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86화>
셀루티스.
구원이란 미명 아래 ‘초인’을 말살을 부르짖는 세계 3대 빌런 집단.
이들이 악명 높은 이유는 그 접근 방식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안식과 평온을 기원하는 여타의 다른 종교 뒤에 숨어, 악의를 전파하고 분란을 조장한다. 또한 교리를 들먹이며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초인은 물론이고 민간인까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세뇌한다.
셀루티스의 세력이 모든 빌런 집단을 통틀어 최고인 이유가 이거다.
동시에 무서운 이유도 이거다.
저기 길을 가는 사람이 셀루티스 교인일 수도 있다. 방금 내게 인사를 건넨 사람이 셀루티스일 수도, 오늘 내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 이웃이 셀루티스의 탈을 쓸 수도 있다.
셀루티스는 언제 어느 곳에나 있다.
박수혁은 이 점을 간과했다.
* * *
챙!!
박수혁의 검날이 쏟아지는 화살을 걷어 냈다.
“황당하네.”
달동네, 무거운 리어카를 끄는 노부부. 그 노부부를 도와주기 위해 리어카를 밀어 줬을 뿐인데.
이렇게 됐다.
마나 폭탄이 터지고, 마법이 날아들고,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진짜 민간인까지 이용하잖아.”
알고는 있었지만 치가 떨린다.
초인의 일은 초인끼리 정리한다. 이것이 이 세계의 불문율이건만…….
“없애야겠구나.”
박수혁의 눈이 사납게 변한다.
둥글둥글한 눈에서, 맹수의 눈으로.
검은 머리칼이 황금으로 물드는 순간.
촤륵-!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전부 두 동강 난다.
허공 한가운데서 두두두 떨어지는 화살의 잔해들. 마법도 마찬가지다.
파이어볼에서부터 플레임 버스터까지.
워터 애로우부터 아이스 체인까지.
등급 불문, 종류 불문, 모든 마법들이 절반으로 잘려 정지된 채 흩어져 간다.
당연히 이를 본 복면인들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소리쳐 보지만.
“모두 피해!!”
늦었다.
이미 맹수는 깨어났다.
금빛 광채가 번쩍이더니, 선두에 선 복면인의 목이 갈라졌다. 다시 금빛 광채가 일렁이더니, 후방에 있던 복면인의 허리가 잘려 나갔다.
최전방에서부터 후방으로.
눈 깜짝할 새 이뤄진 공세.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도망칠 생각 마라.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겠다는 박수혁의 의지였고.
검은 주인의 의지를 충실히 실행했다.
내려치고.
“내 팔, 팔이! 끄아아악!!”
또 내려치고.
“커헉!!”
자비 없이.
“아, 안 돼.”
베어 냈다.
“도, 도망쳐!!”
백해무익(百害無益).
세상에 하등 필요 없는 암 덩어리들.
박수혁의 검이 이 암 덩어리들을 착실히 도려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불현듯 스쳐 가는 위화감.
박수혁이 본능적으로 베는데.
깡-!!
검에 잘린 것은, 화살.
순백의 빛을 내뿜는 마법 화살이었다.
“……?!”
눈앞에서 흩어지는 마나 덩어리.
하얀 마나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지고, 사라지는 아지랑이들 사이로 보이는 존재들.
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이 땅에 강림하는 천사들.
아니, 천사의 탈을 쓴 몬스터 떼였다.
“많이도 모였구나, ‘비둘기’들아.”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는 돌연변이 몬스터.
‘식인’을 통해 대상의 능력 일부를 흡수하는 변이 개체.
생태계 붕괴 현상의 불순물.
박수혁이 알아낸 저들의 정체였다.
그리고 셀루티스는 모종의 방법을 통해 저들의 출현을 예지해 냈고, 이들을 ‘회수’해 일을 꾸미고 있다.
이 가설이 오늘의 습격을 통해, 저들의 등장을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박수혁이 검을 든 어깨를 풀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그를 향해 선두에 선 천사가 다가오는데.
“우리. 대화. 하고. 싶다.”
“대화 좋지. 대화. 그런데, 대화는…….”
서걱!
비스듬히 미끄러지는 천사의 목.
“……지성체끼리 하는 거란다, 비둘기들아.”
키요오오오오오!!
천사들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며 박수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박수혁도 마주 달려갔다.
비처럼 내려치는 빛의 화살들.
박수혁의 신영이 금빛 잔상을 남기며 빛의 화살들을 스쳐 갔다.
깡!
박수혁의 검을 막는 천사의 창.
짧은 단창 두 자루가 교차돼 있다. 숙련된 단창술.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박수혁의 눈은 사나워지는데.
“너, 뭐 먹었냐.”
이 비둘기 새끼는 이 정도의 단창술을 펼치기 위해 누구를 먹었을까.
아찔한 열기를 발산하는 파이어 레인도, 자신을 발을 붙잡고 있는 식물의 줄기나, 날아드는 정체 모를 벌레들.
이 힘의 뒤에는 어떤 인간들이 존재했던 것일까.
박수혁이 착잡한 눈으로 가로막던 창을 베어 낸다.
“인간을 먹는 몬스터나…….”
떨어지는 창날을 잡아채 던진다.
커억!
숨어 있던 셀루티스 교인이 쓰러진다.
“그런 몬스터에게 인간을 주는 네놈들이나.”
모두 똑같다. 모두 공범이다.
그러니.
오늘 너희는 죽는다. 내 손에.
모두 공평하게.
하늘을 뚫고 황금의 검이 내려온다.
그 검은 컸다. 그 검은 길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찬란한 군왕의 기상을 닮은 검.
그래서 그 이름, 군왕의 검이리라.
검호류 군왕
공평무사(公平無私)
군왕의 판결은 한 점 의혹도 없어야 되는 법.
“모두 공평하게 죽여 주마.”
* * *
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술실로 달려갔다.
“고맙다, 유리야. 봄이 잘 부탁해. 아직 몰라. 얼마나 다쳤는지. 금방 갈게. 아, 봄이한테는 말하지 마라. 응, 고마워.”
폰을 끄며 모퉁이를 지나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누나, 그리고 은빛나와 몇 번 얼굴만 본 형의 팀원들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좋지 않다. 은빛나와 형의 팀원들 간의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하? 하아? 단독 행동? 대장을 적진에 쑤셔 넣고선 단독 행도오옹? 세상에나 마상에나.”
“비꼬지 마십시오. 저희도 저희 잘못은 압니다.”
“알아야죠. 대장이 수술실에 처박혔는데 당연히 알아야죠. 모르면 그게 인간인가요.”
“이보세요, 은빛나 씨!”
슬쩍 돌아가 누나에게 다가갔다.
“왔어?”
“어떻게 된 거야.”
“당했어. 멍청하게.”
예전에 포항에서의 ‘천사’. 당시 진유리와 함께 세계에 접촉해서 엿봤던 그 ‘천사’를 추적하고 있었단다.
여기까지는 나도 아는 정보.
“근데, 천사가 셀루티스랑 연관됐을 가능성이 높았어.”
“……광신도들이 여기서 왜 나와?”
“그렇게 됐어.”
셀루티스.
전에 내가 부숴 놨던 진화단과 더불어, 세계 3대 빌런 집단이다. 그리고 현재 아버지가 쫓고 있는 게 이 셀루티스로 알고 있다.
“아빠가 이런 걸 보냈어.”
폰에 보이는 건, 깃털. 하얀 깃털이었다.
천사와 하얀 깃털. 정말 지랄 맞네.
어쩐지…… 어줍잖은 빌런들을 상대하는 줄로만 알았던 난, 수혁 형이 당했다는 소리에 걱정보다는 의문부터 들었다.
형의 진짜 실력을 아는 나로서는, 형이 동네 빌런 따위에게 진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한데 셀루티스의 광신도들이라면…… 아무리 형이라도 혼자는 무리다.
아니, 잠깐. 생각해 보니 웃기네.
“……그런데 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 다닌 거야?”
“뭐긴, 그놈의 완벽주의지.”
“확실하지 않아서 혼자 다닌 거야? 하…… 형답다, 진짜.”
“내 말이.”
빌런은 맞지만 셀루티스일 거란 확신이 없었단다. 가능성이 높긴 한데 100퍼센트가 아니었다나.
누나 말대로 그놈의 완벽주의다.
그제야 은빛나가 왜 저렇게 화내는지를 알았다.
그녀는 지금 누나를 대신에 형의 팀원들을 나무라는 것이다. 대장이 혼자 행동하는데, 대체 팀원이란 놈들이 뭐 하고 있었느냐고 말이다.
저쪽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당사자가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는가. 우리도 몰랐다며.
하지만 어쩌겠나, 결과가 이렇게 나왔는걸.
시간이 간다.
이제는 싸움도 한풀 꺾여 침묵밖에 남지 않았다. 고용한 복도에 째깍, 째깍 누군가의 시계 소리만이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2시간이 넘어간다.
이쯤 되자 나도 불안하다.
“괜찮다더니.”
분명히 어머니가 말하기로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는데…….
좀 보고 싶다. 어떤 상황인지 봐야지 안심이 될 것 같다.
그렇게 몸을 일으키는데.
“누나, 저기 들어가려면…….”
그 순간.
끼익,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나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몇 번 본 치유계 각성자. 그리고, 어머니도 함께였다.
“감사합니다, 채 선생님. 매번 이렇게 도움받고.”
“허허, 별말씀을. 의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아니에요. 다음에 식사해요. 연두 씨도 고마워요. 갑자기 불러냈는데, 이렇게 협조해 줘서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표님 부탁인데요.”
“그런데 두 분에게 다시 한번만 물어볼게요. 상처 부위에 박혀 있던 얼음은 마법이 아니란 거죠?”
“네, 조직 검사 결과 확실히 마법은 아닙니다.”
“리커버리에 반응 없는 거 보셨죠? 마법이라면 절대 불가능해요.”
“후우…….”
그렇게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시더니, 자리가 정리되고 나를 따로 불렀다.
“기혁아, 이거 뭔지 알겠어?”
“……?!”
시험관 안에 밀봉돼 있는 것은 얼음.
얼음 조각이었다.
그리고 난, 홀린 듯 달려갔다.
“기혁아! 기혁아! 어디 가!”
난 저 얼음을 안다.
* * *
삼한 호텔.
한국 최고의 재벌로 불리는 삼한 그룹이 운영하는 호텔.
그 명성답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호텔이고, 국빈들이 찾을 때면 어김없이 묵는 곳이었다.
자연히 국빈으로 취급되는 ‘미국 교류단’도 이곳에 체크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삼한 호텔이 오늘따라 시끄럽다.
“저기, 이러시…… 아악!”
많이 시끄럽다.
콰아앙!!
심하게 시끄럽다.
“한 번만 말한다. 비켜라.”
“안 됩니다.”
“안 돼? 그럼.”
쿵쿵, 파지직, 콰아앙-!
벽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벽의 잔해 속에서 박기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남자의 머리를 쥐고선.
“그러게 비키라 했잖아. 한 번만 말한다 했지?”
손에 들린 남자를 던졌다. 벽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지는 남자.
남자는 이 층을 지키던 미국 교류단의 경호원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뭐ㅇ…… Holy shit…….”
벽이 부서지는 소리에 복도로 나오는 미국 교류단.
이 상황에 할 말을 잃는다.
벽은 부서져 있고, 어제까지 인사를 나누던 경호원은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 경호원들이 안 오는 것을 보니 다른 경호원들도 저 꼴인 것 같다.
“……어, 어떻게.”
“Oh god…….”
미국에서도 거르고 걸러 선발된 나이트를 저렇게 걸레짝처럼 다룬다고?
나도 1:1은 힘든데? 쟤는 혼자서 다 쓰러트렸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근데 여기 호텔이잖아. 호텔에서 이래도 돼? 한국 치안 문제 있는 거 아냐?
몇 초도 안 되는 시간. 고개를 빼꼼 내민 애들의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하는 생각은 같았는데.
“경고하는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안 건들려고 했어!
저건 절대 건들면 안 되는 거다. 건들면 모두 X되는 거다.
모두가 눈빛을 교차하더니 슬그머니 문을 닫았다. 지극히 현명한 선택이었다.
지금 박기혁은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박기혁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보여 준 얼음.
그 얼음, 박기혁은 알고 있다.
마법도 아니고, 주술도 아닌, 굉장히 기묘한 형태의 얼음. 그 특이한 구조에 한 번을 봤음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빠른 속도로 걸어가니 마침내 제일 복도 끝, 제일 안쪽 방에서 아는 얼굴이 나왔다.
박기혁이 찾던 얼굴이었다.
“박기혀…… 크허헙!!”
순식간에 멱살을 잡힌 남자가 손을 탁탁 친다.
지금 박기혁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남자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윌리엄.
미국 교류단의 단장이었다.
“덩어리 어디 있냐?”
그렇다.
그 얼음의 정체는.
아이스 쉬프트(Ice shift).
챈들러 가문의 ‘혈족 계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