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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명가의 마왕님-90화 (90/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90화>

한바탕 폭풍우를 몰고 왔던 진유리가 비실비실 추락하고, 나는 그런 진유리를 곱게 받아 들었다.

“……힘…… 업서.”

“그러게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쓰래.”

“어…… 때써?

“괜찮았다. 합격이야.”

“……헤…… 헤…… 헤…… 좋댜.”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실실 웃던 진유리가 까무룩 기절했다.

고생했다, 녀석.

나는 피식 웃으며 진유리를 업어 들고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휘유우.”

눈앞에 보이는 고블린의 성은.

그야말로 개판.

자연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하다.

이 말보다 앞에 보이는 광경에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싶다.

진유리의 ‘용언’이 만들어 낸 폭풍우가 고블린 성을 휩쓸기를 고작 십여 분.

성은 말 그대로 물바다가 돼 버렸다.

푹푹 빠지는 발은 걷지 못할 정도.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현재 나조차도 날아서 이동 중이다.

내가 이동이 힘들 정도인데, 신장이 인간의 허리 어림도 안 되는 고블린은 어떻겠나.

걔들은 단순히 이동이 불편하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허리까지 잠기면 그때부턴 생존의 문제였다.

실제로 진창에 처박힌 시체도 꽤 보인다. 살아 있는 고블린들도 사정은 별반 다를 거 없다.

이 공간에서 제 발로 서 있는 존재는 나와 내 스켈레톤뿐. 나머지는 죽지 못해 숨만 쉬고 있는 수준이었다.

완전히 무력화된 고블린 도시.

이제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벼를 수확하듯 무력화된 고블린들의 목을 자르는 것.

서걱!

고블린들의 목으로 스켈레톤 군단의 도끼가 떨어졌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

학살의 시작이었다.

나는 등 뒤로 소리 차단 마법을 걸고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어딘지 알아볼 필요는 없다. 마나의 파장이 길을 가르쳐 주고 있으니까.

명색이 마왕인데 마나 파장 정도를 못 읽겠나. 진유리처럼 명확한 ‘선’을 보는 것은 힘들어도 단순히 읽는 것쯤은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향하는 곳은 여기 이 마나의 파장이 이끄는 곳이다.

유독 불쾌하고 음습한 마나. 그 마나의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타천사, 녀석이 있다.

내성 안을 지나, 가장 깊숙한 방 앞에 섰다.

코끝을 찌르는 아릿한 혈향.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이 피 냄새, 인간의 것이었다.

곧바로 문을 연다. 짙은 혈향이 훅 들어오더니, 시야 저편에 보이는 광경.

마치 붉은 운무처럼 낀 피의 흔적 사이로 보이는 인간의 시체들과.

왕좌에 앉은 타천사.

“인간이여. 어서. 오라. 나는. 이곳의 왕.”

타천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진짜 왕이라도 된 양 오만하게.

“인간이여. 짐이 너와. 대화하고 싶다.”

난 별다른 대꾸 없이 한쪽 벽에 진유리를 눕혀 놓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콰직!!

도약했다.

갖가지 방해 마법을 한달음에 뚫고, 타천사의 코앞에 도착.

마귀를 휘두른다.

“소용없느리라.”

까아앙-!

타천사의 하얀 실드와 마귀가 접촉하며 불꽃을 튕긴다.

그런데 뭐? 소용없다고?

“뭐. 뭣?!”

쇠를 긁는 소리와 함께 절단되는 실드.

반쯤 잘려 나가자, 타천사가 급한지 부리나케 몸을 뺐다.

우습다.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음에도 이토록 가볍게 왕좌를 버린다고?

빈 왕좌에 앉아, 타천사를 내려다본다.

“인마, 왕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왕의 위엄은 권위에서 나오며.

왕의 오만은 실력에서 나온다.

왕은 그 자체로 상징이니.

“보여 줄게.”

진짜 왕이 어떤 건지.

세계가 어둠에 물들며 문이 닫히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공포의 시간이 시작됐다.

*   *   *

‘거짓말했어.’

로자리아는 좀 전에 진유리의 고유 마법을 보고선 확신이 들었다.

고유 마법과 알파 기어가 다르단 것을.

“……Liar!!”

사기꾼 자식!

으득으득, 로자리아가 손톱을 깨물었다.

사기를 쳐?! 내가 준 빅터 설계도로 알파 기어도 만들면서!

엄밀히 말하면 고유 마법을 알파 기어로 오해한 것은 로자리아였고, 먼저 빅터 설계도로 장난질을 한 것도 로자리아 본인이다.

그러나 로자리아가 이런 생각을 할 줄 알았다면 헨리에게 ‘사회성이 결여된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평을 받았겠나.

이미 로자리아의 머릿속에 저런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박기혁은 하늘도 울고 갈 사기꾼이고, 그 사기꾼은 자기가 준 빅터 설계도로 알파 기어를 만들었다.

분해! 짜증 나!!

“으으으으…….”

이만큼 로자리아의 머리에는 온통 고유 마법뿐이다.

진유리의 손에 발현된 폭풍우. 온갖 마나를 다 집어삼킨 하나의 ‘자연재해’.

그래, 완벽한 ‘자연재해’였다.

마법의 극의라 불리는 ‘자연’의 영역이란 말이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오해하는 부분.

마법이 자연의 상위 개념이라고 알고 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사막에서도 물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저기 남극의 빙판 위에서도 불 마법으로 불을 피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는 틀렸다.

마법은 자연을 절대 따라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법은 자연을 본떠서 만든 개념이니까.

박기혁식 표현으로는 ‘세계가 허락한 힘’. 여기서 허락된 힘이란 딱 자연까지인 거다.

잊을 만하면 어마어마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히는 ‘허리케인’이나, 매년 연례행사처럼 일어나는 지진처럼 자연재해를 못 막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법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결국 ‘자연’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진유리가 그 영역에 도달할 수 있지?’

사실 이게 로자리아가 가장 흥분한 부분이었다.

정확히는 어떻게 진유리가 자신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도달했냐는 것이다.

박기혁이면 모른다. 분명히 그는 강하고 지혜롭다. 자신보다 위가 확실하다. 한데 진유리는 아니잖아. 진유리는 자신보다 아래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아래!

‘내가 못 하는 건 걔도 못 해야 한다.’

로자리아는 이래야 말이 된다고 믿었다.

동시에.

‘걔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맞다. 생각할수록 이게 맞다.

“안 되겠어. 고유 마법. 가져야겠어.”

저 고유 마법이란 거 너무 탐난다. 몹시 탐이 나 미칠 것만 같았다. 세계의 마법 발전을 위해서라도 응당 고유 마법은 자신이 배워야 했다.

자신 같은 인재가 저런 선진 마법을 모른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초국가적 손실이다.

“히…….”

상상만으로도 좋다.

마도 공학과 ‘고유 마법’의 결합을 상상하며 웃던 로자리아가 표정을 고쳤다.

본격적인 플랜을 세운다. 저 고유 마법을 배울 플랜.

다행히 이제껏 로자리아는 그의 주위를 기웃거리며 많은 것을 보았다.

대표적으로.

‘박기혁은 여자에게 약하다.’

진유리, 메르헴, 김하니, 박봄. 하다못해 동물인 버찌까지도.

생각해 보면 박기혁 주위에는 여자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박기혁에게 도움을 받았다. 메르헴은 주술을, 진유리는 마법을, 박봄이나 버찌는 말할 것도 없고, 김하니조차도 맹훈련 중이었다.

이 정도면 박기혁이 자신만의 ‘하렘’을 꿈꾸는 게 아닌가 합리적 의심이 들었지만, 또 그건 아니었다.

‘의외로 관계는 클린해.’

로자리아가 수집한 소문으로는 이건 클린하다 못해, 철벽이란다. 특히 박봄이란 아이가 생긴 이후로는 더욱더.

어쨌든 박기혁이 이성에게 약하다는 것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주장.

“좋아, 이쪽으로 가자.”

로자리아가 벌떡 일어나 숲으로 뛰었다. 눈을 붙이고 있던 윌리엄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잠시 부스럭, 부스럭 숲이 흔들리더니.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풀 메이크업이 된 로자리아가 서 있었다.

“So good. Perfect야.”

준비 끝.

이제 내면을 다진다.

“절대 물러서지 말 것.”

진유리처럼.

“뭐라 해도 무시하고 들러붙을 것.”

이것도 진유리처럼.

“안 되겠으면 와락 안을 것.”

물론 이 또한 진유리처럼.

그렇다.

로자리아는 진유리의 ‘행동’이 박기혁에게 먹힌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래, 이건 착각이었다. 대단히 큰 착각.

로자리아가 본래의 계획대로 사냥을 끝내고 온 박기혁을 향해 매달리는데.

“나도 가르쳐 줘. 고유 마법. 가르쳐 줘!!”

“뭐래는 거야.”

“나도!! 내게도!!”

“아, 비켜!”

진심으로 짜증 낸다. 잘못하면 한 대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안 돼. 말은 이래도 여자에 약하다고.

로자리아는 박기혁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진유리를 보며 이를 꽉 깨물고는 다시 들러붙는다.

“Pleaseeee!! 꼭 배우고 싶어!!”

“이게 돌았나. 좋은 말할 때 놔라.”

“못 놔. 안 놔. 너 알파 기어도 뺏어 갔잖아. Me에게 고유 마법 가르쳐 줘!”

“허, 우, 이걸 그냥…… 하.

주저하는 박기혁.

효과가 있다! 로자리아가 한층 더 몸을 밀착하는데.

사실은 아니었다. 주저했던 게 아니라, 인내심이 바닥난 것이고.

“후, 적당히 해라. 진짜 맞는다.”

“때려. 때려 봐!”

로자리아가 ‘설마 때리겠어.’라며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이미 박기혁의 주먹은 날아가고 있던 상태였다.

쿵-!

바닥에 꼬꾸라지는 로자리아.

아까 착각이라 했잖나.

로자리아는 진유리의 ‘행동’이 박기혁에게 먹힌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아니다. 진유리의 행동이 아니라 ‘진유리’란 인간이 먹혔을 뿐이다.

“까불고 있어…… 후, 야! 거기.”

“…….”

“죽은 거 아니니까 빨리 와.”

“…….”

“후…… 셋 셀 동안 안 오면 너도.”

“와, 왔다.”

“뭘 보고 있어, 꾸물대지 말고 빨리 얘 업어. 시간 없으니까.”

그렇게 두 남자가 나란히 여자를 둘러메고는 게이트를 나서고 있었다.

*   *   *

한편 박기혁이 일행을 데리고 게이트를 나오는 그 시간, 박민지도 타천사와 마주하고 있었다.

“……보스 역할을 하고 있네?”

게이트를 ‘클리어’해 강제로 모든 생명체를 이탈시키고 있었는데, 네임드 켄타우르스 ‘보바’가 있어야 할 보스 방에 왜 이놈들이 있을까?

“구원이시여! 저 간악한 자들을 벌하소서!”

“어서! 공격하십시오! 저년을 먹으면 한층 더 강해지실 수 있습니다. 어서!”

사제복을 입은 두 놈이 타천사를 부추기자 타천사도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는다.

기괴하다.

피와 살점을 덕지덕지 묻힌 채로 웃는데, 또 그 웃음이 굉장히 선해 보였다.

이상할 정도로 매력적이며, 무언가 도와주고프면서도, 신성한 무언가를 보는 것 같은 기분ㅇ…….

스윽-!

섬광이 그어졌다.

박민지의 검, 백로가 만들어 낸 섬광으로, 그녀를 둘러싼 ‘매혹’이 일거에 ‘절단’됐다.

“……매혹을 쓰는 거보니까 진짜 ‘보바’를 먹었어.”

네임드 켄타우르스 ‘보바’. 이 게이트의 보스로 하프를 이용한 정신 공격이 특기인 놈이다.

다시 말해, 매혹 주문을 쓰는 저놈은 ‘보바’를 삼킨 것.

인간도 먹고, 몬스터도 먹고, 보스까지 먹어.

살아 있는 게 죄악인 놈들.

“치워야겠네.”

순간.

박민지의 눈동자가 짐승처럼 날카로워지며, 긴 흑발이 끝부터 하얗게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 설마!”

“배, 백……!”

광신도의 입에서 ‘백호’라는 단어가 완성되려는 순간.

푸쉭-!

이미 두 사람의 양팔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광신도는 신을 찾고, 동료를 찾다, 이제는 그 비루한 목숨을 구걸한다.

저항조차 불가능한 신속.

이것이 그녀다.

신속의 검사, 백호 박민지다.

“빨리 끝내자.”

백로가 잘게 떨더니.

검호류 신속

북두칠성(北斗七星)

일곱 개의 별이 이 공간에 강림한다.

압도적인 속도 앞에서 모든 공격은 무의미하다.

박민지의 검은 이 말을 증명하듯 빛을 뿌려 댔다.

찬란한 별빛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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