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85화>
아직 어둠이 어스름히 남아 있는 새벽녘.
김하니는 오전 수업을 듣기 위해 아카데미를 찾았다.
수업은 ‘치유계 필수 응급조치’.
기존의 치료 마법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부목을 댄다거나 상처를 꿰매는 응급조치를 가르치는 교양 과목이었다.
수업 앞에 ‘치유계’라고 떡하니 붙어 있는 터라, 사제나 백마법사처럼 치유 계열 초인밖에 듣지 않는 강의.
당연히 숫자도 적다. 치유계가 그만큼 귀하잖나.
여기에 수업은 전부 오전. 거의 첫 교시에 몰려 있어, 가뜩이나 적은 치유계 학생들 중 극소수만 듣는 강의였다.
소위 말하는 범생이들만 듣는 강의.
김하니는 이 범생이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범생이었다.
강의실로 들어오고, 김하니가 매일 앉던 자리로 찾아간다.
‘있다!’
C열 세 번째 자리.
교수님의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다행히 자리가 있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의자를 빼 앉는데.
“헬로우!”
짝!!
“악!”
등짝이, 등짝이 찢어진 것 같아!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범인은 마주리. 동기 중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다.
“놀랬잖아.”
“놀랬줴나~.”
“놀릴래.”
“놀릴뤠에~.”
“너어!”
“햐햫햐!”
또 하나. 마주리는 김하니의 베스트 프렌드임과 동시에, 부회장으로서 박기혁 팬클럽 ‘작은 거인’을 함께 이끄는 든든한 동료이기도 했다.
“기혁 님의 사진! 사진을 내놔라! 안 그러면 인질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잠깐만! 야! 손 치워! 그 노트북, 메르헴 선배한테 선물받은 거란 말이야!!”
“후욱후욱! 귀한 거군. 인질로서 가치가 더 높아졌어. 크킄크.”
“미친, 핥지 마!”
“인질을 무사히 돌려받고 싶으면 세 장부텃! 츄라이 츄라이!”
“……아, 진짜 또라이…….”
두 사람은 입학 첫날부터 친해지게 됐고, 박기혁이란 특이 취향에(본인들은 죽어도 아니라 하지만) 눈을 뜨며 서로 더 끈끈하게 지내고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 무슨 일 있어?”
“있지. 큰일이 있찌이.”
마주리가 눈알을 잔망스럽게 돌리더니 한쪽을 가리킨다.
“쟤, 휴학한대.”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고, 남자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진짜 휴학할 생각이야?”
“대체 왜? 다시 생각해 봐. 너 성적도 좋고 졸업 빨리하는 게 이득이라니까.”
“그러지 말구. 창현아아~ 우리랑 같이 졸업하자.”
남자의 이름은 서창현.
수려한 외모, 훌륭한 인품, 성적은 늘 최상.
입학부터 남다른 치유 능력으로 뭇 에이전트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던 2학년 최고의 엄친아였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성지 순례를 꼭 가고 싶었거든. 이때가 아니면 갈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서창현의 ‘성지 순례’ 발언에 아이들이 수긍해 간다.
다른 이가 성지 순례라고 하면 ‘취했냐?’ 반문하며 음주 측정부터 하겠지만, 신실하기로 유명한 서창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서창현은 신에 관해서 만큼은 타협하지 않기로 유명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모두에게 사랑받는 서창현임에도 이상하게 마주리는 그를 싫어했다.
“잘됐다. 근래에 들었던 소식 중 제일 기쁜 소식인 듯.”
“넌 성기사면서도 이상하게 창현이 싫어하더라. 보통 신을 믿는 초인들은 서로 잘 지내지 않아?”
“그렇긴 한데…… 아, 몰라. 이상하게 쟤는 찝찝해. 싫어.”
제일 친한 친구가 이러하니, 김하니와 서창현은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킹메이커 작전에 동행하면서 서로 인사하는 사이로 발전하긴 했지만…….
딱 그뿐이다.
그 이후에 서창현이 몇 번이고 같이 밥 한 끼 하자며 권했지만, 보다시피 마주리 선에서 커트당하며 그마저도 흐지부지됐다.
“야, 쟤 인사한다.”
저 멀리서 서창현이 손을 흔든다. 김하니도 손을 흔들며 어색하게 웃어 본다.
잠시 뒤, 문을 열고 사라지는 서창현.
닫히는 문틈으로 십자가 피어싱이 유독 눈에 띄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성지 순례를 떠난다던 서창현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서울 도심의 한 호텔이었다.
호텔 청소 직원으로 위장한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순간, 구두 뒷굽에 박힌 아티팩트를 발동.
안티 필드(Anit Field)
이제 CCTV를 비롯한 감지 기기는 무력화됐다.
쉽다. 너무 쉬워서 하품이 날 정도로 쉬운 임무다.
하지만 그분을 위한 일.
한 치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다.
서창현이 비장한 표정으로 카트를 밀었다.
스르륵, 굴러가는 카트. 걸음걸음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시금 되새겼다.
‘이름, 챈들러 머레이. 나이 21세. 챈들러가의 넷째. 항간에는 사생아란 소문이 있음.’
‘괴팍한 성격과 비호감적인 외관 탓에 모두에게 비난받음. 그간의 행적을 보면 비난받아 마땅한 열등 종자.’
‘신체적 재능, 마법적 재능, 정신적 재능, 모두 기준 미달. 그러나 딱 하나, 챈들러의 혈족 계승 ‘아이스 쉬프트’의 활용도만큼은 탁월. 챈들러 가문이 그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
총평은.
‘재활용 불가 폐기물.’
이런 폐기물을 ‘구원’의 제물로 바친다는 게 서창현은 개인적으로는 못마땅했지만.
어찌 ‘그분’의 뜻을 거스를까.
세상 만물을 사랑하는 ‘그분’답게 저 악취 나는 폐기물조차 사랑하시는 거겠지. 비록 이제껏 쓸모없는 폐기물이었지만 마지막은 ‘구원’의 제물이 되어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리라.
아, 자비로우셔라.
아, 은혜로우셔라.
당신의 종은 오늘도 탄복합니다.
카트가 멈추고, 서창현이 문 앞에 당도했다.
목표물이 있는 방.
똑똑, 노크를 한다. 곧이어 들려오는 욕설. F 워드나 S 워드, 저기 바다 건너의 욕설들이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아찔한 술 냄새와 함께 머레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뭐야?”
그 순간, 눈부신 광채가 주위를 뒤덮는다.
신성 주문
엑스터시(Ecstasy)
콰당탕!
챈들러 머레이가 허물어졌다.
술로 찌든 머리에 정신계 마법까지 투입되자, 허무할 정도로 쉽게 정신을 잃은 것.
서창현이 바닥에 퍼져 있는 살덩이를 본다.
흉측하다. 과연 폐기물답다고 해야 할까. 평소 얼마나 나태한 삶을 살았는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외관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이 폐기물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그분의 자비가 당신에게 닿기를.”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이렇게 챈들러 머레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오늘은 위그드라실을 보기로 한 날.
나는 일찌감치 ‘지혜의 숲’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기혁 군. 차는 뭘로 드릴까요?”
“아무거나.”
오늘 만남의 목적은 위그드라실의 의뢰 때문이다.
미국 교류단의 돌발 행동을 관리해 달라.
까놓고 말해, 분탕 종자들을 알아서 정리하란 뜻이었고, 진행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하러 온 것이다.
겸사겸사 따로 부탁할 것도 있고.
“어떻게 교류단을 다룰지 내심 궁금했는데, 윌리엄 군과 로자리아 양을 잡아 놓고 변수를 조정할 줄이야.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야.”
아무리 위그드라실의 의뢰라고 해도 꼬맹이들을 일일이 감시할 수는 없잖아. 나도 체면이 있는데 모양 빠지게 그 짓은 못한다.
“그나마 놀아 줄 만한 애들이 그 둘뿐이라서 그래.”
“다르게 보면 두 사람은 쓸 만하단 말이네요?”
“응, 꽤.”
“호오~ 평가가 후해요.”
위그드라실은 내 실력을 어렴풋이 아는 몇 안 되는 존재.
그만큼 내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알고 있다.
쓸 만하다는 건 엄청 후한 표현이란 거지.
“처음에는 놀랬어요. 갑자기 폭행 사건에 연루되고요. 저는 큰일 나는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기혁 군은 이 상황을 활용해서 족쇄를 채우더군요. 정말 당신이란 인간은 끝을 알 수가 없어요.”
“확실히 말하자. 그 사건은 얻어 걸린 거야.”
“들어서 알아요. 유리 양을 에스코트하다가 생긴 일이라면서요?”
“에스코트는 무슨, 억지로 끌려간 거지.”
“후훗. 두 사람, 여전히 사이가 좋네요. 다행이에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두 분이 결혼했으면 좋겠네요. 항상 꿈꿔 왔거든요. 진룡과 검호의 결실. 아아,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요.”
“얘는 갑자기 웬 급발진이래. 야, 정신 차려.”
사실 보고라고 해 봤자 이런 평범한 대화에 더 가깝다.
뭐, 우리가 상하 관계로 묶인 사이도 아닌데 이 정도 대화면 충분하지.
솔직히 위그드라실도 이런 걸 더 좋아한다. 얘가 혼자 오래있다 보니 대화가 부족한가, 말하는 걸 생각 이상으로 즐겼다.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크리스토퍼 윌리엄이란 청년을 다루는 방법이요.”
“방법은 무슨, 그냥 닥치고 패는 거지. 너도 알잖아. 일부러 너 보라고 아카데미 게이트 이용했는데.”
“안 그래도 고마워요. 매일 재미있게 보고 있답니다. 정말 비명도 못 지를 정도로 패던데요? 이런 걸 한글로는 찰지게 때린다고 하죠. 정말 적절한 표현이에요. 아주 구석구석 찰지게 때리시더라고요.”
“피곤해. 매일 싸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즐거워하시던데요?”
“큼, 손맛이 좋긴 하더라.”
그때, 위그르다실이 손뼉을 치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궁금한 거 물어봐도 되나요?”
“물어봐.”
“그 검은 스켈레톤 뭔가요? 대체 뭐길래 그토록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죠?”
“아, ‘사랑’을 깨우쳤거든.”
“사랑요?”
“그래, 사랑.”
사랑. Love.
요즘 나의 주 관심사다.
애정과 관심, 대화와 이해.
이제껏 시도해 보지 않은 무수한 방법으로 스켈레톤에게 애정을 주고 있는데, 이게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스켈레톤 녀석들도 내 사랑에 응답하듯 무럭무럭 자라는 중.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
물론 이를 본 어머니는 ‘기혁아, 그거 아냐.’라며 학을 떼셨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성장한 스켈레톤은 매일 같이 내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한층 더 빠르고, 한층 더 강해졌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스켈레톤이 아니라 스켈레톤 워리어나 데스나이트 같은, 스켈레톤의 상위 호한 소환물로 보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었다.
“어쩐지, 정령들이 별 힘을 못 쓰고 무너지더라니 그런 발전이 있었군요. 기혁 군은 대단하네요.”
“뭐 이 정도쯤이야.”
“그런데…….”
사실 윌리엄 쪽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앞서 말했듯 위그드라실이 언제든 볼 수 있었으니까.
아마도 진짜 본론은 이쪽이겠지.
“……로자리아 양은 어떻게 구슬렸나요. 요즘 매일 같이 기혁 군 꽁무니만 쫓아다니던데요?”
“구슬린 게 아니라, 열 받아서야.”
인공 정령석 때문에 뻔질 나게 나를 찾던 로자리아.
락을 고유 마법, 정확히는 자기 혼자 알파 기어로 이해하며 한동안 발길을 뚝 끊더라.
호기심이 풀렸다는 거였다.
그런데 불과 3일도 안 돼 다시 나를 쫓아다녔다.
그것도 더욱, 열렬히.
왜냐하면 이 몸이 ‘알파 기어’를 만들고 있거든.
“……알파 기어요? 제가 아는 그 알파 기어?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자세히 좀 말해 봐요.”
“이야기가 긴데.”
“빨리요. 궁금하단 말이에요.”
“뭐 그렇다면야.”
사정은 이렇다.
고유 마법이란 것을 가르쳐 주고, 빅터 설계도를 받은 나.
기대했던 백지 수표도 아닌데, 실상은 쓸모가 없는 종이 쪼가리란 걸 알게 된 나는.
당했다는 것을 알고 부들부들 떨어 댔다.
로자리아 그 애송이도 이걸 노렸을 거라 생각하니 그날 밤은 열 받아서 잠도 안 오더라.
그래서 잠깐만 진심이 돼 보았다.
진심으로 빅터 설계도를 판 것이다.
자기 딴에는 빅터 설계도로 아무것도 못 얻을 거라 확신했겠지만.
내가 누군가.
마왕이다.
제국 시절 내가 모르는 마법이 없었고, 내가 발현하지 못하는 마법이 없었다. 모든 마법사의 꿈인 진리에 가장 가까웠던 마법사.
그게 나 마왕이란 말이다.
한데 뭐? 알파 기어?
가소롭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그딴 걸 들이미나.
설계도를 다 뜯어서 핵심만 추출, 빅터라는 장난감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압도적인 스펙의 알파 기어를 설계해 나갔다.
그렇게 3일 밤낮을 꼬박 새워 완성된 설계도.
골렘처럼 조종형도 아니며, 워 아머처럼 탑승형도 아니다.
세계에 처음 등장한 신개념의 알파 기어.
이른바 ‘구체화된 고유 마법’이었다.
사실 조금 놀랐다.
꼬맹이한테 당했던 분노가 만들어 냈다기엔, 너무 상상 이상의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일까? 욕심이 지나쳤다.
스펙을 올리고, 올리고, 미친 듯이 올리다 보니, 우주를 뚫는 성능을 가졌지만 그만큼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던 것.
이제껏 살아오며 연구비에 연연하지 않던 나인데, 그런 내가 봐도 기괴할 정도의 액수였다. 0이 몇 개인지 세기조차 힘들더라.
인정해야 했다. 아무리 나라도 이건 심했다.
화가 났다 해도 적당히 해야지. 괜히 애한테 흥분했나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래도 만든 게 아까워 적당히 다운그레이드해서 만들려고 했는데.
그때, 어김없이 나타난 진유리.
설계도를 뚫어지게 보더니.
“우리 기혁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대뜸 이 말을 하고는 집으로 갔다.
자기 집, 진룡산 말이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진룡산, 유해련 앞으로 불려 갔고.
“우리 사위 하고 싶은 거 다 하렴.”
이 말을 듣는데 소름이 확 돋더라.
세상에, 진유리가 두 명이나 있어!
심지어 이를 말려야 할 진도하마저도.
“진행시키세요.”
이렇게 ‘구체화된 고유 마법’.
이른바 ‘마룡기 프로젝트’의 시작은 이렇게 된 것이다.
* * *
지혜의 숲을 나온 박기혁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힘들 줄 알았는데, 성공했다.”
“하아…… 놀랍네요. 엄청나요. 마룡기, 진화된 알파 기어…… 꼭 한번 보고 싶네요.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참여하고 싶을 정도예요. 정말요? 저도 참여해도 되나요? 저야 고맙죠.”
“잠깐만요. 방금 뿌리라 했나요? 제 뿌리? ‘세계수의 뿌리’ 말하는 거죠? 그걸 달라고요? ……기혁 군, 혹시 미치신 건가요?”
“기간트를 엿 먹인다…… 갑자기 흥미가 돋네요. 진지하게 말해 보세요.”
세계수의 뿌리.
규칙을 벗어난 마나 전도율을 자랑하는 특급 아티팩트 재료.
모든 마도 공학자의 꿈같은 재료가 박기혁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이걸로 큰 고비는 넘겼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함정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미 시작한 일. 이런 과정조차 즐겨야 하지 않겠나. 박기혁은 상쾌하게 웃으며 액셀을 밟았다.
하지만 행운과 불운은 늘 함께 온다고 했던가.
한 통의 전화에 박기혁의 웃음이 순식간에 지워진다.
- 기혁아, 너희 형이……!
전화가 끊기고.
차가 갑자기 속도를 높인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