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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명가의 마왕님-42화 (42/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42화>

필드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 노해춘의 시선이 한쪽에 고정되어 있다.

발악하는 쿠마스, 부서지는 대지.

마치 색칠 공부를 하는 것처럼, 푸른 초원에 흙색 구멍이 실시간으로 뚫려 가는 모습의 전장에서.

대검을 든 박기혁과 백색의 군세가 쿠마스를 착실히 썰어 버리는 중이었다.

“……경이롭군요.”

박기혁이 대검을 우악스럽게 내려쳤다. 형과 식, 어느 것도 없는 단순한 내려치기.

검술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기본기였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랬다. 기술의 발전은 ‘결핍’에서 시작한다. 모자람을 인정하고 나의 결핍된 부분을 보안하기 위해, 그래서 나보다 강한 상대를 꺾기 위해 발전한다고.

태초의 인간은 연약했다.

늑대처럼 단번에 먹잇감의 숨통을 끊는 송곳니도 없었다. 사자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었다. 하이에나의 턱도 없었다.

어느 하나, 야생의 세계에서 인간이 내세울 건 없었다. 그런 인간이 모자람을 보안하기 위해, 생존을 위해 선택한 게 ‘기술’이다.

하지만.

애초에 시작부터 결핍이 없는 인간이라면?

완성된 인간이라면?

늑대를 능가하는 송곳니가 있고, 사자보다도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다면?

굳이 기술이 필요 없지 않을까?

지금 노해춘의 눈에 박기혁이 그랬다.

내려치고, 내려치고, 또 내려치고, 채찍처럼 휘몰아치는 쿠마스의 공세에도 박기혁은 집요하게 본체를 두드렸다.

오직 내려치기 하나로.

“전에 놈은 47번 버텼거든. 그러니까 넌, 날 더 즐겁게 만들어 봐!”

박기혁이 활짝 웃으며 검을 내리쳤다.

죽이겠다.

너를 죽이겠다.

절대로 너를 죽이겠다.

기술도, 심득도 없는 오직 살기뿐인. 날것 그대로의 검.

이게 박기혁의 검이었다.

노해춘은 부르르 몸을 떤다.

벌써 며칠째 보는 장면이지만 여전히 전율적인 광경이었다.

“후우……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군.”

이러하니 박기혁의 전투는 말초적인 면이 강하다. 무언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나이의 싸움이라고나 할까.

노해춘은 괜히 자신의 애병인 장창을 쓰다듬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해춘도 현역일 때가 있었다. 누구보다 뜨겁던 시절. 창 한 자루만 있으면 그 누구도, 어떤 난관도 두렵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박기혁의 전투는 그때의 뜨겁던 시절을 떠올릴 만큼 원초적이며 자극적이었다. 이제는 식어 버렸다 생각했던 노해춘조차도 강렬한 투기가 샘솟을 정도로.

노해춘이 들끓는 투기를 진정시키던 그 시각. 박기혁의 전투도 다른 국면으로 치닫는다.

파지직- 지직…… 푸슉-!

절대 깨지지 않을 것만 같던 쿠마스의 외피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검은 핏방울이 상처를 비집고 터져 나왔다.

“44번. 예상보다 빨리 깨졌는데. 네가 약한 거냐, 내가 강해진 거냐?”

박기혁에 물음에 쿠마스는 비명으로 답했다.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등장한 쿠마스의 얼굴.

그리고 쿠마스는 박기혁을 향해 독침을 토해 냈다.

푸쉬시시식-!

전력으로 토해 낸 독침이 마치 브레스처럼 쏘아진다. 산성을 잔뜩 머금은 독침이 닿는 곳마다 연기를 내뿜으며 본래의 형태를 잃는다.

제아무리 박기혁이라도 저걸 맨몸으로 맞으면 치명타다. 당연히 맞아줄 생각도 없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피한다.

그리고 그 시각, 박기혁의 우악스런 공세에 잠깐 잊혔던 스켈레톤들이 사각을 타고 쿠마스의 몸 위로 달라붙었다.

마치 사탕에 달라붙는 개미 떼처럼 순식간에 쿠마스는 스켈레톤의 군세에 덮혔다.

캬각- 캬갸갸각각!

쿠마스가 귀찮다는 듯 발악해 보지만 스켈레톤들은 끈질기게 버텼다.

그렇게 쿠마스의 거구가 스켈레톤으로 가득 찼을 때.

박기혁의 등 뒤로 육망성이 떠오르길 잠시…….

스켈레톤의 이마에 똑같은 문양의 육망성이 새겨지는 순간.

헬 블레이즈

Hell Blaze

지옥의 업화, 헬 블레이즈가 작열했다.

불길한 푸른 불꽃이 쿠마스를 집어삼켰다.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쿠마스. 살고 싶어 몸부림치며 도망쳐 보지만, 청염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을 태우겠다는 것처럼 맹렬히 연소했고.

순식간에, 쿠마스가 일곱 걸음도 걷기 전에.

쿠마스는 회색 잿더미가 돼 있었다.

이를 본 노해춘의 총평은.

“마…… 마법도 검만큼이나 화끈하군.”

이랬다.

*   *   *

한편 노해춘이 언덕 위에서 느긋하게 박기혁의 전투를 구경했다면, 진유리는 없는 시간까지 쪼개 가며 박기혁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와아-.”

오브에 비친 쿠마스가 청염에 잡아먹히고 있다.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는 쿠마스의 거구. 가히 경이로운 수준의 파괴력이다.

하나, 진유리가 위력에 놀란 건 아니다.

“저런 식으로 헬 블레이즈가…… 가능해?”

화염 마법 헬 블레이즈.

마탑 공식 5클래스 마법으로 화 속성답게 위력만큼은 확실히 보장된 마법이다. 많은 마법사들이 애용하며 진유리도 마찬가지.

그런데 헬 블레이즈를 저런 식으로, 그러니까 스켈레톤에 걸어 폭탄처럼 쓰는 경우는, 단언컨대 처음 봤다.

“타깃 설정에 용이, 마법 범위 축소, 마나 효율 증가, 역으로 마나 소모는 감소…….”

잠깐만 봐도 이 획기적인 헬 블레이즈의 장점들이 줄줄 쏟아졌다.

동시에 새삼 깨닫는 진유리.

“쟤, 정말 천잰데?”

천재가 아니면 이런 신박한 발상을 할 수 있을까.

그래, 발상은 할 수 있다 치자. 상상은 모두에게 공평한 영역이니. 하지만 이를 현실에 구현하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아포칼립스라는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을 펼칠 때부터 알아봤는데.

몸만큼이나 뇌도 섹시하잖아!

“탐나. 가지고 싶어.”

그의 방식, 그의 사고, 그의 기술.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가지고 싶다.

“으으으……!

오브를 보던 진유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돌 스타를 보는 팬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메르헴이었다.

“유리, 뭐 해요.”

“엄마야! 깜짝 놀랐잖아.”

“밥 안 먹고 뭐해요. 지금 먹지 않으면 저녁까지 굶어야 돼요. 혹시 1시에 출발하는 거 잊은 거예요?”

“그치만 기혁이가 사냥하는 걸!”

……어쩌라고.

박기혁이 사냥하는 거랑 네가 밥 안 먹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메르헴이 짜게 식은 얼굴로 진유리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유리는 신이 난 상태. 고로 말릴 수 없다.

“이거 봐! 스켈레톤을 이용한 헬 블레이즈! 이 획기적인 방식에 놀라지 않는다면 그건 마법사로서 직무 유기얏!!”

터져 버린 폭탄이 이런 것일까. 진유리가 쉼표 없이 두두다다 자신의 감정을 토해 냈다.

술식이 어떻다는 둥, 공명이 어떻다는 둥, 소환물을 컨트롤하는 것이며, 검술도 알고 보면 마법을 위한 포석이라며.

그 망할 놈의 헬 블레이즈란 마법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메르헴에게는 진유리가 그딴 헬 뭐시기보다 훨씬 독하고 치명적이었다.

“그만! 소리 좀 낮춰요. 머리 아프니까요.”

“내가 흥분 안 하게 생겼어?! 이건 혁신이야. 파격이라고! 넌 놀랍지도 않니?”

“니가……!”

니가 이 유난을 떠는 게 더 놀랍거든요?!

메르헴은 입 밖으로 나가려는 말을 필사적으로 삼키며 참을 인자를 되새겼다.

“후우…… 그래서 유리,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기혁은 대단하다? 나도 알아요. 내가 유리보다 기혁을 만난 시간이 더 긴데 모를까요.”

“메리는 좋겠다. 부러워.”

“부러울 것까지는…… 잠깐만요. 근데 누구 마음대로 메리라고 부르는 거예요. 아직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거든요?!”

“나도 처음부터 20조에 들어갔으면 배울 수 있었을까? 나 진짜 기혁이한테 마법 배우고 싶거든. 어떻게 안 될까? 응!”

“하…….”

이게 본론이었네요. 메르헴은 빤히 진유리를 쳐다봤다.

간절한 표정.

마법에는 진심인 진유리. 마법에 대한 열망이 눈빛에서부터 느껴졌다.

“부탁해 봤어요?”

“아니…….”

“의외네요. 유리라면 칭얼대며 부탁할 줄 알았는데요.”

“얘는, 나도 마법사야…… 마법사가 어떻게 남의 비전을 가르쳐 달라고 해. 나도 염치가 있지.”

“음, 진심으로 부탁해 보는 건 어때요. 방금 저한테 말한 것처럼 진심을 담아서요.”

“……조금 무서워. 아니, 많이 무서워.”

“뭐가요. 거절당할까 봐요? 평소에도 많이 당하잖아요.”

“그게…… 그냥…… 그…… 겨, 경우 없는 애로 보이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요. 당신 유리 아니죠? 내가 아는 유리는 경우라는 단어를 모를 건데요.”

“아, 몰라. 나도 잘 모르겠어.”

진유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갈팡질팡하는 눈망울.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소녀 같은 모습이다.

그 모습이 귀여워 메르헴의 입꼬리가 눈치 없이 슬금슬금 올라간다.

“진지하게 부탁해 봐요. 내 생각이지만요, 기혁은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의외로 인연에 약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애들한테도 약해. 봄이한테 하는 거 보면 같은 사람이 맞나 깜짝 놀란다니까.”

“맞아요. 맺지 않았으면 모를까,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히 여기는 게 기혁이에요. 만약 유리가 싫었다면 동아리 때부터 단방에 거절했을 걸요.”

“그…… 그래? 그럼 나 가능성이 있는 거야?”

“네,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나의 예상인데요. 확신할 순 없지만.”

메르헴이 진유리를 빤히 보더니.

“유리한테는 유독 약한 것 같거든요. 기혁이요.”

잠깐의 침묵.

잠시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는다.

에이~ 설마~ 둘 다 실없는 소리를 했다며 웃음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들은 꿈에도 몰랐다.

설마가 진짜일 줄은.

*   *   *

식은땀이 흐른다.

“절 받아 주세요.”

받아 달라고? 뭘 받아 줘?!

난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받아만 주신다면 무슨 짓이든 할게요.”

평소라면 헤실헤실 웃으며 내게 장난치던 진유리인데.

얘는 왜 갑자기 무릎까지 꿇고 있는 걸까? 아니, 무슨 짓은 또 왜 넣는 건데.

“첫눈에 반했어요. 이제 난 당신의 마법ㅇ…….”

“……!!”

급히 손바닥으로 진유리의 입을 가린다.

그런데 모양새가 묘하다.

신장 2미터가 넘는 거구의 나다. 당연히 손바닥도 크지. 그런데 유리의 신장은 168. 우리나라 평균에 얼굴도 조막만 하다.

그래서일까. 내 손바닥이 본의 아니게 진유리의 얼굴 전체를 가리는,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만 같은 모양새가 됐다.

그 증거로 저기, 저쪽에서 몰래 엿보는 애들의 시선이 따갑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괜히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에 일단 무릎 꿇은 진유리를 번쩍 일으켜 천막 뒤쪽으로 데려왔다.

“갑자기 왜 이래?”

“메리가 진심으로 이야기하라고 했어. 받아 줘. 나를.”

“뭘 받아 달라는 줄 알아야 받아 줄지 말지 말할 거 아니냐.”

그제야 진유리가 나름대로 정리해서 말한다.

나의 마법을 보고 감동받았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너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다. 제자로 받아 달라.

이걸 앞뒤 다 자르고 ‘나를 받아 줘.’라고 말하다니. 진짜 한 대 패 버리고 싶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받아 주라.”

“후우, 이걸 때릴 수도 없고.”

“……무섭지만 견딜게. 난 준비됐어.”

“야이 씨. 아오! 너는 되도록 말하지 마라. 속 터지니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째 하루 종일 사냥한 것보다 요 10분 때문에 더 피로한 것 같다.

서포팅 머신에서 커피를 받아 마셨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조금 살 것 같네.

“자, 정리하자면. 오늘 내가 사냥하는 모습을 봤고, 내 마법을 배우고 싶다 이거지?”

“응, 받아 주면 뭐든…….”

“쓰읍!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으름장을 놓자, 진유리가 눈을 내리깐다. 그러면서 내 눈치를 살피는 게, 얘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나 귀엽기까지 했다.

“좋아, 가르쳐 줄게.”

“지, 진짜?! 진짜로오?!”

“가르쳐 달라며.”

“아니, 그게 너무 쉽게 가르쳐 줘서. 그렇잖아! 마법사에게 마법은 비전 같은 거라, 함부로 가르쳐 주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긴 한데, 넌 괜찮아.”

안 그래도 한 번쯤은 봐주려고 했다. 말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본인이 말해 주니 잘됐다.

이 세계의 ‘혈족 계승’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특별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내 안에 자리 잡은 ‘검호’만 하더라도 쓰는 나조차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규격 외의 힘이거든.

그런데 대한민국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진룡이다.

솔직히 마법사로서 호기심이 들지 않으면 거짓말이지. 대체 진룡이 가진 힘은 무엇일까.

더군다나 저 눈, ‘용의 눈’이란 거.

아무리 봐도 진리를 엿보는 게 맞단 말이야.

흥미로워. 연구하는 대가로 마법을 손봐 준다면 남는 장사 아니겠나.

뭐, 이런 이유를 제외해도, 진유리의 부탁은 거절하기 힘들긴 하다.

망할 놈의 성녀가 흘린 잔상 때문에.

“그, 그, 그, 그…….”

“갑자기 왜 그래? 어디 고장 났냐. 얼굴을 왜 벌겋게 해. 더워?”

“나, 나, 나…….”

“……그래, 너? 뭐? 마법 가르쳐 준다니까. 왜?”

“좋아햇!!”

냅다 도망가는 진유리.

혼자 남겨진 난 부리나케 사라지는 진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넌, 내가 꼭 가르친다.

가르쳐서 스승에 대한 존경을 뼛속 깊이 새겨 주마.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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