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82화>
윌리엄의 정령 부대들이 빠른 속도로 허공을 휘저었다.
불의 정령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길이, 물의 정령이 스쳐 간 자리에는 물방울이.
대지의 정령은 먼지를 남기고, 바람의 정령은 돌풍을 불러온다.
수토풍화(水土風火).
4대 속성의 정령들이 활개 치며 영역을 넓혀 갔다.
어림잡아 수십은 될 법한 정령들. 감히 부대라고 칭해도 무방할 정도의 숫자가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수행하고, 적을 압박해 갔다.
다수의 하급 정령들을 사용해 정령들의 숫자를 늘리고, 일정 숫자의 하급 정령마다 중급 정령을 배치해 하급 정령을 제어하고, 다시 중급 정령에 상급 정령을 붙이는.
이른바 피라미드식 명령 체계.
이게 ‘궁전’ 특유의 정령술이었다
정령과의 교감을 중요시하는 유럽 ‘마탑’의 정령술과는 달리, 미국 ‘궁전’의 정령술은 지극히 전투 중심적이다.
이를테면 유럽의 마탑이 정령을 ‘반려동물’쯤으로 생각한다면, 미국 ‘궁전’은 철저히 ‘병기’로 취급했다.
때문에 유럽의 많은 정령사들에게 맹비난을 받는 ‘궁전’이었지만, 그 효과만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렇지 않다면 ‘궁전’이 ‘마탑’과 함께 정령계를 양분할 수 있었겠나.
그리고 이 ‘궁전’ 정령술. 정령 군단의 방점을 찍는 게.
‘인공 정령’.
현재 윌리엄의 곁에 있는 저 정령이었다.
“크리스, 더 밀어붙여.”
- 캬악! 쉬익~ 쉬익~
뱀의 머리에 날개, 몸통에는 손과 발이 붙어 있는.
흡사 서양의 ‘드래곤’을 보는 듯한 정령.
하지만 위엄 넘치는 드래곤은 아니다. 이등신에 날개도 파닥파닥하는 게, 오히려 귀엽다에 가까운 드래곤이었다.
이 드래곤을 닮은 정령의 이름은 크리스.
크리스토퍼 윌리엄의 인공 정령이었다.
“숲으로 몰아.”
- 키야아아악-!!
크리스가 울자, 윌리엄의 정령 부대가 한층 더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쏘아 댔다.
이게 인공 정령이다. 주인을 대신해 ‘정령’들을 관리하고 제어하는 컨트롤 타워.
예전에도 한번 언급됐듯, 정령은 급이 올라갈수록 자아가 뚜렷해진다. 상급 정령쯤 되면 이때부턴 더 이상 명령을 하는 관계가 아니다. 부탁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나마도 부탁이 실행되면 다행이다. 정령의 성격, 성향에 따라 거부당하는 것도 비일비재. 심지어 부탁이 곡해되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평소라면 웃으며 넘어갈 일. 하지만 1분 1초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에서 이건 치명적인 단점이다.
참고로 유럽의 마탑이 ‘교감’을 중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같이 성장해 교감이 생기면 주인의 말을 잘 들으니까. 오랜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반면 미국은 이 전달 체계의 문제를 타협하지 않았다.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근본적으로 바꿔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공 정령이 탄생했다. 주인이 직접 만든 ‘정령’ 말이다.
이 정령은 절대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머니니까, 아버지니까, 창조주니까.
심지어 일반적인 정령들이 역소환되면 자연으로 흩어지는데, 인공 정령은 역소환 시 주인의 내부, 마나 홀에 자리를 잡는다.
이처럼 오직 주인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 정령은 모든 정령의 꼭대기에 앉아 아래에 있는 정령들을 다스린다.
이게 Made in America ‘정령 군단’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메커니즘, 익숙하지 않은가?
뭔가 비슷한 걸 본 것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맞다.
이건.
박기혁의 외부 마나 홀, ‘신체’랑 놀랍도록 흡사하다.
“이런 거 보면 인류가 발전하는 방향은 비슷한 것 같아.”
물론 어디까지나 메커니즘이 비슷할 뿐이다.
이쪽은 악명을 떨친 대악마들. 말랑말랑한 정령들 따위랑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일까, 근처에 떠 있는 이등신 키메라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왕왕대며 울어 댔다.
- 자존심 상한다! 나 자존심 상한다!!
“너 스켈레톤 잘 못 다루잖아.”
-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악마보다는 마수에 가까운 키메라.
그래서 지적 능력이 떨어지지만, 그만큼 운동 능력이 탁월한 마수다.
쉽게 말해 무식하다는 말. 그런데 이 녀석이 지휘를 한다고?
박기혁이 피식 웃는다.
“뭐, 재미있겠네. 한번 해 봐.”
- 고맙다! 고맙다!!
제어권을 넘기는 박기혁.
키메라가 제어권을 잡고.
그 순간, 어둠 뒤에 있던 스켈레톤의 안광이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더니.
키아아아아아악-!!
포효했다.
돌진했다.
이제껏 어둠 뒤에서 사슬로 견제하던 스켈레톤이, 정면을 향해 뛰쳐나와 사슬을 마구잡이로 뿜어냈다.
스켈레톤의 이상 행동에 화들짝 놀란 정령들. 어찌할 바를 모르며 후퇴했다.
일순간 무너지는 진형.
기세가 오른 키메라가 더 가열하게 스켈레톤들을 다그쳤다.
- 부숴라! 부숴라!!
마나가 뭉텅이며 떨어져 나가고, 스켈레톤 군단이 던진 사슬들이 엉키더니, 거대한 고목처럼 뭉쳐지고.
곧이어, 대지를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앙! 콰아앙-!!
연속으로 내려쳐지는 사슬 뭉치들. 대지가 울컥대며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이런 거침없는 공세 속에서 윌리엄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크리스.”
- 쉬이이익~
순식간에 정령 부대를 산개시키고는 마법을 통해 견제, 최대한 시간을 끈다. 동시에 산개시킨 정령들로 포위진을 구성하고, 스켈레톤 군단을 압박해 나갔다.
양쪽 진형이 크게 변한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양측의 우위는 명확해진다.
윌리엄의 정령 부대의 우세.
-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키메라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씩씩대지만, 박기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아무렴, 당연하지. 이쪽은 닥치고 돌진밖에 모르는 마수고, 저쪽은 나름 체계적으로 대규모 집단 전술을 배운 인간이다.
누가 봐도 우열이 명확하다. 보이는 결과가 말해 주지 않나.
오히려 박기혁의 흥미를 끈 것은 다른 부분이다.
“저거, 마나 홀 역할을 하고 있네?”
윌리엄 옆에 떠 있는 오브.
빨간 구체에 보라색 입이 달린 괴상망측하게 생긴 오브였다.
저 오브가 입을 오물거리며 마나를 빨아들이고, 동시에 빨아들인 마나를 정제해 윌리엄에게 공급하고 있었다. 정령사의 고질적인 마나 부족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대결에서 윌리엄은 채 1시간을 싸우질 못했다. 그러나 이번 대결은 거의 2시간째 풀 전력을 유지 중이다.
“마나 드레인 성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그래, 어줍잖게 이거저거 섞을 바에야 하나에 집중하는 게 좋지. 잘 만들었어.”
확실히 도구나, 아티팩트 같은 것은 제국보다 이 세계가 훨씬 잘 만드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박기혁의 시선이 다시 돌아간다. 이번에는 상대측이 아닌 우리 측, 정령들에게 집중 난사당하고 있는 스켈레톤 군단이다.
부서지는 스켈레톤 군단.
검은 쇠사슬을 흩뿌리며 공세를 막아 보는데, 이를 두고 볼 정령들이 아니다. 각을 잡은 채 죽어라 쏘아 댄다. 그야말로 폭격에 가까운 마법 세례.
게다가 쏟아지는 마법은 단일 속성이 아니다. 수토풍화, 4대 속성이 혼합된 다속성 마법. 이런 식으로 변칙성을 가하면 아무리 견고한 방패라도 뚫리기 마련이다.
쇠사슬이 터져 나갔다. 계속 밀리는 스켈레톤 군단.
거의 사이드에 몰아넣고 일방적으로 린치를 가하는 수준으로 당하고만 있다.
어떻게든 활로를 뚫기 위해 어둠으로 변해 하늘로 날아 봤지만 하늘은 정령들의 영역, 어림도 없었다.
위기다.
이제 정령의 공세가 박기혁 근처까지 왔다.
그런데 박기혁은 이런 위기의 순간에.
“아!”
깨달음을 얻는다.
당하고 있는 스켈레톤들이…… 슬퍼하고 있다. 괴로워하고 있다.
고통스러워서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분해하고 있어.”
자신들은 더 잘 움직일 수 있는데, 더 잘 싸울 수 있는데, 당하고만 있는 이 상황이 화나고 억울해서 분해하고 있다.
동시에 박기혁에게 원하고 있다.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고.
당신이 이끌어 준다면 몸을 불살라서라도 앞에 있는 적을 처단하겠다고.
“신기하네…….”
스켈레톤이 감정이라니. 이제껏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생경한 감각이다.
이게 가능한가?
박기혁이 스스로 물어봤다. 당연히 답은 나오지 않는다. 느껴 보지도 못했는데 무슨 답을 내리겠나.
계속 감각에 집중해 본다.
정령의 불꽃에 오른팔이 녹아내리는 스켈레톤은, ‘죽이겠다.’ 투지를 불태우며 왼팔에 있는 사슬을 내려쳤다.
다리가 얼음에 굳은 스켈레톤은 ‘더 싸우고 싶다.’라고 버둥거렸고, 흙뭉치에 압사당한 스켈레톤은 마지막 공격을 ‘아쉽다.’라고 평하고는 분해됐다.
박기혁은 스켈레톤의 감정에서 의지를 느꼈다.
그리고
“아……!”
깨닫는다.
이게 진도하가 말하는 ‘마나의 의지’구나.
영감이 말했던 ‘마나의 말’이구나.
순간 박기혁의 눈이 반개한다. 개운하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무언가가 한 꺼풀 걷힌 기분이었다.
“……키메라, 빠져라.”
키메라가 아쉬운 얼굴로 뒤로 빠지고 스켈레톤의 제어권이 박기혁에게로 넘어갔다.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보인다.
이제껏 자신은 이들을 어떻게 대했던가. 마왕의 군세라 불렀음에도 정말 동료로 보았는가. 소모품으로 보지 않았는가.
언제 부서져도 상관없는 소모품 말이다.
불러 본다.
“스켈레톤.”
소모품이 아닌.
동료를 불러 본다.
“일어나라.”
휘리리릭.
그들의 신체를 뒤덮고 있던 어둠이 커튼처럼 펄럭이고, 커튼이 걷힌 자리에는 정렬된 스켈레톤들이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의 감정이 또렷이 전해진다.
- 명령을.
박기혁이 이에 진심으로 응답한다.
“죽여.”
정렬돼 있던 스켈레톤들이 어둠이 되어 흩어지길 잠시.
하늘에 어둠이 찾아온다.
깨지는 하늘, 균열 사이로 쏟아지는 쇠사슬. 쇠사슬의 폭우가 하늘을 뒤덮으며 정령들이 절규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 알겠다.”
마나를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를……
박기혁은 깨진 하늘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 * *
박수혁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식인을 하는 천사라니? 무슨 말이야, 아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봐.”
백사장의 고운 모래를 발끝으로 느끼며 걸어간다.
“이거 아는 사람은 누구누구 있어. 기혁이랑 유리…… 일단은, 일단은 알리지 말자. 알아, 걔네들 밖으로 돌아다니는 거. 그게 얼마나 큰일인지 엄마가 모르는 줄 아니? 근데 증거가 없잖아! 증거가.”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에 머리가 휘날렸다.
“엄마가 조사해 봤거든. 조사한 것만 보면 깨끗해. 아무 이상 없어. 어디에도 특별한 징조는 없었어.”
머리를 가리며 정면을 향해 걷는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곳에서 단서를 찾았어.”
검집이 매달린 벨트를 조이며 조금씩 속도를 올린다.
“이거, 깃털. 너네 아버지가 며칠 전에 보낸 거야.”
속도를 올리는 박기혁의 주머니에 비치는 하얀 깃털.
“아버지가 뭐 조사하는지 알지? 셀루…….”
“셀루티스.”
순간,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들. 사방에서 박수혁을 조여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수혁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는데.
따사로운 태양빛이 내려쬐는 하늘.
거대한 그림자가 태양을 등지고 날고 있었다.
천사.
아니, 천사의 거죽을 쓴 괴물.
“찾았다.
검을 잡는 박수혁.
박수혁의 머리칼이 황금빛으로 출렁이길 잠시.
황금빛 검기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