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83화>
박봄과 버찌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밥 먹을 때도, 잘 때도, 심지어 화장실 갈 때도 버찌는 봄이 곁을 지켜 준다.
그래서 봄이에게 버찌는 아빠 다음이다.
아빠가 최고로 좋고, 두 번째로 좋다는 뜻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함께인 박봄과 버찌.
박봄이 버찌를 안은 채 베이비 시트 안에 쏙 파묻혀, 운전석을 바라봤다.
“호냥이 이모, 어디가?”
“할머니한테 가지.”
“할모니? 쪼아!!”
둠칫둠둠칫!
온몸으로 좋음을 표현하는 박봄. 버찌도 곁에서 ‘뇨오오오!!’ 길게 울며 배경 음악을 넣어 준다.
할모니는 봄이가 세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호냥이 이모한테는 비밀이다. 호냥이 이모가 슬퍼하는 모습은 싫으니까.
할모니의 회사는 크다. 엄청 커서 하늘을 뚫는다.
동화책 잭과 콩나물의 콩나물 같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서웠다. 무너지면 어쩌지? 고백하자면 지금도 조금 무섭다.
“버찌, 언니 지켜 줄 거지.”
“냐아아옹-.”
지켜 준단다.
조금 안심되는 박봄이었다.
매번 서는 데 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할모니!
“할모니이이이!”
“어이쿠, 내 강새이.”
강새이는 강아지다.
할모니는 가끔 이상한 말을 하는데, 아빠는 그게 사투리란다. 봄이는 할모니의 사투리를 자주 썼다. 이모는 할모니의 사투리를 싫어해서 둘은 매번 싸운다.
“제발 애 앞에서 이상한 말 좀 쓰지 마. 유치원에서 똑같이 쓴다니까.”
“가시나야, 쓰면 좀 어때서.”
“진짜!”
박봄은 사투리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사투리가 좋다. 재미있고 뭔가 따신 기분이 좋다.
할모니의 품에 안겨 회사로 들어갔다. 물론 버찌도 함께다.
마주치는 분마다 인사를 해 온다. 봄이도 인사를 한다. 물론 버찌도 함께다.
“안뇽하세요!!”
“냐아아옹-!”
봄이의 발음이 샌다.
며칠 전에 빠진 유치 덕분이다.
그날 ‘이~.’ 하며 거울을 본 봄이는 울었다. 못 생겨졌다고 펑펑 울었다. 하지만 호랑이 삼촌이 괜찮다며 바나나 우유도 주고 쌩쌩 목마도 태워 줬다.
그러고 보니 호랑이 삼촌, 며칠째 못 봐써!
“할모니, 호랑이 삼촌 어디 가써?”
“큰 삼촌은 일하러 저기 멀리 갔어요.”
“늦게 와요?”
“쪼금. 왜? 보고 싶어?”
박봄이 고개를 끄덕인다.
호랑이 삼촌은 봄이가 좋아하는 사람 네 번째니까. 그리고 뒤에 있는 호냥이 이모가 다섯 번째다.
미안해, 호냥이 이모. 그치만 호랑이 삼촌이 가르쳐 주는 칼춤은 너무 재미있는걸.
“기혁이는 언제 온대?”
“조금 있다 온대. 요즘 미국 쪽 애들한테 시달리는 중인가 봐. 오늘은 로자리아라던데.”
“기계 성애자?”
“가시나야, 니가 입조심하라며.”
“아! 봄이 들었어?”
“봄이는 못 들어써요.”
사실 들었다.
기계 성애자.
무슨 뜻이지?
박봄은 나중에 아빠한테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며 ‘기억 은행’에 집어넣었다.
아! 기억 은행은 봄이가 기억을 집어넣는 곳이다. 아빠가 그러는데, 나중에는 여기에 마법도 집어넣을 수 있다 들었다.
“밥 안 먹었지? 밥 먹고 올라가자.”
“시켜 먹으면 안 돼?”
“풋. 너 많이 먹는 거 사람들한테 보여 주기 싫어서 그렇지? 괜찮아. 너 많이 먹는 거 다 아니까.”
“응? 무슨 말이야.”
“엄마 프리즘 채널 못 봤어? 너 먹는 모습 올렸는데, 조회 수 폭발이더라.”
“엄마앗!!”
봄이도 할모니가 말한 동영상 안다.
같이 봤으니까.
호냥이 이모가 고기를 먹는데 접시가 산처럼 쌓였다. 근데 생각해 보면 호냥이 이모만 많이 먹는 게 아니다. 호랑이 삼촌도 엄청 많이 먹고, 아빠도 엄청 많이 먹는다.
그리고 할부지는 진짜 어어엄~ 청 많이 먹는다. 아마 제일 많이 먹을 거다.
할부지, 할부지하니까 봄이는 갑자기 할부지 생각도 났다.
“할모니, 할부지는 어디 가써요?”
“우리 강새이 할부지도 궁금해? 할부지도 저어기 멀리 가써요.”
“호랑이 삼촌보다 멀리?”
“아마 그럴걸. 자세한 건 이 할모니도 몰라요.”
“헉!!
“왜?”
“왜 그래, 봄아?”
“할모니도 모르는 거 이써?!”
“뭐어?”
깔깔깔.
세 여자가 뒤집어지듯 웃었다.
봄이는 언제나 봄이 편인 아빠를 좋아한다.
동생인 버찌도 좋아하고, 매번 봄이에게 재미있는 사투리를 가르쳐 주는 할모니도 좋다.
칼춤을 가르쳐 주는 호랑이 삼촌도, 아빠 다음으로 유치원에 많이 오는 호냥이 이모도, 캡틴 타이거를 젤 많이 사 주는 할부지도.
봄이는 울 가족 모두가 좋다.
봄이가 쓴 일기장에는 여섯 가족이 함께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 * *
“하…….”
우울하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다.
어머니가 말하는 ‘마상(마음의 상처)’이 이런 걸까. 아프다, 너무 쓰라리다.
철퍼덕 엎드려 테이블과 혼연일체가 되던 때.
탁.
내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
찰랑거리는 얼음의 냉기가 뺨으로 전해 오고, 눈을 들어 올리자, 진유리가 서 있었다.
“으이구, 조금만 더 녹으면 슬라임 되겠다. 아주 테이블에 붙겠어.”
“시끄러워.”
“이럴 거면 왜 봄이 일기장을 훔쳐 본 거야. 걔도 프라이버시가 있는데.”
“정리하다 실수로 본 거야.”
“진짜? 봄이 걸고?”
“너는…… 말을 해도.”
진유리, 이 녀석은 오늘도 얄밉다.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잘못한 걸.
진유리의 말대로 봄이의 일기장을 엿본 게 화근이었다.
고백하자면 처음은 아니다. 몇 번 봤다.
두 번? 세 번?
진심으로 사심은 없었다. 왜, 아버지로서 그런 거 있잖나. 우리 딸내미가 잘 지내나, 뭐 하고 노나, 친구는 잘 사귀나…… 뭐 이런 거.
요즘 내가 이런저런 일로 소홀해서 더 궁금했다.
그렇게 한창 봄이의 일기를 읽고 있는데 섬뜩한 느낌이 들지 않나? 정말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돌아봤을 때.
충격적이게도 그곳에는 봄이가 서 있었다.
그 이후로는.
“아빠 미어!!
“할모니, 아빠가, 흐극, 아빠가, 봄이 일ㄱ…… 으아아아앙!!”
……생각하기도 싫다.
“하아…….”
“근데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민트 초코 라떼를 빙빙 돌리던 진유리가 말을 잇는다.
“어떻게 네 기척을 뚫을 수 있었지? 너 감지 능력 사기잖아.”
“마법 쓴 거지…….”
“그러니까! 내 말은 봄이 그 쪼꼬미가 몇 살인데 그 정도 마법을 쓰냔 말이지.”
“……킥.”
얘가 아직 뭘 모르네. 우리 봄이는 천재라고.
솔직히 방심한 것도 없지 않다. 감각이 너무 좋다 보니 풀어 놓으면 피곤하거든.
그걸 감안해도 봄이가 특별한 건 사실이다.
잠깐 예상해 보자면 내면에 있는 ‘혈족들’ 중 하나를 쓴 것 같은데.
벌써 혈족들 제어할 줄도 알고.
내 딸이지만……
“……대단해.”
헤벌쭉 웃자, 진유리가 기괴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나 요즘 궁금해. 벌써부터 이런데 나중에 봄이 사춘기 때 넌 어떨까.”
“봄이는 사춘기 안 와.”
“오고 안 오고의 문제가 아니야. 사춘기, 그것은 진리야. 자연현상. 질풍노도의 계절.”
“…….”
“눈을 감고 생각해 봐. 중2병 정통으로 맞은 봄이가 ‘아빠랑은 말이 안 통해! 나가!’ 하면서 문을 쾅 닫는 모습. 상상되지 않아?”
“그럴 리 없어.”
“풋. 내기할래? 나는 온다에 너 걸 수 있는데.”
“니가 날 왜 걸어.”
“소중하니까……?”
“하아…….”
아무튼,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잘못한 게 맞다.
봄이는 똑똑한 만큼 섬세한데, 아빠가 돼서 딸의 섬세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로.
“빨리 마치고 고기나 먹으러 가야겠다.”
“나도! 내가 살게.”
“맘대로 해라.”
시계를 본다.
얘는 할 말이 있다면서 왜 안 온대, 라고 생각할 때쯤.
때마침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
로자리아였다.
“커피, 샷 더블 추가, 설탕 5개. 저기로 부탁해. 이건 팁.”
* * *
왕왕 들리는 말이 있다.
이름을 떨친 강자들은 독특한 개성이나 괴벽을 지니고 있다.
그냥 톡 까놓고, ‘또라이’라는 소리다.
예로 프리즘에 들어가면 ‘땡땡땡에 대하여, 수호자의 기묘한 행동.’ 등등. 이런 이름 난 수호자들의 또라이 짓에 대한 영상들이 심심찮게 떠오른다.
그렇다면 진짜 강자들은 전부 또라이인가?
만약 누가 내게 묻는다면…… 맞다. 근거가 있다.
다만, 선후 관계가 바뀌었다.
강자라서 또라이가 아니다. 또라이라서 강자인 거다.
멀리 갈 필요 없다. 전생의 내가 그러했으니까.
그래서 한때 제국 최고의 또라이로서, 재능 넘치는 또라이를 이해할 수 있냐면.
아니.
뭘 이해해.
또라이는 그냥 또라이지.
“네 락, 아무리 시도해도 못 풀겠어. 거래하자. 제시해.”
“얘 웃기네. 네 앞에서 네 락을 풀려고 했단 소리가 당당하게 나오나 봐.”
“풀려고 했으니까 말하는 거지. 왜 숨겨야 돼.”
“말하는 거 봐봐. 야, 도둑이 집 비밀번호 모른다고 주인한테 전화해서 ‘비밀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라고 물으면 가르쳐 줘야 돼? 이상하지? 네가 하는 말이 이 꼴이야.”
“그래서 거래를 제시했잖아. 집을 새로 살 만큼의 보상이 주어진다면 비밀번호쯤 가르쳐 줄 수 있는 거잖아.”
“와, 끝까지 당당해. 너 상상 이상의 도둑년이었구나.”
“난 네가 더 이해가 안 돼. 나는 Mr. 박과 거래 중이야. 넌 왜 끼어드는 거야.”
로자이라와 진유리.
이름 하여, 과연 누가 이 시대의 또라이인가.
두둥!
꽤 흥미진진한 매치업이다. 시간만 있다면 느긋하게 즐기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다.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 봄이랑 고기 먹기로 했으니까.
“……됐고, 내가 전에 부탁한 건.”
“끝냈어.”
슥.
로자리아가 서류를 내민다.
챈들러 가문에 대한 것들이다.
챈들러가의 덩어리가 민간인 클럽에서 범위 마법을 갈긴 사건.
꽤 심각한 사건으로, 만약 자국민이 이딴 짓을 저질렀다면 두말할 거 없이 집행부로 끌려가 바로 감옥행이다.
하나, 챈들러는 미국인이고, 하물며 이름 높은 명문가다.
자칫하면 국제 문제로 확대될 수 있는 사건.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이 사건은 크게 벌려 봤자 귀찮기만 하다.
그래서 고민하는데, 이상한 데서 해법이 나왔다.
바로 얘, 로자리아에게서.
내가 알아보니까, 미국은 하나의 나라임에도 동부와 서부가 서로 싫어한단다. 거의 원수로 취급하는 수준.
이를 보고 생각했다.
이 폭행 사건, 이쪽에 넘기면 어떨까 하고.
챈들러 가문은 서부의 명문가. 그런데 동부 쪽에서 이 챈들러 가문의 실수를 쥐게 된다면?
꽤 재미있어질 거다.
“스승님이 네가 준 정보 잘 써먹었다 했어. 원하는 거 있으면 들어주라 했어.”
“스승님?”
“메카닉 마스터야. 쟤 스승.”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조사해 봤거든. 어떤 년이 내 걸 넘봐서 말이야.”
진유리가 ‘도둑년’이라 말하며 으르렁댄다.
무시하자. 괜히 이 장단에 맞추면 저녁은커녕 오늘 안에 이야기가 안 끝난다.
“원하는 건 없고 보상만 제대로 받아 줘.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공론화되면 안 되는 거 알지?”
“걱정 마. 스승님도 머저리 하나 때문에 시끄러운 걸 원하지는 않아.”
관리국에도 조용히 처리해 준다고 ‘선물’까지 받았는데, 약속과 다르면 살짝 골치 아파진다.
“이걸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그만해. 시간 아까워.”
로자리아가 품에서 인공 정령석을 꺼낸다. 전과 마찬가지로 색을 잃은, 돌멩이가 된 인공 정령석이다.
“이걸로 확신했어. 마지막의 그 별 모양 마법진은 내가 풀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 그거 나 말고 못 푼다니까.”
“어떻게 한 거야? 그거 뭐야? 왜 너만 풀 수 있는 거야?”
“하나만 해라, 하나만.”
커피를 마시며 진유리를 툭툭 친다.
“응?”
“네가 설명해 봐. 너 알잖아.”
마법에 ‘나의 진리’를 투영하는 고유 마법.
여기 있는 진유리는 이미 이 고유 마법의 첫발을 내디딘 상태다.
“대충 개념만 설명해 줘. 어차피 모르겠지만.”
“진짜? 내가 해도 돼?”
고개를 끄덕이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정면을 보니 로자리아는 이 상황이 불편한 모양. 진유리를 보며 ‘네까짓 게 나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라는 질투까지 엿보였다.
“잘 들어, 도둑년아. 네가 못 푼 건 ‘고유 마법’이란 거야.”
“난 도둑년 아니다.”
“조용해. 그래서 안 듣고 싶어? 말하지 말까?!”
“……bitch.”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잡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설명은 훌륭했다.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마법사가 진리를 대하는 법까지.
흠잡을 데 없다.
확실히 이런 것만 보면 진유리도 우수한 학생이란 생각이 든다. 그놈의 입만 조심하면 말이다.
잠시 뒤, 설명이 마무리되고.
“……결론적으로 기혁이가 건 고유 마법은 기혁이밖에 못 푸는 거야. 이해했어?”
로자리아는 잠깐 고민에 빠지더니.
이상한 말을 뱉는다.
“그거 ‘알파 기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