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53화>
화창한 아침.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김연희는 출근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데스크 직원과 인사를 나누고.
“좋은 아침이에요.”
“오셨습니까, 대표님.”
“다들, 오늘 하루도 파이팅하세요.”
평소처럼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실장에게 보고를 받았으며.
“일렉트론에서 한국 지부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접촉해 왔습니다. 인공 정령석 물량을 늘릴 수 없냐고 문의했는데, 일단은 보류했습니다.”
“거절하세요. 힘들게 맞춘 균형인데, 누군 더 주고 누군 덜 주면 귀찮아져요.”
사옥의 최정상, 이 옵티멈의 두뇌라 여겨지는 대표실에 들어서자 은은히 퍼지는 커피 향. 비서실 직원이 내려 준 에스프레소 향이었다.
“훗.”
완벽해.
이제 가족들 사진을 보며 에스프레소를 음미한 뒤, 회의를 시작하면 실로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래, 이때까지는.
이 웬수 같은 남편 놈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응? 당신이 이 시간에 왜?”
“연희가 보고 싶어서!”
“진심으로 걱정돼서 그러는데, 우리 아침 같이 먹었어. 그건 기억하지?”
“시간은 중요치 않아!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나! 푸하하하!”
“……후우.”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김연희.
이런 일이 한두 번이야?
박건을 상대할 때는 첫 번째도 침착, 두 번째도 침착이다.
괜히 흥분해 말렸다간 이쪽만 손해다. 사랑, 정열, 평화 등, 최소 30분짜리 헛소리 퍼레이드가 이어지리라.
“나도 사랑해. 사랑하니까, 쓸데없는 말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기대하시라. 짜잔!”
“USB?”
“노노노. 그냥 USB가 아니지. 울 귀염둥이 손녀님의 깜찍한 재롱이 들어 있는 USB! 어때? 아직도 쓸데없나?”
“틀어 봐.”
“자, 여기 팝콘 같이 즐기자고.”
사실 김연희는 USB가 나왔을 때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녀의 막내는 딸 이야기만 나오면 껌벅 죽으니까. SNS만 봐도 온통 봄이 사진뿐이다. 당연히 오늘처럼 영상도 자주 보내 줬고.
다만 궁금한 건, 왜 그냥 안 보내고 USB로 보냈나. 그게 걸렸지만 뭐 있겠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영상을 틀었다.
박기혁에게 받았다더니 영상의 장소는 동아리실.
‘출구 없는 지옥’이었지…….
김연희가 아들의 네이밍 센스에 실소를 터트리는 사이 화면에는 박기혁을 포함해 한준우, 메르헴, 진유리, 그리고 박봄까지. 그녀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너무도 일상적인 풍경.
자연스레 의문이 들었다.
‘대체 뭘 보여 주고 싶은 거지?’
그리고 이런 김연희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영상의 초점이 한쪽으로 몰리는데.
“인형극?”
“흠? 저거 도마뱀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 세트 아닌가?”
“……정말이네?!”
날 때부터 마나를 품고 태어나는 진룡.
때문에 마나 제어가 필요하고, 저 인형으로 마나 제어를 가르친다고 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김연희가 알기로…….
“저거 귀한 건데 저렇게 들고 나와도 되나?”
봄이가 익숙하게 가지고 노는 것을 보니 하루 이틀 가지고 논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의문이 들긴 하지만 넘어간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김연희가 집중하는 건 인형, 캡틴 타이거의 움직임이었다.
“……제법이잖아.”
진짜 사람처럼 생동감 있게 검을 내리치는 캡틴 타이거. 보법이나 검을 내리치는 자세나 깔끔했다.
“거참, 우리 손녀 기본기가 탄탄하구만!”
“……인형으로 검을 저렇게 다루다니.”
“하하. 캡틴 타이거라! 암, 호랑이는 언제나 옳지! 우리 손녀가 마나 제어만큼이나 센스가 뛰어나.”
“쟤는 뭘 시켜도 되겠어.”
“힘든 일을 겪었는데도 참 잘 컸어.”
“기혁이도 아빠 태가 나고요.”
두 사람의 입가에 스르륵 미소가 번졌다.
박봄의 ‘비밀’을 아는 두 사람이다. 납치, 실험, 혈족이란 시한폭탄, 위험했던 순간, 그리고 이를 통제하는 ‘박기혁’의 존재까지.
가족으로서 모두 알고 있기에 박기혁과 박봄 부녀가 한 앵글에 잡힌 장면이 더욱 가슴 따뜻하게 여겨졌다. 뭔가, 수혁이를 처음 안았을 때의 기분이랄까.
하지만 따뜻한 건 따뜻한 거고.
이어질 영상은 따뜻함보다는 충격이었는데.
잠시 뒤, 캡틴 타이거가 하늘 높이 대검을 들었을 때.
봄이의 입에서 나온 단어.
- 거. 모. 류!”
거모류? 설마, 검호류?
- 강. 검. 술!
“강검술?!”
“잠깐만 조용해 봐요!”
- 산. 사. 때!
“……!!”
“……!!”
검호류 강검술.
산사태.
검호의 검술이 인형의 검으로 재연됐다.
당연히 김연희의 턱은 바닥까지 추락 중.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하하! 뭐긴 뭐야. 산사ㅌ…….”
“좀 조용해 봐요!”
며칠 전 진유리와 놀랍도록 똑같은 반응.
그날 밤, 검호 가문 가족회의가 열렸다.
주제는 봄이.
가문의 막둥이 진로에 대한 문제였다.
* * *
한편 박봄의 영상은 의외의 곳에서도 주목받고 있었다.
진룡산 최정상.
고즈넉한 정취를 자랑하는 한옥 저택.
진룡의 정점, 진도하가 거주하는 이곳에서.
- 거. 모. 류!
- 강. 검. 술!
- 산. 사. 때!
틱-
마지막으로 영상을 확인한 진도하가 리모컨으로 영상을 껐다.
“진유리.”
“응.”
“저 아이가 인형으로 ‘검호’의 기술을 썼고, 이게 부서졌다. 이 말이지?”
“아빠, 그건 말이야…….”
“아니, 대답은 됐다. 영상이 있으니까.”
진도하가 차로 입을 축이고는 무릎 꿇고 있던 진유리를 내려다봤다.
“네가 ‘워 아머’란 것을 만들 때도 그러려니 했다. 연구 명목으로 창고를 털어 갈 때도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부서진 교육용 인형 세트, 정식 명칭은 ‘아룡(兒龍) 교육 세트’로 향했다.
“가문의 기물을 허가 없이 들고 나간 것도 모자라 파손까지 했다라…… 난 누구한테 죄를 물어야지? 너? 아니면 저 아이?”
“아빠,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봄이는 잘못 없어요!”
봄이란 이름이 언급되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진유리.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던 진유리가 마치 반성한다는 듯이 손을 더 빠짝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진도하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내 딸이라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진룡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자, 최고의 망나니라 불리던 진유리가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에 반성하는 척까지 다 한다.
저 봄이란 아이 때문에.
저 아이가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다.
“어울리지도 않은 짓은 집어치우고.”
진도하가 손을 휘젓자 덜컥, 의자가 뒤로 빠지고.
“앉아라.”
이때다 싶은지 진유리가 잽싸게 앉는다.
“이번에는 넘어가지만 다음은 없다. 명심해라.”
“응!”
“이제 저 아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쟤가 ‘고양이’네 막내의 양녀라고?”
“아빠는 고양이가 뭐야. 그리고 굳이 양녀라고 해야겠어? 그냥 봄이라고 해.”
“양녀든 봄이든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진도하가 궁금한 건 단 하나.
“어떻게 저 아이가 ‘고양이’의 검술을 쓸 수 있는 거지?”
검호의 검술은 일반적인 기술이 아니다.
‘발검’으로 검을 쥐는 방법을 배우고, ‘쾌검’으로 빠름을 익힌다. ‘강검’은 힘을, ‘중검’은 무게를, ‘환검’은 환상을, ‘유검’은 부드러움을, ‘변검’은 변화를.
검이라는 무기로 할 수 있는 모든 기예가 총망라된, 검호를 완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교본’이었다.
오직 검호를 위해, 더욱 완벽한 검호를 만들기 위해 탄생한 교본.
때문에 검호가 아닌 이들은 설사 알아도 사용조차 못하는 게 이 검호의 검술이었다.
“……진짜? 저렇게 단순한데?”
“흉내야 낼 수 있겠지. 하지만 검술이 가진 본연의 파괴력을 발휘하진 못해.”
옛날부터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검호의 검술을 익히면 나도 검호처럼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하고.
실제로 몇몇의 검호는 단지 ‘재밌겠다.’는 이유로 기술들의 일부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폐쇄적인 진룡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
그럼에도 진도하는 이게 검호답다고 생각했다. 박건 자식만 봐도 알겠지만 검호들은 괴팍하기로 유명하니까.
어쨌든 수많은 시도가 있었고, 결과는?
당연히 꽝이다.
모조리 실패했다.
“혈족을 타고나지 않으면 검호의 기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지.”
“그러면 봄이도…….”
“그래, 검호의 기술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미 검호란 거다.”
“설마, 봄이가 진짜 딸?!”
진유리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정작 진도하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
‘유리는 가지고 놀지 않아서 몰랐겠지만.’
이번에 진유리가 들고 나간 인형. 캡틴 타이거라는, 실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름으로 불리는 저 인형은 사실 ‘불량품’이다.
워낙 난이도가 높아 아동용 기구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정되어 창고 구석에 박아 넣은 불량품.
그런데 그 불량품을 저 봄이란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룬다.
‘인형극이 끝날 때까지 인형을 유지했다는 점만 봐도 마나량은 상상 이상이야.’
‘중간에 ‘더블 캐스팅’을 쓴 것으로 보아 전문적으로 마법을 배웠을 확률도 높아.’
‘무엇보다…….’
검호의 검술을 인형으로 펼치는, 불가사의한 마나 제어력.
이 얼마나 훌륭한 마법적 자질이란 말인가!
탐난다.
아깝다.
저 아이의 무시무시한 마법적 재능이 탐이 나고, 하필이면 검호의 식구라는 사실이 몸서리치도록 아까웠다.
“……그래도 박기혁이란 청년은 마법에 조예가 깊다고 하니.”
무식한 박건보다는 대화가 되겠지.
결심을 마친 진도하가 오랜만에 펜을 들었다.
박기혁 님에게……
* * *
일이 커졌다.
평소처럼 동아리실 카메라로 봄이 영상을 찍어 보냈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인형으로 검술 좀 펼친 게 어지간히 놀라우셨나 보다.
동영상을 드린 날 저녁. 집에 들어가자마자 난 취조당하듯 부모님한테 잡혀 있어야만 했다.
“기혁아, 봄이 유치원 다른 데로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 왜 있잖아, 영재 교육원 같은 곳으로.”
“검을 가르치자. 봄이는 검을 위해 태어난 아이다. 내가 직접 가르쳐 주마.”
여기에 형이나 누나나 한마디씩 거들며 상황을 부추겼는데.
“아빠는 저리 가. 내가, 내가 가르칠게. 여자는 여자한테 맞는 검이 있는 거야.”
“너야말로 저리 가. 기혁아, 너도 알겠지만 모든 배움은 시작이 제일 중요한 법이란다.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벽에 막히는 법. 우리 중에 가장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에게 배우는 게 맞지 않겠니?”
“그러면 난 기본도 모른다?”
“아들아, 방금 말 오만방자하구나. 나와라. 아빠의 위엄을 보여 주지.”
“이건 못 참지.”
“……후우, 이놈의 집구석. 전부 조용햇!!”
때 아닌 봄이 쟁탈전.
정작 당사자인 봄이는 나와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데, 어른들끼리 저마다 자신이 가르치겠다며 아우성이다.
여기까지면 다행이게. 다음 날 진유리를 통해 내게 전해진 한 통의 편지. ‘박기혁 님에게’로 시작된 이 편지의 보낸 이는 전혀 예상 밖의 인물.
진룡의 가주 진도하였다.
“……이렇게 만남에 응해 줘서 감사합니다. 저는 진유리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평소 딸아이가 폐를 끼친다고 들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박봄 님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녀는 최고의 마법사가 될 재능을 가졌습니다.”
유리를 통해 진도하가 인재 욕심이 많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성장 플랜까지 말하며 돈은 전부 자신이 대주겠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도하가 인재에 대해 진심이란 것을.
어쨌든 봄이의 영상 하나로 일어난 소란은 잘 마무리되어 흔한 해프닝으로 끝났고, 우리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와 아카데미 학생으로서 게이트로 향했다.
“아쁘아! 이거! 선물 이모가 사 죠쏘!”
물론 봄이도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