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87화>
며칠 전 챈들러 머레이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사고 치면 한동안 사라지고, 잊을 만하면 슬쩍 기어 들어온다.
이런 패턴의 연속이니 윌리엄도, 미국 교류단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거다.
이게 끝이다.
너무도 허무한 이유였으며,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하찮은 사정이었다.
그래서 윌리엄의 기억 저편, 저기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처박고서 들춰내지 않았는데.
“덩어리 어디 있냐?”
이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괴물을 깨울 줄은.
윌리엄은 몰랐다.
* * *
“덩어리가 사라졌다…… 그런데 너희들은 모른다는 말이지.”
톡톡,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친다.
툭툭, 이걸 어쩔까 생각하며.
툭툭,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
“갑자기 깨우…….”
“쉿.”
로자리아가 뭐라 말하려는 걸 윌리엄이 재빨리 막는다.
그래도 눈치는 있다. 하긴, 매일 처맞았는데 이 정도 눈치도 없으면 그게 인간인가. 개복치지.
시계를 본다.
어느덧 새벽이 가까워 왔다.
봄이는 한창 꿈나라에 있을 시간이다. 생각해 보니 오늘 봄이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짜증이 확 났다.
인상을 찡그리자, 윌리엄이 움찔댔다.
“빨리 끝내자.”
폰을 꺼내며 말했다.
“우리 형이 습격당했다.”
“너희 형이라면, 박수혁.”
“산군이 다쳤어. 신기해…….”
“그런데 말이야.”
보여 줬다. 아까 어머니가 들고 있던 얼음 조각의 사진이었다.
“이게 우리 형 배에 꽂혀 있었거든. 어떻게 생각해?”
둘이 폰에 찍힌 얼음 조각을 본다. ‘뭔데 그래?’라며 짜증을 내는 로자리아와는 반대로 윌리엄은 진지하게 바라보더니.
“……!!”
흠칫, 몸이 경직됐다. 역시나, 장착된 눈치가 제 기능을 하나보다.
“서, 설마…….”
아니지? 아니라고 해 줘, 라는 표정이지만.
안타깝게도 맞다.
“그거, 덩어리 얼음이다.”
“……!!”
“……!!”
아이스 쉬프트. 챈들러 가문의 혈족.
이 얼음은 챈들러 외에는 만들 수 없다.
고로 챈들러 머레이가 우리 형의 습격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돼 있다는 증거다.
“아, 아이스 쉬프트라는 증거는…….”
“내가 봤다.”
“……네가 잘못 봤을 가능성은 없어?”
“응, 없어.”
질문은 여기까지.
애초에 이 자리는 내가 입증하려고 가진 자리가 아니다. 너희들이 해명해야 될 자리지.
둘이 무언의 눈빛을 교차한다.
넌 알아? 난 몰라. 무슨 일이야. 머레이는 어디 있어? 저게 왜 박수혁의 상처에 있었냐고. 모른다니까!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있겠어?!
혼란스러운 두 사람.
뾰족한 수가 안 보인다. 설명이 필요하지만 정작 설명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둘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큰 거 한 방이 남았으니까.
“추가해서, 우리 형을 습격한 세력은 셀루티스로 밝혀졌다.”
“……!!”
“……!!”
오늘 참 많이 말문이 막힌다.
셀루티스? 우리가 아는 셀루티스? 빌런 집단 셀루티스?
둘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이제 둘은 서로를 힐난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서로를 욕하고 힐난하기에는 위기의 정도가 터무니없이 크고 강력하다. 잘못해서 휘말리면 자신들의 커리어가 송두리째 갈려 나갈 정도로 말이다.
“Fuck…….”
“…….”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윌리엄이 욕을 토해 냈다. 로자리아도 욕을 안 했을 뿐이지, 인상은 구겨진 지 오래다.
“기회를 줄게. 1분, 1분 안에 어떻게든 날 납득시켜 봐.”
“…….”
톡톡- 톡톡- 톡톡-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치는 소리와.
째깍- 째깍- 째깍-
시계 바늘이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결국 60초가 지나갈 동안 둘은 입을 열지 못했다. 끝내 둘은 날 실망시킨 거다.
느릿하게 커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교류단이 오기 전에, 위그드라실한테 의뢰받은 게 있다. 교류단을 관리해 달라고 하더라. 특히.”
둘을 바라본다.
“너희 둘,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특히나 조심하라고 했지.”
하지만.
“기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꼬맹이들인 너희들이 사고를 쳐 봤자 얼마나 치겠냐, 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클럽 폭행 사건?
밖에서는 큰일이라 떠들지만 내 입장에서는 귀여운 수준이다.
윌리엄과의 대련?
대련이야 매일 하는 건데 무슨 특별한 감정이 있겠나. 로자리아의 빅터 사건도 마찬가지다. 앙큼한 장난 정도.
한데, 이젠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고가 났네? 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랑 상관없는 일다.”
“연좌제는 합리적이지 못해. 난 챈들러 머레이랑 말도 안 하던 사이야.”
“이건 처음부터 잘못됐다. 아이스 쉬프트가 나왔다고 머레이가 범인이란 법은 없다.”
“혹시 몰라, 챈들러 머레이가 납치당했을 수도.”
“그, 그렇군! 돼지 새…… 아니, 머레이가 함정에 빠진 거다. 생각해 봐라. 머레이가 박수혁과 싸운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된다.”
“이게 합리적이야.”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어디 한번 보자고.”
난 이 말만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놀아 주는 건 끝이란 거다.
* * *
며칠 뒤.
약속 시간이 다 돼 가자, 나도 슬슬 몸을 일으켰다.
준비한 배낭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전투복을 입는…….
“아차.”
중요한 걸 깜빡할 뻔했잖아.
책상에 놓여 있던 펜던트를 목에 건다.
봄이와 버찌의 사진이 든 펜던트.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두 딸내미를 보며 한껏 웃음을 지었다.
버찌를 안아 들었다.
“봄이를 부탁해.”
냐아아앙-(믿어.)
“오냐, 믿을게. 이건 계약금.”
방에 있는 냉장고에서 고양이 참치 하나를 까 주고는, 다시 전투복을 입었다.
“음.”
뭔가…….
거울 속 날 보고는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돌아봤다.
처음으로 입은 전투복 덕분일까…… 어색하다. 연신 두리번거렸다.
이게 엄청 유명하다고 하던데, 브랜드 이름이 캐탤이라고 전투복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린다더라.
사실 잘 모른다. 이것도 땡무위키에서 검색하고 알아낸 정보다.
안 그래도 이 옷 때문에 한바탕 시끄러웠다.
나는 전투복이란 그냥 편하면 된다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래서 트레이닝복을 많이 입었다. 그래서 맞춤 전투복이란 말이 나왔을 때 괜찮다며 사양했건만.
우리 김연희 여사님, 극대노하셔서.
“뭐? 트레이닝복? 아들, 대체 무슨 생각이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물건마다 용도가 괜히 있는 줄 알아? 트레이닝복은 훈련용이야. 전투할 때는 전투복을 입어야지!”
“천 쪼가리? 야, 박기혁. 네가 무시하는 이 천 쪼가리 하나로 죽을 게 살고, 중상이 경상으로 바뀌어. 엄마가 그런 경우를 한두 번 보는 것 같아?”
“네 몸이 혼자 몸이야? 엄마도 있고, 아빠도, 형도, 누나도, 봄이도 있어. 엄마 말 듣고 입으라면 입어. 쓰읍! 토 달지마.”
안전 불감증이라며 폭풍 잔소리를 듣고서 결국 맞추게 된 전투복.
그래서 내 소감은.
“제법 괜찮네.”
그때, 옷을 맞출 때 직원이 몬스터 근육으로 이뤄진 섬유가 몸의 감각을 끌어올려 근육의 자극점을 잡아 준다는 둥, 근육의 움직임을 더 생생하게 느껴 탄력 있게 보조해 준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
확실히 그러하다.
걸음마다 발바닥부터 종아리, 대퇴 사두, 대퇴 이두를 지나 엉덩이까지, 아주 섬세하게 느껴졌다.
세삼 깨닫는다니까.
“확실히 이쪽 세계가 물건은 잘 만들어.”
탈탈 어깨를 털며, 방을 나왔다.
그리고 나를 마주한 어머니는.
“우와, 아들 멋져.”
매우 만족하신 듯 환하게 웃으셨다.
“우리 아들 옷걸이가 좋아서 뭘 입어도 태가 나. 비율은 날 닮았다니까.”
‘잘 만들어 놨어.’ 어머니가 만족스럽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즉에 입을 걸 그랬네요.”
“제발, 내 말이 그 말이야. 엄마가 너 트레이닝복 입는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가 찼게?”
“잘못했습니다.”
“아셨으면 고치세요.”
사담이 오간다. 수업 빼먹어도 되냐, 밥 많이 먹어라 등등.
어머니는 항상 전투에 나갈 때면 이랬다. 지극히 평소처럼, 내게 편안함을 주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럴 때면 난 언제나처럼 꽉, 어머니를 안아 줬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와.”
문이 열고 나서자, 내 눈빛이 변한다.
활짝 짓던 미소는 지워지고, 온순했던 분위기는 사라진다.
그렇게 마음가짐을 다잡으며 문을 열고 나가는데.
“기혁아! 여기! 여기야!!”
“풋!”
한 발짝 때자마자 빵 터졌다.
커다란 SUV의 운전석에서 손을 방방 흔드는 진유리.
쪼그만 게 무슨 자신감으로 저렇게 큰 차를 타고 왔어. 그나저나 엑셀은 밟히는 거야?
풋, 웃음이 나왔다.
“내가 너 때문에 웃는다. 진짜.”
우리는 차를 타고 목적지로 출발했다.
* * *
윌리엄은 스스로가 오만하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행동이 다르며, 항상 품위 있는 신사인 척 행동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질투가 많은 소인배란 것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이딴 것은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만하면 어때, 위선적이면 어때.
실력이 있잖아.
윌리엄은 오만한 행동을 인정받기 위해 매일 밤을 지새웠다. 위선적인 성격쯤은 사소한 단점이 될 만큼 노력하고,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양분 삼아 또 노력했다.
가끔은 이런 자신이 백조 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물 위에서는 우아한 척하지만 물 밑에서는 허겁지겁 발길질하는 백조 말이다.
그럼에도 본인이 최고이고, 장차 최고가 될 것이란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래, 며칠 전까지.
그러니까 교류단으로 한국에 오기 전, 더 정확히는 지금 눈앞에 있는 박기혁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펼치면.”
“내가 찾을게.”
박기혁의 머리 위로 마법진이 떠오른다.
구름 위에 각인처럼 새겨지는 육망성.
그래, 저 육망성. 명칭은 아포칼립스.
윌리엄은 저 정체불명의 마법 앞에 수없이 무너졌다. 그가 자랑하던 정령 부대는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패퇴했다.
처음 두 판은…… 그래, 방심했다고 치자. 다음 세 판은 익숙하지 않았다고 치고, 다음 세 판은 적응하는 기간이라 치자.
이렇게 변명에 변명을 늘어놓다, 나중에는 쓸 변명이 부족할 만큼 매일 같이 졌다.
자존심이 무너졌다.
그가 믿었던 실력이 무너진 순간, 그의 오만함은 무엇으로도 인정될 수 없었다.
그래도 윌리엄은 좌절할지언정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면 끝이다.
이 인기, 이 명성, 자신이 이룩했던 것들이 모두 끝이기에 이를 악물고 도전했다.
그런데, 이런 윌리엄의 마음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흔들렸던 것은 불과 며칠 전. 챈들러 머레이의 문제로 호텔로 쳐들어온 박기혁을 봤을 때였다.
사실 그날, 윌리엄은 한창 정령을 소환해 감응 훈련 중이었고, 박기혁이 호텔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의 존재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경호 인력을 무력화시키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이제껏 자신과 붙었을 때는 놀아 준 거였구나. 진짜는 보여 주지도 않았구나.
얌전히 잡힌 이유도 이 때문이다.
흥분한 박기혁에게 반항하다간 이번에는 전처럼 ‘치킨’이 아니라 햄버거 패티가 될 것 같았다. 믹서기로 곱게 갈린 햄버거용 고기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음이 흔들린 건 바로 오늘, 저거였다.
하늘을 채운 육망성이 확장하더니 정말 필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4레벨 게이트를 뒤덮는 아포칼립스.
저것의 목표는 하나다. 이 필드에 ‘목표물’이 있는지 없는지 탐지하는 것.
“…….”
꿀꺽.
이 짓을 오늘만 세 번째다.
처음 간 게이트는 꽝, 두 번째도 꽝.
이번이 세 번째.
처음 봤을 때는 사람 불러놓고 뭐 하는 짓인가 했다.
뭐? 게이트 전역에 마나장을 펼쳐 거기서 특정 존재를 감지한다고? Are you kidding me?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게이트를 뒤덮을 만큼의 ‘제어력’을 가진 인간이 있을 수 없고, 설령 이렇게 마나를 펼쳐 놓더라도 그 사이에서 특정 존재의 마나 신호를 캐치해 낼 ‘장악력’을 가진 인간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믿은 윌리엄인데.
“……기혁아, 있어! 찾았어!”
꿀꺽.
방금 침 넘기는 소리는 윌리엄이 한 게 아니다. 옆에 있는 로자리아가 한 거다.
눈빛이 교차한다.
이게 되네?
솔직히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가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진유리가 붉은 워 아머를 장착하며 하늘로 날아가고, 박기혁이 육망성을 등 뒤로 펼치며 역시 하늘로 날아갔다.
멍청하게 뒤에 있는 윌리엄과 로자리아.
“갈…… 거지?”
“……봐야겠어.”
로자리아의 등 뒤 허공에 부품들이 조합되며 기계 날개가 생성된다. 불꽃을 내뿜으며 두 사람이 사라진 곳으로 날아가는 로자리아.
윌리엄도 바람의 정령을 타고 그들을 뒤따랐다.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이 멈춰 선 곳은 야트막한 동산 위.
필드 특성상 동산이 많은 곳이라 옆에도, 그 옆에도, 시야 내에 비슷한 동산만 한가득한데, 진유리는 콕 저 동산을 찍었고.
“기혁아, 저기.”
그 순간, 박기혁의 대검, 마귀가 뽑혔다.
검호류 강검술
산사태
울컥, 울컥. 대지가 호흡하더니.
콰아아아앙-!
터져 버렸다.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동산.
그리고 마침내 밑동까지 사라졌을 때.
흙더미 속에서 펄럭, 순백의 날개가 펼쳐졌다.
“……Angel?”
천사였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날개를 펼치는 모습이 일견 성스럽기까지 한 천사.
설마, 박기혁의 목표물이 저 천사였던가.
윌리엄과 로자리아의 시선이 동시에 박기혁을 향해 돌아가는데.
있어야 할 박기혁은 없었다.
“잡았다!”
콰득!!
그는 이미 천사의 날개를 뜯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