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72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살랑거리던 바람에 더위가 느껴지고 행인들의 차림도 가벼워졌다. 훌쩍 다가온 기말고사로 학생들은 비상사태. 저마다 훈련실을 찾느라 바빴다.
애들은 별다를 거 없다.
준우와 메리의 연애 전선은 여전히 순항 중.
“준우,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응? 무슨 날?”
“하아…… 아니에요. 기대한 내가 바보지요. 밥 안 먹었죠? 밥이나 먹으러 가요. 뭐 먹을까요?”
“돈까스.”
“또요? 싫어요. 오늘은 다른 걸 먹고 싶다고요.”
“알았다. 마음대로 해라.”
“빨리 씻고 나와요. 전에 갔던 호텔, 거기 새로 들어온 식당이 맛있ㄷ…… 이게 뭐예요?”
“선물. 100일 기념.”
“……돈까스 먹으러 가요.”
개인적으로 볼 때마다 신기한 커플이다.
한쪽은 금이야 옥이야 길러진 온실 속의 화초. 한쪽은 온갖 시련을 정통으로 맞은 잡초.
이 둘이 어떻게 사귈 수 있는지…… 이 커플을 보면 이런 게 사랑의 힘인가 새삼 느끼게 된다.
진유리는 새롭게 우리 멤버가 된 김하니를 교육 중.
“하니야, 우리 동아리에선 세 가지만 명심하면 돼.”
“흡! 흐으읍!!”
“첫 번째, 박기혁은 진유리 거다.”
“허억! 허어어억!!”
“두 번째, 진유리는 박기혁 거다.”
“끄아아악!!”
“세 번째…….”
“선배! 이거 꿈쩍도 안 해요.”
“응, 세 번째가 그거야. 세 번째. 문은 반드시 스스로 연다. 힘내. 할 수 있어.”
이쪽은 다른 의미로 신기하다.
내가 아는 진유리는 지독한 마이 페이스에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다. 한때 내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잘나가던 1조를 공중 분해시킬만큼 좋고 싫고가 분명한 아이.
그런 진유리가 김하니한테는 유독 잘해 주더라. 김하니도 그런 그녀를 잘 따랐고.
잘 지내는 모습이 신기해 물어봤더니 “원래 적은 더 가까이 두는 법이거든.”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역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진유리의 똘기였다.
다만 모두가 비슷한 건 아니었다. 변한 것도 있었다.
다름 아닌 우리 봄이와 버찌.
결과부터 말하자면 봄이는 더 이상 아빠를 찾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빠가 싫어진 건 아니고, 여전히 하늘만큼 땅만큼 좋은데 언니니까 참는다나.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다.
버찌는 이제 스스로 걷는다.
제대로 눈도 못 뜬 채 ‘살려 달라.’ 버둥거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봄이가 주는 분유도 잘 먹고 빨빨빨 잘도 기어 다녔다.
이렇듯.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시간은 우리 곁을 스쳐 갔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내일, 그토록 시끄럽던 미국 교류단이 오는 날이 왔고, 강의실로 들어서자 온통 교류단 이야기뿐이었다.
* * *
“내일 교류단 오는 거 맞지?”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오는 거야?”
“난 아직도 모르겠어. 걔들이 왜 와? 저기 아프리카나 유럽 쪽은 그럴 수 있어. 우리랑 비슷하게 포지셔닝과 사냥 위주의 교육을 하잖아.”
“하긴, 하이 캐슬이나 기, 기…….”
“기어스 스쿨.”
“고마워. 기어스 스쿨. 둘 다 사냥보다는 마법이나 기술을 배우잖아. 성적도 실기 시험보다는 연구나 논문, 과제로 평가한다고 하더만.”
“킹메이커 이론 때문이겠지. 그거 연구하려고 오는 거 아니겠어.”
“킥. 얌마, 설마 그걸 진짜로 믿는 거임?”
“못 믿을 건 어디 있어?”
“하, 킹메이커 이론. 그래, 좋아. 붕괴된 생태계를 조정해 붕괴 현상을 강제로 유지시키는 방법. 아주 자랑스러워. 근데 이게 미국이 올 정도야? 객관적으로 말이야.”
“흠…… 철수 말도 맞긴 하다.”
아무래도 미국 교류단의 목적에 대해 말이 많았다.
말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문제다.
아무리 킹메이커 작전이 검증을 통해 이론으로 등록됐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이게 획기적인 방법이냐고 한다면, 난 고개를 저을 거다.
계속 말하지만 발상의 전환일 뿐이지, 이게 편리하거나 시간을 대폭 단축한다거나 같은, 확실한 이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주목받는 이유?
처음이라서.
최초. 퍼스트.
무릇 처음은 주목받는 법이니까.
사실 이 문제는 여기 있는 애들끼리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겨우 학생의 머리에서 생각해 낼 답이었으면 위그드라실이 내게 부탁했겠는가.
강의실에 있는 애들도 이를 알아서일까.
미국 교류단이 왜 오는지, 무슨 목적인지 토의하는 그룹은 아주 극소수였다.
오히려 가장 뜨거운 주제는 따로 있었는데…….
그건 바로 교류단의 명단이었다.
“어머, 어머. 얘 내가 아는 브래드 주니어 맞나? 드라마 ‘더 타임스’에 나온 브래드 아들!”
“시리우스, 시리우스…… 얘 혈족 맞지? ‘타깃팅’ 비슷한 거 쓰던 것 같던데.”
“챈들러, 레빈, 포레스트, 아이제아…… 이게 무슨 교류단 명단이야. 미국 명문가 파티 명단이지.”
“하이 캐슬에 다니는 내 친구한테 들은 건데 성적 상위 10퍼센트만 교류단 신청 가능했다나 봐.”
“기어스 스쿨은 다섯 개 이상 프로젝트 제출한 사람 중에서 선발했다더라.”
“어후, 누가 보면 전쟁 치르는 줄 알겠다. 얘들 왜 이런다니.”
“칼을 간 거지. 너희도 알다시피 요즘 미국, 솔직히 주춤하잖아.”
“하긴 그 말도 맞네.”
“기대가 크긴 하다고 하더라.”
화려하다 못해 위협적인 교류단의 구성.
하나같이 이름을 떨친 유망주들이고, 그게 아니면 미국의 유명 혈족이라더라.
내가 아는 것은 아니고 메리가 말해 줬다. 파티에서 몇 번 본 사람들이면서 말이다.
그런 가운데 이 으리으리한 교류단의 구성에도 불구하고, 가장 주목받는 이름은 정작 따로 있었다.
크리스토퍼 윌리엄.
로자리아 빌랜드 워싱턴.
크리스토퍼 윌리엄은 하이 캐슬 소속의 학생회장이고, 로자리아 빌랜드 워싱턴은 기어스 스쿨 소속의 수석 디자이너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둘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룹이 극명하게 나뉜다는 것.
간단하게 크리스토퍼 윌리엄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저기 저 무리처럼.
“으으, 나 떨려. 정말 윌리엄 오빠 맞겠지? 동명이인, 다른 사람이고 막 그런 거 아니지?”
“아냐, 확실해. 어제 윌리엄 오빠 인스타에 들어가 봤거든. 거기에 무려 티켓이이!!”
“티케엣!!”
“빼박 캔트!!”
“시끄러워 이것들아. 대체 걔가 뭐가 좋다고. 으이구.”
“좋다는데 냅둬. 그런데 너희들, 윌리엄 우리랑 동갑인 건 알지?”
“무슨 상관이야! 잘생기고 능력 좋으면 다 오빠지!”
“아~ 오빠~.”
“근데, 윌리엄이 누구야?”
“……?”
“……??”
“……외…… 계인……?
“……치워. 나 갈 거야.”
“야, 야, 어딜 가. 미친 X들, 모를 수도 있지. 왜 윤주한테 지랄이야!”
“그래, 윤주는 전사계라서 이쪽에 관심 없다고.”
“윤주야, 윌리엄이 누구냐면, 하이 캐슬 학생회장이야. 하이 캐슬은 알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미국 서부에 있는 아카데미잖아. ‘마법 궁전’들 모여 있는 곳.”
“잘 아네. 그럼 그 ‘마법 궁전’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학파가 누구인지 알아?”
“그건 몰라.”
“엘리멘탈 학파야. 정통 위저드를 키우는 학파로 심지어 정령 마법까지 모든 마법을 다룰 줄 알아야 진정한 위저드라고 말하는 곳이야.”
“엘리멘탈? 어디서 들어 봤는데……. 맞다. 엘리멘탈 마스터.”
“That’s Right! 훌륭해. 엘레멘탈 마스터. 미 서부 최강의 히어로. 크리스토퍼 윌리엄은 이 엘리멘탈 마스터의 제자야.”
“아하……!”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데 배경까지 눈부시다.
전통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백마 탄 왕자가 이럴까? 여자아이들이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도 이해가 됐다.
반면 로자리아 빌랜드 워싱턴은 남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기어스 스쿨에서는 로자리아가 온대.”
“걔 ‘메카닉 마스터’ 제자 맞지? ‘로잘린 엔진’ 만들어서 ‘멀린상’ 받은 애.”
“크으, 예쁜데 귀엽고. 귀여운데 섹시하고.”
“난 그딴 거보다 졸라 센 게 마음에 들어. 프리즘에 뜬 로자리아 매드 무비 봤어? 빅터로 싸이클롭스 우그러트리는 장면. 키야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빅터 시리즈’도 볼 수 있으려나.”
“로잘린이 오니까 가능할 수도.”
“제발 보고 싶다. ‘알파 기어’.”
미녀에 로봇. 둘 다 남자라면 늘 꿈꾸는 로망 같은 것.
로자리아 빌랜드 워싱턴은 이 사기적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당연히 남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수밖에.
이렇듯 여기도 교류단, 저기도 교류단. 강의실이, 아니 아카데미 전체가 온통 미국 교류단 이야기로 가득하다.
굳이 피곤하게 이야기에 끼지 않아도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귀에 강제로 정보가 꽂힐 정도니까 말이다.
이 소란 통에 내가 할 일은 감각을 넓힌 채 정보를 수집하기만 하면 끝.
정보라는 게 경중이 있다 보니 종이에 끄적이면서 쓸 만한 정보를 추려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끄적이던 중 내 귀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조장! 조장도 미국에서 왔잖아. 쟤들 봤어?”
“맞네. 조장이라면 윌리엄이랑 로자리아랑도 알겠다.”
“……맞다. 둘 다 같은 미들 스쿨을 다녔다.”
“오오오.”
헨리였다.
2조장. 아직까지도 세계 최고의 세이프티라 불리는 타이탄의 아들.
“성격은 어땠어?”
“윌리엄이 그렇게 잘생겼다며?”
“로자리아 예쁘냐?”
모두가 헨리에게 주목했다.
성격, 취향, 외모, 취미 생활 등 별의별 질문들이 쏟아지는데…… 이상했다. 정작 헨리의 표정은 별로였다. 무언가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
“되도록 그 둘에게 접근하지 마라.”
“……엉?”
“무슨 말이야.”
“조언이다. 둘은 굉장히 Dangerous(위험)하다. 기억해라.”
이 말을 마지막으로 헨리는 입을 꾹 다물었고, 때맞춰 들어온 교수로 모여든 아이들도 자연스레 해산했다.
“음, 그러네. 맞아. 쟤가 미국에서 왔지.”
끄적이던 종이를 찢어 버린다.
“괜히 썼네.”
종이 아깝게.
가장 확실하고 신빙성 높은 정보가 저기 있는데, 뭐 하러 피곤한 짓을 했던 건지.
수업이 마치고 난 헨리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야기 좀 하자.”
* * *
헨리.
풀 네임은 헨리 월 주니어(Henry wall Jr).
현존 최고의 세이프티라는 ‘타이탄’ 월터 헨리의 아들이며, 미국의 대표하는 명문가 월(Wall) 가문의 계승자.
이토록 찬란한 명성에 걸맞게 헨리는 철이 들 무렵부터 압도적인 재능을 자랑했고, 자연스럽게 미국 최고의 재능들이 모인다는 ‘노블 가디언(Guardian)’, 한국으로 치면 명문 사립 중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크리스토퍼 윌리엄과 로자리오 빌랜드 워싱턴을 만나게 되는데.
“헨리 월이지? 반가워. 난 크리스토퍼 윌리엄이야. 윌리엄이라고 불러.”
“네가 헨리 월? 흠, 아닌데? 내가 아는 헨리 월은 더 우람하고 커다란데, 너는 너무 작은데? 흐음…….”
둘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윌리엄은 우아하며 지적이었고, 로자리아는 엉뚱했지만 순수해 보였다.
결과적으로, 착각이었다.
어린 헨리의 착각.
우아하며 지적이던 윌리엄이 실은 오만하고 경솔하며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란 것이나.
“음, 악취가 나네. 다른 곳으로 갈까?”
“난 말이야. 국가적으로 칭크들을 관리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해.”
“헨리, 우리들은 귀족이야. 이 나라를 책임지는 지배층이라고. 그런데 고작 햄버거 먹으려고 줄을 서야 한다고?”
엉뚱했지만 순수하게 보였던 로자리아가, 사실 매사에 계산적이며 사회성이 결여된 이기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이나.
“왜 도와줘야 하는데?”
“왜 불쌍한데?”
“흐응, 싫은데. 왜 함께 협동해야 해?”
“네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나, 나의 행동을 강제하려는 이유. 말해 봐. 이유가 타당하다면 도움을 줄 용의가 있어.”
헨리는 도저히 이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 이 두 사람의 행동은 절대 정의롭지 못했으니까.
정의를 수호하는 월 가문의 일원으로서 헨리가 두 사람과 척을 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질긴 악연이 시작된 것이다.
* * *
목이 타서일까, 불쾌한 기억에 속이 쓰려서일까.
헨리는 1.5리터 이온 음료를 단숨에 비우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로자리아는 나았다. 걔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무관심하니까. 하지만 윌리엄은 달랐다. 그는 유독 내게 집착했다.”
헨리에게 시비를 거는 윌리엄.
가만히 당해 줄 헨리도 아니었게 둘의 싸움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불행하게도 나와 윌리엄의 실력은 엇비슷했다. 링이나 정해진 공간에서 싸우면 전사인 내가 우세, 무제한 룰에서 싸우면 마법사인 윌리엄이 우세.”
차라리 한 명이 압도적으로 강했으면 싸움은 계속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실력은 엇비슷했기에 둘의 싸움은 격해졌고 결국, 나중에는 도를 넘을 정도의 수준에까지 이른다.
“이 흉터 보이나.”
헨리의 오른쪽 가슴에 난 흉터. 마치 화상 자국처럼 짓이겨진 흉터였다.
“이게 녀석과의 마지막 결투를 끝내고 남은 흉터다.”
패배한 헨리는 전치 8주. 승리한 윌리엄은 반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패자는 패자대로, 승자는 승자대로 양쪽 다 웃지 못하는 결투였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우리는 강제 퇴학당했다.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반 미들 스쿨로 갔고, 윌리엄은 서쪽으로 간다는 소문만 들었다. 여기까지가 전부다.”
회상을 마친 헨리가 눈을 뜨고, 앞에 있는 박기혁을 바라봤다.
“하나 물어보자. 만약 이번 교류회에서 사고가 난다면 어느 쪽일까? 윌리엄과 로자리아, 둘 중에서.”
“물어보고 말고도 할 거 없다. 윌리엄이다. 로자리아도 위험하지만 그녀는 욕심에 관해서 솔직하다. 그에 반해 윌리엄은 남들에게 자신의 욕심을 들키는 것을 수치스러워한다.”
“오케이, 이해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확인만 하고 밥 먹자.”
박기혁이 몸을 일으키고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너 아까 말했지? 너랑 윌리엄 놈이랑 실력이 엇비슷하다고.”
동아리실 정중앙에 세워진 스파링 코트. 박기혁은 그 코트의 입구를 활짝 열고는 씨익 웃었다.
“실력 한번 보자. 올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