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38화>
고풍스러운 정원.
단향목이 흐드러지게 솟아오른 길을 지나다 보면 작은 호수가 나온다.
물길에는 물레방아가 굴러가고, 비단 잉어가 금빛 양탄자처럼 헤엄치는 호수.
그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
눈이 없는 용이 각인되어 있는 ‘이무기의 다리’라는 곳을 건너면 바로 그곳에 한 채의 정자, 용이 쉬어가는 곳 ‘용휴정(龍休亭)’이 있었다.
김연희는 이 용휴정에 앉아 용이 각인된 처마를 구경하고 있었다.
“과해. 누가 진룡 가문 아니랄까 봐. 여기도 용, 저기도 용.”
“어쩔 수 있나. 용이 우리고, 우리가 용인데.”
김연희의 시선이 돌아간다.
그녀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이름은 유해련.
청초한 이미지에 기품이 느껴지는 아우라.
한때 성갑기마대의 단주로서 ‘광휘의 선봉’이라 불린 실력자이자, 현 진룡 가주 진도하의 아내이며, 동시에 진유리의 모친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밖에서 본 입장이고, 김연희에게 유해련은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늦었다, 기지배야.”
“닥쳐. 바쁜데 대뜸 찾아와 놓고.”
태어날 때부터 같은 동네.
부모님끼리도 친구여서 서로의 집을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던 두 사람.
초, 중, 고, 아카데미마저 동기로 보내며 가족보다도 오래 붙어 있었던, 지긋지긋할 정도의 관계였다.
거기에 두 사람은 빌런의 습격으로 양친을 동시에 잃어버린 아픔을 나눴고, 복수를 결심하며 김연희가 옵티멈을 세울 때 가장 큰 힘이 되어 줬던 이가 유해련이다.
그렇게 서로의 결혼식에서 민망할 정도로 펑펑 울었던 흑역사를 가지고.
그렇게 서로의 출산을 가장 근처에서 함께했으며.
평생의 궤적을 공유했던,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친구.
그게 김연희와 유해련이었다.
“녹차 맛있더라, 해쫑. 새로 들였어? 한잔 더 줘 봐.”
“한잔 더 줘? 못 본 사이에 우리 희땡이가 맛이 갔네. 여기가 찻집이니, 가스나야? 여기 진룡 가문이야. 대통령도 함부로 못 온다고.”
“그래서 해쫑. 야박하게 차도 안 내주시겠다고요? 하나뿐인 친구가 먹고 싶다는데?”
“하아…… 앓느니 죽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가스나랑 엮여서.”
방울이 울리고, 곧이어 호수 저편에서 찻주전자가 담긴 쟁반이 날아온다.
당연히 이 쟁반과 주전자도 청색 용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정말 취향 일관적이라니까.”
“정체성. 아이덴티티. 몰라?”
“그놈의 정체성. 우리도 호랑이 대문짝만 하게 붙여 놓을까?”
“괜찮네. 번쩍번쩍한 걸로 하나 장만해.”
“너는 용으로?”
“응, 비늘 다 보이게.”
둘이 키득키득, 시답지 않은 농담에 웃는다.
밖에서야 세계 5대 에이전트의 대표이며,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진룡의 안주인이지.
여기서는 그냥 그 나이 대의 아줌마일 뿐이다.
“뭐 하고 지냈어?”
“나야 평소와 다를 바 없지. 에이전트 일로 사람 만나러 다니고 소속 초인들 관리하고. 넌? 러시아에 세미나 갔다 왔잖아. ‘희귀 수인 연구회’였던가.”
“말도 마라. 러시아. 으으, 러시아. 진절머리가 난다. ‘용인’ 만들 생각 없냐면서 바깥양반 보고 협조해 달라잖아. ‘인체 연성 보고서’라는 별 허접한 종이 쪼가리 내밀면서.”
“그게 가능해?”
“가능하면 협조해 달라고 했겠니. 지들끼리 벌써 하고도 남았지. 해 보고 답이 안 나오니까 우리한테 앵긴 거야. 암튼 정신 나간 놈들이었어.”
“와…… 역시 러시아. 빠꾸 없는 나라.”
“생각만 해도 질린다니까. 건이 오빠하고 수혁이는 아직도 미국?”
“응, 아직 파병 중이야.”
“아직도?! 7레벨 게이트 아니야?”
“거의 10년 만에 자연 발생된 상위 레벨 블루 게이트잖아. 생태 조사도 하고, 위험도 체크도 하고, 거점 설치까지 하고. 꼼짝없이 1년 걸릴 거야. 계약도 1년으로 돼 있고.”
“1년?! 오바다, 오바. 아무리 길어도 6개월이면 떡 치겠는데.”
“치긴 뭘 처, 이년아.”
“뭐긴 뭐야. 다 알면서. 흐흐.”
“흐흐. 말 나와서 말인데 요새 너희는 어때? 그거 있잖아, 그거…….”
“얘는 못하는 말이 없어. 진짜!”
그렇게 흔한 아줌마의 수다가 이어진다.
차로 모자라 식사가 오고, 으리으리한 수랏상이 말끔히 비워질 때까지 열띤 수다를 이어 가던 두 사람.
이러다 밤이라도 샐 기세였다. 실제로도 유해련이 권했지만.
“자고 갈래?”
“싫어. 나 잠자리 바뀌면 잠 못 잔단 말야.”
“이년이 헛소리하네. 너 머리만 대면 자는 거 다 아는데.”
이렇게 수다를 이어 가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초저녁이 되어서야 마침내 오늘의 ‘본론’인 자식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 기말고사, 우리 유리랑 기혁이가 같이한다며?”
“하, 천수만이한테 찍혔잖아. 조금 굽혀 주면 될 걸, 절대 못 물러선대. 완전 지 아빠야.”
“웃기시네. 고집하면 희땡, 희땡하면 고집. 기혁이는 너 닮은 거구만. 건이 오빠였으면 허허 웃었다.”
“얘는 못하는 말이 없어. 근데 유리 많이 달라졌더라. 나 처음에 못 알아봤잖아, 입학 발표할 때. 너 세미나 갔을 때지?”
“넌 유리가 정말 ‘위험’했을 때 봤잖아. 나야말로 울 딸내미가 검호 가문 막내라고 보낸 사진 보고 긴가민가했잖아. 내가 모르던 자식을 낳았나 물어볼 뻔했다니까.”
“너도 기혁이 한창 아플 때 봤으니까.”
모두가 알다시피 박기혁은 ‘마나 허무증’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더 이상 비밀도 아닌 이야기.
하지만 진룡 가문의 차녀, 진유리가 이제껏 생사의 갈림길에서 외줄타기를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나 드레인.
숨 쉬듯 마나를 흡입하는 이 특성은 진룡의 혈통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발현되는 희귀 특성이었다.
진유리는 이 마나 드레인이 너무 일찍, 너무 과하게 발현됐다.
아직 채 심장의 마나 홀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마나가 밀려들어 온다?
신체가 붕괴된다.
제방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폭우가 쏟아지면 논과 밭이 물에 잠기듯 말이다.
어찌 보면 운명의 장난이다.
한쪽은 마나가 한 톨도 없어서 문제라면, 진유리는 마나가 너무 많아서 문제.
“이제는 건강해진 거지, 유리?”
“일단은. 마나 홀은 무사히 자리 잡았으니까. 기혁이는? 마법 쓰던데, 마나 허무증 극복했어?”
“자기 말로는. 죽을 뻔했을 때 길이 보였다던데, 잘 모르겠어.”
“그거 ‘임사 체험’이네.”
“임사 체험?”
“간혹 있어.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나면 뭔가 깨닫는다네. 미 서부의 ‘궁전’들이 하는 ‘드럭 쇼크’가 임사 체험하려고 하는 거잖아.”
“우리 아들이랑 그 쓰레기 자식들이랑 엮지 마라.”
“하여튼, 너나 나나 인생 참 기구하다니까. 자식들 속 썩이는 것까지 닮고. 이런 건 안 닮아도 되는데, 그치?”
“어쩌겠냐, 다 팔자지. 그래서, 계속 다른 데로 빠지지 말고. 이번 기말고사 어쩔 거야.”
“어쩌긴. 알아서 하겠지. 애도 아니고 우리가 기말고사까지 챙겨야 하니.”
“듣기로는 우리 기혁이 때문에 너희 딸내미 조가 곤란하다던데.”
“아, 그거였어? 난 또 뭐라고. 유리가 조장을 때려친다고 하긴 하더라. 뭐라더라? 자기가 명검이래. 적성을 찾았다나? 그런데 박 서방도 그렇다. 다 큰 처녀한테 검이 뭐야, 검이.”
“조장 그만두는 거 진심이래?”
“진심이야. 유리 걔, 마음 떴어. 완전히.”
“미안. 우리 애 때문에 곤란해졌네.”
“뭘 그런 걸로. 여편네들 시끄럽긴 한데, 나 알잖아. 핵주먹 유해쫑. 어디 감히 우리 박 서방을 건드려.”
“……잠깐, 아까부터 슬쩍슬쩍 박 서방이야?”
“잊었니? 나 유리 낳았을 때 산후조리원에서, 너 기혁이 데리고 와서 둘이 결혼시키자고 했잖아.”
“내가?”
“응, 니가.”
“니가 아니고?”
“내가 아니고, 너. 너란 뇨자.”
두 사람의 손가락이 바쁘게 오가다 깔깔 웃음이 터졌다.
한참 웃다가 유해련이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런데 둘은 알까? 지들이 결혼 약속한 사이라는 거.”
“진짜 시킬 거야?”
“그럼 농담인 줄 알았어? 나 벌써 식장까지 생각해 뒀는데?”
“미쳤어, 미쳤어!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정략결혼이야?”
“정략결혼? 무슨 정략결혼이야. 서로 좋으면 연애결혼이지.”
“……연애? 잠깐! 스타압!!”
연애라고? 연애라니? 연애는 둘이 하는 건데.
찬물을 뒤엎은 표정으로 김연희가 해명을 요구했고, 유해련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유리가, 박 서방이 좋대.”
“허ㄹ…… 기혁이는?”
“우리 유리 말이야, 좋아하는 건 무조건 가져. 내가 그렇게 가르쳤거든.”
“……미친다, 진짜.”
“예단은 뭘로 할까? 차? 시계? 그냥 집을 해 줄까? 우리 박 서방 스타일을 모르겠네. 호호호~.”
* * *
누가 내 이야기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안 그래도 앞에 있는 진유리 때문에 머리가 띵한데 귀까지 가려우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총으로! 총으로 하자. 봐봐. 이거 신상 라이플 M-86. 철갑 마나탄만 120발. 연발 기능에 스마트 탄창 교체 기능까지 추가된 어마어마한 녀석! 어때? 벌써 두근거리지 않아?”
“몇 번을 말하냐. 난 클래식한 게 좋다니까.”
“그럼 이건 어때? 프랑스 무기청에서 만든 건데 FGU-3300. 이 스코프가 핵심이야. 은신 감지, 지형 파악, 투시 기능까지…….”
대한민국 마도의 종주라는 진룡의 자제가 알고 보니 총기 성애자라니…… 이 무슨 통탄할 노릇인가.
“싫다. 난 검으로 할 거야. 결정했어.”
“난 총이 좋아!”
“그러면 네가 총 써.”
“나도 쓸 테니까, 너도 써.”
“싫어.”
“그럼 나도 싫어.”
“그러면 어쩌라고!”
“총으로 하면 되지. 봐봐. 이번에는 너도 틀림없이 좋아할걸. 호주에서 만든 건…….”
아무 생각 없이 ‘이제 스켈레톤 무기도 교체해야겠다.’라고 한마디 흘린 게 화근이었다.
그때부터 총기 성애자 진유리 씨는 저 빌어먹을 카탈로그를 내 면전에 들이밀며 총의 우수성을 설파하고 있다.
그게 벌써 2주.
인간적으로 이 정도면 세뇌 아닌가.
“몇 번을 설명하냐. 아무리 나라도 저거 구현 못 한다니까.”
“그러니까, 연구해 보자니까. 난 준비됐어.”
“내가 싫다니까.”
“으음, 아직 부족한가 보네. 몇 개 더 볼까?”
“됐어. 넣어. 어허! 꺼내지 마! 그냥 내가 네 연구 도와줄게. 그 워 아머 만드는 거 도와줄 테니까. 제발 나 좀 놔주…… 아…….”
잠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아차, 싶었지만 늦었다. 이미 진유리는 ‘계획대로 됐어.’라는 듯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취소 안 되냐?”
“카탈로그가 어디 있지?”
“기말고사 끝나고 하자.”
같이 게이트를 간 날. 정확히는 모두 앞에서 ‘진유리 사용법’을 보여 주며 손발을 맞춘 뒤부터.
오늘처럼 진유리는 날 졸졸 따라다녔다.
동아리도, 게이트도, 가끔은 출석까지 내팽개치고 따라올 때도 있었다.
왜냐고 물으면 그저 “좋아서.”라며 헤헤 웃는다.
그래, 저 웃음.
저 웃음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내가 아이들한테 약한 건 인정이다. 그런데 여자한테 약한 건 절대 아니란 말이야.
평소라면 귀찮다고, 꺼지라고 딱 잘라 말했을 거다.
그런데 저 웃음, 저 웃음이 문제다.
왜 저 웃음에서 망할 성녀가 보이는 걸까?
닮지도 않았는데!
진유리는 흑발, 성녀는 금발.
진유리는 황인, 성녀는 백인.
진유리는 전형적인 동양형 얼굴이라면.
성녀는 전형적인 서양의 미인형이다.
그런데 왜 난 진유리의 웃음에서 망할 성녀의 웃음을 보는 거냐고! 왜!
그때부터다. 우리 사이가 말린 건.
“밥 뭐 먹을 거야?”
“너 안 가냐. 나 봄이 보러 갈 거야.”
“그러니까, 밥 뭐 먹을 거냐고. 애들 밥도 안 먹일 거야?”
“설마, 따라오려고?”
“응.”
“그냥 가 주면 안 될까? 제발 부탁이다.”
“밥은 내가 살게. 봄이 귀엽더라. 맛있는 거 사 줄게. 누나 오늘 돈 많다.”
뭐? 누나? 쥐방울만한 게 누나라고?
머리가 띵하다.
드래곤 브레스 앞에서도 침착했던 난데, 어째서 이 조막만 한 여자애 입에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까.
안 돼. 말을 돌리자.
“그, 그, 그래! 그 너희 조! 너희 조 분위기 안 좋다 했잖아. 걔들이랑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해 보지.”
“됐어. 어차피 이번 기말고사 끝나면 안 볼 거야.”
“인마, 그래도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네 나이 때는 인간관계가 중요한 법이야.”
“훗. 귀엽네. 너랑 나, 나이 같아.”
“같긴 뭘 같아!”
“안 같아? 생일 불러 봐. 같다에 나를 건다.”
“줘도 안 받아! 아오! 진짜! 이 쥐방울만한 게. 어우!!”
“괜히 할 말 없으면 말하지 마. 사람 가벼워 보여. 나 가벼운 남자 싫어.”
“니가 싫은 걸 왜 나한테 말하냐고!”
“택시 왔어. 가자.”
“야! 야, 진유리! 쥐방울!!”
기어코 진유리는 보육원까지 따라오더니, 뇌물 공세로 아이들까지 사로잡았다.
특히 우리 봄이랑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된 건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여러모로 피곤한 나날이 지나, 드디어 기말고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