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57화>
1년 전, 이 나라를 충격에 빠트린 진화단 납치 사건은 공식적으로 ‘진화단의 알력다툼’으로 마무리됐다.
경찰청장이 ‘인위적인 혈족 계승이라는 허무맹랑한 연구를 무리하게 진행하다 벌어진 사건’이라며, 연구는 실패했다 못 박은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박기혁이 연구실에 들어섰던 시점, 연구는 이미 궤도를 넘어 있는 상태였다. 실제로 혈족, 단일 혈족에 관해서는 80퍼센트의 능력을 보존한 상태로 계승 가능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완성품은 아니었다. 안정화가 안 된 터라 부작용이, 언제, 어떻게, 무슨 방식으로 나올지 모르는 미완성품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볼까? 눈앞에 놀라운 결과가 있는데?
막말로 이 상태로 발표만 했어도 세계는 충격에 빠졌을 거다. 이제껏 미지의 힘이라 불리며 고귀한 영역처럼 취급받던 ‘혈족 계승’에 닿은 것이니까.
그럼 경찰이 거짓말을 했던 건가? 이런 희대의 연구 결과를 꿀꺽하고서도 입을 싹 닫은 거냐고?
그건 아니다. 그들은 진짜 몰랐다.
왜냐하면 박기혁이 조작했으니까.
본인이 검호라는 혈족이기에 혈족의 힘을 지키려고?
단언컨대 아니었다.
물론 자신의 가족이 아닌 검호가 돌아다닌다는 게 찝찝하긴 했던 박기혁이지만,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다.
연구자의 시선에서 볼 때, 이 연구는…… 계륵이었니까.
생각해 봐라, 연구가 완벽하게 완성됐다면 굳이 진화단이 이런 무리한 도박을 했을까?
‘계승이 가능하다.’는 다르게 보면 ‘계승만 가능하다.’로 볼 수 있었고, 이때의 연구가 딱 그랬다.
이후의 안정화다 뭐다 해서 얼마나 많은 재화와 시간을 잡아먹을지 감당도 안 되는 주제다.
분명히 탐나는 성과이긴 하지만, 먹으면 어떤 식으로든 탈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 탈이 나도 완벽하게 혈족 계승의 비밀을 파헤칠 수만 있다면 감수할 수 있겠지. 그런데 고작 80퍼센트의 능력이다. 아류란 말이다.
그렇다면 박기혁이 연구를 조작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박봄 때문에.
연구가 공개된다면 혈족 계승이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희생당한 아이들에게 ‘다혈족 계승’을 시도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타고 올라가다 보면 봄이의 존재까지 드러날 수도 있다 판단해서였다.
한 사람의 몸에 16개, 아니, ‘검호’까지 합해서 17개의 혈족이 숨 쉬고 있다.
이 사실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아무리 검호라 해도 박봄을 지켜 주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고민 끝에 실험 자체를 조작한 것이다.
모두 봄이를 지키기 위해서.
* * *
“…….”
“음, 이게 이 정도로 민감한 주제인가요?”
“…….”
“…….”
나와 위그드라실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재 봄이의 상태를 아는 사람은 우리 가족을 제외하면 전무하다.
그런데 가족이 아닌 이가 눈치챘다.
불안 요소가 생긴 것이다.
어떻게 할까…… 감정을 지운 눈으로 위그드라실을 말없이 바라본다.
“…….”
“…….”
싸늘한 대치가 이어지던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위그드라실.
“제가 박기혁 군을 왜 좋아하는 줄 알아요?”
“…….”
“그 눈 때문이에요. 당신의 눈은 인간 같지 않은, 오히려 저희 쪽에 가까운 눈이거든요.”
인간처럼 행동하고, 인간처럼 말하지만. 수호령이라며 치켜세우지만, 위그드라실의 본질은 몬스터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몬스터.
“뭐랄까, 동족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헛소리 집어치우고…….”
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대답 여하에 따라 이쪽의 대응도 달라질 테니까.”
말을 함과 동시에 언제라도 ‘마귀’를 꺼낼 수 있게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반대쪽 손에서는 ‘아포칼립스’를 깨웠다.
“정말이지, 인간은 불필요한 의심이 너무 많아요. 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질 못하는 건가요. 조금 상처받았어요.”
“말 돌리지 마라.”
“……박봄 양이 불안정하다는 정도는 알죠.”
위그드라실이 박봄을 보며 씁쓸하게 웃는다.
“작은 몸에, 채 완성되지 않은 그릇. 그 속에 가득한 의문의 힘‘들’. 각기 다른 성격의 힘이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대치하는 가운데, 이를 강제로 찍어 누르고 있는 강력한 힘 하나.”
위그드라실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킨다.
“당신. 박기혁 군의 힘이죠. 여기까지가 제가 본 전부예요.”
“……재미있네. 이 사실을 아는 다른 사람은?”
“없네요.”
“내가 믿을 근거는?”
“그만. 좋게 봐주는 건 여기까지예요.”
위그드라실의 기파가 매섭게 피어오른다.
“분명히 말했죠. 제가 선의로 말한 거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유치한 인간의 잣대를 들이밀지 말란 말이에요.”
“…….”
“…….”
찰나의 정적.
나의 마나와 위그드라실의 마나가 허공에서 춤추길 잠시.
내가 먼저 주머니에서 손을 뺀다.
“후우. 미안. 이래 봬도 아버지라서.”
“저도 사과하죠. 당신에게 박봄 양이 이렇게 큰 줄은 몰랐어요.”
“아까 했던 이야기 다시 해 봐. 봄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준다는 거지?”
“어디까지나 박기혁 군이, ‘생태계 붕괴 현상’을 조사해 줬을 때 이야기죠.”
“말해 봐. 가능하다면 그깟 조사쯤은 얼마든지 해 줄 테니까.”
“보기 좋네요. 박봄 양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있군요.”
위그드라실이 흐뭇하게 웃으며 찻잔을 채우더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재 박봄 양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뭘까요?”
“가장 시급한 문제라…….”
당장 말을 잇지 못한다. 너무 많은 게 생각나서.
“답하지 못하겠다면 제가 할까요. ‘불안정함’ 혹은 ‘위태로움’. 이게 현재 박봄 양의 문제예요.”
내면에서 싸우는 힘도, 육체의 그릇도, 정신의 영혼도, 모든 게 불안정하다.
“마치 유리 조각 같아요. 톡 치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연약하고, 위태롭죠.”
“그렇다면 손을 쓰지 못한 이유도 알겠네.”
“그 또한 너무 불안정해서죠.”
차라리 다 자란 성인이 이랬다면 손을 쓰기는 편하다. 그릇이나 영혼 같은 게 이미 완성돼 있을 테니까.
실제로 비슷한 예가 여기 있잖나.
내 몸에서 ‘마왕의 마도’와 ‘검호의 본능’, 그리고 ‘거인의 육체’가 뒤엉켰을 때가 있었다. 그때 내가 어떻게 했나? 서로 불을 붙여 정면 돌파했다.
모두 그릇이나 영혼이 완성돼 있는 상태였으니까 가능한 일.
그러나 봄이는 고작 6살이다. 농담 조금 보태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나이다.
그릇도 영혼도 자라는 나이.
이때는 아무래도 조심할 수밖에 없다. 자칫하다간 봄이가 망가질 수 있다.
난 봄이의 미래를 걸고 도박을 할 생각이 결코 없었다.
“박기혁 군은 아마 박봄 양이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최소한 손을 댈 수 있을 정도까지요. 한 10살? 그 정도만 돼도 당신이라면 충분히 고칠 수 있겠죠.”
“8살만 돼도 충분하다.”
“훗. 역시 자신감. 박기혁 군답네요.”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해, 어떻게 해결해 줄 거야.”
“급하시긴.”
위그드라실이 싱긋 웃으며 손뼉을 쳤다.
짝짝, 박수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녀의 옆으로 나무가 솟구쳤다.
그리고 거목의 줄기 사이로 반짝이는 무언가.
“저희는 평생 한곳에 뿌리내린답니다. 세계수의 숙명이랄까요.”
마치 다이아몬드로 만든 사과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열매.
“영약이라면 소용없다. 아직 봄이는 영약을…….”
“조용. 계속 말하게 해 주세요.”
내 말을 자른 위그드라실이 조심스럽게 나무줄기 안으로 손을 비집어 넣는다.
“저희에겐 뿌리내린 곳이 고향이며, 평생을 가꿔야 할 터전입니다.”
그런데 뿌리내린 곳에 다른 생명이 있다면?
어디선가 들어 봤을 거다. 내 눈에 귀한 것이 남의 눈에도 귀하다고.
세계수가 뿌리내리기 좋다는 뜻은 생기가 충만하다는 뜻. 백이면 백 생태계가 꾸려져 있을 거다.
그러면 이들을 어떻게 할 건가.
“인간은 평생에 걸쳐 자아를 확립하지만 저희는 이때, 이 질문에 답할 때, 비로소 ‘자아’가 확립되죠.”
‘배척’을 선택하면 모든 생명을 부수고 0에서부터 오직 자신을 위한 생태계를 구성한다.
‘고립’을 선택한다면 철저히 주위로부터 자신을 가둔 채, 평생을 숨어 산다.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어떻게 할까.
“욕심은 분쟁을 낳고, 분쟁은 결국 피를 부르죠. 힘으로 우위에 섰을 때야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약 힘의 논리가 역전된다면…….”
남은 건 파멸뿐.
평생을 한곳에 뿌리내린 채 살아야 만하는 세계수에게 적을 만드는 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래서 위그드라실은 선택하게 된다.
‘조화(調和)’를.
“고백하자면 사실 전 그렇게 온화하지만은 않답니다. 그럼에도 더불어 살아가길 선택한 건, 오직 생존을 위해서예요.”
생존의 방편으로 선택하게 된 ‘조화’.
위그드라실은 애정을 쏟아부었다.
땅도, 환경도, 이 땅에 뿌리내린 모든 생명에게.
“이래서 ‘홀로 완성되는 숲은 없다.’는 말이 나온 거예요. 맞아요. 우리 아카데미의 근본이죠. 사실 이 말은 학생들이 아니라, 제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훗. 재미있죠.”
이렇게 자아가 확립된 세계수는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많은 일을 하지만, 거기까지는 박기혁 군이 알 필요 없고…….”
위그드라실이 살살 아이를 달래듯 어루만지니, 줄기가 허락하듯 양옆으로 갈라진다.
“세계수는 10000일에 걸쳐 열매를 맺는답니다. 우리는 이것을 땅에 심어 그릇을 키우죠.”
자식이 아닌 분신 같은 것. 또 하나의 ‘나’를 만드는 거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열매에는 저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힘도, 능력도, 심지어 위그드라실의 자아인 ‘조화’도.
“조화의 열매. 만물이 함께하는 이 힘이라면, 박봄 양의 내부도 안정되지 않을까요?”
독립된 개체를 하나의 숲으로 만든다.
봄이를 괴롭히는 수많은 혈족들을 ‘조화’라는 이름으로 묶어 버리면…….
“어때요. 거래할 생각이 드세요?”
당연히 나의 대답은.
“콜.”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래였다.
* * *
며칠 뒤, 아카데미로 수십 대의 차량 행렬이 이어진다.
차량의 문에 그려진 세 자루의 검이 교차해 있는 문양. 세계 5대 에이전트라는 옵티멈의 문양이었다.
옵티멈이 아카데미에 무슨 일인가?
학생을 비롯해 교직원 모두가 차량 행렬을 주목하는 가운데, 차량이 멈춰 선 곳은 푸른 게이트 앞. 지혜의 숲으로 가는 통로였다.
그리고 차량의 문에서 내린 남자.
차기 수호자 후보 1순위이자, 역사를 통틀어 그 무력만은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최강의 검호.
산군 박수혁이었다.
“여기는 여전하네.”
“단장님, 장비 내립니까?”
“부탁 좀 할게요.”
박수혁이 터덜터덜 지혜의 숲으로 향했다.
게이트에 발을 내딛으니 익숙한 감각과 함께 시야가 점멸한다.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 박수혁은 넘쳐 오르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아카데미의 모든 사람에게 도전했을 때가 있었다.
동기를 평정하고, 선배들을 발아래 두고, 심지어 교수들마저 꺾어 버렸다.
그렇게 아카데미 전부를 발아래에 둔 박수혁은 마지막으로, 이 아카데미의 정점에 도전하게 되는데.
그게 이곳의 주인, 위그드라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불을 걷어찰 만큼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부정하지는 않는다. 검호에게 승부욕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니까.
“어서 오세요. 박수혁 군.”
그의 시야에 위그드라실이 웃고 있었다. 옛날과 전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웃음을 짓고서.
“오랜만입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박수혁 군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봐요. 검을 잡고 있잖아요. 훗.”
“아…….”
본능적으로 검에 손이 갔나 보다.
박수혁이 뻘쭘함에 뒷머리를 긁는다. 위그드라실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훗. 역시 재미있어요. 수혁 군도, 민지 양도, 기혁 군도. 검호들은 정말 저를 실망시키지 않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장비 들어오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는데.
“한판 어떻습니까?”
박수혁이 검을 들고.
“와요. 오랜만에 추억이나 되새기고 좋네요.”
위그드라실의 주위로 초록 구체가 떠오르고 있었다.
* * *
학생회 대강당.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한발 떨어져 혼자 앉아 있던 나는.
“……형님은 잘하고 있으려나.”
무엇인가, 꼭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때, 갑자기 내 눈앞에 튀어나온 인영.
“왁!!”
“……뭐 하냐.”
진유리였다. 저기 입구에서부터 몰래 은신 마법 쓰고 오더라.
“쳇. 또 들켰어. 이번에는 자신 있었는데.”
“한참 멀었다. 그건 그렇고, 여긴 웬일이야?”
“왜긴, 너 가는데 당연히 나도 가야지.”
“안 와도 된다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나와 위그드라실의 거래다. 난 굳이 여기에 내 친구들을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행동하려고 했는데, 얘는 정말.
“나 아니면 누가 너 챙겨 줘.”
탁탁, 진유리가 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준다.
“먼지 없잖아. 은근슬쩍 만질래?”
“훗. 요즘 몸 좋은 남자가 그리 좋더라?”
“너를 어찌하냐.”
미치겠다. 이 천방지축을 어찌할까
한참을 생각하는데 강당 스피커로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붕괴 현상 조사’ 사전 브리핑이 있겠습니다. 조사단 여러분들은 정숙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