, 후, 크흠, 형…… 아니, ‘에밀’ 사제님.”
임미령은 서창현의 대모이니까.
캄캄한 지옥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 주고, ‘에밀’이란 이름으로 새 생명을 준 진정한 구원자였으니까.
“에밀 사제.”
“네, 대사제님.”
“우리는 말이에요. 그분의 뜻대로 사는 종이에요. 종의 미덕은 ‘복종’. 그분이 죽음을 원하신다면, 저희 종들은 웃으며 심장을 내어 드려야만 하는 거예요.”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그분의 종이다.
그러니 그분의 종으로서.
“복종하세요.”
생각하지 마라, 의심하지 마라.
복종하라.
설령, 그 길의 끝이 파멸이더라도, 웃으며 복종하라.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뜻대로.”
지금 이 순간, 거짓된 믿음이 폭주하고 있었다.
* * *
며칠 뒤.
꽃가람 유치원.
박봄은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빠 보고 싶어…….”
빨간 날에는 꼭 오던 아빠가 이번 빨간 날에는 안 왔다.
같이 인형 놀이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캡틴 타이거도 준비했는데……
“흐끕, 흐끕.”
대신 호랑이 삼촌이 ‘칼춤’을 가르쳐 줬지만, 아빠랑 노는 것만큼 즐겁지 않았다.
호랑이 삼촌은 아빠가 나쁜 사람 잡으러 간다 했는데, 나쁜 사람 밉다. 봄이가 커서 혼내 줄 거야.
계속 아빠 생각하니까 더 보고 싶다.
몽글몽글, 박봄의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히잉, 아빠아.”
기어코 또로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착한 언니는 울면 안 되는데. 미안해, 버찌야. 언니는 나쁜 언니인가 봐. 미안해.
왈칵, 울음보가 터져 버렸다.
“흐극흐극. 아빠아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 박봄.
흐끅흐끅, 서럽게 우는 소리에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박봄에게로 몰려드는데.
그 순간 저 멀리서 호다닥! 달려오는 인영.
“비켜어!!”
자칭 봄이의 베스트 프렌드, 임현지였다.
임현지가 슬라이딩하듯 봄이 앞에 서더니 팔을 쫙 벌려 봄이를 가렸다.
“누구야!! 우리 봄이 누가 울려써! 민기 너야! 아님 창현 너야!?”
둘은 유치원에서도 유명한 짝꿍.
벌써 떡볶이를 다섯 그릇이나 함께 먹은, 떡볶이로 묶인 찐친이었다.
우리 소중한 봄이를 울린 자는 용서할 수 없다!
도끼눈을 치켜뜨고 으르렁대는 임현지.
다행히 소란은 봄이가 흥분한 임현지를 달래며 일단락되었다.
시간이 지나, 유치원이 끝나고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온 사람은.
선물 이모. 메르헴이었다.
“봄, 수업 잘 받았어요?”
“응…….”
“응? 왜 대답에 힘이 없어요. 얼굴은 또 왜 이렇게 시무룩하고요?”
이때 끼어드는 임현지.
“언니, 봄이 울었어요!”
“어머? 봄 울었어요? 왜 울었어요?”
메르헴이 봄이를 안아 들며 묻자, 박봄은 말없이 그냥 메르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모습에 메르헴은 쓰게 웃으며 박봄의 등을 쓸어 줬다.
‘기혁이 보고 싶어서군요.’
하긴, 얼마 전까지 박기혁이랑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봄이다. 그런 아빠를 몇 주째 못 보니 어지간히 보고 싶을 거다.
“할아범, 안 되겠어요. 우리 봄이 기분이 우울하니까, 풀어 줘야겠어요.”
“허허. 스트레스 푸는 데는 역시 쇼핑 만한 게 없겠죠. 준비하겠습니다.”
“현지 양도 함께하겠어요?”
“어, 엄마한테 말해야 하는데.”
“할아범.”
“연락해 놓겠습니다.”
그날, 백화점에는 큰손이 등장했다.
눈길이 가는 대로 다 사는 큰손.
특히 백화점 아동용 코너는 옷이면 옷, 장난감이면 장난감, 싹 동이 났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인기가 한풀 꺾인 ‘캡틴 타이거’ 시리즈 인형을 남김없이 사 갔다는 것이다.
그날 밤, 봄이의 옷장에는 하얀 공주 드레스가 가득 채워졌다.
그 옆에는 각종 장난감 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아끼는 건 아빠가 선물해 준 ‘마귀’를 닮은 대검이었다.
아빠가 손잡이부터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 준 선물.
마법도 걸려 있다고 들었다.
봄이는 대검을 머리맡에 두고 침대에 누웠다.
“버찌이, 언니한테 와.”
“냐아아앙-.”
봄이의 품에 발라당 쓰러지는 버찌.
둘이 누운 침대 주위로 캡틴 타이거 인형이 산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럼에도.
“힝, 히잉.”
봄이는 슬펐다.
“아빠, 빨리 와요.”
봄이한테는 아빠가 최고니까.
박봄은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 * *
마귀에 붙은 피를 털어 내며 시체를 툭 던져 놓았다.
“망할 새끼들.”
다닥다닥 쌓여 있는 시체 위로 걸터앉아, 숨을 고른다. 사람 귀찮게 봄이도 못 만나게 해.
“하여튼, 이 새끼들이 문제야.”
퍽!
발에 걸리는 시체를 찼다.
하아, 한숨을 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새초롬하게 떠오른 초승달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계속 보다 보니, 우리 봄이의 눈웃음이 생각나네.
하긴, 초승달뿐이겠나. 반달은 봄이가 ‘대단해에!’ 감탄하는 입을 닮았고, 보름달은 봄이의 빵빵한 볼따구니 같다.
종합해 보자면, 현재 내 머릿속에는 온통 딸내미 생각뿐이다.
“하, 봄이 보고 싶다.”
봄이는 잘 있으려나. 머릿속에 봄이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기분 좋게 스쳐 가는데.
그 순간, 코끝을 찌르는 불쾌한 냄세.
인상을 찡그리며 마귀를 든 손을 빗살처럼 휘두른다.
콰직!
막히는 검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
냉기의 방패를 두른 타천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