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75화>
고기에는 진심인 검호가답게, 우리는 전투적으로 고기를 먹어 치웠다.
소고기의 스테디셀러 안심과 등심.
차돌박이, 가비살, 업진살, 살살 녹는 특수 부위.
끝으로 달짝 짭쪼롬한 양념 시리즈까지 야무지게 먹어 치우고는 비로소 젓가락을 놓을 수 있었다.
“잘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봄이 이리 와. 입 닦자. 우우우 해 봐. 옳지.”
“15인분이 적당하네. 너무 배부르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그래, 10인분은 살짝 모자랐어.”
이제 배도 어지간히 채웠으니, 디저트인 청포도 셔벗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아참, 그 전에.
“아쁘아, 나.”
“친구들 불러 달라고?”
“응응!”
보통 애들이 시도 때도 없이 프리즘을 찾는다면, 우리 봄이는 조금 다르다.
프리즘보다 ‘친구’랑 노는 걸 100배는 좋아한다.
웃으며 허공을 쓸었고 공간이 열리며 뾰로롱- 네 마리의 요정이 나온다.
“바뽀오!”
바포메트와.
“랑! 랑!”
아수라.
“히유유우우웅~.”
이건 키메라고.
“컹컹!”
개처럼 짖는 얘는 펜릴이다.
이등신 형태의 요정. 사실 흉악하기로 유명한 대악마들이지만 봄이가 요정이라 믿으니 요정이라 치자.
봄이가 네 마리 요정들을 데리고 버찌에게로 향한다. 대충 사이즈 보니까 저거 인형 놀이다.
곧이어 가방에서 손바닥만 한 인형을 꺼내는 봄이. 봐라, 역시나다.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봄이를 보니 최소 1시간짜리다. 고로 이제 어른의 대화를 해도 된다는 말.
먼저 입을 연 것은 수혁 형이었다.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어. 이번 미국 교류단, 다들 꿍꿍이가 있는 것 같더라고.”
“당연해.”
민지 누나는 태연히 셔벗을 먹으며 말을 이었다.
“콧대 높은 미국이야. 하물며 보낸 게 각 아카데미 최고들이잖아. 꿍꿍이가 있어. 틀림없이.”
“맞아. 민지는 똑똑하네.”
“놀리지 말고. 계속.”
“음, 그게 어제 미국에 있는 친구랑 통화했는데…….”
옵티멈 에이전트에서 미국 쪽 지원을 담당하는 수혁 형.
때문에 미국에 지인들이 많이 있는데, 어젯밤 전화를 건 친구는 ‘조지나 궁전’ 소속의 마법사란다.
조지나 궁전은 회복과 버프을 비롯해 백마법이 전문인 학파.
그런데 이 조지나 궁전은 엘리멘탈 궁전을 끔찍할 정도로 싫어한단다. 거의 불구대천 원수급으로 본다네, 그래서 어떻게든 서로의 약점을 잡으려 혈안이 돼 있었는데 이 정보는 그렇게 얻은 정보라고 한다.
“엘리멘탈 마스터가 너에 대해 알아보고 있단다.”
“나? 나 말이야?”
손가락으로 날 찍으며 멍청하게 되묻자.
“응, 너 박기혁. 이 부분은 조금 민감해서 따로 개인적으로 알아봤거든. 이곳저곳에서 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건 사실이라더라. 네가 쓴 마법. 아포칼립스에 호기심을 보인다던데?”
“흐응? 아포칼립스를?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한대. 뭐 얻는 것도 없을 텐데.”
“베끼지 못해?”
“못 해.”
“절대로?”
“절대로.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야. 내가 아니면 구현 자체가 불가능해.”
“다행이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또 있단다.
“또?”
“그러게. 우리 동생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인이 돼 있더라고.”
“허 참. 이번에는 어디야?”
“기어스 스쿨. 여기서도 널 주목한대.”
“거기도 아포칼립스 때문에?”
“아니, 여기는 인공 정령석 때문에, 인공 정령석 생산 공법에 관해서 너랑 진지하게 거래를 원하는 것 같은데.”
“아…….”
이건 이해가 간다.
기어스 스쿨이라면 그럴 만하지.
워 아머 한 대를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정령석이 필요하다. 일반 아티팩트를 제련할 때랑은 차원이 다른 수준의 정령석이 말이다.
이건 실제로 내가 겪어 봤다.
진유리랑 ‘드래고니안’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정령석을 사용했던가. 농담 않고 거의 소형 트럭 하나를 가득 채우는 양이었다.
대체 이렇게 가성비가 안 좋은 장비에 왜 그렇게들 집착하냐고 몇 번을 물었었지. 그럴 때면 진유리는 그저 “그게 워 아머니까.”라고 끄덕였을 뿐이다.
진짜 목젖을 때릴 뻔했다.
어쨌든 실제로 우리 김연희 여사님이 말씀하길길, 정령석 시장에서 가장 열렬한 소비층은 ‘워 아머’를 만드는 집단, 혹은 회사라더라. 생산량의 70퍼센트는 이쪽에서 가지고 간다나.
그만큼 정령석에 굶주린 이들이니 내 인공 정령석에 침을 질질 흘리며 흥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쪽은 꽤 진지하다고 하니까. 생각 있으면 대화해 봐.”
“됐어. 어머니 생일선물로 드린 건데 내가 왜 이야기해. 이야기를 해도 어머니가 하셔야 맞지.”
“음, 기혁이 말도 맞네.”
“잠깐.”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누나가 말을 끊는데.
“가능성은 없어? 정보가 오염됐을.”
“흠, 충분히 높지. 아마 이 친구도 일부러 정보를 흘렸을 걸.”
“의도를 가졌다?”
“아마도?”
“그러면 100퍼센트 믿으면 안 되는 거잖아.”
“상관있어?”
“……?”
당당한 형의 답변에 오히려 말문이 막힌 건 누나. 수혁 형은 셔벗을 한 입 먹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쉬운 건 저쪽이잖아. 접근을 해도 저쪽에서 먼저 할 테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만 해도 이득이란 말이지.”
“목적만 알면 그만이란 말이야?”
“응.”
상대의 목적을 아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이 기본을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싸움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설령 이를 알게 되는 경로가 의심스러워도.
상관없다.
“어차피 여긴 우리나라야. 날뛰어 봤자, 얼마든지 수습 가능해.”
강자에게만 허락된 여유.
수혁 형에게는 이 여유가 있다. 그리고 언제 어느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물론 형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너무 안심하지는 마. 방심하다가 다칠 수도 있잖아. 너 다치면 형이 어머니를 어떻게 보겠니. 형 말 이해했지?”
“그럴 줄 알고 대비도 해 놨어.”
“걱정할 필요 없어. 얘 완전히 미쳤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다. 스켈레톤에다가 그딴 짓을…… 허 참.”
“호오? 스켈레톤에다가 뭔 짓을 했길래? 한…….”
“싫어.”
“……형 말도 안 꺼냈는데?”
“보여 달라는 말이잖아. 보면 또 흥분할 거고. 그럼 싸우러 갈 건데, 싫어. 나 오늘 피곤해.”
“이야, 기혁이 똑똑하네.”
수혁 형이 피식 웃는다.
“그래도 조심해. 괜히 휘말리지 말고. 네가 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너무 다쳐도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으니까.”
“넵, 걱정 마십시오.”
“풋.”
“넌 왜?”
“웃겨서.”
누나가 내 쪽을 힐끗 보고는 비웃으며 말했다.
“얘가 싸움을 피해?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이 누나가?
“하긴 기혁이가 싸움을 피할 리 없지.”
얼씨구, 이 형도?
“차라리 엄마한테 말해서 수습하는 플랜을 준비하는 게 나을걸.”
“아주 일리 있는 말이야. 역시 박민지, 우리 집의 브레인다워.”
어이가 없다.
설마 두 사람, 내가 애들 싸움에 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날 대체 뭘로 보고.
하지만 이런 내 항변에 누나도 형도 피식 웃더니.
“내기할래?”
“무슨 내기?”
“네가 얼마나 참는지.”
“좋네, 형은 일주일 본다. 우리 동생이 그 정도 인내심은 있을 거야.”
“이 오빠 감 떨어졌네.”
누나가 손가락을 세운다.
“3일. 너 3일 안에 사고 쳐.”
마치 예언처럼 확정하는 민지 누나. 그때까진 웃어넘겼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내가 누군데. 겨우 꼬맹이들이랑 푸닥거리할까 싶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퍼어어억-!
“끄아아악!”
난 깨닫는다.
우리 누나, 박잘알인데?
* * *
꽝!
문을 발로 차며 방으로 들어온 남자.
백인, 갈색 머리, 거의 2미터는 되는 키에,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명문가의 후손이다.
이렇듯, 여기 이 남자는 타고난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훌륭했다. 너무 훌륭해 숨만 쉬어도 부와 명예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 타고난 것을 제외한다면.
이 남자.
챈들러 머레이는 엉망이었다.
“퍽! 퍽! 퍽킹, 윌리엄. 자기가 대장인 줄 알아?!!”
우적우적.
초콜릿들을 입에 쑤셔 넣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초콜릿들이 머레이의 입으로 쑤셔 넣어졌다.
“후욱! 지가 뭔데. 지가 뭔데 내게 명령이야!”
천성이 샘이 많고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인간.
“나 챈들러야. 감히 너희 같은 천한 것들이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우걱우걱.
지독한 열등감을 폭식으로 해소해,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지 오래.
“더러운 잡종 녀석. 그런 잡종 녀석 때문에 내가 살이 찌는 거야.”
잘되면 내 탓, 못 되면 남 탓. 그놈의 자기 합리화가 강하며.
“또 자기들끼리 나를 욕하겠지. 가문의 명예에 똥칠하는 돼지새끼라고. 퍽킹, 쓰레기들.”
피해망상임에도.
“신경 안 써. 난 나니까.”
자신이 쿨 하다 생각하는 진성 또라이.
얼마나 구제불능이냐면 챈들러 가문에서 포기했을 정도. 만약 머레이가 혈족으로서 눈에 띄게 뛰어나지 않았다면 진즉에 ‘폐기’됐을 거다.
“안 되겠어. 이 더러운 마음을 씻어 낼 성수가 필요해. 성수를 마셔야겠어.”
여기서 ‘성수’는 알코올. 즉, 술이다.
맞다. 얘는 심한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래도 챈들러 가문이라는 명성 덕분일까. 그의 곁에 사람은 끊이지 않았는데.
“어이, 어이. 브라더, 뭐 해? 오늘 한잔 어때?
“뭐라고? 윌리엄이 자중하라 했다고? Fuck!! 윌리엄이 니 엄마야? 대체 언제까지 윌리엄의 젖꼭지만 빨 거야? 꺼져, 겁쟁이야!”
“Yo man. 나와. 오늘 내가 풀코스로 쏜다. 이쪽 밤 문화를 즐겨 보자. Come on~.”
더럽고, 치사하고, 재수 없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지만.
어쩌겠나. 챈들러 가문인데.
곧이어 챈들러 머레이를 중심으로 일당이 모였다.
그들이 향한 곳은 홍대의 한 클럽. 일당 중 한 명이 어설픈 한국어로 묻고 물어 온 클럽.
“이야, 한국사람 친절해. 길까지 가르쳐 줘. 헤이, 헤이. ‘고마어요.’ 웃는다. 바이바이~.”
“휘유우~ 10시인데 사람이 꽤 많아. 간판도 화려하고, 미국이랑 다르잖아.”
“여기 줄 서라는 것 같은데?”
“장난해? 여기서 서서 기다리라고? 다리 아파 죽겠는데 무슨 줄이야.”
헤이! 헤이!
챈들러가 쿵쿵 대며 문으로 가, 가드를 잡았다.
그리고 마나를 일으켜 통역기를 켰고.
“야, 여기 주인 나오라 해.”
클럽이 달라 봤자 클럽 아닌가. 결국 돈이면 안 될 게 없다.
지폐 다발을 들고 하는 협상에 가드는 꼬리를 말았고, 챈들러와 일행들은 3층 VIP룸으로 향했다.
“놀자!”
“술, 술 시켜. 여기서 제일 비싼 술이 뭐야?”
“난 밑에서 춤추고 있는다.”
“같이 가.”
일당들이 저마다 흩어지고, 머레이는 아래가 보이는 테라스에 몸을 기댄 채 맥주를 기울이며 아래를 바라봤다.
“마음에 드는걸.”
술과 음악, 화려한 조명과 더욱 화려한 여자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만 모아 놓은 공간이었다.
여기서는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고난도, 의무도, 아무것도 없다. 오직 쾌락만이 가득하다.
술을 마셔도, 욕을 해도, 여자에게 찝쩍대도.
돈 몇 푼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머레이! 안 내려와?”
“간다.”
신나게 춤췄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부어라 마셨다.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그러다 문제의 사건이 발생하는데.
“응?”
잔뜩 취한 머레이의 흐리멍텅한 눈에 어느 여자가 비췄다. 이쁘장하게 생긴 동양인 여자. 작고 아담한 체구가 딱 머레이의 이상형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미 그의 팔은 여자의 팔뚝을 잡고 있었다.
“야! 나랑 놀자.”
잔뜩 취한 머레이에게 브레이크는 없었고.
꺅, 꺅 소리치는 여자.
시끄럽지만 이게 또 매력 있다. 씨익, 웃은 머레이가 우악스럽게 여자를 휘감으려 했다.
그 순간.
덥석.
손에 느껴지는 압박감.
어떤 놈이 자신을 막아 세운 것이다.
“너 뭐야?”
머레이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는 내려다봤다. 어차피 동양인들. 자기보다 큰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건 가슴팍.
“……?!”
스르륵, 고개를 든다. 내려다보던 시선이 수평이 되고, 그것도 모자라 올려다봤을 때.
한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 여자. 나가.”
“누구 맘…… 끄윽!”
꽈악- 남자의 손이 힘을 주고, 머레이가 몸을 비튼다.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는 여자. 여자는 남자를 향해 몇 번이고 인사하며 클럽 어디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 상황이, 자기 것을 남에게 뺐긴 것 같은 이 굴욕적인 상황이 머레이의 스위치를 켰다.
“퍽…… 퍽. 퍽! Fuck!!”
파직- 파지직-!
대기가 얼어붙는다.
성에가 끼고, 바닥에 얼음이 낀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얼리는, 나중에는 얼음을 이용해 도구까지 재현하는 챈들러 가문의 혈족 계승 ‘아이스 쉬프트’였다.
“죽어라, 병신 새끼야(Son of a bitch)!”
콰직!
머레이를 중심으로 일정 공간이 얼어붙는다.
벽도, 전등도, 문도, 얼어붙었고, 당연히 남자도 산 채로 얼음 조각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만든 광경을 만족스레 지켜보는 머레이.
“큭.”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이, 열 받게 하고 있어.
살짝 뒷감당이 쫄리긴 하지만, 본인은 챈들러다. 이 코딱지만 한 나라가 챈들러를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나.
술이나 더 마시자.
차오르는 우월감을 느끼며 손을 뺐다.
“뭐야. 잘 안 빠지네.”
괜히 잡힌 상태로 얼렸나.
비틀비틀 손을 돌리며 팔을 빼 봤지만, 안 빠진다. 빠질 생각을 않는다.
왜 이러지? 의문이 드는 순간, 싸늘한 감각이 그의 뒷목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
“다했냐?”
고개를 들자.
남자가, 박기혁이 웃고 있었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앞에 둔 아이처럼 해맑게 말이다.
“이제 내 차례지?”
퍼어어억-!
“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