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78화>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
모래가 솟구친다.
가시의 정체는 샌드 스파이크(Sand Spike).
원뿔형의 샌드 스파이크가 돋아나고, 한준우는 하늘을 달리듯 몸을 꺾으며 가시를 피해 달아났다.
반대쪽도 마찬가지.
메르헴은 샌드 스파이크를 피하다 안 되겠다, 라고 생각했는지 메이스로 가시를 부숴 버렸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샌드 스파이크.
사막의 모래를 모두 쓸어버릴 기세로 가시들은 무한히 생성됐다.
샌드 스파이크를 피하고는 등을 마주치는 한준우와 메르헴.
“빨리 찾아야 해.”
“시간을 벌어 줘요. 내가 할 수 있어요.”
“……실수하지 마라.”
“준우도요.”
쏜살같이 쏘아지는 두 사람.
어김없이 두 사람을 뒤쫓는 샌드 스파이크.
그들이 지나가는 걸음걸음마다 모래 가시가 솟구쳤다.
토 속성은 모든 속성 중 지형 시너지를 가장 많이 받는 속성. 때문에 사막이라는 지형 시너지를 받은 샌드 스파이크는 훨씬 빠르며, 더욱 강력하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하지만 두 사람도 속도에서 빠지지 않았는데, 날 듯 모래를 박차며 뒤쫓는 샌드 스파이크를 따돌린다.
그러면서 공격자를 찾는 데 신경을 집중.
어디 있나.
어디에 숨어 있냐, 박기혁.
감각을 최대한 세밀하게 퍼트려 보지만.
없다.
과연 박기혁, 완벽할 정도로 자신을 숨겼다.
두 사람의 감각에 걸린 생명 신호는 저기, 돌산 위에서 이쪽을 구경하고 있는 진유리와 김하니뿐.
정작 박기혁은 어디에도 없었다.
존재를 숨긴 박기혁, 집요하게 추적 중인 샌드 스파이크.
이대로는 안 된다.
“안 되겠어요, 준우. 마법부터 지워야겠어요. 업어 줘요.”
한준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르헴이 폴짝 뛰어 한준우의 등에 업혔다.
푸욱- 모래 속으로 빠지는 한준우의 발.
민첩성을 살리려 경무장을 고집하는 한준우와는 달리, 판금 갑옷에 타워 실드와 같은 중무장을 하는 메르헴이라 생각 이상으로 무겁다.
당연히 속도가 느려지고, 추격하는 샌드 스파이크가 거의 따라붙는데.
그 순간 날아드는 메르헴의 버프.
“야생의 숨결, 생명 촉진, 광폭화.”
야생의 숨결은 감각을 증폭해 일순간 한계 이상의 운동 능력을 부여해 주는 버프.
생명 촉진은 말 그대로 신체가 가진 생명력을 일순간 증폭시키는 순환계 버프.
각자가 쓰임이 다른 버프. 하지만 이 두 가지 버프를 잇는 것이 바로 광폭화다.
야생의 숨결로 증폭된 운동 능력을 광폭화로 200퍼센트 활용, 생명 촉진으로 광폭화의 시간을 연장시킨다.
하급 주술이라도 그 쓰임에 따라 상급 주술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법.
이것야말로 상위 주술사의 덕목이었고.
메르헴은 당당한 상위 주술사였다.
아르고스의 눈
Argos‘s Eye
두웅-
허공에서 100개의 눈이 일시에 떴다.
주시하는 신 ‘아르고스’의 눈이다.
100개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인다. 좌우, 아래위를 데구르르 굴러 반대편을 보기도 하더니.
마침내.
“……!!”
100개의 시선이 한쪽을 향해 집중되고.
‘찾았다!’
메르헴은 굳이 ‘저기’라 외치며 손을 뻗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땅에 내려.
쿵!
판금 장화를 모래에 쑤셔 넣고는.
“……!!”
한준우의 허리를 휘감은 뒤.
“저기예요오!!”
투포환 선수처럼 냅다 던져 버렸다.
거의 100미터 이상을 날아가는 한준우.
당황하던 모습도 잠시, 곧바로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잡고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저긴가.’
낙하지점은 모래 한가운데.
특이점은 없다. 그냥 사막의 모래였다. 그래서 더 찾기 힘들었다. 사막은 전부 모래로 가득했으니까.
그럼에도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한준우. 메르헴이 저기라면 저기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었다.
이제껏 샌드 스파이크만 고집하던 공격 패턴이, 갑자기 다양해졌다.
교란 마법인 ‘다크 스웜’이 발현돼 한준우의 시야를 차단하기 시작됐고, 모래 채찍 ‘어스 웹’이 한준우를 끌어내리려 쏘아졌으며, ‘어스 스피어’ 다발이 유도 미사일처럼 한준우를 격추시키기 위해 발사됐다.
찰나의 순간 발현된 마법들.
하지만.
마법의 향연 앞에서 한준우는.
스릉-
단지 검을 빼 들 뿐.
하루살이의 춤
감각의 감옥이 주위를 뒤덮는다.
길 잃은 마법들이 엉뚱한 데서 폭파하고, 순식간에 마나의 폭발을 뚫은 한준우가.
쌍검을 교차시키는 순간.
광시곡 제 1장
광휘(廣熙)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쐐액-!
절단되는 공간.
마법도, 모래도, 감각마저도…… 모든 게 빛살에 사로잡혀 자취를 잃는다.
그리고 그 빛의 끝자락을 막고 선 것은.
채앵!
박기혁.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박기혁이다.
검을 맞대고 선 한준우와 박기혁.
분명히 한준우의 공격은 치명적이었지만, 온갖 방어 마법을 두른 터라 박기혁의 몸에는 티끌만 한 상처도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전혀 상처 하나 없는데도.
정작 박기혁의 얼굴이 심각해 보이는 건 왜일까?
“대체 사랑이라는 게 뭐지…….”
* * *
사랑.
영어로는 Love.
사랑이라는 게 뭘까?
요즘 나의 머리를 가득 채운 화두다.
이 화두를 내게 던진 이는 진도하였다.
그날, 감사 인사를 전하러 진룡산에 오른 날.
맛있게 식사를 끝내고 진도하와 독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몹시 즐거운 시간이었다.
땀을 흘리지 않고, 검을 맞대지 않고도, 이토록 즐거울 수 있다니. 더군다나 마법에 관한 토론으로 말이다.
나이도, 출신도, 모든 것을 떠나.
오로지 마법사 대 마법사로서.
우리는 진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사랑’이란 것도 이때 나온 이야기였다.
“박기혁 님의 마법에 대한 열정과 집요함. 정말 훌륭합니다. 특히 ‘효율’과 ‘살상’이란 측면에서 만큼은 저는 물론이고, 제가 아는 모든 마법사를 통틀어 최고입니다. 본받고 싶을 정도예요.”
“하지만 그래서 한쪽으로 치우친 게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한 번쯤은 스스로를 고찰해 보십시오. 마법적 효율은 지나치다 못해 집착에 가깝습니다. 파괴적인 살상력도 똑같습니다. 때문에 박기혁 님의 마나는 항상 ‘죽이려고’ 24시간, 365일 팽팽하게 조여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조금 걱정됩니다.”
“감히 조언해도 되겠습니까. 아까 우리가 말한 거 기억하십니까.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만물에는 마나가 깃들어 있으며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의지의 다른 말은 자아. 전 마나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마나를 좀 더 아껴 보십시오. ‘사랑’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마나도 기꺼이 당신의 사랑에 보답할 겁니다.”
사랑하라.
마나를.
무언가 머리를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이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으니까.
내 마법의 시작이야 안내자였던, 영감에게서.
“인마, 넌 좀 말을 해도 곱게 좀 하면 안 되냐. 좀 더 상냥하게, 강요하듯 하지 말고. 엉?”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너’를 결정짓는 거다. 마법은 안 그런 줄 알아? 너, 한 번이라도 마나랑 대화해 봤어? 없겠지. 그냥 내가 시킨 대로 하라고 강요하니까. 걔들도 생각이 있어, 새꺄.”
“하아…… 하긴, 너나 나나 뒷골목 잿빛 인생인데. 쯧, 됐다. 방금 한 말은 잊어. 무슨 상냥함이냐. 그냥 ‘지배’해. 잘하는 거나 하자.”
사탕을 먹어 봐야 달콤함을 알고, 사랑도 받아 봐야 따뜻한 걸 안다.
그때 영감이 내게 해 줬던 말이다.
당시에 난 이게 무슨 말인지 감도 못 잡았다. 영감의 말대로 사랑이란 걸 받아 봤어야 알지.
마치 코끼리를 보지 못한 사람이 이야기로 듣는 것처럼, 내겐 사랑은 환상 속의 코끼리 같은 존재였다.
한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난 이 ‘사랑’이란 감정을 안다.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형, 누나와 나누는 우애.
봄이에게는 부성애.
분명 난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마나를 사랑하라.
이제는 할 수 있지 않을까.
* * *
수련용 게이트를 나온 박기혁과 일행들은 우선 점심부터 시켰다.
주문 담당은 막둥이 김하니 출동.
“확인할게요, 선배님들. 준우 선배는 모듬 가스 3인분.”
“맞다.”
“메리 선배는 연어 샐러드하고 바케트 롤.”
“새로 생긴 ‘카탈리아’에서 주문해 주세요.”
“유리 선배는 저랑 분식 먹기로 했으니까, 떡튀순 시킬게요.”
“옹야.”
“기혁 선배는…….”
김하니가 마음의 준비를 하며 메모장을 본다.
“해물 쟁반 짜장 곱빼기에 탕수육 대자, 초밥 20인분에 새우 튀김 5인분.”
“적당히 먹으려고.”
“하핫. 적당히…… 적당히. 넵.”
한 사람이 주문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양의 음식들.
처음 주문할 때는 이 목록을 보고 많이 놀랐던 김하니다. 설마 날 놀리는 건가? 말로만 듣던 신입 괴롭히기?
그러나 이제 놀라지 않는다. 똑똑히 봤거든. 박기혁의 몸으로 블랙홀처럼 사라지는 음식들을.
“주문할게요!”
명랑하게 버튼을 눌렀다.
‘주문이 완료됐습니다.’라고 떠오른다.
오늘의 승자는 초밥집이다. 아카데미 상권의 큰손 박기혁의 은총을 받았으니, 이제 주인은 심혈을 기울여 초밥을 만들 것이다.
일단 단골만 되면 당신의 매출을 책임지는 큰손 박기혁의 주문이거든.
역시나, 예상대로 박기혁과 일행들이 동아리실에 들어서자 음식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즐거운 식사 시간.
모두가 젓가락을 들었다.
“너 아까 그 말은 뭐야?”
“응? 내가 뭐라 했는데.”
“이렇게, ‘사랑이라는 게 뭐지…….’라고 말했다.”
“준우, 표정 연기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뭐? 사라앙? 진짜? 우리 박기혁이 사랑이라 말했다고?! 기혁이가 드디어 나의 사랑으을윽컥~!”
“야, 씨. 더럽게……”
“콜록! 콕콜록!!”
“후우. 하니야, 거기 휴지 좀.”
“여기요.”
밥을 먹으면서도 시선이 박기혁에게 집중된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박기혁의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나왔다는 것이 궁금한 모양.
“별거 아냐. 누구한테 ‘마나를 사랑하라’라는 말을 들어서.”
“누구가 누군데?”
“그게…….”
아무리 박기혁이라도 진유리 앞에서 아빠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닌 것 같아, 대충 둘러댔다.
“마법적으로 인정할 만한 사람.”
“……?!”
“오오…….”
“신기하네요. 기혁, 당신이 마법으로 누굴 인정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아닌데. 나도 있는데. 나도 기혁이랑 마법적으로 교류하는 사이야.”
“글쎄요, 교류는 양쪽에서 주고받는 건데 유리는…… 일방적이지 않을까요?”
“한국말로 짝사랑이라 하지.”
“너희는 진짜…….”
“괜찮아요, 유리 선배. 저는 이해해요. 짝사랑도 사랑이잖아요.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존중받을 가치가 있어요. 선배 파이팅!”
“……네가 제일 나빠.”
한준우가 까끌한 입을 국물로 헹구며 말을 다시 잇는다.
“그래서, 조언대로 해 봤나?”
“글쎄, 잘 모르겠네.”
박기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초밥 세 개를 입에 집어넣었다.
하루아침에 깨달을 수 있었다면 굳이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기혁, 잘 모르겠으면 해 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에헴, 맞지.”
“모르면 행동해라. 네가 가르쳐 준 거 아닌가.”
“맞아, 맞아.”
“선배님. 머, 멀리 갈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인연은 가까운데 있지 않을까요.”
“크흠.”
진유리는 마치 ‘그 인연이 나다!’라고 말하듯 활짝 가슴을 펼친 채 기괴한 포즈를 짓고 있다.
박기혁은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고, 귀엽기도 하고……
“적당히 하고 밥이나 먹어. 빨리 먹고 오후 훈련해야 하니까.”
“으어어어?!”
“허엉?”
“설마 대련했다고 일과 끝난 줄 알았냐?”
“난 좋다. 훈련은 언제나 옳지.”
“야! 메리, 네 남친 안 챙겨?”
“준우, 제발 눈치 좀 챙겨요.”
이렇게 동아리 ‘출구 없는 지옥’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흔한 일상을 보내는 듯했다.
저 문이 열리기 전까지.
쿠웅! 끼이이익-!
까앙-!
한 쪽당 200킬로그램. 총 400킬로그램의 문이 튕기듯 활짝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걸어 들어온다.
그리고 무리의 선두에는.
“안녕하십니까. 미국 교류단 대표 크리스토퍼 윌리엄입니다.”
피곤에 찌든 윌리엄이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