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명가의 마왕님-39화 (39/247)

<검술 명가의 마왕님 39화>

“……다소 천박하다 치부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는 한 인정해야 한다. 레이드는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난다는 것을…….”

‘레이드의 원리 이해’ 시간.

화려한 콧수염의 노교수가 그림을 띄웠다.

“이건 옛날, 고대 시대의 레이드 모습이다. 보이는 대로 여기가 공략대다. 검과 창, 마법사를 상징하는 로브와 지팡이도 간간이 보이지. 장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공략대의 모습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기.”

그림의 한쪽 귀퉁이가 확대된다.

담소를 나누는 공략대와는 다르게, 음지에서 허리를 굽히며 무언가를 챙기는 사람들.

“학생은 이 사람들이 뭔지 아나?”

“짐꾼입니다.”

“정답. 짐꾼이다. ‘아공간 마법’이 탄생되기도 훨씬 전, 고대 시대의 레이드에서는 이처럼 짐꾼을 기용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또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짐꾼들이 몬스터 사체를 옮기는 그림.

“짐꾼이 몬스터 사체와 마석을 챙기고 있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루팅’ 과정이지. 이걸 설명하기 전에 잠깐 부연을 하겠다.”

노교수가 마커를 들었다.

그리고 유려한 필기체로 ‘몬스터 루팅’를 쓰는데.

“블루 게이트 기준, 몬스터 사체 보존율은 30퍼센트 정도라는 게 학계 정설이다. 즉, 다시 말해 이를 제외한 70퍼센트의 몬스터 사체는 사냥 후 사라진다는 거다. 마석만을 남긴 채. 이유는 모른다. 추정만 가득한 미스테리로 남아 있지.”

“사냥을 경험해 본 이라면 알 거다. 몬스터 사체는 돈이 된다. 그런데 이게 고작 30퍼센트밖에 보존이 되지 않는다? 공략대 입장에서는 눈앞에서 돈이 사라지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보존율을 높이려는 연구를 거듭하지만, 결과적으로 방법은 없었다.”

“다만 이 보존율이 100퍼센트로 회수되는 경우를 알게 되지. 그게 레드 게이트다. 레드 게이트에서 현실로 ‘역류’하는 몬스터는 100퍼센트의 확률로 사체를 남기지. 한때 이를 이용해 미친 짓을 벌이는 게 유행이기도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말이다. 여기까지가 ‘몬스터의 루팅’에 대해 부연 설명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노교수가 마커를 놓고는 다시 그림을 띄웠다.

그림에서 짐꾼은 허리가 휘어지도록 짐을 지고는 공략대를 뒤따르고 있었다.

“본 교수가 말했다. 레이드는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난다고. 레이드 때 짐꾼들의 역할은 이처럼 보급이다. 양이 많지. 이 부분이 중요하다. 공략대의 수익은 게이트 안에서 공략대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냥을 지속할 수 있냐와 정비례하니까.”

진지를 설치하는 그림.

거대한 솥에 음식을 하는 그림.

달이 떠 있는 밤, 나무 위에서 주위를 살피는 그림.

“이밖에도 짐꾼은 많은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몬스터 사체를 해체하는 그림.

“물자 보급, 진지 구축, 취사, 경계, 마지막으로는 몬스터 해체까지. 이 짐꾼에는 현대 보급의 총아가 담겨 있다. 목적은 명확하다.”

돈.

Money.

“공략대가 오직 사냥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압도적으로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니까.”

……

*   *   *

옵티멈 에이전트 본관.

지금 난 어머니와 함께 지하 2층 ‘자동화 인형’ 개발부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우와…….”

유리창 너머로 기계 팔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작은 부품들이 모이고 모여 점차 형체를 갖춰 가는 건.

워 머신(War Machine).

진유리의 카탈로그에서 지겹게 봤던 녀석들이었다.

“워 머신 맞죠, 엄마? 우리 워 머신도 만들어요?”

“당연한 거 아니니. 여기 옵티멈이야. 세계 5대 에이전트! 우리가 안 만들면 누가 만드니.”

“그런데 엄마, 전 보급 장비 빌리러 온 건데요……?”

“풋. 어머? 얘 귀여운 거 좀 봐. 눈앞에 있잖아. 보급 장비.”

“머신이 보급 장비예요? 전투 장비가 아니고요?”

“뭐야 너. 설마 보급 장비라는 게 전투 식량이나 대충 천막 같은 거 생각한 거야?”

“아…… 예…… 그, 그럼 안 돼요? 아공간 주머니도 있고 한 달 치 식량만 있으면…….”

“어, 어머나. 큰일 날 소리. 요즘 누가 그렇게 대충 보급해. 아들, 지금 21세기야. 18세기가 아니란다.”

흥분한 어머니가 보급의 연대를 읊는다.

고대의 짐꾼부터, 아공간 마법의 탄생으로 이뤄진 물류 혁명, 그렇게 이어져 영양과 수면을 비롯해 컨디션 및 모든 면을 책임지는 21세기까지.

아무래도 전문 분야다 보니 더 흥분하신 것 같은데.

요약하자면.

“결국 돈이네요?”

“……너무 심플해서 맥 빠지지만, 맞아. 그게 핵심이야. 돈, 돈이 가장 중요하지.”

문득 어제 들었던 ‘레이드의 원리 이해’가 생각난다. 거기 교수도 레이드는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난다 했는데, 이에 대해 어머니에 말해 주자.

“어? 노해춘 교수님?”

“아세요?”

“알지. 그분 나 있을 때도 ‘레이드 원리 이해’ 교수였어. 아직도 현역이신가 보네, 잘 지내시지?”

“수업이 지루하다는 것 빼고는요.”

“여전하시네. 그래도 잘 들어 둬. 수업이 지루해서 그렇지 의외로 트렌드에 민감하시니까 도움 많이 될 거야.”

“그 트렌드라는 게 이 머신이에요?”

“맞아. 우리 아들, 날 닮아서 핵심을 잘 짚는다니까. 이 머신이야말로 현재의 트렌드, 이제는 시대의 흐름이 될 물건이지. 아마 네가 현역으로 뛸 때는 더 자주 보게 될 거야.”

확실히 요즘 많이 들어 보긴 했다.

귀찮은 일부터 섬세한 일까지, 노동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고 있는 머신. 그래서 시민 단체들은 인권과 일자리 문제를 앞세워 이 머신에 대한 규제에 나선다고 들었다.

솔직히 이런 일상적인 부분은 잘 모르겠고, 레이드만으로 볼 때 머신의 유행은 계속될 것이다.

제국에서도 ‘사역마’가 유행할 때 꼭 이랬으니까.

흔히 볼 수 있는 골렘. 골렘의 업그레이드판인 기간트와 타이탄. 시체를 이용해 제작한 키메라.

제국에서는 이런 인간이 다루는 소환물 전부를 ‘사역마’라 칭했다.

내 스켈레톤도 따지고 보면 사역마란 말이지.

초창기 사역마의 용도는 마법사가 주문을 완성하기 전, 잠깐의 딜레이를 막기 위한 거였다. 그러다 마법이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각설하고, 사역마는 변수에 취약한 인간보다 다양한 환경에서 균일한 수행 능력을 보여 준다.

다양한 환경? 생각나는 거 없나.

맞다. 바로 게이트.

게이트 안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다.

까마득한 산일 수도, 메마른 사막일 수도, 시야조차 확보할 수 없는 어둠일 수도 있다.

이런 환경에서 균일한 수행 능력을 가진다?

엄청난 메리트다.

이러니 사랑받을 수밖에.

사역마의, 머신의 발전은 게이트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 언제까지고 이뤄질 것이다.

앞으로도 쭉.

“이게 괜찮으려나…… 자, 봐봐. 엄마가 요즘 잘나가는 걸로 몇 개 골라 봤거든. 너는 뭐가 마음에 들어?”

“음, 아무거나요?”

“으휴, 그럴 줄 알았어. 하나씩 보자.”

첫 번째 모델.

사람 하나 집어삼키고 남을 크기의 강철 박스에 바퀴가 달려 있는 녀석.

“미국에서 만든 모델이야. 기본적으로 거점 설치나 취사는 가능하고 사체 회수도 수준급. 둔해 보이지만 이동 속도도 괜찮고. 이 장비만의 특별한 장점이라면 자체 통신망을 구축하고 있어서 훨씬 넓은 범위로 무전기를 사용할 수 있어.”

두 번째 모델.

아까가 직육면체라면 이번에는 눈사람이다.

흰색 구 두 개가 나란히 박혀 있는 묘한 녀석.

“눈사람 닮았지? 그래서 ‘스노우 맨’이라고 불려. 이것도 기본 기능은 다 있다 보면 돼. 이 모델만의 장점이라면 보이는 것처럼 ‘부유 마법’이 장착되어 있어. 그래서 서포팅 머신 중에서도 가장 빨라. 작전에 활용하기 좋지.”

마지막 모델.

앞서 두 녀석이 네모와 원, 형이상학적인 모양이었다면, 이건 다르다.

이건 누가 봐도 인간형이다.

마네킹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녀석.

“음, 이 애…….”

기분 탓인가, 설명을 하는 어머니가 내 눈치를 본다.

“이 애도 기본 기능은 다 있어. 다만 앞의 두 모델 같은 서포팅 특화 모델은 아니야. 오히려 ‘워 머신’ 쪽이지.”

“서포팅도 되고 전투도 되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니에요?”

“그게, 단점이 있어.”

평균 이상의 근접 전투력을 지녔지만 마나 효율 기준 이하.

인간형답게 손과 발을 이용해 인간에 필적한 운동 능력이 있지만 자율 행동 불가능.

듣고 있는데 이상하다. 다른 모델보다 단점을 유독 많이 말하시네.

그리고 그 이유는 곧 밝혀졌는데.

“으…… 솔직히 말할게 아들. 이거, 우리 옵티멈에서 자체 생산한 모델인데, 성능은 정말 괜찮거든. 그런데 아직 테스트 단계라…….”

“합격.”

“기혁아?”

“합격!”

뭐가 중한디. ‘Made in 어머니’인데.

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

“누가 봐도 마네킹인데…….”

메리가 하얀 마네킹을 살피다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이게 옵티멈에서 새롭게 만든 모델이라는 거예요?”

“응. 어때, 괜찮지?”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외형은 나쁘지 않은데요.”

“그치? 내가 보니까 전부 이상하게 생긴 것뿐이더라고. 네모, 세모, 원, 유치원 미술 시간을 보는 듯했다니까. 그런데 이 디자인 봐. 인간형. 크~ 얼마나 정감 가.”

“서포팅 머신이 원래 그렇잖아요. 외형보다 성능이 중요하지요. 움직여 봐야겠어요. 어떻게 움직여요.”

“여기 제어기를 머리띠처럼 쓰고 마나로.”

메리를 붙잡고 한참 설명을 하는데, 우리 뒤로는 이미 한참 전에 설명을 들은 준우와 진유리가 벌써 신나게 머신을 가지고 노는 중이다.

“감각이 늘어난 것 같다.”

“재미있어! 발차기! 발차기! 얍! 얍!”

각자 한 마리씩 잡고서 샌드백을 치고 있는데, 준우는 평소 감각을 제어했던 터라 익숙한 모양. 하얀 마네킹이 마치 복싱 선수처럼 꽤 그럴싸하게 펀치를 선보였다.

그에 반해 진유리 머신은 영 상태가 시원찮다. 하고 싶은 건 많아 보이는데, 서툴러서인지 행동하나 몸짓 하나 죄다 어색하다.

“이렇게. 이해했어?”

“대충요. 한번 움직여 볼게요.”

제어기를 쓴 메리가 미간에 주름을 짓는다. 집중하는 모양. 그리고 메리의 앞에 있던 하얀 마네킹이 움직였다.

앞으로, 뒤로, 오른쪽, 왼쪽, 한 바퀴 턴, 두 바퀴 턴. 요즘 길만 걸어가면 들리는 노래의 춤도 추고.

오…… 생각보다 움직임이 좋은데?

“나쁘지 않은데요?”

“네가 생각 이상으로 잘 다루는 거야. 보통은 저게 일반적이거든.”

나는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킨다. 샌드백에 하이 킥을 차는데 중심을 잃고 꼬꾸라지는 머신.

진유리의 머신이었다.

“네가 소환에 재능이 있나 보다.”

“그, 그런가요? 흠, 제가 좀 그래요. 뭐든지 잘하거든요.”

칭찬에 신이 나서 머신을 가지고 노는 메리.

그렇게 애들은 새 장난감을 선물받은 어린아이처럼 정신없이 머신을 가지고 놀다, 주문한 점심이 와서야 겨우 그만둘 수 있었다.

옴뇸뇸!

즐거운 식사시간.

참고로 우리는 식사시간에 말이 많은 편이다.

“그러면, 저 머신 써 주는 대신 옵티멈에서 보급 물자를 지원해 준다는 말이에요?”

“그거하고, 여기 가슴 쪽에 뭐도 붙이고.”

“아하, 로고요. 으으, 매워. 물 좀요.”

떡볶이를 먹던 메리가 급히 물을 찾고, 평소 때처럼 자연스럽게 준우가 물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많이 하는 거다.”

“유명한 공략대는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라고 하잖아요. 근데, 기혁. 이렇게 기혁 어머니 도움 받아서 해결해도 되나요? 기말고사는 레이드의 모든 과정을 보는 거잖아요.”

“괜…….”

“괜찮아. 문제없어.”

내 말을 자르며 훅 들어오는 건 진유리.

“나 흘렸어. 닦아 줘.”

“니가 닦아. 왜 꼭 내 옆에 들러붙어서 닦아 달래.”

“괜히 닦아 줄 거면서 앙탈 부리지 마. 나 밀당하는 남자 별로야.”

“너 혼난…….”

“잠깐!”

이번에 내 말을 끊는 건 메리.

제발 말 좀 하자. 니들 나한테 왜 이래.

“유리, 아까 말하던 거 계속해 봐요. 왜 문제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진유리가 내 옷깃을 잡더니.

“배경도 능력이거든.”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활용하는 것.

아카데미가 결코 공평한 곳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근데 내 옷은 왜 잡냐.”

“치명적이잖아.”

*   *   *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노력해 봐야 들러리야. 어차피 ‘혈족’들이 다해 먹는걸.”

“걔 있잖아. 중학교 동기. 걔 혈족이었다잖아. 바로 아카데미에…….”

누구는 매일 같이 노력해도 얻지 못할 힘을, 누구는 혈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얻는다.

바꾸고 싶었다. 내 손으로 이 뿌리 깊은 부조리를 끊어 내고 싶었다.

그래서 진화단의 손을 잡은 것인데……

“미안하네만, 지부장. 당분간 활동을 중단하게. ‘집행부’에서 냄새를 맡았어.”

“쯧, 그러게 아무리 단원이 습격당했더라도 선을 지켰어야지. 닥치는 대로 정리하면 쓰나. 자네가 그렇게 날뛴 덕에 우리가 곤란해졌다네.”

“아쉽지만 ‘호문클로스F’ 프로젝트는 일본 지부에 넘기…… 어허! 말조심하게.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능력만 본 거야, 능력만! 크흠!”

잠시 착각할 뻔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여기라고 공평할 리 없잖은가.

대의니 미래니 외쳐도 뒤로는 제 식구, 자기 호주머니나 챙기는 꼴을 봐라.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해 주겠다.

“사…… 님…… 사장님. 사장님.”

김 사장이 눈을 떴다.

“왔냐? 일은?”

“의심되는 놈들은 싹 쓸었습니다. 우리 쪽 작업장도 다 정리해서 ‘대구 연구실’로 옮겼고요. 경찰 쪽에 약도 쳤으니 한동안은 여유가 있을 겁니다.”

“고생했다야. 일 없으면 국밥에 소주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는데, 시간이 없네. 애들은 준비됐고?”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좋아. 남는 시간, 실험체 싹 긁어서 대구로 튄다.”

프로젝트를 넘기라고? 누구 마음대로.

내가 시작했으니, 내가 끝을 본다. 설령 그게 실패할지라도. 내 건 못 뺏긴다.

김 사장이 아공간에서 한 자루의 창을 꺼냈다.

“이제부터 진화단 한국 지부는 단독 행동에 들어간다.”

창을 휘감고 있던 뱀이 붉은 눈을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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