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명가의 마왕님 32화>
십여 분 뒤.
털썩.
복면을 쓴 남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평범하다 못해 평온한 표정. 성실히 정보를 뱉어 냈으니 약속대로 고통 없이 끝내 줬다.
그건 그렇고.
“납치, 살인, 인신매매…….”
정보의 조각들이 얽히고설키며 내 표정이 심각해졌다.
“제대로 똥 밟은 것 같은데.”
사실 염동석을 기를 쓰고 독점하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한 바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고.
아무리 흑마법과 염동석이 상성상 좋다지만 이렇게 대량으로 필요할 경우는 하나뿐이거든.
인체 실험.
이 녀석들, 인간에 손을 대는 게 틀림없다.
다만.
“여기까지가 내가 예상한 부분이라면.”
이놈들은, 내 예상을 비웃는 것처럼 훨씬 질 나쁜 놈들이다.
흑마법도 분야가 있고, 악당도 급이 있다.
인체 실험?
인간 이하의 짓거리가 맞다. 이것만으로도 이 녀석들은 죽여 없애야 할 벌레 새끼들이다.
그럼에도 정말 갈 때까지 간, 나락 밑에 나락이 있다.
인간 이하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길 포기한 쓰레기들만 손을 대는 ‘금기’.
인체 합성의 최종 단계 ‘호문클루스’.
‘창조’의 영역이었다.
결론.
이 쓰레기 새끼들, 인간을 만들고 있다.
수십, 수백, 수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을 잡아먹는 인간 병기를.
“후우-.”
한숨이 나왔다.
제국이나 여기나, 답 없는 새끼들은 어디에나 있구나. 새삼 악인이란 놈들에게 진절머리가 난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런 새끼들 때문에 흑마법이 악당이 되는 거다.
원래 깨끗한 것보다 더러운 게 티가 나는 법.
아무리 이미지를 좋게 하면 뭐해? 이렇게 임팩트 있게 똥 싸질러 주면 모든 흑마법사들은 개새끼가 돼 있었다.
그래서다. 내가 이런 새끼들을 싫어하는 게.
같은 흑마법이란 이유로 내가 노력해 이룬 성과를 시궁창에 빠트리는 쓰레기들.
마음 같아선 다 죽이고 싶다.
그래서 실제로 제국 시절,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런 쓰레기들을 치우기도 했다.
“내가 이런데 그 어린 녀석은 얼마나 증오스러울까. 쯧.”
여기서 어린 녀석은 한준우다.
빌런들에게 가문이 몰살당한 가여운 내 어린 친구.
조금 전 헤어질 때 눈빛에서 느낀 살기는 진심이었다. 어떤 식으로라도 사고가 날 낌새.
메리를 붙여 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본래는 악인을 징벌하며 대인전 경험도 챙기는 거였다. 겸사겸사 준우의 가슴에 들끓는 증오도 풀어 주고.
그런데 상대가 이 정도라면.
“아예 박멸해야겠어.”
발본색원(拔本塞源)
아예 뿌리를 뽑아야겠다.
* * *
한준우는 절대 잊지 못한다.
그날, 칠흑 같던 어둠을 뚫고 굵은 핏방울들이 비처럼 내리던 밤.
무희 가문에 벌어진 지옥도를.
“저희가 막겠습니다. 도망가십쇼!”
“안 되겠어요. 이대로라면 모두 당할 거예요. 차라리 준우만이라도…….”
“살아야 한다. 너만이라도 살아남아 복수를…….”
“가문을 부탁한다, 준우야.”
“엄마가 미안해. 사랑하는, 아가.”
항상 웃어 줬던 삼촌들.
엄마만큼 챙겨 줬던 이모들.
겉으로는 엄했지만 속내는 따뜻했던 할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던 부모님들.
모두를 잃었다.
정체불명의 빌런 집단에게, 무희 가문을 비롯해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모든 명문가들이 일거에 몰살당한 참사였다.
그리고 이날. 부산 참사가 일어난 밤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한준우.
바로 자신이었다.
칼이 춤을 추며 목을 베어 냈다. 잘려진 목이 바닥을 구르며 피보라가 몰아쳤다.
아찔한 혈향이 코를 타고 전해 온다.
상관없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눈앞의 적을 베는 것.
한준우가 고개를 젖힌다. 찔러 오는 창을 간발의 차로 피한다.
동시에 창날을 잡고 날아오른다.
마치 체조 선수가 철봉을 타고 날아오르듯, 유려하게 솟구친 한준우가 곧바로 단검을 뿌렸다.
“커헉?!”
섬광처럼 쏘아진 단검.
구멍 난 심장.
한준우가 쓰러지는 복면인을 무심하게 보며 다시 정면을 주시한다.
빗발치는 마법의 세례를 뚫고 정확히 적을 노려봤다.
‘이제 남은 건.’
둘.
차르륵-
한준우의 양 손목에 묶여 있던 사복검이 일시에 펼쳐졌다.
채찍처럼 늘어져 있는 사복검이 찰랑, 찰랑 흐느적대길 잠시.
눈빛이 변한다.
‘춤추자.’
차르르륵-!
빗발치는 마법의 세례에서 한준우가 춤을 췄다.
베고, 쳐 내고, 찌르고, 터트리고.
현란하게 움직이는 검격에 색색의 마법들이 파쇄됐다.
앞, 뒤, 옆, 360도를 넘어 머리 위까지…… 한준우는 사각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완벽하게 마법들을 막아 냈다.
“미, 미친!”
“저…… 저게…….”
말이 돼?
동료를 제물 삼아 만든 찬스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막힌다고?!
두 복면인은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자신들의 마법을 보며 잠깐 얼이 빠졌다.
그리고, 이 잠깐은.
누구에게는 잠깐이지만, 한준우에게는 너무도 큰 시간이었다.
“후우…….”
호흡을 뱉으며 감각을 팽창시킨다.
흩날리는 검날이 내뿜는 음악에 정신을 집중한 채, 들끓는 감정을 갈무리하고.
그 순간, 한준우의 시야가 빛으로 가득 찼다.
검이 밤을 베고.
하루마저 베어 내면.
하루살이는 내일을 살까.
하루살이의 춤.
자취를 감춘 한준우.
마법을 쏘던 복면인들이 놀라, 한준우를 찾아보려 하는 순간, 시야가 어둠에 침식된다.
마치 눈을 감은 것처럼 온통 어둠뿐인 이곳.
시각이 차단당했다, 라고 생각한 복면인이 어떻게든 도망가려 했지만.
푹?!
발을 뻗은 곳이 낭떠러지처럼 푹 꺼진다.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에 복면인이 입으로 “아악!!” 비명을 지른다.
그런데, 질렀는데…….
이상하다?
왜 들리지 않지? 고래고래 소리쳐 보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 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복면인은 ‘하루살이의 춤’이 만들어 낸 감각의 감옥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자신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 * *
퍽! 퍽!
한준우가 장검으로 내리쳤다. 시체는 점점 곤죽이 되어 간다.
보다 못한 메르헴이 뛰어왔다.
“그만요! 그만요!”
“…….”
“준우, 그만해요!”
도저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다.
메르헴이 어쩔 줄 몰라 하다 덥석, 껴안았다.
“그만해요, 준우. 이미 죽었잖아요. 왜 더럽게 피를 튀겨요.”
“…….”
메르헴도 부산 참사를 안다. 빌런 연합에게 혈족이 이어지던 부산의 명가들이 몰살당한 사건.
당시 무희 가문, 한준우의 가족들이 빌런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당연히 화가 날 거다. 눈앞에서 가족이 죽었는데 안 그렇겠나. 심지어 당시 한준우는 겨우 12살. 자아가 제대로 갖춰지기도 어린 나이.
저들이, 아니, 이 세상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울 거다.
그래도.
“……이런 짓은 의미 없어요. 아무리 화가 나도 자신을 망가트리지 마세요.”
“…….”
“준우는 항상 이성적이었잖아요. 난 그런 준우가 좋아요. 큰일이 일어나도 ‘동감’이라는 한 단어만 말하는 준우가 좋아요. 그러니까, 준우를 상처 입히지 마세요. 네?”
“…….”
한준우는 끝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뚝뚝, 눈물만 흘릴 뿐이다.
메르헴은 한동안 토닥토닥 친구의 등을 두드려 줬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이제야 감정을 추스른 두 사람은 급히 자리를 떴다.
“기혁이 반대쪽에서 작업한다 했어요. 우리는 기혁이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혼란만 주면 되는 거예요. 듣고 있어요, 준우?”
“듣고 있다.”
“또 흥분하지 말고요. 말 안 했는데요. 방금 위험했던 거 알아요? 그 마지막에 쓴 기술…….”
“하루살이의 춤.”
“그래요. 하루살이의 춤. 그거에 휩쓸려 차단 주술이 깨질 뻔했어요. 날뛰어도 적당히 날뛰어야지요! 약속해요. 아까처럼 날뛰지 않겠다고요.”
“약속하지. 아까는 내가 흥분했다.”
“흥, 약속 어기기만 해요. 그때는 준우 죽고 나는 사는 거예요.”
“알았다.”
대화를 하면서도 두 사람은 빠르게 숲을 헤쳐 나간다.
메르헴은 자신을 중심으로 차단 주술을 상시 펼치는 중이고, 한준우는 이에 감각을 퍼트려 적의 유무를 파악했다.
수많은 게이트행으로 빚어진 팀워크가 빛을 발했다.
“찾았다.”
굳이 뒷말은 필요 없다. 한준우가 앞장서서 달려가자 메르헴이 자연스레 뒤따른다.
두 사람의 보폭이 맞춰진다. 심지어 오른발, 왼발, 발걸음마저 똑같아졌다.
빠르게 목표 지점에 도달한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
기이할 정도로 붉은 대지에 우뚝 솟은 나무.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올라간 가지에 매달려 있는 열매.
아니, 열매를 빙자한 인간의 머리다.
피를 토하는 머리.
콸콸콸-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뱉어 내는 핏물이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이 땅이 빨간 게…… 우웩!”
“……까득!”
식인목(食人木).
인간을 먹고 자란 마수가 그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 * *
“정말 마수까지 손댔네?”
통짜 인간을 제물로 사용하는 하급 마수 식인목.
단단히 뿌리를 내리는 고정형 개체라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를 상회할 만큼의 공격력과 어지간한 마법은 견딜 수 있는 항마력과 재생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체적으로 생기를 빨아들여 성장한다는 점에서 장점이 더 많은 놈이었다.
다만 그래도 잘 쓰이진 않았는데.
이유는…… 저 꼴 보면 모르겠나.
주렁주렁 달려 있는 머리나,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손발. 진짜 비호감이잖아.
이런 외적인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식인목 저 녀석, 제물이 너무 많이 든다.
거의 중급 마수 정도?
아마 저놈 한 마리 불러내려면, 최소 50명 정도는 산 채로 바쳐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제국의 악마술사들도 꺼리는 놈인데.
여기 지구에서 마주칠 줄이야.
“가지가지 한다.”
실실 웃음이 나온다.
인정해야겠다.
난 여기 지구는 그래도 평균 이상의 인격과 지성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필수 교과 과정으로 도덕을 배우기까지 하는데, 기본적인 품위는 알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이 꼴을 보니…….
“제국이나 이곳이나, 개새끼는 개새끼라니까.”
딱, 손가락을 튕기자.
일대의 공간이 출렁이고, 모습을 드러내는 스켈레톤 군대.
순백의 백골에 도끼와 방패를 갖춘 죽음의 군대가 자리 잡고.
여기에 눈을 뜬다.
움푹 패인 눈두덩에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순간, 뼈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들이 빛을 발했다.
준비를 마친 스켈레톤들이 나를 향해 재촉한다.
“진격.”
후두두두둑!
땅을 박차고 나가는 스켈레톤들. 당연히 선두에 있는 건 나다.
목표는 식인목.
녀석도 위기를 느낀 모양인지, 식인목이 땅에 숨겨 놨던 뿌리를 꺼냈다.
얼마나 양분을 처먹었는지 통실통실 살이 잔뜩 오른 뿌리들이 대지를 때려 대고, 금방 일대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진동했다.
하지만 내가 겨우 하급 마수에 쫄겠나.
“영광인 줄 알아라. 처음 써 보는 거니까.
며칠 전, 민지 누나가 가르쳐 줬던 기술.
“호흡은 균일하게.”
“몸에 힘을 빼고.”
“검에 몸을 맡겨.”
대검을 꽉 부여잡으며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검호’를 깨웠다.
“검호류…….”
검호류 발도술.
달빛 가르기.
허리까지 당긴 대검을 횡으로 그었다.
달빛을 닮은 섬광이 일대를 절단해 나간다. 숲도, 나무도, 뿌리도, 식인목의 줄기마저도.
찌직, 찌지지직, 콰직!!
줄기가 반쯤 잘려 나간 식인목이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고.
“쯧, 아직 손에 안 익나.”
가공할 파괴력이었음에도 아쉽다. 단번에 줄기를 끊어 버릴 생각으로 펼쳤는데 정확도가 부족했다.
연습을 게을리하면 이렇게 티가 난다니까.
반성하자.
내려치는 식인목의 뿌리를 대검으로 우직하게 막고는 곧바로 토막 냈다.
다른 쪽 뿌리는 스켈레톤 선에서 정리 중.
뿌리가 내려칠 때면 미처 피하지 못한 스켈레톤들이 과자처럼 부서졌지만, 땅을 내려친 찰나의 빈틈을 노리고 뿌리에 달라붙은 스켈레톤들이 더 많았다.
개미처럼 달라붙어 산 채로 포를 뜨는 상황.
끝났다.
고정형 마수인 식인목이 거리를 잃어버린 시점에서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잠시 뒤.
끄아아악-!
식인목이 마지막 단말마를 뱉어 내며 땅으로 쓰러졌다.
쿵!!
전투의 끝이었다.
……
…
잠깐.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 있거든.”
일대의 생기를 흡수하는 식인목.
때문에 식인목이 뿌리내린 대지는 죽어 버리지만, 반대급부로 식인목은 어떤 생물보다도 많은 생기를 저장한다.
다시 말해.
“훌륭한 단백질이죠.”
공간이 일렁이고 잠시 후. 오른편에서는 바포메트가, 왼편에서는 아수라가 얼굴을 드러냈다.
“먹어.”
콰직콰직.
검은 안개가 쓰러진 식인목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데구르르, 가지에서 떨어진 누군가의 머리가 내 발치에 다가왔다.
공허한 눈동자가 날 올려다본다.
생기(生氣)는커녕 영혼마저 오염된 눈동자.
하나 내게는 보인다. 녀석이 간절히 염원하는 그 무언가.
그건, 복수였다.
“약속하마. 너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사라지는 머리의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